산 위에서 높새바람이 불어오던 늦봄에 누나는 왔습니다. 엄마는말했습니다. 동생이 잘못되면 니 책임이야. 그래서 누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버스에 얌전히 앉아 곧장왔습니다. 마을로 들어오다 누나는 군인을 보았습니다. 학교도 보았습니다. 탑도 보았고, 산과 강도 보았습니다. 얼굴에 파리가 앉은 노인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누나를 째려보았습니다. 누나는 무서워서 동생의 손을꼭 잡고, 마구 뛰어서 왔습니다. 저녁에 할머니가 고깃국을 끓여줍니다. 국물 위에 뜬 비계에 털이송송 박혔습니다. 비계를 집어먹은 동생은 밤새 토합니다. 동생이 게워내는 걸쭉한 덩어리를 누나는 한 손으로 받아냅니다. 다른 손으로는 동생의 머리를 누릅니다. 더 토해봐, 빙섀야. 사람 잠도 못 자게다음날부터 누나는 학교에 다닙니다.
----[비밀동화] - P9
높새바람이 마을을 통과합니다. 갈참나무 사이로 고온건조한 바람이 불어갑니다. 백엽상의 온도계 눈금이 올라가고 지붕들 위로 뜨겁고 가벼운 불씨들이 떠다닙니다. 머리에 풀잎을 꽂은 군인들이 피터팬처럼 불씨 사이를 날아다닙니다. 누나아앙아아. 동생이 누나를 부릅니다. 누나아아앙아아아아. 누나를 부르는 소리는 탑과 운동장과느티나무를 돌아 마을 곳곳으로 퍼져갑니다. 누나는 알지 못하지만 학교는 몇 년 뒤에 폐교가 됩니다. 누나가 덧셈뺄셈을 하던 칠판에는 군인들이 WXY를 그려넣고 동생이 맴을 돌던 이순신 장군 옆에서는 키 큰 풀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보다 훨씬오랜 후에 누나는 폐교를 찾아와 울게 됩니다. 돌을 껴안고 울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 P10
어쩌면 누나는 잠깐 잠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공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빠가 엎드린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돌려 자리에 눕는 게 보입니다. 누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 있기 때문에 그것은곁눈 시야로,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곧이어 엄마가 팬티를 올립니다. 누나는 자리에 누워 골목의 발소리까지 다 듣고 있었지만 엄마 아빠한테선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걸 압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누나는 종종 그날을 회상하게 됩니다. 단칸방에서 어린 남매를 키우던 젊은 부부의 너무 고요한 교합을, 상체를일으키고 속옷을 올리던 단 두 동작, 그 숨죽인 움직임이 주던 기이한슬픔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나는 어린아이였고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날 밤 천장을 보고 누운 누나의 얼굴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습니다. - P16
단칸방에 찾아온 무수한 밤들 중 한 날에 회수는 생겨났습니다. 일을 시작하려던 때에 회수를 가진 엄마는 살기 싫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습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엎드려서 웁니다. 조금 더 기운이 나면 누나한테 시비를 겁니다. 누나가대답을 늦게 하거나 방문을 열어놓거나 비누에 머리카락을 묻히면 냄비들을 모두 꺼내 납작하게 밟아버립니다. 누나를 사등분으로 접은뒤 싱크대 속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다 정상으로 돌아오면 엄마는누나 볼에 미친 듯이 입술을 비빕니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가 흙을묻혀오고 머리카락을 떨어뜨려도 마구 따라다니며 칭찬을 합니다. 누나는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엄마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됩니다. 자신을칭찬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선 금세 기가 죽는 아이로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칭찬을 끌어내기 위해 기를 쓰며 살게 됩니다. - P17
희수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엄마가 열무단을 들어 누나 등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열무는 단단합니다. 열무의 흙들이 누나의 머리카락을 파고듭니다. 열무가 다 흩어지자 엄마는 자리에 주저앉아 웁니다. 누나와 희수는 가만히 앉아 엄마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엄마는 꺼이꺼이 웁니다. 누나는 희수가 휘젓다만 허공에 말풍선을 띄우고 ‘꺼이꺼이‘라고 씁니다. 엄마가 우는 건자기 때문이라고 누나는 생각합니다. 한 번씩 꺼이꺼이 울고 나면 엄마는 며칠 동안 웅크리고 누워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빠는 밥상을 펴놓고 앉아 일을 하다가 희수를 업어달래고, 희수가 잠들면 누나에게 줄 밥을 볶습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노려보다 베개를 던지며 소리를 지릅니다. - P18
토요일입니다. 백엽상에서 맴을 돌다 정글짐으로 건너갔던 희수가긴 돌 위에 엎드려 있습니다. 누나는 친구들과 곤충채집 숙제를 해야합니다. 누나는 죠리퐁 한 봉지를 뜯어 희수에게 쥐여줍니다. 천천히먹어. 그래도 희수는 자꾸 누나를 따라오려고 합니다. 누나야, 나도 갈래. 나도 고기 잡을래. 우리 고기 잡으러 가는 거 아니야, 빙섀야. 누나는긴 돌 위에 희수를 밀쳐 앉힙니다. 야, 빨리 가야 돼, 친구가 누나를재촉합니다. 누나앙, 나도 갈래. 희수가 징징거리며 다시 일어섭니다. 아! 누나의 책가방을 잡던 희수가 나동그라집니다. 흙바닥 위로 죠리퐁이 쏟아집니다. 누나아앙아 누나는 친구들과 서둘러 다리를 건닙니다. 누나아앙아아 돌아보니 희수가 등을 구부리고 울고 있습니다. 울면서 죠리퐁을 한 알 한 알 봉지에 주워담습니다. 주워담다가다시 누나 쪽을 보며 웁니다. 울다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죠리퐁을 주워담습니다. 그러다 다시 엉덩이를 들고 누나를 부르며 웁니다. 여름 해는 깁니다. 긴 돌 위에는 희수가 없습니다. - P23
절터 위로 낙엽이 지고 눈이 오고 또 봄이 옵니다. 금줄을 두른 사람들이 드디어 무릎을 펴고 절터에서 캐낸 것들을 정리합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금줄을 두른 사람들이 카메라에 대고얘기합니다. 출토된 기와편이나 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절이 10세기경에 세워졌다고 얘기합니다. 발굴된 유물이 모두 13세기 중반의 것이고 그 이후의 유물은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절은그즈음에 폐사된 뒤 한 번도 복원된 적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금당지와 강당지의 흙이 모두 불에 탔고 퇴적물에 목탄의 흔적이 있으며 마을이 몽고군과의 접전지역이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들은 절이 몽고 침입시 몽고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고 정리합니다. - P33
높새바람이 전언을 실어옵니다. 누나는 돌축대에 혼자 앉아 귀를기울입니다.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와 절이 불에 타던 날, 큰스님들은담담하게 열반에 들어 사리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개‘자에도 못 간 젊은 승려들은 새까맣게 탄 몸 그대로 절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절에 살면서 예불을 드리고 향을 피우고 마을을 돌며 탁발을 합니다. 돌축대에 나란히 서서 마을을 바라보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물을 마십니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소리없이 걸어가며 저물 무렵이면 줄을 지어 지붕 없는 절터로 돌아옵니다. 한데에서 오래 살아 머리 위에선 풀이 자랍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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