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엔 사건 사고가 많았다. 인천발 멜버른행 여객기가 남태평양 상공에서 실종되었고 무기를들고 탈영한 병사들이 곳곳으로 숨어들었다. 해안에서는 난류를 타고온 밍크고래가 연이어 그물에 걸려나왔다. 아침에 지하계단을 내려가사무실 문을 열면 날개 달린 개미 수천 마리가 바닥에 엎드려 퍼덕거리고 있었다. 하루 업무는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개미 더미를 쓰레기봉투에 털어넣는 일로 시작되었다. 전임자의 책상은 그대로였다. 보던 문서는 서너 쪽이 넘어간 채로펼쳐져 있었고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가른 플러스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 그만두었다기보다 잠깐 화장실에 간 사람의 책상에 가까웠다. 전임자의 것일 휴대폰 배터리는 충전이 완료된 채 여전히 꽂혀 있었고 반쯤 남은 핸드크림, 전임자가 마지막으로 뽑은 형태 그대로 멈추었을 티슈의 선까지 고스란했다. ---- [전임자의 즐겨찾기] - P41
나는 양쪽 전화를 동시에 끊어버렸다. 끊자마자 다리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생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이없이 생기고 어이없이 죽는지, 생물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 생물들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연구자를 골탕 먹이기라도 하듯 늘 마음대로 몰려다니고 마음대로 죽어버렸다. 거기에 가설을 세우는 일은 피로했고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 P49
장마는 끝을 보였지만 하늘은 어두웠다. 날이 저무는 속도에 맞추어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정은 나를 낳지만 않았으면 천하를 얻었을거라고 했다. 어려서 들은 말이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그 말은 정기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몸과 마음이 침잠하는 날은 더 그랬다. 나는 내수면연구소가 있는 흑천으로도 정이 있는 해안으로도 가지 않았다. 식사 때를 두 번 지나치면서 잠을 잤고, 일어나보니 다시 날이저물고 있었다. 세번째 전화가 온 건 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흑천도 해안도 아닌 송의 번호였다. - P52
몇천 미터 깊이의 심해에는 마그마가 굳어지면서 생긴 뜨거운 물이 바닷물과 반응해 검은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블랙스모커가 있다. 블랙스모커 근처에 사는 생물들은 태양에너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지구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기체만을 먹고 산다. 지구에서 햇빛이없이 생명체가 살아가는 곳은 단 두 곳, 심해의 블랙스모커와 도청 밑지하연구소뿐이었다. - P62
정은 한번 다녀가라고 하루에 열두 번 정도 전화를 했다. 턱뼈가 부서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도 했고 코가 주저앉았다고도 했다. 나는정이 이제 좀 적당히 살기를 바랐다. 정은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들은 것도 많고, 들은 것이 많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정은 몇몇 친구들이 미니홈피에 손녀 사진을 올리는 것까지 부러워했다. 그것은 수천만원짜리 밍크고래를 손에 넣고 싶은것보다 더한 욕심이었다. 노년에 손녀 사진을 쓰다듬으며 살기 위해선 젊은 날 많은 걸 억제해야 된다는 걸 정은 몰랐다. 남편을 잡아먹고 싶어도 참고, 한탕 크게 하고 싶어도 참고, 자식이 발목을 잡으면잡힌 채 산 자만이 나중에 그런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 P63
"소초에 있으면서 한 번도 숙면을 취해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게밤 근무가 없을 때 잠을 더 못 잤던 것 같아요. 잠을 못 자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에요." "그래? 고래도 그래. 니네 수영이 누나 자료가 그러더라. 고래는 폐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깊은 잠에 빠지면 물속에서 질식할 수가 있다. 그래서 고래는 절대 깊은 잠을 자지 않는다." 안쓰럽기도 하고 화제도 돌리고 싶어 한 말이었지만 탈영병의 표정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초소에 서서 수평선만 보고 있으면 눈보다 귀가 예민해져요. 햇빛은 수면 위에서 자글자글 끓고 바다는 조용한데 그 밑은 말할 수 없이소란스러워요. 몇천 미터 심해에서 찰랑거리는 수면까지 밑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게 들려요. 그러다 태풍이 오고 바다가 정말로 뒤집어지면 바다 밑은 말할 수 없이 고요해져요. 심해에서부터 수면까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게 들려요. 그런 게 들리기 시작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나는 무언가에 넋이 나간 듯한 탈영병의 옆모습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이 얼마나 예쁜지 만져보고, 몸의 모든 접힌 부분을 들추어 냄새를 맡아보고, 배도 한번 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탈영병을 처음 본 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65
"고래 숨소리가 들려요. 습기 찬 공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소리, 고래가 분기를 뿜어요.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 입자들이 해변까지 날아와요. 물 위로 솟구칠 때요, 바다 한가운데서 섬 하나가 솟아오르는 것같았어요. 머리를 내밀고 사과만한 눈으로, 아니, 거의 수박만했던 것도 같아요, 고래가 저를 봐요. 눈이 얼마나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지몰라요. 저는 고래한테 단박에 빠져버렸어요. 왜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래 얘기를 해왔는지 저절로 알았어요. 이마엔 미열이 돌고, 심장은 시끄럽고, 다른 사람 말은 하나도 안 들려서 자꾸 문제 일으키고." 그건 열병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스스로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탈영병은 전임자 얘기가 빠진 순수한 고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임자얘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비커에 떨어뜨린잉크 한 방울이 아무런 번짐 없이 또르륵, 바닥에 닿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 P66
정에게 와사비는 자존심의 정점 같은 것이었다. 해안 변두리에서자잘한 회나 뜨며 살지라도 그 회만은 최고로 정성스럽게 갠 와사비로 마무리되어야 했다. 정은 늘 청하를 팔팔 끓인 물에 와사비를 개었다. 그것을 손목이 시큰해질 때까지 개고 개어야 톡 쏘는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고 했다. 녹색 광택이 빛나던 솔표 와사비분말은 내 유년을 장악하는 거대한 징표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아무리 정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코끝을 치고 올라오는 와사비향은 어쩔 수 없었다. 주말에 연구소 관사에 남아 부화동 수온을 점검하던 수많은 여름마다나는 컵라면에 와사비를 풀어 먹었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눈에 먼저들어온 것도 솔표 분말이었다. 정은 앞니 하나가 나간 상태였다. 전화로 듣던 것처럼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 P68
고래의 젖엔 다디단 지방이 많아서 한 모금만 먹어도 하루에 이 센티씩 큰다고 했다. 고래는 지느러미를 젖히고 가슴근육을 움직여 아기에게 젖을 뿜어줄 것이다. 아기는 고래의 아기가 먹는 반의 반의 반만 먹어도 배꼽이 볼록 튀어나와 금세 쌔근거릴 것이다. 고래는 아기를 등에 태우고 가슴지느러미로 노를 저어 따뜻한 바다로 데려다줄것이다. 고1은 고래에게 ‘내 아기에게 젖을 줘‘라고 말했다. 그날 밤 작은 어진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은 고1과 고래, 검은 바다와 아기, 해변의 모래들과 해안 초소 위의 경계병이었다. 경계병은 해안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낚시꾼도 취객도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경계병은 해변으로 뛰어내려갔다. 여학생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해안에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좌초한 고래의 지느러미를 젖히고 신생아를 유기한 고등학생 얘기도 나오지 않았다. 혹등고래도 오랫동안 그 앞바다에 나타나지 않았다. - P72
주마등의 끝엔 탈영병이 있었다. 박제철을 들여다보던 탈영병이 큭큭 웃는다. 나는 탈영병과 마주 앉아 와사비에 밥을 비벼 먹는다. 담요를 덮어주자 탈영병은 몸을 웅크린다. 탈영병은 미열이 있고, 탈영병은 고래 얘기를 한다. 탈영병의 얘기를 듣는 나는 그 시간들이 조금고통스럽다. 쓰레기봉투 옆에 앉아 있는 나는 그 시간들이 탈영병과함께 보낸 짧은 여름이 어떤 선물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그 며칠의시간 때문에, 물속이지만 이제 정말로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앉은 채로 나는 꿈을 꾸었다. 블랙스모커가 피어오르는 심해, 지구상에서 햇빛 없이도 생명체가 살아가는 유일한 곳, 고래의 젖을 먹고세상에서 제일 큰 아기가 된 사람의 아기가 기분이 좋은 날이면 블랙스모커까지 헤엄쳐 내려오는 꿈. 크릴새우를 훑어먹고 대왕오징어와싸우며 심해를 떠돌던 아기가 잠깐씩 와서 쉬어가는 곳. 나는 그곳에앉아 잠이 들었다. - P76
여객기와 별도로 고래 연구자들에게 그날은 중요했다. 혹등고래는홀로 이동하는 고래였기에 백여 마리가 집단으로 좌초한 건 이례적인일이었다. 호주의 고래연구소는 이 이례적인 현상을 밝히는 데 필요한 시간과 예산과 인력을 연말까지는 산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혼획을 가장한 불법포획이 만연하면서 해안의 밍크고래 개체수는크게 줄었다. 일부는 좌초한 고래를 위해 전국적인 구조체계를 갖추자고 주장했고 일부는 민족의 오랜 식단인 고래고기의 대중화를 위해포경을 재개하자고 주장했다. 시간이 가면서 문어통발에는 문어와 밍크고래 외에도 다양한 것이 걸려나왔다. 모 항공사의 로고가 찍힌 기내 의자를 봤다는 어부도 있고 메밀베개 껍데기를 봤다는 어부도 있었지만 원래 바다는 쓰레기장이라고도 불릴 만큼 안 떠다니는 게 없었다. - P78
해변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더라는 얘기를 듣고 정은 딸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무한대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최보살은 정의딸이 어디에 있든 물에 흠뻑 젖어 떨고 있으니 양지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굿을 해야 된다고 말했다. 정은 작은 어진에 줄을 만들었다. 그 위에 딸의 배냇저고리와 원피스와 교복치마를 내다 걸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빛이 그것들을오래 소독하고 말렸다. 해안에 사는 물고기들이 가끔씩 튀어올라 그것들을 구경했다. 하천을 헤엄치는 동자개는 여전히 가슴지느러미 가시를 뒤로 젖히며 빠가빠가 울었고 가슴지느러미를 가진 모든 어미들이 그 소리를들으며 같이 운다는 얘기도 그해 여름에 퍼져나간 소식들 중 하나가되었다. 깊은 산 계류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여울이 되고 시내가 되어바다로 흘러갔지만 민물고기는 바다의 염분을 견디지 못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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