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그는 조용히 들어갔다. 짐은 침대에누워 코를 골고 있었고, 헬렌은 잠든 것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그녀는 신발코에 북슬북슬한 방울이 달린 얇은 분홍색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밥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느껴지지 않았던 슬픔이 일었다. 그는 형이 형이! 그리웠고, 형은 메인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형은 메인을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밥은 그들이 여기로 돌 - P308

아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짐은 남은 생을 뉴욕에서망명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밥은 남은 생을 메인에서 망명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팬을 늘 그리워할 것이다. 뉴욕을늘 그리워할 것이다. 해마다 뉴욕을 찾아가도 그럴 것이다. 그는이곳에서 망명자였다. 그리고 이 기이한 현실이 자신의 삶은,
짐의 삶은, 심지어 팬의 삶은 결국 어떤 모습인가같은 슬픔을 안기며 그를 흔들어놓았다. - P309

그래서 밥은 발꿈치에 엉덩이를 붙인 채 쪼그려 앉아 있다가,
헬렌의 눈이 한동안 감겨 있자 맞은편 의자로 조용히 옮겨 앉았다. 그는 몸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오래 걸은 것처럼 아팠다. 온몸이 아팠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내 영혼이 아파하고 있다고.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이, 입을 벌린 어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선택은 어떤 것이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깨달음이 그를 찾아왔다. 그것은 짐에게도, 헬렌에게도, 마거릿에게도, 그 자신에게도마찬가지였다. - P310

9월 중순의 어느 화요일 아침, 올리브키터리지는 조심조심차를 몰아 요트 선착장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어서-이제 그녀는 이른 시간에만 운전했다예상대로 차는 많지 않았다. 그녀는 빈자리에 차를 대고 천천히 내렸다. 올리브는여든두 살이었고, 스스로 완전히 늙은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팡이를 쓰기 시작한지 삼주가 지났고, 돌길에서는 발밑을 잘살펴야 했기에 위를 쳐다보지 않고 걸었다. 그럼에도 이른 아침의 햇살과 우듬지 쪽에서 이미 선홍색으로 물든 나뭇잎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 P312

올리브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썰물 때였다. 거칠어진 머리를 빗질해놓은 듯 해초가 한방향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만에 남은 배들은 우아하게 자리를잡고 있었고, 가는 돛대들이 작은 첨탑처럼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들을 지나 저멀리 이글 아일랜드와 퍼커브러시 아일랜드가 보였다. 두 개의 섬 전역에 상록수가 자랐지만, 여기서는가는 선이 그려진 듯 보일 뿐이었다. 종업원 여자가 실제로 달걀 접시와 머핀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양손으로 골반을 짚은 채 "더 필요하신 건요?" 하고 말했고, 올리브는 그저 고개만 작게 흔들었다. 그러자 여자는 가버렸고, 걸을 때 하얀 바지를 입은 엉덩이 한쪽이 올라갔다가 내려가면서 반대쪽 엉덩이가 올라왔다. 거대한 살덩이들이 번갈아 오르내렸다. 테이블 위로 비치는 햇살 한 조각에 올리브가 손에 낀 반지들이 반짝반짝빛을 튕겨냈다. 그 손-그렇게 햇빛을 받은 모습을 쳐다보니놀라움이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반향을 일으켰다. 쭈글쭈글하고푸석푸석했다. 그것이 그녀의 손이었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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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걸었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하면서 자신이 안전하지 않은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타운은 지난 몇 년 사이 급변해서, 사람들은 더이상 지금의 그처럼 밤에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도리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다. 예전에는 많이 생각했다.
머리 위에서 달빛이 내리비치고 있었고, 그 빛은 계속 환했다. 마치 도리에 대한 기억이 혹은 도리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처럼. "분명 너희 집은 조용하지 않겠구나." 그녀는 말했다.
그러다 데니는 문득 생각했다. 지금 그의 집은 조용했다. 해가바뀌고 또 바뀌면서 점점 조용해지고 있었다. 애들이 결혼하고떠난 뒤로 그의 집은 서서히 조용한 집이 되어갔다. 마리는 지역학교에서 교육공학자로 일하다가 몇 년 전에 은퇴해서 더이상어떤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해 할말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뒤에 그도 가게에서 은퇴해서 역시 할말이 많지 않았다. - P233

구급차가 떠났고, 경찰 하나가 데니에게 말했다. "음, 오늘밤한 생명을 구하셨군요." 그러자 다른 경찰이 차에 타며 말했다.
"일단 지금은 말이죠."
데니는 재빨리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자신의 자식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그 생각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자식들은 불쌍한 도리와는 달리 안전한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자식들은 약을 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게있다면 그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사위는 것이 서글펐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그는 서둘러 집 앞 계단을 올라갔고, 코트를 벗어던졌다. 마리는 아직 잠들지 않고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책을 침대에 내려놓고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왔어?" 그녀가 말했다. - P236

11월이었다.
메인주 크로스비에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다. 바로 이날 수요일에는 해가 나서 세상에는 선뜩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오크나무에 매달린 잎은 금색으로 변해 시들어갔고, 상록수는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차렷 자세를 하고 있었다. 다른 나무들은 잎을 벗어내고 검은 가지만 남은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고, 뾰족한 우듬지는 끝이 더욱 가늘어졌다. 길은 황량했고,
들판은 싹 베어져 깨끗해 보였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살 아래에서 만물은 얼마간 오싹하면서도 굉장히 아름다워 보였지만 빛은 하늘 꼭대기까지 가닿지 못했다. 하늘은 검은빛이 도는 푸른색이었다. - P237

죽은아내 벳시가 그 여자가 쓴 걸 다 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올리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 강을 따라 달리고 있었고, 풍경에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삭막한아름다움, 길 바로 오른쪽으로 강물이 회색 리본처럼 흘러갔다.
"오늘 드라이브 나오길 잘한 것 같아." 잭이 말했다. - P245

그날은 그런 식이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뒷길로 돌아다니며이야기를 나누었다. 잭은 이미 한 적 있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다시 했다. 올리브의 어린 시절 집을 보자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 외곽에 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집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그 이야기를 올리브의 집만큼 작지는 않았지만어렸을 때조차 작게 느껴졌던 그 집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했다.
좁아터진 느낌이었다고, 그는 지금 그렇게 표현했다. 올리브는들으면서 "아, 뭐"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저것 좀 봐." 잭이 모퉁이를 돌자마자어두워지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11월의 석양이 눈앞에 모습을드러냈다. 지평선을 가로질러 노란색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헐벗은 나무들이 잎을 떨군 짙은 색 나뭇가지를 하늘을 찌를 듯뻗어올리고 있었다. "굉장하다. 잭이 말했다. - P249

하지만 시내에서 빠져나와 개방도로로 나오는 동안 올리브는그의 옆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잭 역시 할말이 없었다. 여전히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길에 그어진 흰 선말고는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고 강을 따라 달리면서, 올리브가그의 아내라는 사실과 오늘밤 일레인을 만나기 전까지 그들이함께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더이상 올리브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행복은 이제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그들이 함께한 날은 저물었다, 끝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차 안의 침묵 속에서 잭은 올리브-그의 아내의 존재를 느꼈다. 물리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 P263

잭은 너무 무서워서 의자에 앉아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무서운 것은 인생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이 누군지, 혹은 뭘 - P266

하는지 모른 채 살아왔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이 그의 내면에전율을 일으켰고, 그는 그것을 자신이 느낀 대로 정확히 표현할단어조차-스스로 잘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방식에 대해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고 느꼈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큰 맹점이 존재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어떻게 보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정말로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 P267

하지만 이제 그는 기억 속에서 벳시를 생각했다. 그녀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단순함을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는 캐시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오, 벳시!) -아니, 벳시는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밤 그는 그녀가살아서 그와 함께 있기를 바랐다. 그 생각이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들의 삶 전체가 허비되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많이 웃었고달콤한 순간도 많았으니 삶 전체는 아니었다. 오늘밤 그런 순간들이 책의 마음속을 스쳤다. 그는 주말에 자신이 크레페를 만들던 모습을,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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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는 행복했다.
아들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리틀 헨리는 위층으로 데려가 재웠고, 아이 엄마와 아이의 여동생인 아기도 위층으로 올라갔다. 큰아이 둘은 서재에 있는 카우치 겸용 침대에 재웠다. 구석에 있는 전등 불빛이 아들에게 쏟아졌다. 그녀가 원한건 오로지 이것이었다. 이거면 되었다. 크리스의 눈동자가 투명해 보였다. 얼굴도 투명해 보였다. 회색 머리칼은 여전히 놀라웠지만 아들은 좋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족부 전문 병원에 대해,
자기 밑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와 자신이 내야 하는 보험료와 환자들의 보험에 대해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집에 세 들어 사는사람 이야기도 했는데, 지금은 누가 욕만 하면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꽥꽥거리는 앵무새를 데리고 사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친구와 같이 사는 곧 결혼할 것 같은 젊은 남자라고 했다. 아들은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 P125

날은 매우 화창했다. 어제의 구름은 완전히 사라졌고, 햇살이집안으로 환하게 비쳐들었다. 바깥으로 보이는 큰 거실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만은 찬란했고, 바닷가재 부표들이 가볍게깐닥거렸다. 가재잡이 배 한 척이 바다에 나가 있었고, 나무들은만을 따라 가느다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다 같이 큰 파도를 구경하러 레이드스테이트파크에 가기로 했다. "애들은 정말 제대로 된 바다를 구경한 적이 없거든요." 크리스토퍼가 말했다. "진짜 바다요. 뉴욕으로 흘러드는 형편없는 바다 말고요. 애들에게 메인 해안을 보여주고 싶어요. 여기에도 있긴 하지만" - P131

그들은 또 한번의 밤을 보냈다. 그리고 또 한번의 낮이 지나갔고, 마침내 마지막 밤이 되었다. 올리브는 너무나 지쳤다. 그 시간 내내 리틀 헨리를 빼면 어느 아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녀를 응시했다. 점점 대담해지는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는데, 아이들을 볼때마다 아이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눈을 마주치면 얼른 시선을 내려피했지만, 이제는 계속 보고 있었다. 시어도어는 크고 푸른 눈으로, 애너벨은 작고 검은 눈으로 무슨 이런 애들이 다 있는지.
마침내 아이들은 서재로 잠을 자러 갔고, 리틀 헨리-얼마나착한지가 위층에서 잠을 자는 동안 올리브는 크리스토퍼와앤과 아기와 함께 앉아 있었다. 올리브는 이제 젖이 밖에 나와있는 것을 보는 데 얼마간 익숙해졌다. 좋지는 않았지만, 익숙해지고는 있었다. 그리고 앤이 측은했다. 슬픔 때문에 체구가 줄어든 듯 보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앤 역시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 P138

"크리스토퍼." 그녀가 용기를 내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결혼한다."
아들이 어중간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쳐다보고 이렇게 말하기까지 영원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결혼할 거라고 말했어. 잭 케니슨하고."
그녀는 아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보았다. 의심의여지 없이 창백해졌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곧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염병할 잭 케니슨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예요?"
"얼마 전에 아내와 사별했어. 전화로 네게 그 사람 얘길 한 적이 있는데, 크리스." 그녀는 얼굴이 활활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느꼈다. 아들의 얼굴에서 빠져나온 모든 피가 그녀의 얼굴로 들어온 것 같았다. - P139

퍼하고 있어요.
그리고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 순간 진실이 점점 커지며 공포스럽고 빠르게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수준의로 실패한 것이다. 실패는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 분명했지만 여태 깨닫지 못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그런 가정을 꾸리지 못한 것이다. 다른 가정에서는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와 같이 지내면서 대화를 나누며 웃었고, 손주들은 할머니 무릎 위에앉았다. 그리고 다 같이 놀러 다니고, 뭔가를 같이 하고, 함께 식사하고 헤어질 때 키스했다. - P148

 아들은 엄마 같은 여자와 결혼했다. 모든 남자가결국에는 이런저런 형태로-그렇게 하듯이.
잭이 조용히 말했다. "저기, 올리브, 잠시 같이 바람 쐬고 옵시다. 드라이브 좀 하고, 그다음엔 내 집으로 가요. 여기서 벗어나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어요."
"좋은 생각이에요." 올리브는 일어서서 코트와 큼직한 검은색핸드백을 가져왔고, 잭에게 이끌려 스바루로 갔다. 그는 그녀를태우고 자신도 차에 탔다. 그리고 출발했다. 올리브는 거의 뒤를 돌아볼 뻔했지만 그러는 대신 눈을 감았다. 어차피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였다. 그녀의 집, 그녀와 헨리가 아주오래전에 지은 집, 지금은 작아 보이는 집, 중요한 건 땅일 테니누가 됐건 매입한 사람이 완전히 허물어버릴 집 그녀는 감은 눈뒤에서 그 집을 보았고, 그녀 안에 일어난 전율이 뼛속을 통과했다. 그녀는 그 집에서 아들을 키웠다-엄마 없는 아이를 키운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한 번도 깨닫지 못한 채, 이제그 아이는 집을 떠나 멀리멀리 가버렸다. - P150

가을이었다. 나뭇잎은 색깔이 달라졌지만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다. 라킨 씨네 집 옆의 단풍나무들은 색색의 아름다운 비명을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 집은 전소되어 주저앉기 전에도 한동안 보기 안쓰러웠다. 무릎 높이로 자란 풀과 더이상 손질되지 않는 관목이 집 앞쪽의 크고 웅장한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로저 라킨이 줄곧 거기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들이 놀란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죽는 건 얼마나 끔찍한가! 바로 밑에서 마약중독자 둘이 몹쓸 마약을 조제하는 동안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은 당연히 수군거리는 소리가 많았다. 라킨 부부는 늘 자기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가 있었다.
루이즈는 예뻤고, 그건 타운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 P152

그 말은 구슬처럼 순식간에 수진에게 굴러왔는데, 진실한 무언가가 말해졌으나 자신은 붙잡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는 사무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오. 그녀는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햇살 한줄기가 먼 창문을 통해 느닷없이 들어와 버니의 책상 위에 작은 빛의 띠를 그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책상 위에그를 향해 놓인 작은 액자를 보았다. "누구예요?" 그녀가 액자를향해 고갯짓을 하며 물었다.
그가 액자를 돌려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흑백사진 속에 부부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옛 시대 사람들처럼 보였다. 남자는수염이 풍성하고 슈트에 폭이 좁은 타이를 맸으며, 여자는 머리에 꼭 맞는 모자를 썼다. "부모님이셔." 그가 말했다.
"그렇군요." 수진이 눈을 찡그리고 사진을 보았다. "혹 그분들이 정통파 유대교 신자셨어요?" - P164

버니는 망설여지면서도 더없이 진지해지는 것을 느꼈다. 변호사로서 자신의 책무를 훨씬 벗어난 뭔가를, 오래전 아내에게 모호하게 말했던 것을 빼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뭔가를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느낌이었다. "좋아."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다음은 이거야. 믿음이 있느냐고 있어, 문제는 설명할 수가 없다는 거야. 하지만 믿음이라고 볼 수 있겠지. 믿음이 맞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오, 말씀해주세요 버니."
버니는 손을 목덜미에 갖다댔다. "할 수가 없어, 수천, 설명할말이 없어, 우리보다 더 큰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를 넘어서는 거야. 나는 거의 평생 이런 생각을 품고 살았어." 그는 실패했다고 느꼈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 P185

수진이 말했다. "저도 그런 걸 느끼곤 했었어요. 오랫동안 아저씨가 방금 말씀하신 그런 걸 느꼈어요. 하지만 저도 설명은 못하겠네요." 버니는 대답하지 않았고, 수잔은 계속 말했다. "어렸을때, 그리고 혼자 있을 때ㅡ전 학교에 있지 않을 때는 주로 혼자시간을 보냈어요-종종 나가서 걸어다녔는데 그때 그런 걸 느꼈어요. 아주 심오한 느낌이었어요. 그저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방식으로 이해한 것이었겠지만, 저는 그 느낌이 신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을 한 그런 신은 아니었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 P185

신이 있다면 어린아이들이 왜 암에 걸리나, 지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냐, 그런 이유요.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 저는 당신 지금 엉뚱한나무를 긁고 있어,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어떤 나무가 맞는 나무인지, 어떻게 잘 긁어야 할지는 저도잘 모르겠어요."
책상 앞에 앉아 버니는 멍하니 믿기지 않는다는 느낌에 빠졌다. 수진이 하는 말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잰이 덧붙였다. "그런 기분이, 그런 느낌이 왜 더이상 들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버니는 강을 내다보았다. 늘 그렇듯 강 풍경이 또 달라져 있었다. 지금 강물은 더 초록빛을 띠었고, 하늘을 뒤덮은 구름은 더높이 올라가 있었다. "다시 느끼게 될 거야." 그가 말했다. - P186

수진이 말했다. "그거 아세요. 버니? 저는 이 문제를 많이 생각했어요. 정말 많이요. 그리고 제가.………… 음, 이런 표현을 생각해냈어요. 그러니까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해서요. 제 머릿속을 스친 표현은 이건데요. 우리가 할일은-어쩌면 우리의 의무일 수도 있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한 어른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신비의 무게를 가능한 한 우아하게 견디는 것이다." - P187

"사람들은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살아간단다." 버니가 말했다. "정말로 그래. 사람들이 뭘 끌어안고 사는지 보면 늘 놀라게돼."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수진, 너는 방금 내게 남편이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 그게 뭐건 그것에 대한 네 경험도알지 못한다고 했어."
"맞아요." 수잰이 말했다. "버니, 정말 현명하세요. 사랑해요."
버니가 말했다. "수, 나도 사랑한다." 그는 이제 기분이 나아졌다고, 그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불편한 마음이 얼마간 덜어졌다고 몹시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만 더. 내 말 잘 들어라."
"듣고 있어요." 수잰이 말했다.
그가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면 실컷 울어, 평생 그런 적이 없었을 만큼 맘껏 울어. 다 울고 나면 뭘 좀 먹고, 종일 굶었을 텐데."
"맞아요. 안 먹었어요. 뭘 좀 먹을게요. 약속해요. 하지만 더이상 울고 싶진 않아요. 버니. 저 사실・・・・・・ 사실 지금은 노래를 부르고 싶은 기분이에요."
"그럼 노래를 부르렴." 그가 말했다. - P188

버니는 책상 앞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종의 조용한놀라움이 그의 가슴속을 관통했다. 수잰은 용케 타락하지 않았고, 그녀가 이야기할 때 보여준 정직한 태도는 단연코 작지 않은선물이었다. 그녀는 순수했고, 그것은 그녀에게 숨쉬는 것처럼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수재의 순수함이 파도처럼 밀려와지난 세월 직업적으로 누적된 그의 불안을 얼마간 씻어내준 것같았다. 잠시 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내에게 수잰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 P189

수잰이 그를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는 그만의 비밀로 남겨둘 것이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혼자 간직하는 숱한 비밀을 생각해보면, 그런 정도의 비밀은 전혀 나쁠게 없다고, 그는 일어서면서 생각했다. - P190

병이 들기 전에 신디는 지역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그녀는 책을 사랑했다. 오, 정말로 책을 사랑했다. 책의 촉감을, 책의냄새를 사랑했다. 마냥 조용한 것도, 조용하지 않은 것도 아닌도서관의 분위기를 사랑했고,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가끔 와서 오 - P197

전을 통째로 보내는 노인들을 사랑했다. 그녀는 노인들에게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법이나 읽고 싶은 잡지를 찾는 법을알려주는 일이 좋았다. 그중 가장 사랑했던 일은 책을 대출해주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찾아와 그녀가 추천해준 책을 읽고 느낀 점을말해주었다. 신디는 모든 책을 읽었고, 지금도 침대옆 탁자와창턱에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바닥에도 몇 권 있었다. 그녀는특별한 선호 없이 어떤 책이든 좋아했고, 가끔 그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셰익스피어를, 샤론 맥도널드의 스릴러소설을, 새뮤얼존슨의 전기를, 여러 극작가의 작품을 읽었고, 유치한 로맨스소설도 읽었다. 또한 시도 읽었다. 그녀는 속으로 시인은 신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P198

신디는 어렸을 때 시인이 되려고 생각했다-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가. 하지만 아이였던 그녀는 시를 좋아했고, 3학년 때 담임선생은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젊은이를 위한 시선집』을 그녀에게 주었다. 여동생이 그책 여기저기에 빨간색 크레용을 칠해놓았을 때, 신디는 그애를 때렸다. 나중에 여동생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신디는 그 기억 때문에 늘 마음이 아주 괴로웠다. 하지만 신디는 그 책이 온통 빨갛게 되기 전에 거기 실린 모든 시를 외웠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작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세계로 안내를 받는 기분이 얼마간들었다. - P198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해줄 때 다정했고, 신디는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이 마찬가지로 궁핍한 처지에 있던 신디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디는 시를 썼지만 혼자만 읽었다. 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신디보다 두 살 아래인 앤드리아 드리는 일 년 전 미국의 계관시인이 되었고, 신디는 메인주 크로스비 출신이 그런 위업을 달성한것에 속으로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솔직히 신디는 앤드리아가 쓴 시가 늘 이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앤드리아의 시는 용감했다. 신디도 그것은 알았다. 앤드리아의 시는 그녀의 삶이 주된내용이었고, 신디는 그것들을 읽으면서 자신은 절대 앤드리아처럼 쓰지 못했으리란 걸 깨달았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쓰는 건 신디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담배를 피울 때 볼이 쏙 빨려들어가던 것을 보면서 느낀 역겨움은 결코 쓸 수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그녀 자신에 관한 것도쓸 수 없었을 것이다. - P199

신디가 쓸 수 있는 것은 2월의 햇빛에 대해서였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2월에 대해 불평했다. 춥고 눈이 오고 이따금 비가 오고 눅눅하다고 불평했고, - P199

얼른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신디에게 2월의 햇빛은 늘비밀 같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2월에는 낮이 점점 길어졌는데, 잘 관찰하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의 끝마다 세상이 조금씩 더 열렸고, 더 많은 햇빛이 황량한 나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약속했다. 그 햇빛이, 약속했다. 그건 얼마나 굉장한일인가. 침대에 누워 신디는 지금도 볼 수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 금빛이 세상을 여는 것을. - P200

올리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아, 알지. 내가 하고싶은 말은, 내가 별로 잘해주지 못했다는 거야. 그게 지금 마음아픈 거고. 정말로 마음이 아파. 요즘 이따금-드물게, 아주 드물긴 하지만 이따금 내가 인간으로서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더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아. 헨리가 내게서 그런 모습을 전혀 못 봤다고 생각하면 정말 괴로워."올리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또 이런다. 내 이야기만 하고 있네. 요즘 내 이야기는 많이 안하려고 하는데." - P205

올리브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 말했다. "신디 쿱스,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할 나쁜 기억 한두 개쯤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그녀가 뒤로 기대앉아 두 발목을 꼬았다.
"하지만 무서워요!"
"오, 나도 알아. 알지. 당연히 무서울 거야. 사람들은 모두 죽는 걸 무서워해."
"모두요? 그게 사실인가요, 키터리지 선생님? 선생님도 죽는게 무서우세요?"
"나도 죽는 게 죽을 만큼 무서워. 그건 사실이야."올리브가자세를 고쳐 앉았다.
신디는 그 말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잘 수용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것도 가능하겠지. 어떻게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신디는 느꼈다-자신이 거의 평범한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냥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그냥 너무 외로워요. 이렇게 외로운 거 싫어요."
"당연히 싫지." - P206

"선생님 나이에도 죽는 게 무서우세요?"
올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맙소사. 내가 이미 죽은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어. 하지만 여전히 죽는 건 무서워." 그리고 올리브가 말했다. "알겠지만, 신디. 네가 정말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리고 죽게 된다면, 진실은………… 우리 모두 그저 몇 걸음 뒤에 있다는 거야. 이십 분 뒤, 그게 진실이야."
신디는 그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녀는 톰과 아들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그녀 없이 영원히 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올리브의 말이 맞았다. 그들 모두 그녀가 가고 있는 곳으로 가고있었다. 그녀가 지금 가고 있는 거라면.
"고마워요" 신디가 말했다. "그리고 와주셔서 고마워요."
올리브 키터리지가 일어섰다. "잘 있어." 그녀가 말했다. - P207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고, 지붕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올리브가 말했다. "톰이 다시 시작한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신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 키터리지 선생님. 그이가혼자 산다는 생각도 견딜 수 없어요. 못견디겠어요. 정말로 못견디겠어요. 그이는 그저……… 오, 혼자 두기엔 덩치만 큰 아기같아요. 그래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요. 하지만 그이가 다른누군가와 같이 있는 걸 상상하면 마음이 더 아파요."
올리브는 그 말을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신디. 너하고 톰은 같이 자랐어. 헨리하고 나도 그랬고. 우리는열여덟에 만나서 스물한살에 결혼했지. 진실은… 네가 그 사람하고 같이 살았다는 거야. 그 사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올리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사라지지 않아." - P212

올리브가 눈을 깜박였고,
마침내 말했다. "문득문득 그이가 몹시 그리워, 신디. 잭이 잘해주지 않아서가 아니야, 대체로 잘해주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헨리가 생각날 것 같아."
"선생님이 와주셔서 정말로 기뻐요." 신디가 말했다. "나를보러 와주지 않는 사람 말을 믿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니, 나라면 믿을 거야. 그냥 믿어."
"하지만 왜 보러 오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올리브, 오래된친구들이 저를 보러 오지도 않아요."
"무서워서 그래."
"거참 유감이네요!"
"오, 동의해.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선생님은 무섭지 않으시잖아요."
"무섭지 않아."
"죽는 건 무서운데요?"
"그렇지."올리브가 말했다. - P215

"알겠어요." 신디가 말했다. "제가 곧 죽을 사람이니까 말해도 안전할 거라고 여기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쟤한테말하지 못할 게 뭐야, 그러셨을 수도 있겠다고요."
올리브가 말했다. "네가 죽을지 안 죽을지 나는 몰라."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올리브가 말했다. "문 앞에 크리스마스 화환이 아직 걸려 있더라. 그러는 사람들을 종종 봤는데이유를 모르겠어."
신디가 말했다. "오, 저도 그거 싫어요. 톰한테 몇번이나 말했는데, 그이는 왜 떼어내는 걸 자꾸 잊어버리죠?"
올리브가 허공에 손바닥을 휙내리쳤다. "경황이 없어서 그래,
신디. 요즘 다른 것에는 집중할 수가 없을 거야."
어리둥절했지만, 신디는 올리브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단순한 말이었지만, 완벽한 사실이었다. 오, 가엾은 톰!
신디는 생각했다. 톰 내가 그동안 당신한테 너무했어..…… - P223

신디가 고개를 돌렸다. 햇빛이 장엄했다. 한낮의 빛이 끝을 향하면서 입 벌린 모습을 한 태양이 연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황홀한 노란색을 쏟아냈고, 그 빛은 헐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내리비쳤다.
그리고 그다음 일어난 일은 이것이다―신디는 이 일을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말했다. "어쩜, 나는 늘 2월의 햇빛을 사랑했어." 올리브가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쩜." 그녀는 경외감이 깃든 목소리로한번 더 말했다. "2월의 저 햇빛 좀 봐.‘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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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7-2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 마지막 문단에서 ˝퍼하고 있어요˝가 정말 어떤 의미 있는 문장인줄 알고, 뜻을 잠시 생각했던 거 있죠 ㅎ
 

 사람들이 보도에 나와 있었는데, 많은 이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거나 유아차를 밀고 있었다. 모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함께있다는 것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을 얼마나 쉽게 당연한일로 받아들이는가! 누구도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그는 그저 배 나온 늙은이일 뿐 전혀 쳐다볼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이 그를 거의 자유롭게 했다. 인생의 많은 시간을키 크고 잘생기고 배가 나오지도 않은 남자로 하버드 캠퍼스를거닐며 보냈다.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학생들은 존경어린 눈빛으로 힐끔거렸고, 여자들 또한 눈길을 주었다.
동료들이 말해주기로, 학과 회의 때 그는 위압적인 존재였다. 그런 모습을 의도했던 터라 그는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는 콘도를 짓고 있는 부두 한곳을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사방에 물과 사람이 보이는 이곳으로 이사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흘끗 본 뒤 다시 집어넣었다.
딸과 통화하고 싶었다. - P10

이제 잭은 올리브키터리지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을 그냥 두었다. 키 크고 덩치 크고, 맙소사, 올리브는 이상한 여자였다. 그는올리브를 꽤 좋아했는데, 솔직했고-그게 솔직한 건가? 그녀에겐 뭔가가 있었다. 남편과 사별한 여자, 올리브는 잭의 인생을구해준 거나 다름없었다-그는 그렇게 느꼈다. 같이 몇 번 저녁을 먹으러 갔고, 한 번 콘서트를 보러 갔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키스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큰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그녀의 입술, 올리브키터리지. 따개비가 잔뜩 들러붙은 고래와 키스하는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두 해 전 태어난 손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할아버지, 즉 올리브의 죽은 남편 이름을 따서 헨리라고 지었다. 잭은 그게 딱히 신경쓰이지 않았지만, 올리브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잭이 뉴욕으로 가서 리틀 헨리를 만나보라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음,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 P19

지금잭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락의자로 가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물고기 눈을 한 끔찍한 남자가 그를 차에 붙여 세웠을 때 목격한 개미들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개미. 해야 하는 일을하면서 죽을 때까지 사는 존재들. 잭의 차에 짓뭉개져 그토록 무분별한 학살을 당해도. 그는 정말로 개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중세시대 인간행동, 그리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살해되고 그 결과 유럽의 모든 이들이 서로를 학살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대 인간행동을 연구해온 잭 케니슨-그런 잭이 개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일은 일요일이고, 긴 하루가 될 거라고 예감했다. - P37

 그 말을 한사람이 누구였더라? 대단하지 않다는 말? 올리브 키터리지였다.
타운의 어느 여자에 대해 말할 때 그 표현을 썼다. "그 여자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올리브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여인이존재했고, 사라졌다. 지워졌다.
결국 잭은 종이를 꺼내 펜으로 썼다. 올리브키터리지, 당신이보고 싶습니다. 혹 당신이 전화해주거나 이메일을 보내거나 나를 보러 와줄 수 있다면 아주 기쁠 거예요. 그리고 그는 편지에서명을 한 뒤 봉투에 집어넣었다. 침을 묻혀 봉인하지는 않았다.
보낼지 말지는 아침에 결정할 것이다. - P38

 올리브는 자신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올리브는 남자가 좋았다.
늘 남자가 좋았다. 아들을 다섯 낳고 싶었다. 그리고 그랬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늘 있었는데, 왜냐하면 크리스토퍼가……… 오, 사 년 전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부터 줄곧그래왔듯, 올리브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생생한 슬픔의 무게를느꼈다. 그리고 헨리가 죽고 이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무게가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 있는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크리스토퍼와 앤은 첫아기 이름을 크리스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헨리라고 지었다. 헨리 키터리지.참 멋진 이름이었다. 멋진 남자였다. 올리브는 손자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 P45

자 있을 때 찾아사실 올리브는 나이를 먹으면서 왜 남편에 대한 마음이 굳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것은 그녀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긴 결혼생활 동안 그들 사이에 생겨난긴돌담-그들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곳에 이끼로 덮인 따뜻하고 움푹 팬 자리가 있어서, 때로 느닷없는 이해의 웃음이 터질 때면 두 사람 사이의 그 자리에 햇빛이 일렁이기도 했다―이더욱 높아지고 단단해져서 작은 구멍에 꽃이 피기는커녕 담을따라 얼음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그들 사이에뭔가가 생겼고,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어떤 날에는여기는 돌덩이가 더해진 자리, 저기는 돌멩이 한 무더기 (크리스토퍼의 사춘기, 오래전 그녀와 같은 학교 동료 교사였던 짐 오케이시에 대한 감정, 시보도라는 여자와 헨리가 벌인 어이없는 애정행각. 죽음의 협박 속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면서 헨리와 함께 견딘 범죄의 공포, 크리스토퍼가 이혼하고 타운을 떠난 것)가 보태진 자리라고 짚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노년으로 향하면서 그들 사이에 왜 그렇게 높고 끔찍한 담이 세워졌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쪼그라들수록 헨리의 심장은 더욱 굶주렸다 - P50

애슐리가 끙하는 신음과 악 하는 비명이 뒤섞인 큰 소리를 냈다. 그리고 뭔가가 쑥 빠져나왔다.
올리브는 여자가 아기를 낳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뭔가 덩어리 같은 것을 낳았다고 생각했다. 거의 진흙덩어리 같은 것을. 그러다 곧 그것의 얼굴과 눈과 팔을 보았다. "오, 맙소사"올리브가 말했다. "아기가 태어났어요."
"자, 어떤 아기가 태어났는지 볼까요" 하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올리브는 그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잡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는 구급차를 타고 왔는데, 차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책임감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이 와락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린이 잔디밭에서 일어섰다. 얼굴 위로 눈물이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 올리브." 그녀가 말했다. "오, 놀라워요." - P55

잭이 잠시 그녀를 지켜보았고, 이어 재미있다는 듯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잡혔다.
"올리브," 그가 마침내 말했다.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나는 몰라요. 몇 번 전화했는데, 아마 뉴욕에 손자를 보러 간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자동응답기 없어요?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 내가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는 것 같거든요."
"손자는 만나본 적 없네요."올리브가 말했다. "그리고 자동응답기는 당연히 있죠."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아, 어느 날 꺼버렸네요. 누가 자꾸 전화해서 휴가 상품에 당첨됐다는 메시지를 남겨놓는 바람에. 다시 켜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녀는 이제자신이 진짜로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그 빌어먹을 기계를 다시켜지 않은 것이다. - P62

그날 밤!
올리브는 파도가 자신을 높이높이 던져올리며 위아래로그네를 태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어둠이 아래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 같아 공포를 느끼며 버둥거렸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삶이라니,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 아닌가 자신의삶이 달라진 것을 많이 달라질지도 모르고 혹은 전혀 달라지지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양쪽 생각 모두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파도가 자신을 높이 밀어올릴때만큼은 기쁨을 느꼈으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고, 곧 다시내려와 파도가 출렁이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식이었다―이쪽저쪽, 위로 아래로. 그러는 동안 그녀는 지쳤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 P69

그러고는 말했다. "자는 중이에요."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참 우렁찼다. 그것이 올리브의 신체감각을 자극했다. 전율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공포를 느꼈다. 몸이 기름에 흠뻑 적셔진 상태에서 누가 성냥을켜서 갖다댄 것처럼. 그의 웃음이 일으킨 공포, 전율, 그 느낌은악몽 같았지만, 한편으로 그녀 자신이 쑤셔박혀 있던 거대한 캔의 뚜껑이 방금 열린 것 같았다.
"진짜예요." 올리브가 말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얼른, 저리 가요, 잭."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제발,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알지 못했다. 제발, 그녀가 다시 생각했다. 제발.. - P70

토요일 오후, 케일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지나 미스 미니가 지내는 요양원으로 갔다. 3월 중순의 날씨는 추웠지만 눈은거의 내리지 않았다. 케일리의 자전거는 보도에 떨어져 있던 잔가지 위를 덜컹거리며 달려갔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아서 손이시켰다. 미스 미니는 케일리가 지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 위층에 살았었다. 미스 미니는 그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케일리가 청소를 맡았던 첫번째 집의 주인이었다. 노부인은 작은 체구에 눈이 아주 크고 눈동자 색깔이 짙었다. 케일리는 세월과 더불어 집안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때에, 특히 부엌에 낀 때에깜짝 놀랐다. 그래서 케일리는 때를 닦아내고 또 닦아냈고, 그러는 동안 미스 미니는 부엌 입구에서 들여다보며 "오, 일을 참 잘하는구나, 케일리!" 하고 말했다. 미스 미니는 손뼉을 치기까지하며 케일리가 한 일에 감탄했고, 케일리는 그래서 미스 미니를좋아했다. 미스 미니는 케일리가 일을 마치면 늘 오렌지주스를따라주고, 식탁 맞은편에 앉아 케일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학교나 친구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케일리에게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83

아버지의 병세가 아주 깊었던 어느 날, 그가 침대에 누워 케일리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케일리가 가서 아버지의 입에 귀를 갖다댔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늘 너를 가장 예뻐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덧붙였다. "네 엄마는 브렌다를 가장 예뻐하지."
그의 입가에 하얗고 끈끈한 침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사랑해요, 아빠." 케일리가 말했다. 그러고는 티슈를 집어 그의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고, 아버지는 따뜻한 눈빛으로그녀를 쳐다보았다.
케일리는 종종 그 순간을 아버지가 당신이 가장 예뻐하는 아이가 그녀라고 말해준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늘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지금은 시내치과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저녁에도 케일리에게 할말이 거의 없는 듯했고, 케일리는 종종 그것이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이따금 케일리는 실제로 아픔이 작은 파도처럼 가슴에 들이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마음의상처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상처를 말하는 거라고. - P87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말했다. "어디 갔었니?" 케일리는 링로즈 부부의 집에서 청소를 끝낸 뒤 자전거를 탔다고 말했다. 아주 아름다운 날이었다고. 그리고 케일리는 피아노 앞에앉아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오, 어찌나 열심히 쳤던지! 아무리건반을 눌러도 음악의 신선한 토양 속에 손가락을 충분히 깊이박아넣을 수 없다는 듯이 모차르트 소나타를 잇따라 쳐나갔다.
치고 또 쳤다.
그러고 나서 앉아서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피아노에는 손도 대지 않더니. 거기 덩그러니공간만 차지하고."
케일리가 말했다. "계속 칠 거예요. 그러니 없애지 말아주세요." - P90

케일리가 아주 어렸을 때, 어느 날 그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이예쁜지 물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글쎄, 어떤 미인대회에 나가도 우승은 못할 거다. 하지만 기형쇼 같은 데 나갈 일도 없겠지."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케일리 -그때 6학년이었다는 미인대회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체육 선생이 그녀를 따로 불러 셜리폴스 타운에서 ‘리틀 미스 목시‘ 대회가 열리는데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다. 케일리의 아버지는 길길이 날뛰었다. "내 딸은 누구든 외모로 평가받는 일이 없어야한다!" 아버지는 정말로 화를 냈고, 그래서 케일리는 체육 선생에게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럴 수 없다고. 그리고 케일리는 대회에 나가든 못 나가든 상관이 없었다. - P92

슬픔의 파도가 밀려와 케일리를 덮쳤고,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통과했고 해안을 따라 달렸다.
링로즈 씨를 생각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사이 일어난 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지만, 그 일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거의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하던 대로 해나갔다. 자전거를 탔고, 도넛가게에서 일주일에 이틀씩 오전에 일했다. 가게를 운영하는 남자가목요일 오전에 하루 더 일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피폐해졌고, 어느 오후 비사 배브콕의 부엌에서 칫솔을 들고 바닥에 엎드렸을 때는 정말로 어질어질했다. 버사 배브콕은 집에 없었고, 케일리는 일어서서 편지를 남겼다. 여기서 더이상 일할 수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들통도 비우지 않고 칫솔도 바닥에 둔 채로 떠났다. - P101

케일리는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또 지르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일리에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더이상 그 상황이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녀 안의 스위치가 꺼진것 같았다. 그녀 안에서 커져가던 모든 공포가 사라졌다. 이걸로끝. 신경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가 그녀의 뺨을 때렸고 눈물이 와락 솟구쳤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느껴본 가장 이상한 감정이었고, 그 감정이 무서웠다-어머니가 아니라 그 감정이. 그녀의 침묵은 어머니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네 언니한테 전화해야겠다!"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고 어머니가 케일리의 침실에서 나갔을 때, 케일리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방안은 무참히 파괴된 듯 보였다. 작은 책상에는 넘어진 전등 위에 팬티 한 장이걸려 있었고, 양말은 저만치 벽에 날아가 있었으며, 분홍색 퀼트이불은 찢겨 있었다. - P103

많은 일, 시민권 운동, 이제는 훨씬 좁아진 세상, 링로즈 선생이결코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들로 연결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케일리는 링로즈 씨를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가 견뎠을 외로움을, 고작 몇 피트 떨어진 곳에서 지금도 견디고 있을 외로움을.
케일리는 고개를 젓고,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지금 이순간에 그저 이 순간만큼은-다시 그와 가까이 있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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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위에 뿌연 안개가 걸려 있어 물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산책로마저도 조금 먼 곳은 보이지 않아 올리브는 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 연거푸 놀라곤 했다. 평소보다 늦게 나왔더니 사람이 더 많았다. 포장된 산책로 옆으로는 솔잎 더미가 드문드문 보였고, 키 큰 풀들의 끝과 관목 떡갈나무의 나무껍질, 산책하다앉을 수 있는 화강석 벤치가 있었다. 젊은 남자가 가벼운 안개를뚫고 올리브를 향해 뛰어왔다. 그는 손잡이가 자전거 핸들처럼생긴 삼각형 모양의 유모차를 밀면서 뛰었다. 올리브는 유모차안에 얌전히 누워 잠자는 아기를 얼핏 보았다. 저 자만심 강한베이비부머 부모들은 별의별 장비를 다 갖추었다. 크리스토퍼가 저 아기만 했을 때 올리브는 아이가 아기 침대에서 자도록 내버려두고 길 아래 사는 베티 심스를 찾아가곤 했다.  - P283

 너무 더운 날이어서 물안개도 후텁지근하고 끈적였다. 눈 아래로 땀이 눈물처럼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온몸에 시커멓고 지저분한 진창을 주사라도 놓은 듯, 라킨의 집에 갔던 일이 마음속에 퍼지며 가라앉았다. 이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더러운 진창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버니에게 전화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고, 이야기를 털어놓을 헨리도 없으니- 걷고 말도 하는 헨리가 없으니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바로 오늘 아침에 그를 다시 한번 뇌졸중으로 잃은것 같았다.
- P284

요양원으로 운전하는 동안 보슬비가 차에, 그리고 앞에 펼쳐진 도로에 내렸다. 잿빛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여느와는 달리 속이 상했다. 크리스토퍼 때문인 것은 맞지만, 심한자책의 양 날 사이에 끼어버린 것만 같았다. 사실 한 번도 해본적은 없지만 가게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사적이고 깊은 부끄러움이 훅 올라왔다. 수치심이 지금 눈앞의 차창 와이퍼처럼 영혼을 가로질러 쉬익쉭 훑고 지나갔다. 거대하고 가혹한 검정 손가락 두 개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올리브를 질책했다. - P288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P292

 하지만 루이즈는 자식들을 사랑했고, 끊임없이 자랑했다. 루이즈가 도일이 여름 캠프에서 집을 그리워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적시던 걸 올리브는 다시금 기억해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며 루이즈 라킨을 찾아간 것은 잘못이었다. 또한 가고 싶으면 가라고 헨리에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죽으리라고 생각한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이 이상하고 불가해한 세상에서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올리브는 앞으로돌아누우며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켰다. 튤립을 심을 것인지를 곧 결정해야 할 것이다.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 P293

이 집에 들어와본 적이 없는 올리브는 집이 낡았다고. 몹시 피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단지 스토브 옆의 부엌 바닥에 타일 몇개가 없어서, 또는 싱크대 상판의 가장자리가 불룩 올라와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집은 그저 대단히 지친 분위기였다. 죽어간달까. 죽어가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됐든 보는 사람도 피로해졌다. 올리브는 커다란 창문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거실을 흘끔 들여다본다. 손볼 것이 많은 집이다. 하지만, 말린의 집이다. 물론 말린이 집을 판다면, 차고 위의 방에 사는 케리도 같이 이사를 나가야 할 것이다. 안된 일이군, 두 사람의 코트를 걸어놓은 벽장문을 닫으며 올리브는 생각한다. 몇 년전 케리 먼로는 크리스토퍼에게 눈길을 준 적이 있다. 아들의 병원에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헨리마저도 아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크리스토퍼는 말했다. 그여자는 제 타입이 아니에요. 그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우습다.  - P302

이 광경을 지켜보는 올리브는 기분이 묘하다. 질투심? 아니,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질투를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가갈수 없는 느낌, 그래 그런 기분이었다. 통통하고 천성이 친절한여인이 아이들과 사촌, 친구들에 둘러싸여 소파에 앉아 있다. 그런 여인은 올리브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다. 올리브는 이감정이 가져오는 낙심을 깨닫는다.
그녀는 오늘 왜 여기에 왔던가? 헨리가 에드 보니의 장례식에꼭 가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그녀는 누군가의 깊은 슬픔을 보며 자신의 어두운 마음에 한줄기 빛이 비쳐들기를 바라며 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로 가득한 오래된 집은그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리고 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 위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 P310

파도가 밀려나가고 있다. 바닷가 부근의 물은 잔잔하고 쇳덩이 빛깔이지만, 롱웨이 록을 지나는 지점부터는 물살이 변덕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하얀 물마루마저 보인다. 작은 만에서 바닷가재 부표가 살며시 까딱까딱 움직이고, 갈매기가 마리나 부근의 선창에서 배회한다. 하늘은 아직 푸르지만 북동쪽으로는 막일어나고 있는 구름 띠와 수평선이 나란하고, 저쪽 다이아몬드섬의 소나무들은 꼭대기가 휘어져 있다.
올리브는 결국 떠나지 못했다. 진입로의 차가 다른 차들로 막혀 있어 나가려면 이리저리 차 주인들을 찾아 묻고 다니며 법석을 떨어야 하는데, 그 짓은 하기 싫다. 그래서 올리브는 눈에 띄지 않는 좋은 자리를 찾아낸다. 데크 바로 아래 구석에 있는 나무 의자, 거기 앉아 구름이 만 위로 서서히 지나가는 걸 구경할 - P311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올리브는 깊은 숨을 내쉬며 나무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실이아니기도 하니까. 불과일년전 새방의 굽도리 널에 필요한 치수를 재려고 무릎을 꿇고 자를 들고 엎드린 다음 그녀가 받아 적도록 수치를 불러주던 헨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일어서던 키 큰 헨리 됐어, 올리. 개들을 오줌 누이고 시내로 가자구." 그리고 차를 탔었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아, 올리브는얼마나 기억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기억할 수 없었던가. 시내로들어간 다음, 목재 가게에 갔다가 우유와 주스가 필요해서 들렀던 ‘숍앤세이브‘의 주차장에서 올리브는 차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두 사람의 인생은 끝이었다. 헨리는 차에서나와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고, 다시는 집으로이어지는 자갈길을 걷지 못했고, 다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그 커다란 청록색 눈으로 병원 침대에서 올리브를 멀거니 바라볼 뿐.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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