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위에 뿌연 안개가 걸려 있어 물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산책로마저도 조금 먼 곳은 보이지 않아 올리브는 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 연거푸 놀라곤 했다. 평소보다 늦게 나왔더니 사람이 더 많았다. 포장된 산책로 옆으로는 솔잎 더미가 드문드문 보였고, 키 큰 풀들의 끝과 관목 떡갈나무의 나무껍질, 산책하다앉을 수 있는 화강석 벤치가 있었다. 젊은 남자가 가벼운 안개를뚫고 올리브를 향해 뛰어왔다. 그는 손잡이가 자전거 핸들처럼생긴 삼각형 모양의 유모차를 밀면서 뛰었다. 올리브는 유모차안에 얌전히 누워 잠자는 아기를 얼핏 보았다. 저 자만심 강한베이비부머 부모들은 별의별 장비를 다 갖추었다. 크리스토퍼가 저 아기만 했을 때 올리브는 아이가 아기 침대에서 자도록 내버려두고 길 아래 사는 베티 심스를 찾아가곤 했다. - P283
너무 더운 날이어서 물안개도 후텁지근하고 끈적였다. 눈 아래로 땀이 눈물처럼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온몸에 시커멓고 지저분한 진창을 주사라도 놓은 듯, 라킨의 집에 갔던 일이 마음속에 퍼지며 가라앉았다. 이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더러운 진창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버니에게 전화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고, 이야기를 털어놓을 헨리도 없으니- 걷고 말도 하는 헨리가 없으니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바로 오늘 아침에 그를 다시 한번 뇌졸중으로 잃은것 같았다. - P284
요양원으로 운전하는 동안 보슬비가 차에, 그리고 앞에 펼쳐진 도로에 내렸다. 잿빛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여느와는 달리 속이 상했다. 크리스토퍼 때문인 것은 맞지만, 심한자책의 양 날 사이에 끼어버린 것만 같았다. 사실 한 번도 해본적은 없지만 가게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사적이고 깊은 부끄러움이 훅 올라왔다. 수치심이 지금 눈앞의 차창 와이퍼처럼 영혼을 가로질러 쉬익쉭 훑고 지나갔다. 거대하고 가혹한 검정 손가락 두 개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올리브를 질책했다. - P288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P292
하지만 루이즈는 자식들을 사랑했고, 끊임없이 자랑했다. 루이즈가 도일이 여름 캠프에서 집을 그리워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적시던 걸 올리브는 다시금 기억해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며 루이즈 라킨을 찾아간 것은 잘못이었다. 또한 가고 싶으면 가라고 헨리에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죽으리라고 생각한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이 이상하고 불가해한 세상에서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올리브는 앞으로돌아누우며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켰다. 튤립을 심을 것인지를 곧 결정해야 할 것이다.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 P293
이 집에 들어와본 적이 없는 올리브는 집이 낡았다고. 몹시 피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단지 스토브 옆의 부엌 바닥에 타일 몇개가 없어서, 또는 싱크대 상판의 가장자리가 불룩 올라와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집은 그저 대단히 지친 분위기였다. 죽어간달까. 죽어가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됐든 보는 사람도 피로해졌다. 올리브는 커다란 창문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거실을 흘끔 들여다본다. 손볼 것이 많은 집이다. 하지만, 말린의 집이다. 물론 말린이 집을 판다면, 차고 위의 방에 사는 케리도 같이 이사를 나가야 할 것이다. 안된 일이군, 두 사람의 코트를 걸어놓은 벽장문을 닫으며 올리브는 생각한다. 몇 년전 케리 먼로는 크리스토퍼에게 눈길을 준 적이 있다. 아들의 병원에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헨리마저도 아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크리스토퍼는 말했다. 그여자는 제 타입이 아니에요. 그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우습다. - P302
이 광경을 지켜보는 올리브는 기분이 묘하다. 질투심? 아니,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질투를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가갈수 없는 느낌, 그래 그런 기분이었다. 통통하고 천성이 친절한여인이 아이들과 사촌, 친구들에 둘러싸여 소파에 앉아 있다. 그런 여인은 올리브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다. 올리브는 이감정이 가져오는 낙심을 깨닫는다. 그녀는 오늘 왜 여기에 왔던가? 헨리가 에드 보니의 장례식에꼭 가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그녀는 누군가의 깊은 슬픔을 보며 자신의 어두운 마음에 한줄기 빛이 비쳐들기를 바라며 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로 가득한 오래된 집은그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리고 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 위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 P310
파도가 밀려나가고 있다. 바닷가 부근의 물은 잔잔하고 쇳덩이 빛깔이지만, 롱웨이 록을 지나는 지점부터는 물살이 변덕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하얀 물마루마저 보인다. 작은 만에서 바닷가재 부표가 살며시 까딱까딱 움직이고, 갈매기가 마리나 부근의 선창에서 배회한다. 하늘은 아직 푸르지만 북동쪽으로는 막일어나고 있는 구름 띠와 수평선이 나란하고, 저쪽 다이아몬드섬의 소나무들은 꼭대기가 휘어져 있다. 올리브는 결국 떠나지 못했다. 진입로의 차가 다른 차들로 막혀 있어 나가려면 이리저리 차 주인들을 찾아 묻고 다니며 법석을 떨어야 하는데, 그 짓은 하기 싫다. 그래서 올리브는 눈에 띄지 않는 좋은 자리를 찾아낸다. 데크 바로 아래 구석에 있는 나무 의자, 거기 앉아 구름이 만 위로 서서히 지나가는 걸 구경할 - P311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올리브는 깊은 숨을 내쉬며 나무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실이아니기도 하니까. 불과일년전 새방의 굽도리 널에 필요한 치수를 재려고 무릎을 꿇고 자를 들고 엎드린 다음 그녀가 받아 적도록 수치를 불러주던 헨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일어서던 키 큰 헨리 됐어, 올리. 개들을 오줌 누이고 시내로 가자구." 그리고 차를 탔었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아, 올리브는얼마나 기억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기억할 수 없었던가. 시내로들어간 다음, 목재 가게에 갔다가 우유와 주스가 필요해서 들렀던 ‘숍앤세이브‘의 주차장에서 올리브는 차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두 사람의 인생은 끝이었다. 헨리는 차에서나와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고, 다시는 집으로이어지는 자갈길을 걷지 못했고, 다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그 커다란 청록색 눈으로 병원 침대에서 올리브를 멀거니 바라볼 뿐.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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