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닐거나 쏘다닌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에게 더 큰의미가 있었다는 것은 그의 친구 몇몇이 각기 나름으로 그원정들에 대한 회고담을 내놓으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는 아침 식사 후에 혼자서 또는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출발하여 저녁 식사 직전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 도보 여행이 성공적이었을 때는 커다란 지도를 꺼내 새로운 지름길을 붉은잉크로 표시해 두었다. 그는 온종일 동행과 한두 마디 이상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황야를 돌아다닐 수 있었던 모양이다.  - P12

 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항상 그 배경에 있었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의 일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고 일어난 일들을 잘 기억하지도못했지만, 어떤 사람을 묘사할 때면 그는 유명 무명의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냈다ㅡ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불과 두세 마디로 정확하게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그의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일 때도 있었다. 자신에게 진실하게 비치는 느낌은 누구보다도 존중했지만, 기존의평판이나 전통적인 가치들은 예사로 뒤엎고 무시하는 특유의 버릇이 있어, 당혹스럽고 때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추상적인 상념에 빠져 있는 듯하다가 문득 깨어나 그 선명한 푸른 눈을 뜨고서 자기의견을 말할 때면, 도저히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런 버릇은- 특히 그가 점점 귀가 어두워져서 그렇게 중얼대는 의견이 남에게도 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불편한 것이 되었다. - P15

 그의 딸들도- 비록 그는 여성의 고등 교육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똑같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마땅했다. 한때 딸 하나가 담배 피우는 것은 무섭게 꾸짖었지만 그의 견해로는 여성이 담배 피우는 것은 좋은 버릇이 못 되었다 - 그녀가 화가가 되어도 좋은지는 그저 묻기만하면 되었다. 그는 딸이 자기 일을 진지하게 여기기만 한다면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주겠노라고 확답해 주었다. 그는딱히 그림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약속을 지켰다. 그런 종류의 자유가 천 개비 담배보다 낫다.
문학이라는 아마도 좀 더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오늘날도, 열다섯 난 딸이 따로 검열하지 않은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락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에 대해 의심하는 부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허락했다. 몇몇 사실에 대해, 그는 아주 간략하게, 아주수줍게 언급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읽고 싶은 것을 읽으라고 말해 주었고,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라하고무가치한〉, 하지만 분명 다양했던 그의 많은 책들을 허락받지 않고도 다 읽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책들을 좋아하니까읽는다는 것, 실제로 좋아하지 않는 책들을 좋아하는 척하지 - P19

말아야 한다는 것 - 그것이 독서에 관한 그의 유일한 지침이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능한 한 적은 말로, 가능한 한 명료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 글쓰기에 관한 그의 유일한 지침이었듯이 말이다. 그밖의 다른 것은 스스로 배워야 할 터였다. 하지만 비록 그가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거나지식을 과시한 적은 결코 없었다 해도, 그것이 뛰어난 학식과 폭넓은 경험을 지닌 사람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정말이지 철없는 아이일 것이다. 언젠가 본드가의 양복점 주인이 자기 가게 앞을 지나는 아버지를 가리켜 <좋은 옷을 좋은 줄도 모르고 입고 가는 신사분>이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 P20

실제로 거리가 단점이기는 했다. 우리는 여름에만 그곳에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골 생활은 1년에두 달, 길어야 석 달로 제한되었다. 다른 달들은 내내 런던에서 지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누렸던어떤 것도 콘월에서 보낸 여름만큼 대단하고 중요하지는않았다. 런던에서 몇 달씩 지내고 난 뒤에 콘월로 떠나게 되니 시골 생활이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우리 집과 우리정원이 있고, 만과 바다와 황야가 있고, 클로지, 헤일스타운늪지, 카비스 베이, 릴런트, 트리베일, 제너, 거나즈 헤드 같 - P24

은 곳들이 있고, 도착한 첫날 밤 노란 차양 뒤에서 파도가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모래를 파고,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바위틈을 뒤져 빨갛고 노란 말미잘이 촉수를 하늘거리는 것을, 아니면 젤리처럼 바위에 들러붙은 것을 보고, 물웅덩이에서 파닥거리는 작은 물고기를 발견하기도 하고, 별보배고둥을 줍기도 하고, 식당에서 문법책을 대충 훑으며만의 불빛들이 바뀌는 것이나 에스칼로니아 잎이 회색이나밝은 녹색인 것을 바라보고, 마을로 내려가 1페니짜리 압정한 통이나 주머니칼을 사고, 라 씨 - 하인들의 말에 따르면, 찰랑이는 곱슬머리 가발을 쓴 부인과 <광고를 통해 결혼했다는 ㅡ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가파르고 좁은 골목에서 나는 온갖 생선 냄새를 맡고, 생선 뼈를 물고 다니는무수한 고양이들과 집 바깥에 돋운 계단 위에서 구정물을수채로 쏟아 버리는 여자들을 보고, 날마다 노란 막이 덮인콘월 크림을 먹고, 블랙베리에 흑설탕을 듬뿍 뿌려 먹고・・・・・・ 이런 기억들로 몇 페이지라도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세인트아이브스에서 보내는 여름이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인생 서막이 되게 했다. - P25

깃발들이 펄럭이고, 총성이 울리고, 배들이 질주하고, 수영 선수들이 물에 뛰어들거나 갑판 위로 끌어 올려지는 등아주 신나는 광경이었다. 세인트아이브스 사람들이 모여서구경하는 곳은 테라스 끝의 말라코프라는 이름의 팔각형 뜰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크리미아 전쟁 때 만들어졌을 마을에서 유일하게 장식적인 장소였다. 세인트아이브스에는오락 시설이 딸린 부두나 산책로가 없고 오로지 이 자갈 깔린 팔각형 뜰뿐이었고, 거기 있는 몇 개의 돌 벤치에는 특유의 푸른 세타를 입은 은퇴한 어부들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잡담을 하곤 했다. 레가타 날은 내 기억 속에 그 머나먼 음악소리와 작은 깃발들이 달린 줄과 돛을 올린 배들, 그리고 모래 위에 점점이 흩어진 사람들과 함께, 마치 한 폭의 프랑스 그림처럼 남아 있다. - P33

한 번은 우리가 성대와 가자미를 연거푸 낚아 올리며 한참이나 열중해 있자,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다음에 너희가낚시하러 올 때는 난 오지 말아야겠다. 물고기들이 잡히는걸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너는 원하면 와도 된다.> 완벽한교훈이었다. 무엇을 비난하거나 금지하는 대신 단지 자신의느낌을 말하고, 그 점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게 한 것이었다. 미끼를 문 물고기가 낚싯줄을 휙 잡아채는느낌은 내가 그때까지 알던 가장 짜릿한 전율을 주었지만,
아버지의 말에 그 매력은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아무 불평없이 낚시를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열정의 기억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그런 활동의 즐거움을 떠올려 볼수있다. 사람이 모든 경험을 충분히 해볼 수는 없을진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그려 보는 무엇을 키울 수 있는 무한히소중한 씨앗 중 하나이다. 종종 우리는 그런 씨앗으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다.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일어날 수도 있었을 일의 씨앗 말이다. 나는 그렇듯 <낚시>를 다른 여러 일시적으로 스쳐 간 일들, 예컨대 런던 거리를 거닐 때 지하층에홀긋 던지는 일별 같은 것들과 함께 분류해 두고 있다. - P39

세인트아이브스 서쪽 해안에 있는 트리베일이라는 내포(內浦)까지 도보 여행을 갔던 길에, 우리 일행이 집을 향해출발하기도 전에 가을 저녁이 저물기 시작했다. 어스름 속에서도 풍경은 너무나 선명하여 다들 말없이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바다를 향해 장엄하게 줄지은 거대한 절벽들이밤과 대서양의 파도를 맞이하며 서 있었는데, 마치 태곳적명령에 다시 한번 순종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의연하고 고고한 모습이었다. 이따금 멀리서 등대의 불빛이 안개를 뚫고황금빛살을 던지며 문득문득 바위들의 거친 형태를 드러내곤 했다. 그 광경만으로도 아직 6~7마일을 더 걸어가기에는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P43

창밖에서 짓누르는 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잠들지 못하고 밖에 나와 어둠 속에 팔이라도 뻗어 보는 것이리라. 불빛은 그 주위에 밀어닥치는 밤의 무한한 파도에비하면 얼마나 미약한 것일까! 바다의 배도 외롭겠지만, 이황량한 땅에 닻을 내리고 밤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물살에 홀로 노출된 이 작은 마을은 훨씬 더 외로워 보였다.
그런데도, 이 낯선 분위기에 일단 익숙해지자, 그 안에는크나큰 평화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마치 실체의 세계에서 유령과 정령들만이 나와 돌아다니는 듯했다. 언덕이 있던 자리에는 구름이 떠돌았고, 집들 대신 불꽃들만이 남았다. 눈은현실의 거친 외관에 긁힘이 없이 밤의 심연에 맑게 씻겨 기 - P46

운을 되찾는 것만 같았다. 대지는 그 무한한 세부들과 함께모호한 공간으로 용해되었다. 그처럼 감각이 새로워지고 민감해진 자들에게는, 집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불빛들은 너무 강하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막 날아오르다 말고 붙잡혀 새장에 넣어진 새들과도 같았다. - P47

이제 나의 아버지를 묘사해 보겠다. 네사와 내가 그 이상한성격의 작렬에 아무 보호막 없이 노출된 것은 1897년 스텔라가 죽은 후 1904년 그 자신이 죽기까지의 7년 동안이었다. 스텔라가 죽었을 때 네사는 갓 열여덟 살, 나는 열다섯 살 반이었다. 내가 왜 <노출되었다고 하는지, 그리고 그를 왜 <이상한 성격>이라고 하는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어린마음과 몸의 닳아버린 껍질 속에 다시 들어가 살아야만 할 것이다. 나는 이제 당시의 내 나이보다는 그의 나이에 훨씬 더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때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하는지? 아니면 그 엄청나게 중요한 관계의 각을 뭉개 버려, 그의 관점에서도 나 자신의 관점에서도 묘사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인지? - P55

나는 이제 모퉁이를 돌아 그를 보고 있다. 정면으로 보고 있지않다. 더구나, 『등대로』에서 어머니에 대해 글을 씀으로써 그추억의 힘을 상당히 지워 버린 것처럼, 거기서 아버지의 추억도 많이 지워 버렸다. 하지만 그도 여러 해 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에 대해 쓰기까지는, 입술이 절로 달싹이면서 그와 논쟁을 벌이고, 그에게 화를 내고, 그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곤 했다.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내 속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었던지, 그중 어떤 것들은 여전히 말할 만하다. 가령, 네사가매주 수요일에 검사받던 가계부 얘기를 꺼낼 때면, 나는 여전히 그 말 못하고 쌓인 해묵은 분노를 온몸으로 느낀다.
- P56

외그의 책들을 통해 나는 작가로서의 아버지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네사와 내가 집안 살림을 물려받았을 때, 나는 사교적인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작가로서의 아버지는 그를 책에서만 만나게 된 지금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집요했다. 그 무렵 나를 지배했던 것은 폭군적인 아버지 -까다롭고, 격렬하고, 연극적이고, 노골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연민에 빠진, 귀가 먹은, 애절한 - 애증이 교차할수밖에 없는 아버지였다.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에 갇혀 있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만일 열다섯 살의 내가 과민하고겁 많은 어린 원숭이로, 노상 침을 뱉거나 견과를 깨뜨려먹고, 껍질을 사방에 던지고, 잔뜩 찌푸린 채 꿍얼거리다 어두운 구석으로 훌쩍 몸을 날려, 우리 이쪽저쪽으로 그네를 - P69

타며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고 하자. 그는 우리 안을 어슬렁대는 시무룩하고 위험한 사자였다. 뭔가 기분이 언짢고 마음이 상해 화가 잔뜩 나서, 갑자기 사나워졌다가는 또 아주겸손해지고, 그러다 또 위엄을 부린다. 그러고는 먼지투성이에파리가 들끓는 우리 한구석에 드러눕는 것이다. 
나는 1897년부터 1904년까지 그 불행했던 7년 앞에서 음츠러든다. 그 당시 우리의 삶만큼 고통에 시달리고 초조하고<비존재non-being〉로 무감각해졌던 삶도 별로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저 두 차례의 불필요한 타격‘ 때문이었다. 그 시절을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을 두 사람을 잔인하고 무의미하게 죽여 버린 무차별적이고 생각 없는 도리깨질 때문이었다.  - P70

그에게 어떤 사상을, 가령 밀이나 벤담이나 홉스의 사상을 분석해 보라고 하면, 그는 (메이나드ㅅ가 내게 말해 준 대로) 예리함과명석함과 공정성의 본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인물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그는 극히 조야하고 유치하고인습적이라 그의 인물 묘사는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리는 그림만도 못할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려면, 케임브리지의 편파적인 교육이 내는 절름발이 효과를 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의 작가라는 직업과 강도 높은 두뇌 노동의 폐해도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결코 육체노동을 한 적이없었다. 그 두 가지 영향이 음악이나 미술에는 소질이 없고청교도적으로 키워진 바탕에 어떻게 작용했을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과 그것이 어떤 감수성을 강화하고 다른 어떤 감수성을 위축시켰을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 P76

그래서 그런 격렬한 분노의표출로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발작에는무엇인가 맹목적이고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데가 있었다. 로저 프라이" 는 문명이란 자각을 의미한다고 말한 적이 있거니와, 아버지는 그처럼 자각이 결여되었으니 깨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아무도 그를 깨우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괴로워했고, 자기감옥의 벽들을 통해 이따금 깨달음의 순간들을 얻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즉, 자기 본위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을 그토록 잔인하게 해치지 못하며, 어떤 것도 어쩔 수 없이 거기 맞닥뜨린 사람들을 그토록 심하게 상처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 무렵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즉, 아버지와 우리의 나이차 때문에 가로놓여 있던 심연 말이다. 하이드 파크게이트의 응접실에는 서로 다른 두 시대, 즉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 P77

우리 사이에는 완충 역할을 할한세40대가 있어야만 했다. 그가 격노할 때 우리 눈에 왠지 우스꽝스럽게 비쳤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는눈으로 그를 보았다. 우리가 본 것은 이제는 열여섯이나 열여덟 살 난 소년 소녀에게도 너무 명백하여 설명할 필요조차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철저히과거의 권력 아래 놓여 있었다. 버네사와 나는 둘 다 타고난모험가요 혁명가였음에도, 우리보다 50년은 더 늙은 사회의지배하에서 살았다. 우리의 투쟁을 그토록 힘들고 격렬하게만든 것은 이런 기묘한 사실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사회는여전히 빅토리아 사회였다. 아버지 자신이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었다. 조지와 제럴드는 빅토리아 사람들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두 가지 싸움을 치러야만 했다. 개인적인 싸움과 동시에 사회적인 싸움을 말하자면, 우리는 1910년대에, 그들은 1860년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 P78

음악은 아직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을 흔히 듣게되는데, 그 말을 가장 잘 입증해 주는 것은 음악 비평의 애매한 상태이다. 음악 비평의 전통은 아주 얕으며, 음악 그 자체가 워낙 생동하는 예술이라 그것을 다루고자 하는 이들을 압도해 버리는 것만 같다. 문학 비평가는 놀랄 일이 별로 없으니, 거의 모든 문학 형식이 그 이전 것과 비교 가능하고 모든성취를 전부터의 기준에 비추어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에서 슈트라우스나 드뷔시‘가 하고 있는 일을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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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포


누군가 또는 뭔가의 1백 주년을 기념하는 사람은 자신이사라져 가는 유령을 평가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 다가오는 해체를 예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로빈슨크루소』의 경우에는 그런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1919년 4월 25일에 『로빈슨 크루소』가 2백 주년을 맞이한다는 사실은 아직도 그 작품을읽는가 또 계속 읽을 것인가 하는 통상적인 논의가 아니라,
오히려 영구 불멸의 『로빈슨크루소』가 나온 지 그렇게 짧은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데 대한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니말이다. 이 책은 한 개인의 노력의 산물이라기보다 종족 전 - P31

체가 만들어 낸 익명의 소산 중 하나로 보인다. 그 2백 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스톤헨지의 세월을 기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우리의 이런 반응에는 아마 다들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읽어 주는 로빈슨크루소」를 들었고, 그래서디포‘나 그의 이야기에 대해 마치 그리스인들이 호메로스에대해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 든다는 사실도 한몫했을것이다. 디포라는 사람이 있었다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으며,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가 손에 펜을 든 어떤 사람의 작품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언짢아지든가 아니면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인상이야말로 가장깊이 새겨져 가장 오래 남는 것이니 말이다. 대니얼 디포라는 이름은 로빈슨 크루소』의 표지에 나올 자격이 영 없어보인다. 그러니 이 책의 2백 주년을 기린다는 것은 마치스톤헨지가 아직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 그것이 여전히건재함을 불필요하게 상기시키는 일이 될 터이다. - P32

 우리는 디포의 전기‘를 쓴 라이트 씨가 이런 소설들은<응접실 테이블용 작품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에 동의해도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용한 가구를 취향의 최종 심판자로 삼는 데 동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작품들이 겉보기의조야함이나 『로빈슨크루소』의 보편적 인기로 인해 마땅히누려야 할 명성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통탄해 마땅하다. 제대로 된 기념비를 세우려 한다면 적어도 『플랜더스』와 『나의 이름은 디포의 이름만큼이나 깊이 새겨야한다. 이것들은 이론의 여지없이 위대하다고 부를 수 있는몇 안 되는 영국 소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같은 작가의 더유명한 작품의 2백 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 작품들의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 P33

디포는 소설가가 되었을 때 이미 나이가 꽤 들어 :슨‘이나 필딩‘보다 여러해 연장자였으며, 소설이라는 것이모양을 갖추어 출범시킨 최초의 작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구적 역할을 강조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그가 소설을 쓴 최초의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서 소설이라는예술에 대한 특정한 개념을 가지고 소설 쓰기에 임했다는 사실만 말해 두면 될 것이다. 즉, 소설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덕이 되는 교훈을 말함으로써 그 존재를 정당화해야만 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분명 수치스러운 범죄〉라고 그는셨다. <그것은 마음속에 큰 구멍을 내는 일종의 거짓말이다. 그 구멍 안으로 조금씩 거짓말하는 버릇이 들어오는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작품의 서문과 본문에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결코 지어낸 것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에근거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목적은 악인을 회심시키고순진한 자들에게 경고하려는 지극히 고상한 소망에 있음을굳이 강조하고 있다.  - P34

디포가 따분하다고 불평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하찮은 것들에 골몰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는 실로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그리는 위대한 작가에속한다. 그의 작품은 인간 본성의 가장 매혹적인 면이 아니라 가장 지속적인 면에 대한 앎에 기초해 있다. 헝거퍼드 브리지"에서 바라보는 런던, 잿빛에, 심각하고, 육중하고, 오가는 차량과 장사하는 이들의 가라앉은 소음으로 가득한, 배들의 돛과 도시의 탑과 놈들만 아니라면 산문적이었을 풍경 - P43

이 그를 떠올리게 한다. 길모퉁이에서 제비꽃 다발을 파는누더기 걸친 소녀들, 다리의 아치 아래 성냥이니 신발끈이니하는 것들을 참을성 있게 늘어놓는 풍상에 찌든 노파들은 그의 책에서 빠져나온 인물들 같다. 그는 크랩과 기싱의 유파에 속하지만, 그저 엄격한 배움의 장소에 함께 앉은 동학이 아니라 그 유파의 창시자이며 스승이다. - P44

소설 다시 읽기


우선, 지루하다. 우리 국민의 독서 습관은 연극에서 시작된 것인데, 연극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섯 시간 이상 계속무대 앞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 왔다.
『해리 리치먼드』를 다섯 시간 동안 내리 읽어 봤자 빙산의일각일 것이다. 여러 날을 더 읽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전체 줄거리도 희미해지고 책은 맛이 가시며 결국 자책만이남아 급기야는 작가를 비난하게 된다. 그보다 더 짜증스럽고힘 빠지는 일도 없다. 그것이 극복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기질로나 전통으로나 시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시야말로 문학의윗길이라는 믿음이 은연중에 퍼져 있다. 만일 한 시간쯤 책을 읽을 여유가 생긴다면, 매콜리‘보다는 키츠‘를 읽는 편이 낫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물며 소설은 장황하고 그리 유려하지도 못하며 케케묵은 가정사를 다루기 일쑤이다. - P55

소설이 그의 직업이다. 그것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적합한 형식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그것은 아름다움을, 전에 지니지 못했던 섬세하고 고귀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것은 자신을 해방하고 비슷한 무리로부터 구분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유물에 걸리적거리지 않고, 자기가 가장잘 할 수 있는 말을 골라 말할 것이다. 플로베르는 늙은 하녀와 박제한 앵무새를 주제로 삼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응접실 테이블 주위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이다. 나이팅게일과 장미꽃은 추방되었다. 아니, 적어도 나이팅게일은 교통 소음을 배경으로 해서는 전과 다른 소리를 내며, 장미꽃도 아크등 불빛 아래서는 그다지 붉지 않다. 오래된 재료들의 새로운 결합이 있으며, 소설은 그 약점들을 위해서가아니라 그 장점들을 위해 쓰일 때 영원한 이야기의 참신한면모를 강화한다. - P67

러시아인의 관점


체호프를 읽을 때면 우리는 <영혼>이라는 말을 되뇌게 된다. <영혼>이라는 말이 그의 책 곳곳을 누비고 있다. 늙은 주정뱅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쓴다. <너는 군대에서 아주 높아져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됐지만, 네게는진짜 영혼이 없어. (……) 네 영혼에는 아무 힘도 없어.> 정말이지 러시아 소설에서 주된 등장인물은 영혼이다. 체호프에게 있어 영혼은 섬세하고 미묘하며 무수한 기질과 장애에달려 있는 반면,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영혼은 한층 깊이 있고풍부한 것이 되며 격심한 질병과 신열을 불러일으키지만 여전히 주된 관심사이다. 아마도 영국 독자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나 『악령』을 재차 읽을 때 그토록 노력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P79

심지어 반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거기에는 유머 감각이라고는 없으며 희극적인 구석도 없다. 영혼이란 형태가 없다. 지성과도 별로 관계가 없다. 그것은 혼란스럽고산만하고 소란스럽고 논리의 통제나 시의 규율에 전혀 굴복하지 못하는 성싶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은 절절 끓는 소용돌이,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 맹렬하게 맴돌며 우리를 끌어들이는 용오름이다. 그것들은 순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영혼이라는 재료로만 되어 있다. 우리는 원치 않게 끌려들어휘돌아가며 눈이 멀고 숨이 막히고 그러면서도 현기증 나는희열로 충만해진다.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보다 더 흥분된 독서는 없다. 문을 열면 러시아 장군들과 러시아 장군들의 가정 교사들과 그들의 의붓딸들과 사촌들, 그밖에 잡다한 사람들로 가득한 방에 들어서게 된다. 이들 모두가 목청 높여 제각기 극히 사적인 일들에 대해 떠들고 있다. 대관절 우리는 어디 있는 것일까?  - P80

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영혼이라는 저 당혹스러운 액체, 뿌옇고 거품 나는 소중한 것이 담긴 그릇일 뿐이다. 영혼은 어떤 장벽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그것은 넘쳐흐르며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섞인다. 포도주 한 병 값을 치르지 못한 은행원의 이야기가 어느 곁에 그의 장인과 장인이 형편없이 다루는다섯 명의 정부들의 삶 속으로, 우편배달부의 삶과 날품팔이여자의 삶 속으로, 그리고 같은 구역에 사는 귀족 여성들의삶 속으로 퍼져 나간다. 도스토옙스키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지쳐도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다. 우리를 덮치는 이 뜨겁고 펄펄끓어오르는 것, 마구 뒤섞이고 경이롭고 끔찍하고 숨 막히는것 - 이것이 인간 영혼이다. - P83

이제 남은 이는 모든 소설가 중에 가장 위대한 소설가이니, 『전쟁과 평화』의 작가를 달리 어떤 말로 부를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톨스토이 역시 이질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외국인으로 느껴지는가? 적어도 우리가 그의 제자가 되어우리 자신의 기준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우리를 의심과 당혹감으로 물러서게 할 어떤 기이한 면이 그에게 있는가? 그의 첫마디에서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보는 것을 보며,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즉 안에서 밖으로 나가기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우편배달부가 아침 8시에 문을 두드리고, 사람들은 저녁 - P83

영혼이 도스토옙스키를 지배하듯이, 톨스토이를 지배하는 것은 삶 그 자체이다. 모든 찬란하고 빛나는 꽃잎의 중심에는항상 이 <왜 사는가>라는 전갈이 숨어 있다. 책의 중심에서는 항상 올레닌, 피에르, 레빈‘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모든경험을 자신 안에 거둬들이고 세상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려보며, 그것을 즐기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의 욕망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산산조각 내는것은 사제가 아니라 그 욕망들을 아는 사람, 자신도 그것들에 탐닉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그것들에 조소할 때,
세상은 발밑의 먼지요 재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의 즐거움에는 두려움이 섞여 든다. 세 사람의 위대한 러시아 작가 중 가장 우리를 매혹하면서도 반발하게 하는 것은 톨스토이이다.
하지만 마음은 태어난 장소의 영향을 받는 법이니, 러시아 문학처럼 이질적인 문학과 마주치게 되면 한껏 날개 쳐진실에서 멀어지려 할 것이 분명하다. - P86

미국 소설


외국 문학으로의 소풍은 해외여행도 많이 비슷하다. 주민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광들이 우리에게는 놀랍게 보인다. 그 언어를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나면서부터 그말을 써온 사람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소리는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는마음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찾아다니며 그것이야말로 프랑스나 미국 정신의 본질이라고 선언하고는 앞뒤 없는 맹신 위에 이론의 구조물을 쌓아올린다. 나면서부터 프랑스인이나 미국인인 사람들이 그런이론을 들으면 재미있어하거나 짜증스러워하거나 아니면잠시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 P97

테크닉, 자기 재료를 형성하고 통제하는 힘을 결여하고있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견지에서 『배빗』은 금세기에 영어로쓰인 어떤 소설 못지않다. 그러므로 관광객은 양단 간에 선
‘택해야 한다. 즉, 영국 작가와 미국 작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라고는 없으며 그들의 경험은 워낙 비슷해서 같은 형식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과, 루이스 씨는 자신을 영국 문학에 맞추어 형성했으므로 ㅡH. G. 웰스가 그 명백한 스승일것이다 ㅡ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미국적 특성들을 희생시켰다는 주장 말이다. 하지만 만일 작가들이 녹색인지 파랑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면, 독서의 기술은 훨씬 더 단순하고 덜 모험적이 될 것이다. 루이스 씨를 연구하면 할수록 드는 생각은 표면적인 판단은 기만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외적인 침착성은 내부의 갈등하는 요소들을 거의 통제하지 못하며, 색깔들은 희미해져 버린다. - P105

 우리는 프랑스나 영국의 문학이 더 단순하다고, 모든 현대 문학이 이 새로운 미국 문학보다 더 단순하게 요약되고 이해하기 쉽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뿌리에는 불화가 있으니, 미국인의 자연스러운 성향은 처음부터 엇나갔던 것이다. 민감할수록 영문학을 읽어야 하는데, 영문학을 읽을수록그는 자기 입으로 말하는 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자기 것이아닌 경험을 표현하고 자기가 알지 못했던 문명을 비추는 그거대한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수수께끼와 당혹감에 더 민감해진다. 굴복이냐 저항이냐의 선택을 해야 한다. 더 민감할수록, 아니 적어도 더 세련되었을수록, 헨리 제임스 같은 이들, 허게셰이머 같은 이들, 이디스 워튼 같은 이들은 영국의편을 들어 영국 문화를, 전통적인 영국 예법을 과장함으로써, 그리고 그 사회적 차이들을 너무 심하게 혹은 엉뚱하게강조함으로써 벌금을 치른다. - P112

 책을 덮고 영국의 들판을내다보노라면, 귓전에 새된 소리가 들려온다. 3백 년 전에그 부모가 바위투성이 해안에 버린, 그래서 자신의 노력만으로 살아남은 아이의 첫 정사, 첫웃음의소리이다. 그는 다소생채기가 났지만 자존심이 강하며 따라서 소심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그는 이제 성년의 문턱에 서 있다. - P116

소로


백년 전인 1817년 7월 12일,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연필 장수의 아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태어났다. 전기 작가들은 그의 명성보다는 그의 인생관에 대한 공감 때문에 매료되어 호의적인 전기를 써주었지만, 그의 책들에서 발견할수 없는 것은 그다지 말해 줄 수 없었다. 그의 삶에는 이렇다할 사건이 없었다. 그 자신이 말하듯 <그냥 집에 있는 것이타고난 재주였다. 그의 어머니는 동작이 재고 달변이었으며 혼자 쏘다니기를 워낙 좋아해서 자식 중 하나는 하마터면들판에서 세상에 태어날 뻔했다고 한다. 반면 아버지는 <작고 조용하고 우직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최고의 연필을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의 비결은 빵은 흑연과 백토와 - P117

물을 섞은 것을 밀대로 밀어 납작하게 만든 다음 가늘고 길게 잘라서 태우는 데 있었다. 하여간 그는 근면 절약하고 또주위의 도움도 좀 받아서 아들을 하버드에 보낼 수 있었다.
소로 자신은 그런 값비싼 기회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가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것은 하버드에서이다. 한우가 기억하는 그의 소년 시절모습에서 우리는 나중에 성인이 된 그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 P118

그는 손재주가뛰어나서, 연중 40일 정도만 일해도 1년의 나머지 기간을 놀며 지낼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옛 인류의 후예라해야 할지, 아니면 장차 도래할 인류의 첫 사람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에게는 강인함과 극기심, 인디언과도 같이때 묻지 않은 감각과 동시에, 자의식과 까다로운 불만과 극히 현대적인 감수성이 있었다. 때로 그는 인간에게 가능한이상의 것을 지각하는 능력 때문에 여느 인간 이상의 능력을지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박애주의자도 인간에게 그보다 더 큰 기대를 걸거나 더 고결한 소임을 고취하지 않았다. 가장 고상한 정열과 봉사의 이상을 지닌 이들이 가장 기꺼이 주는 능력을 지닌 법이다. 삶은 그들에게 가진 것을 다내 놓으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낭비하기보다 아껴 두라고하지만 말이다. 소로는 아무리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해도,
여전히 그 이상의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 터이다. 어떤의미로 그는 언제까지나 만족하지 못했을 터이니, 그것이 그가 더 젊은 세대의 벗이 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는 앞날이 아직 창창한 나이에 죽었으며, 오래 병석에 - P130

서 갇혀 지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연으로부터 침묵과 인내를 배운 터였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거의말한 적이 없다. 자연으로부터 그는 만족하되, 생각없이 이기적으로 만족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지혜를건강하게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그가 말하듯, 자연에는 슬픔이라는 것이 없다. <나는 가능한 한 삶을 즐기고 있으며,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말했다. 마침내 고통 없이 죽음을 맞아들였을 때, 그의 마지막 말은 <큰사슴>과 <인디언>이었다. - P131

조지 기싱


마침내 중년에 이르러 그가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을 때, 한 친구가 죽으면서 연 3 백 파운드의 연금을 남겨주었다. 그리하여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는 원하는 글올쓸 수 있게 되었고 이 사색의 기록과 그에게 가장 소중하게 된 책들을 마지막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이 글의 매력은 건실하고 담담한 데 있다. 마치 날이 저문 후 더는 소망하거나 두려워할 장래의 빛이 없을 때 비쳐드는 잿빛 미광과도같다. 그런데도 그 최종적인 인상은 결코 울적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아 그토록 외적인 사치라고는 없는 삶이 그 자체로 충분할 수 있는 선물들을 발견한다는 것이 찬사를 받을만하다. 그는 드물게 빼어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머리는 우수한 편이었고 책을 좋아했지만, 오로지 그 두 가지재능만으로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재능으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 사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적어도 그가 독립적이고 무해한 인간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그처럼 불굴의 삶에 고작 이런 형용사들을 쓴다는 것은 다소 빈약하게보이기도 하나, 그런 형용사들에는 흠결 없는 진실함의 매력이 있다. 헨리 라이크로프트는 모든 감정, 모든 생각, 모든책을 꾸준히 깎아 내 고갱이만 남겨 놓았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은 진실 아닌 것을 느끼거나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는 듯 - P135

이 말이다. 그러고서 남은 것은 강하고 변함없는 열기를 지닌 순수한 체질이니,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빛나게하여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든다. 그런 재능조차도 그가 필요로 하는 오죽잖은 것들을 갖게 해주기에 충분치 않았다는것은 가혹한 일이다. 그는 온기와 빛을 얻기 위해 가진 책을 팔아야 했고, 시골에 가는 즐거움도 없이 지내야 했다. 이런 희생은 다른 많은 희생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다시금 그는 자신의두뇌를 팔아야 했으니, 이중적인 의미에서였다. 만일 그가 자신의 두뇌를 제대로 사용할 방법이 있었더라면 그 가치가 줄어들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모든 깎아 냄은 의심할 바 없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으니, 마침내 행복할 기회가 왔을 때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마저 현저히 약해져 있었다. 젊은 날의 고된 투쟁, 그나마 독서와 산책에서 작은 기쁨이나마 얻기 위한 투쟁으로 근육을 혹사한 나머지, 그는 말년에자신을 둘러싸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보물들을 제대로 붙잡을수 없었다. 마침내 봄에, 아직 그것을 맛볼 시간이 있을 때, 그가 느끼는 기쁨은 그와 함께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으로 떨린다. 그는 자신에게 <이 신성한 평정의 시간에 대해 무엇인가 재난으로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아닌지> 자문한다.‘
- P136

이처럼 풍부케 하는 과정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항상낯설고 새로운 섬들이 어딘가 먼바다에 떠다니고 있어서 탐험과 보물찾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는 <고대 소아시아지리>가 있고, 저기에는 이집트가 있다. 모든 역사가 심연으로부터 그림들을 불러냈다가 도로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한다. 하지만 아무러면 어떠랴. <아마도 내가 평생 고치지 못할 결점은 나로 하여금 지식을 찾게 하는 마음의 습성일 것이다. > 마지막에 가서 그는 <여러 해를 더 살고 싶다고 말한다." 다가올 해들이 그에게 새로운 것들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해서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수동적인 육신과 온세상을 넘나드는정신, 마침내 돌아와 그가 택한 그 한구석에 정착하는 정신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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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내린다는 건 틀린 표현이다.
들이붓고 있다.
천둥의 위력은 대단하다.
아직 ‘버지니아 울프‘에 빠져있지만 좀 가벼운 책을 읽고 싶었다.
비 탓이다.
그런데
역시 가볍지 않다.

여행을 왜 즐기지 않느냐면,

어렸을 때 아팠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때까지 소아 뇌전증을 앓았다. 부모님은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를 갔을 때 내가 발작을 일으킬까 봐 걱정하시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알려지지 않길 바라셨던 듯한데, 이렇게 두 번째 챕터에서 시원하게말해버린다. 문학 출판계에 들어와 가장 좋았던 건 사람들이 아팠던이야기, 아픈 이야기를 무척 아름다운 방식으로 마구마구 해버린다는 점이었다. 첫 회사에서 한 시인의 인터뷰 자리에 갔던 적이 있는데 나와 같은 소아 뇌전증을 앓으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셔서 듣고 있다가 놀라움과 해방감을 느꼈다. 말해도 되는구나. 왜 말하면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약한 부분을 햇볕 아래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전 연령대에서 천 명에 네다섯 명은 뇌전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전기 신호가 다르게 달린다는 - P13

이유로 맞닥뜨려야 하는 위험과 오해는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혹시 같은 병을 앓았거나 앓는 분이 이 책을 읽는다면지지하는 마음을 보내고 싶다.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것은 내가 쓰는글들이 다소 엉뚱하고 기괴하다 보니 혹 오해를 더할까 하는 걱정때문이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쓰러지는 발작이 가장 위험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나의 경우 잠들었을 때 부분 발작을 일으켰다. 숨을 쉴 수 없어서 깼다. 마치 거인이 내 목을 밟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험한 시점에 다시 호흡이 돌아왔다. 오류가 난 컴퓨터를 억지로 껐다 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때로 얼굴 일부나 한쪽 팔이 마비되기도 했다. 누워 있을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상의 가능성이 적었지만, 늦은 밤 혼자 겪으며 내면이 천천히 조각되었다. 치료를 위해 계절마다 대학병원의 층층을 엄마 손을 잡고 오락가락했다. 피프티 피플』을 쓴 것은 친지 중에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이가 많아 인터뷰 대상자를 소개받기 쉬워서였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뇌파검사를 위해 머리카락 속에 풀을 잔뜩 바르면 프랑켄슈타인」에나올 만한 헤어스타일이 되었고, MRI 기계 속은 몸이 굳도록 추웠다. 그런 유년의 기억들이 내 안에 남아 있어서 병원 이야기를 쓰게된 것 같다. 혼자 느끼는 외로움도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도 - P14

극대화되는 공간을 소설 안에 세워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즐기지 않았다. 낯선 상황에서 피곤하면 발작이일어나곤 했으므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했다. 치료를받고 성장하며 발작은 사라졌고 다행히 아직 재발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발작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뉴스에 그렇게 사망한 이의 사례가 보도되면 먼 나라의 모르는 사람인데도 슬퍼진다.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의 배우 캐머런 보이스가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뇌전증으로 인한수면 중 발작으로 사망했다. 할리우드의 배우라서 알려진 것이지, 비슷한 죽음은 지구 곳곳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현대사회에서도 모두가 평균수명을 누릴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똑바로 마주 본 사람들이 인생에서중요한 선택을 더 잘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에 ‘만약 내가 4년 후에 죽는다면 후회할까? 8년 뒤라면?‘
하고 가정해보는 것만으로도 한결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아팠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미래완료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꿈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70대에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며 50권까지쓰는 것이지만, 충분한 수명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요절한 사람이아니라 열한 살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지 않고 있는 힘껏 살았던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뵐 때마다 무병장수를 빌어주시는 독자분 - P15

들께 부응하기 위해 건강검진을 열심히 받고 있긴 하다.
어쨌든, 발작을 빼도 딱히 건강한 젊음이었던 적은 없다. 박카스광고나 국토대장정 포스터에 좀처럼 이입을 못 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의학의 혜택 속에 살아왔다. 전근대에 태어나지 않아 행운이었다고 안도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여행에 대한 욕망이 약했다. 여행은건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고 일상의 루틴을 유지하는선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나머지 여행까지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큰 결심을 하고 여행을 갈 때는 바탕화면에 유서에 가까운 지시 사항을 남기고, 담당 편집자님께 그때까지 쓴 원고를 예약 메일로 전송해두기도 했다. 매번 살아 돌아와서 잘 취소했지만………..

생각해보면 살아 있는 상태가 너무 신기하지 않은지? 꼭 개인적 얘기, 사람들 얘기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렇다. 지구가 초속30킬로미터로 빙글뱅글 날아가고 있는데 그 위에서 온갖 동식물이 38억 년 동안 생겨났다 멸종했다 하며 보글보글 지내왔다는 것이……. 우주는 죽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어떻게 다들 살아 있지? 거의 매일 놀란다. 심장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뛰었다니? 신경을 쓰지 않는데 호흡이 계속된다니? 산책만 나가도 흥미로운 발견을 하고 화분에 새잎이 나면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다른 요인들도 있지만 환경주의자가 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아팠던 - P16

청소년이 쉽게 경이로워하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경이의 스위치가 반발력 없이 딸깍딸깍 눌리고 말아서, 다른 아팠던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얼마나 비슷한 성향일지 궁금해진다. 나의 노래 부르며 행진하는 스머프 같은 성격이 (특히 동료 작가들에게) 좀 부담스럽다는 평을 들을 때도 있는데, 나름의 맥락이 있다. 어둡고 죽어 있는 우주에서 기적 같은 지구에 산다는 것이 신기해, 냉소와 절망에 빠졌다가도 빨리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개념의 여행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여행을좋아하는 것에 가까웠다. 잘 쓰인 여행 책, 화질 좋은 여행 프로그램,
친구들이 다녀와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보여주는 사진들을 즐기며충분히 만족해버리는 편이어서 스스로 여행을 떠나는 편이 아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다면 말이다. - P17

물론 여행 초기의 뉴욕은 좀 위압적이었다. 일단 그 여행을 위해 일부러 구비한 미러리스 카메라를 처음 며칠은 들고 나가지 못했다. 내가 가방에서 큰 카메라를 꺼내는 순간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관광객이다! 저기 관광객이 있다!" 하고 표적으로 삼을 것만 같았다. 오래된 똑딱이 카메라만 들고 일단 가까운 소호를 걷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설치 작품이 있었고, 설치 작품인가 싶어서 보면 그냥 누가 버린 가구이기도 했다.
많이 걸은 탓에 밤에 누우면 발이 뜨거워서 피곤한데도 금방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그 뜨거움은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수족냉증같은 건 몇 년이고 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뜨거움이었다. - P33

 리스트를짜는 데는 뉴욕의 특별한 미술관(권이선·이수형 지음, 아트북스, 2012)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트앤드 디자인 뮤지엄• 
●모건 도서관 /미술관
●휘트니 뮤지엄
●구겐하임 뮤지엄
●프릭 컬렉션
●메트로폴리탄
●모마
●뉴욕 도서관 부속 갤러리
●첼시의 갤러리들 - P36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의미를 생산하는 짧은 소설들을 쓰며 소원이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진 것을 벅차했다. 생뚱맞은 소원인 줄알았는데 오래 품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으면 가닿고 싶은 대상 쪽에도 신호가 가나 보다. 다른 영역의 아티스트들을 사랑한다. 책은 남의 책, 예술도 남의 예술이 최고…………. 생산자인 것도 좋지만 향유자일때 백배 행복하다. 향유라는 단어 자체가 입 안에서 향기롭다. - P39

애잔한 경영대 캠퍼스 커플이여, 당신들의 딸은 물건너갔습니다………. 그래도 대충 그럴 거라고 말하고 넘어간다.
어쨌건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좋아하는 편이고, 새로 좋아할 만한 것을 만날 준비가 항상 되어 있기도 해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뭔가 힘든 일을 만나 마음이 꺾였을 때 좋아할 만한 대상을 찾으려고 하면 이미 늦은 감이 있다. 괜찮은 날들에 잔뜩 만들어두고 나쁜 날들에 꺼내 쓰는 쪽이 낫지 않나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 누가 "백억이 생긴다면? 천 억이 생긴다면?" 하고 가정하는 질문을 던지면 작업을 쭉 따라가고 있는 동시대 작가의 전시회에 가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제가 수집할게요" 하고 말하는 상상을 해버린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전시관을 짓고 도서관도 하나 짓고 기왕 지은 김에 공연장까지………. 규모가 커지는 데몇 초 걸리지 않으니 포부만큼은 CEO처럼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 P41

그러니 사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최악을 각오하고 여행하는지도 모른다. 예민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조금 더 신경이 굵은 사람들은 무의식 깊이 묻어놓았겠지만. 아름다운 해변에도 맹독성 해파리들이 있고, 환한 잔디밭에서도 흉기가 칼집에서 빠져나온다. 세계는, 인류는, 문명은 순식간에백 년씩 거꾸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럴 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견뎌야만 한다.
같은 장소에서 언제나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지금이 그리 좋지 않은 시대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디선가 다정한 대화들이 계속되고 있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버릴 수가 없다. - P47

시민으로 기능하는 남성 캐릭터를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두는 전략은 나이브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확실히 나에겐 물러 터진 구석이있는 것 같다. 현실 약간 옆 안전한 공기층을 만드는 방식의 작가라서 그런 것이겠지 싶다. 그래도 10년 넘게 소설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이 픽션 속의 캐릭터를 생각보다 자주 닮고 싶어 하고 또그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사실 남성 창작자들이 해야 하는 것인데 하는 사람이 적은 것 같기도 하다. 남성성의 이미지를 함께 살아가고 싶은 모델 쪽으로 슬쩍 옮기는 것이 효과가있을지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다른 전략을 써야겠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늘 찌르는 전략과 녹이는 전략이 병행되어야 한다고믿어왔다. 그리고 나는 녹이는 걸 잘하기에, 자꾸 친구들의 좋아하는 면을 소설 속에 녹인다.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다음을 상상하기 위해서. S도 피프티 피플]에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이름이 들어가 있다. 물론 직업도 배경도 다 다르고 그저 큰 눈으로 잘 울면서 묘하게 꼿꼿한 데가 있는 성격만 빌렸지만 말이다. - P65

언젠가 메트로폴리탄에 세 번째로 간다면, 두 번째로 갔을 때와마찬가지로 비 오는 날에 가고 싶다.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 빗물이흐르고 공원이 내다보이는 유리창이 아름다워 낮게 한숨 쉬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어떤 풍경에 반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한숨을아는지? 그런 한숨이었다. 일기예보가 아주 어긋난다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도입부에 나오는 도나 타트의 소설 황금방울새를 들고가 읽다가 걷다가 해도 좋을 듯하다. 결국 박물관은 ‘한 번 봤으면됐다‘ 하는 장소가 아니라 몇 번이고 재방문하고 싶은 장소여야 하나 보다. 더하여, 뉴욕을 다룬 책들에는 입을 모아 메트로폴리탄의현대미술 파트가 별로라고 쓰여 있었는데 물론 모마보다 규모는 작지만 인상적인 작품들이 알차게 들어차 있어 빠뜨리면 안 될 듯하다. 여행 책들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박물관의 폐장 시간에 한꺼번에 밀려나온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걸으며 만드는 행렬에 슬쩍 동참해본 것도 좋았다. 그 물결 속에서걷고 있자니 청어라든지 정어리라든지 떼로 다니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 P72

돌바닥에 누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 누워 있으니30분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지구는 45억 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자연사 박물관에 갔던 날이 나에게 그랬다. - P75

타임스스퀘어가 나타났다.
찾아간 게 아니라 나타난 거라서 흥분하고 말았다. 화려한 전광판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타임스스퀘어가 ‘여러 겹‘을 가진 공간이라서 벅찼던 것 같다. 지금 눈에 보이는 한 겹뿐 아니라 그동안 매체에서 접해왔던 겹들이 있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마차를 탔던 시대까지 가도 타임스스퀘어는 언제나 타임스스퀘어기에 형성된 겹겹 말이다. 여러 겹을 겹쳐 만드는 인쇄용 필름처럼, 접었다 펼쳤다 할 수 있는 부채처럼 겹겹………. 나만 흥분한 게 아니어서 사방에서 탄성이 들렸다. 그 흥분을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기도했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두 여성과 신나게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여행 계획을 물어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벌어지는 공간이었다. 따지고보면 그냥 전광판들 사이의 길쭉한 광장일 뿐인데도, 월리를 찾아서』의 한 장처럼 구석구석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나랑 졸업 무도회에같이 가주겠니?"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한 사람은 꼭 거꾸로 든다) - P85

기준을 세우는 데는 두 가지 해석이 필요했다. 나는 ‘두고 가다‘
를 흘리듯 잃어버린 것, 쓰고 버린 것에 다 적용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아주 제멋대로, 주관적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매일의 산책에서도, 여행지에서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런 물건들을 만날 수 있었고 기뻐하며 사진을 찍었다. 이제 3백 장 정도를 가지고 있다. 따로폴더를 만들어두고 며칠에 한 번씩 열어본다. 그 가지각색의 사진들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목표가 없어야 취미가 즐거운 것 같다. 찍을 때의 원칙은 하나, 절대로 물건에 손대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예뻐도 가져오지 않는 건 물론이고, 연출을 위해 건드리지도 않는다.
(딱 한 번 떨어져 있는 트럼프 카드의 앞면이 궁금해서 뒤집어본 적은 있다.) 꼭필요한 원칙이라기보단 재미를 위해서다. - P93

을 해야 하는 것 같다. ‘나 홀로 채식‘ ‘샤이 채식‘의 한계를 넘어보려고 책에 슬그머니 써보는데 이러면 업무 미팅이 채식 레스토랑, 채식 카페에서 더 잡히지 않을까? 이 책을 함께 만들고 있는 위즈덤하우스 편집부 분들도 언제나 채식 레스토랑에서 미팅을 잡아주셔서기쁘다. 요즘 변화가 가속화되는 중인 듯해 다가올 날들을 설레며기다린다.
어쨌든 근사한 조화를 이루는 샐러드나 유난히 맛있는 과일은입 안에서 불꽃놀이 같은 느낌을 일으켜서 즐겁다. 연근 스테이크와애호박 만두를 처음 먹었을 때의 충격도 근사했다. 다시 뉴욕에 간다면 채식 레스토랑 투어를 해보고 싶다. 모르긴 몰라도 채식 요리도 뉴욕이 제일 맛있지 않을까?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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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몽테뉴의 <에세>를 읽고 싶어졌다.



몽테뉴


언젠가 바르르뒤크에서 몽테뉴는 시칠리아 왕 르네가 자신을 그린 초상화를 보고 물었다. <왜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크레용으로 하듯 펜으로 자신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까? > 대뜸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용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쉬운 일도 없으리라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모습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 - P11

은 친숙하기 그지없으니까 어디 한번 시작해 보자. 하지만착수해 보면 금방 펜을 내려놓게 된다. 그것은 심오하고 신비하고 압도적인 어려움을 내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문학사 전체에 걸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펜으로 자신을 그리는 일에 성공했을까? 기껏해야 몽테뉴, 피프스‘ 그리고 아마 루소‘ 정도일 것이다. 『의사의 신앙ReligioMedici』은 질주하는 별들과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영혼이어렴풋이 비쳐 보이는 채색 유리와도 흡사하다. 보즈웰이쓴 유명한 전기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언뜻언뜻내다보는 그의 얼굴이 잘 닦인 거울 속에 비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자기 기분에 따라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기영혼의 무게와 빛깔과 둘레를 그 혼돈과 다양성과 불완전함가운데 전부 펼쳐 보이는 것은 기술이 필요한 일이며, 그 기술을 온전히 구사하는 이는 오직 한 사람 몽테뉴뿐이다.  - P12

마치 유령이 정신을 휙 스쳐 지나가 미처 그 꼬리에 소금을 뿌릴 틈도 없이 창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만 같다. 또는 떠도는 빛처럼 깊은 어둠을 잠시 비추고는 천천히 가라앉아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도같다. 그래도 말로 할 때는 얼굴과 목소리, 말투가 부족한 점을 채워 주기도 한다. 하지만 펜이란 유연성이 없는 도구이다. 펜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으며, 또 펜에는 그 나름의 습관과 격식이 있다. 펜은 독재자처럼 군림하여 보통사람들을 예언자로 만드는가 하면, 통상 머뭇거리게 마련인인간의 언어를 엄숙하고 당당한 행진으로 바꿔 놓는다. 몽테뉴가 뭇 망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단연 생생하게 두드러지는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그의 책이 그 사람 자신이라는것을 우리는 단 한순간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가르치기를거부했고 설교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똑같다고 거듭 말한다. 그의 모든 노력은 자기 자신을 글로쓰고 전달하고 진실을 말하려는 것이었으며, 바로 그것이<보기보다 거친 길>이다. - P14

 학문적 성취에 무슨유익이 있겠는가? 그는 항상 똑똑한 사람들과 어울렸고, 그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그는 그들이 나름빛나는 순간이 있고 열렬히 비전을 제시할때도 있지만, 가장 똑똑한 이들도 자칫 어리석음에 빠질 수있음을 목격했다. 당신 자신을 관찰해 보라. 한순간 기세가오르지만 다음 순간 유리가 깨진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고 만다. 모든 극단이 위험하다. 길에서는 아무리 진창이더라도 바퀴 자국이 패인 복판으로 가는 것이 최상이다. 글을쓸 때는 평범한 단어를 고르고 비약이나 웅변은 피할 일이다. 하지만 물론 시는 감미롭다. 최상의 산문은 시로 가득 차있다. - P18

 내적인 삶이 있고 그것을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보물로 여기는 우리에게는 짐짓 꾸미는 태도만큼 의심쩍은 것이 없다.
저항하고 점잔을 빼며 법칙을 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망한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게 된다. 우리는 공직에 봉사하는 이들을 존경하고 명예를 부여해야 하며 그들이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허용할 때는 민망히 여겨야 하지만,
우리 자신은 일체의 명성이나 명예, 다른 사람에게 매이게될 직무들을 피하기로 하자. 우리 자신의 속을 알 수 없는 가마솥, 매혹적인 혼란과 뒤죽박죽인 충동들과 끊임없는 기적으로 들끓는 솥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영혼은 매 순간 경이로운 것들을 솟구쳐 내니 말이다. 운동과 변화는 우리 존재의 본질이며, 경직은 죽음이다. 순응은 죽음이다. 그러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하고, 했던 말을 또 하고, 자가당착을 범하고, 황당한 헛소리를 쏟아내자. 세상이 뭐라 생각하든 말하든 개의치 말고 기발한 생각들을 밀고 나가자 사는것 말고는 달리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질서도 필요하다. - P20

그렇다면 여기, 모든 모순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무엇이 있다. 이 에세이들은 영혼과 소통하려는 시도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 그의 뜻은 명백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명성이 아니며, 장차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장터에 조각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영혼을 다른사람들과 소통하기를 바랄 뿐이다. 소통이 건강이며, 소통이진실이고, 소통이 행복이다.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가장 병들어 있는 은밀한 생각들에까지 내려가 그것들을빛 가운데 드러내는 것,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아무것도 위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무지하다면 그렇다고말하는 것, 벗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 P23

이 에세이들이 그 마지막에 이를 때, 아니 힘껏 달려 절정에 이를 때에 점점 더 분명히 떠오르는 것은 삶이다. 죽음이다가올수록 삶은 점점 더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자신의 자아와 영혼과 삶의 모든 측면이 더 소중해진다. 여름과겨울에비단 양말을 신는 것,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 저녁 식사 후에 머리를 손질하는 것, 물 마실 유리잔을 갖는 것, 평생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 큰 소리로 말하는 것, 한 손에 휘추리를 들고 다니는 것, 혀를 깨무는 것, 발을 가만두지 못하는 것, 툭하면 귀를 긁는 것, 숙성시킨 고기를 좋아하는 것.
냅킨으로 이를 닦는 것(감사하게도 이빨이 튼튼한 것!), 침대에는 커튼을 달아야 하는 것, 기묘하게도 순무를 좋아했다.
가 싫어하고 또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 어떤 사실도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게 내버려 둘 만큼 사소하지 않다. 또한 사실들 자체의 흥미로움 외에도 우리에게는 상상력으로 사실들을 변모시키는 신기한 힘이 있다. 영혼이 어떻게 항상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관찰해 보라.  - P26

어떻게 실질적인 것을 텅 빈 것으로, 연약한 것을 실질적인 것으로 만드는가를, 백주 대낮을 꿈으로 채우는가를, 현실뿐 아니라 환영(幻影)에도 설레는가를 죽음의 순간에도 사소한 일로 옷을수 있는가를. 또한 그 이중성과 복잡성을 관찰해 보라. 영혼은 친구의 부음을 듣고 깊이 애도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사람들의 슬픔에서 심술궂은 기쁨의 달콤 쌉쌀함을 느낀다.
영혼은 믿지만, 동시에 믿지 않는다. 온갖 인상들에 대한 그놀라운 민감성을, 특히 젊은 날의 민감성을 관찰해 보라. 부유한 남자가 도둑질을 하는 것은 소년 시절에 아버지가 돈을넉넉히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벽을 짓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집짓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혼은 그 모든 행동에 영향을 주는 신경과 공감 들로 짜여 있다. 하지만 1580년 당시에도 영혼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무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나 겁쟁이이고 관습적인 방식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니 말이다. 영혼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이고, 우리의자아가 세상에서 사장 큰 괴물이요 기적이라는 것밖에는 모른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알아보고 하면 할수록, 내 기형적인 꼴에 놀라며 나 자신을 알 수 없어진다. 관찰하라. 끊임없이 관찰하라. - P27

여기 살아간다는 위태로운 과업에 성공한 한사람이 있다. 자신의조국에 봉사하고 은퇴한 삶을 살았던, 영주요 남편이 아버지였던, 왕들을 대접하고 여자들을 사랑하고 홀로 오래된 채들과 함께 오래 생각에 잠겼던 이가 있다. 그는 극히 미묘한것들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관찰함으로써 마침내 인간의 영혼을 이루는 모든 부조화한 부분들을 기적적으로 짜 맞추기에 이르렀다. 그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움켜쥐었다. 그는 행복을 성취했다. 만일 다시 살아야 한다면 똑같은 삶을 다시살리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우리 눈 아래서 한 영혼이 내적인 삶을 펼쳐 가는 매혹적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즐거움이 모든 것의 궁극인가? 그렇다면 영혼의 본질에 대한 이 압도적인 관심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이 욕망은? 이세상의 아름다움으로 족한가? 아니면 이 신비에 대한 어떤 - P28

설명이 다른 곳에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이 있을 수 있을까? 없다. 단지 질문이 한 가지 더 있을 뿐이다.
Que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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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의 천사 죽이기>에서 많은 글들에 매료되었지만 단연 압권은 [여성 노동자 조합의 추억]편이다. 이 분, 매력이 어디까지 일지 짐작도 못하겠다. 1920년대에 여성 노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저런 소신있는 판단이라니, 멋지다.


하지만 여기 인쇄된 그 글들이 그 얼굴들과 음성들을 떠올리며 읽을 수 없는 이들에게 그 모든 것을 의미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요. 여기 모아 놓은 챕터들이 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문학으로서는 많은한계를 갖는 글들이지요. 문학 비평가라면 글쓰기에 객관성과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할 거예요. 여성들 자신도 다양성과특색이 부족하고요. 여기에는 깊은 성찰도 없고, 인생 전체에 대한 조망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고 그는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나 소설은 그녀들의 지평 너머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전, 자기 교구 밖으로는 나가 본적 없고,
자기 나라 말밖에는 모르며, 오죽잖은 어휘를 어색하게 구사하며 어렵사리 글을 썼던 이름 없는 작가들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글쓰기란 삶에서 크게 영향받는 복잡한 예술이므로 여기 실린 글들은 문학으로서도 식자들이 부러워할 만한자질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펠트 모자를 만드는 스콧부인의 말을 들어 보세요. <나는 날린 눈이 3 피트, 어떤 데는6피트가 넘게 쌓여 있는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헤이필드에서는 눈보라를 만나 도저히 길모퉁이까지도 갈 수 없을 것만같았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황야에서의 삶이었어요. 나는모든 풀잎을 다 아는 것만 같았고, 어디서 꽃이 피는지도 알고 있었지요. 모든 시냇물이 내 친구들이었어요. 그녀가 옥스피드에서 문학 박사가 되었다 해도 이보다 더 잘 말할 수있었을까요? 또한 레이턴 부인이 베스널 그린의 성냥 통 공장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또 자신이 울타리 사이로 <그늘에앉아 뭔가 신기한 작업을 하고 있는> 세 명의 여성을 보았던일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세요. 거기에는 디포의 묘사를방불케 하는 정확성과 명료함이 있습니다. 

키드 양 -세상 짐을 혼자 진 듯하던, 타자 치던 어두운 자주색 옷차림의 여성 - 이 보내온 편지의 일부도 있습니다. <내가 열일곱살 때였습니다. 당시 내 고용주였던 지체 높은 신사가 어느날 밤 나를 자기 집으로 불렀습니다. 겉으로는 책 꾸러미를 가져오라는 것이었지만, 실제 의도는 전혀 달랐지요. 내가 그 집에 가보니 식구들은 모두 멀리 나가 있었고,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서야 보내 주었어요. 열여덟 살에 나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학인지 아닌지 나는 감히 말할 수없지만, 그것이 많은 것을 설명해 주고 드러내 준다는 점은확실합니다. 당신의 편지들을 타자하며 앉아 있던 그 어두운모습을 찍어 누르던 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침울하고 굴하지 않는 충성심으로 당신의 문을 지키면서 그녀가품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기억들이었어요.
하지만 더는 인용하지 않으렵니다. 이 글들은 단편들에지나지 않아요. 이 음성들은 이제야 침묵을 뚫고 나와 더듬거리기 시작한 터이니까요. 이 삶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깊은어둠에 덮여 있습니다. 여기 표명된 것을 표명하는 것만도상당한 노고가 필요한 어려운 일이었지요. 이 글들은 부엌에서, 어쩌다 틈이 날 때마다, 온갖 방해와 정신 시끄러운 일들가운데서 쓰인 것이에요. 그녀들이 당신한테 보내온 편지들을 놓고서, 내가 일하는 여성들의 삶의 고단함을 새삼스레강조할 필요는 없겠지요. 당신과 릴리언 해리스는 가장 좋은시절을 바치지 않았던가요. 하지만 쉿! 당신은 내가 이 문장을 끝까지 말하게 두지 않겠지요. 그러므로 오랜 우정과 찬탄의 메시지를 보내며, 이만 맺겠습니다. p224~ 228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은 그녀의 외부에서 일어난 일개 사건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핏속에 있는 활성제였다. 그녀는폭정에 대해, 법에 대해, 인습에 대해. 그평생 항거했다녀의 내부에는 개혁가다운 인류애가 끓어올랐으며, 그것은사랑만큼이나 증오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은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이론과 신념이 일부 표출된 것이었으니, 그녀는 그 특별한 순간의 열기 속에서 두권의 웅변적이고 과감한 책 『버크에 대한 답변과 여성의권리 옹호』를 내놓았다. 이 책들은 너무나 지당한 내용이라지금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그 독창성은우리의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파리에서 혼자 커다란집을 빌려 살면서, 자신이 경멸하던 왕이 국민위병들에게 호송되어 지나가는 것을 직접 목도했을 때는, 그가 의외로 위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 그녀도 이유를 알 수 없이〉 눈물이난다면서 <이제 자러갑니다. 평생 처음으로 촛불을 끌 수가 - P99

없습니다>라는 말로 편지를 맺고 있다. 세상일이 그리 간단치는 않았으니, 그녀는 자신의 감정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하던 신념들이 실행에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도 눈물이 났다니 말이다. 그녀는 명성과독립과 자신의 삶을 살 권리를 얻었지만, 뭔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여신처럼 사랑받기를 원치 않으며, 다만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그녀는 편지에썼다. 그 편지의 수신인이었던 매력적인 미국인 임레이가 그녀에게 아주 다정히 대해 준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원칙 중 하나였다. 상호간의 애정이 결혼이며, 만일 사랑이 죽는다면, 사랑이 죽은 후까지 결혼이라는유대가 구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유를원하는 동시에 확실성을 원했다. 그녀는 이런 말도 썼다. 〈나는 애정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그것은 무엇인가 습관적인 것을 뜻하니까요> - P100

 여성의 고난이라는 책도 쓸 예정이었다. 그녀는 교육을 개혁할 예정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도 그녀는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올 예정이었다. 그녀는 해산 때 의사가 아니라 산파를 고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실험이었다. 그녀는 분만중에 죽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그토록 강렬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더없이 비참한 가운데서도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나 자신을 잃는다는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아니, 내가 존재하기를 그친다는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외쳤던 그녀가 36세의 나이에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을 풀었다. 그녀가 땅에 묻힌 후130년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고 잊혀 갔지만, 우리는여전히 그녀의 편지들을 읽으며 그녀의 주장에 귀 기울인다.
우리가 그녀의 실험을,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실을 맺은 실험, 즉 고드윈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그녀가 인생의 핵심을 파고들어 간 도도하고 열정적인 태도를 실감할때, 분명 그녀는 일종의 불멸성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 숨쉬며, 주장하고, 실험한다. 우리는 그녀의 음성을 듣고, 지금도 산 자들 가운데 미치는 그녀의 영혼을 뒤쫓는다. - P107

세라 콜리지


그래도 젊은 커플은 그 순간의 부주의에 대해 넘치는 보상을 한 셈이 되었다. 남은 평생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야했으니 말이다. 그들의 첫아이 세례식에서 콜리지는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헨리는 근면하면서도섬세하고 사교적이고 즐겁게 지내는 성격이었는데, 샘 숙부의 주문에 걸려 평생 아내의 일을 도왔다. 주석을 달고 편집을 하고 그 경이로운 음성이 하던 말을 기억할 수 있는 한 기록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원고를 편집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세라의 몫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그 어질러진 궁전의 집사였다. 아버지가 읽은 것을 읽고, 그의 인용을 재확인하고, 그의 성품을 옹호하고, 무수한 행간에 적힌 말들을해독했으며, 원고 꾸러미들을 공략하여 시작만 해놓은 글머리들을 한데 모으고 결말은 아니라 해도 그 계속되는 부분들을 찾아냈다. 하루 온종일 바친 일이 물거품이 되기도 했다. 14 신문사에 보내는 택시 요금이 늘어났고, 비서를 둘 여유가 없이 일하다 보면 눈이 피곤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애매한 구석이 남아 있는 한, 불분명한 날짜나 검증되지 않는 출전, 반증되지 않은 비방이 있는 한, <불쌍하게도 지칠 - P115

줄 모르는 세라>라는 것이 워즈워스 부인의 말이었다
그녀가 한 작업의 상당 부분은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게 완벽하며, 편집자들은 여전히 그녀가 놓은 기초 위에 서 있다.
그 일은 자기희생이라기보다는 자기실현이었다. 그녀는그 뒤죽박죽의 원고 더미에서 육신의 아버지에게서는 알지못했던 아버지를 발견했고, 그 아버지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느꼈다. 그녀는 단순히 그의 원고를 정서할 뿐 아니라 그의주장에 함께하며 그가 되었다. 종종 그녀는 그의 생각이 마치 자신의 생각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다음을 이어 가기도 했다. 그녀는 걸을 때도 아버지와 꼭 마찬가지로 좌우로 조금비칠거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기 시간의 절반은 그 사라진 광휘를 되비추는 데 쓴다 하더라도, 나머지 절반은 일상의 빛 가운데서, 리젠트 파크의 체스터 플레이스에서 보내야했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중 몇은 죽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아버지처럼 신경 쇠약에 걸렸고, 아버지처럼 아편을 써야했다. 단 3년만이라도 출산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랐다니 안쓰러운 일이다. 그러다 헨리가 특유의 명랑함으로 그녀를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끌어내 주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주석들을 쓰다 만 채, 두 자녀와 얼마 안 되는 돈과 미처다 쓸어 주지 못한 샘 숙부의 고대광실을 남긴 채로 말이다. - P116

시절부터 머리칼을 짧게 자른 터였다 - <건조하고 거칠고 윤기 없는 것이, 짧고 뭉툭한 것이 짚북데기 같았다.> 어머니의 거친 가발과 아버지의 고매한 이마를 그녀는 모두 이해했다. 그녀가 교훈을 건너뛸 수만 있었다면 그 이상한 결혼에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녀는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해 쓰려 했지만, 중단되고 말았다.
유방에 멍울이 생겼던 것이다. 그녀를 진찰한 닥터 길먼은암 진단을 내렸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버지의저작을 정리하는 일도 마치지 못했고, 자기 작품은 쓰지도못한 터였다. 그녀 역시 <불완전하게 완성하는 것>을 참을수 없어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흔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처럼 말없음표로 가득 찬 빈 종이를, 그리고 이 두 줄의 시를 남겼다.

아버지, 어떤 아마란스 꽃도 제 이마를 장식하지 못할거예요.
지금 아버지 무덤가에 피어 있는 것으로 족하니까요. - P120

제인 오스틴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요람을 굽어보는 요정 중 하나가 그녀를 데리고 날아다니며 온 세상을 구경시켜 주었음에 틀림없다. 요람에 다시 뉘였을 때, 그녀는 이미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을뿐 아니라 자신의 영토를 골라 놓은 터였다. 만일 그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면 다른 어떤 영토도 탐내지 않겠다고 동의한터였다. 그리하여 열다섯 살 때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거의 환상을 갖지 않았으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환상도 없었다. 그녀가 쓰는 것은 무엇이나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아버지의 목사관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관계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비개인적이며 속을 알 수가 없다. 작가 제인 오스틴이 책에서 더없이 탁월한 스케치로 그려 낸 그레빌영부인의 대화 내용을 보면, 목사의 딸 제인 오스틴이 한때홀대받았던 데 대한 분노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녀의 시선은 곧장 표적을 향하며, 우리는 인간 본성의 지도위에서 그 표적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 P126

소문에 의하면 제인오스틴은 <뻣뻣하고 까다롭고 과묵하다고,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부지깽이>라고 한다. 이 점을 알아볼 수 있는 흔적들도 있다. 그녀는 충분히 무자비할수 있으니, 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일관된 풍자가 중 한사람이다. 왓슨가사람들』의 딱딱한 처음 몇 챕터는 그녀의 천재성이 다변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그녀는 가령 에밀리브론테처럼 문만 열면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지는 못했다. 겸손하고 명랑하게, 그녀는 둥지를 지을 잔가지들과지푸라기들을 모아다가 깔끔하게 한데 부려 놓았다. 잔가지와 지푸라기 자체는 좀 푸석거리고 먼지투성이였다. 큰 집도있었고 작은 집도 있었다. 티파티와 디너파티, 가끔은 피크닉도 있었고, 인생은 유익한 인간관계와 적절한 수입의 범위로 한정되었다. 진창길에서는 발이 젖었고, 젊은 여성들은쉬이 지쳤으며, 오죽잖은 원칙이, 오죽잖은 결과가, 시골에사는 중상류층 가정들이 공통적으로 누리는 교육이 그 세계를 지탱했다. 악덕과 모험과 정열은 그 바깥에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산문적이고 사소한 것에도 불구하고,  - P131

 어떤 로맨스도 모험도 정치나 음모도 그녀가 바라보는 시골 저택의 계단 장면에 빛을 더해 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섭정공과 그의 도서관장은 대단히 골치 아픈 장애물에 부딪혔으니, 그들은 매수할수 없는 양심을 매수하고 틀림없는 분별력을 흩트리려 한 셈이었다. 열다섯 살 때 이미 그처럼 세련된 문장을 썼던 소녀는 결코 그런 문장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섭정공이나 그의도서관장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 글을 썼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부과하는 관성의 기준이 높은 작가로서 자신의 재능이 어떤 소재를 다루는 데 적합한지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영역 밖에 놓인 인상들, 아무리기를 쓰고 공을 들여도 자신의 재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없는 감정들도 있었다. 예컨대 그녀는 젊은 아가씨가 군대의깃발이나 예배당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하게 할 수는 없었다.
또 낭만적인 순간에 전심으로 몰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는 온갖 수단을 써서 정열적인 장면을 피해 간다.  - P136

그녀는 아름다운 밤을 묘사하면서도 달에 대해서는 단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름 한점 없는밤의 한함과 숲속의 깊은 그늘의 대조>에 관한 형식적인 몇구절만 읽고도, 그 밤은 그녀가 그냥 그렇다고 말하는 대로<엄숙하고 아늑하고 아름다웠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재능은 드물게 완벽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 그녀의완성된 소설 중에는 실패작이 없으며, 그 수많은 챕터 중에다른 것에 비해 현저히 수준이 떨어지는 챕터도 거의 없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그녀는 마흔두 살에 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죽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변모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으니, 때로 그런 변모는 작가의 생애 중 말기를 가장 흥미로운 시기로 만들기도 한다. 활달하고 억제할 수 없으며 생생한창의성을 지닌 그녀였으니,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은작품을 써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런 작품들은 좀 다르게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고 싶은 유혹도 든다. 물론 경계선은 뚜렷하며, 달이니 산이니 성이니 하는 것은 그 너머에 있다. 하지만 그녀도 때로는 잠깐 그 경계선을넘어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특유의 명랑하고 감탄할 만한방식으로 자그마한 발견을 위한 여행을 고려하기 시작하지않았을까? - P137

<설득>에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독특한 지루함이 있다.
그 지루함은 다른 두 시기 사이의 과도기에 종종 나타나는것이다. 작가는 다소 싫증이 나 있다. 그녀는 자기가 그려 내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너무 친숙해져서, 더 이상 그것이 참신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코미디에 나타나는신랄함은 그녀가 더 이상 월터 경의 허영이나 엘리엇 양의속물주의에 재미를 못 느끼고 있음을 시사한다. 풍자는 가혹하며 코미디는 거칠다. 그녀는 더 이상 일상생활의 재미를신선하게 의식하지 못하며,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제인 오스틴이 전에도 이런 일을 했고 더 잘했었다고 느끼는 한편, 그녀가 전에 시도해 본 적 없는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설득』에는 새로운 요소가, 아마도 휴웰 박사‘를 흥분시키고 그것이야말로 <그녀의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주장하게 했던 무엇인가가 있다. 그녀는 세상이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더 신비로우며 더 로맨틱하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그녀가 앤에 대해 이렇게 말할 때 - <그녀는 젊은 시절에 신중하도록 강요당했으나, 나이가 들면서 로맨스를 알게 되었다. 부자연스러운 시작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 P138

 그녀는 인물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 대화에 좀 덜의지하고(이 점은 『설득』에서도 이미 엿보인다) 성찰에 좀더 의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단 몇 분간의 수다로 우리가 크로프트 제독이나 머스그로브 부인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요약해 버리는 저 놀랍도록 간결한 대화나, 여러 챕터 분량의 분석과 심리학을 담고 있는, 임기응변식의 기술은 그녀가 이제 인간 본성의 복잡성에 대해 파악한 모든 것을 담기에는 너무 조잡해졌을 것이다. 그녀는 새로운 방법을, 늘 그렇듯 명쾌하고 차분하지만 더 깊고 더 시사적인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말하는 것뿐 아 - P140

니라 말하지 않는 것까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뿐 아니라인생이 무엇인지까지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물들로부터 한층 더 멀찍이 서서, 그들을 개인보다는집단으로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풍자는 전보다덜 빈번하지만 더 가혹하고 준엄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헨리 제임스‘나 프루스트의 선구자가 되었을 것아, 그쯤 해두자. 이런 사변이 무슨 소용이랴. 여성 중에 가장 완벽한 예술가, 불멸의 책들을 쓴 작가는 자신의 성공에대해 자신감을 느끼기 시작할 바로 그즈음에> 죽었다. - P141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이것은 황야 그 자체만큼이나 스러지지 않는, <길고 구슬픈 바람>만큼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세계이다. 이런 고양감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내몰아 단번에책을 읽어 치우게 만들며, 우리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것은 물론 책에서 눈을 들 겨를도 허락하지 않는다. 어찌나깊이 몰두했는지, 누가 방안에서 움직인다면, 그 움직임은이 방안이 아니라 저 멀리 요크셔에서 일어나는 듯이 느껴질 정도이다. 작가는 우리의 손을 꼭 잡고 자기 길로 끌고 가며, 자신이 보는 것을 자신이 보는 방식으로 보게 만든다. 그녀는 단 한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며, 우리가 자기를 잊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침내 우리는 샬럿 브론테의 천재성과 격정과 분노에 속속들이 젖어 들고 만다. 주목할 만한 얼굴들, 뼈마디가 굵고 다부진 모습들이 우리 눈앞을 스쳐 가지만, 우리가 그들을 본 것은 그녀의 눈을 통해서이다. - P145

제인 에어가 된다는 것의 문제점은 멀리서 찾을 필요도없다. 언제나 가정 교사이고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심각한 제약이다. 그에 비하면 제인 오스틴이나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훨씬 다면적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사실성과 복잡성을 획득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그들은 자신을 만들어 낸 창조자가 지켜보든 말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들이 사는 세계는 일단만들어진 후에는 우리 스스로 찾아가 볼 수도 있는 독립된세계처럼 보인다. 토머스 하다는 그의 개성이 갖는 힘이나시야의 편협함에서 샬럿 브론테와 좀 더 가깝다. 하지만 차이는 엄청나다. 『이름 없는 주드』를 읽을 때는 결말을 향해돌진하게 되지 않으며, 인물들 주위에 그들 자신이 대개 의식하지 못하는 질문과 암시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일련의사님을 따라, 우리도 텍스트에서 벗어나 멍하니 떠돌며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 P146

왜냐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작가들에게는, 좀 더 보편적이고 폭넓은 정신을 지닌 작가들에게는 없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는 인상은 그들의 좁은 벽들 사이에 빽빽이 쟁여지고 뚜렷이 각인된다. 그들의 정신에서는 자신으로 각인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작가들로부터 거의 배우지 못하며, 설령 다른 이들의 것을 채택하더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하디도 샬럿 브론테도 자기 문체를 뻣뻣하고 격식 차린 언론의 문체에서 얻은 것만 같다. 하지만 두 사람 다근면함과 더없이 집요한 성실성으로, 모든 생각을 그것이 언어를 굴복시키기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본뜨는 산문을 주조해 냈고, 거기에 덤으로 그 나름의 아름다움과 힘과 날렵함마저 갖추었다.  - P147

많은 책을 읽은 데에 전혀 힘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직업적인 작가의 매끈함, 속을 채워 넣고 언어를 뜻대로 구사하는 힘 등은 그녀가 배워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나는 남자든여자는 강하고 신중하며 세련된 정신과 교류하게 되면 처음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라고, 그녀는 지방 신문의 논설위원이나 쓸 것 같은 글투로 쓰지만, 점차 열정과 속도를 더해가면서 자신만의 목소리가 되어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인습적인 조심성의 장벽을 넘어서고 신뢰의 문턱을 지나, 그들의마음속에 노변(爐邊)이라 할 만한 곳을 얻고야 말았다.> 그녀는 바로 그곳에 자리 잡는다. 그녀의 문면을 비추는 것은심장의 불꽃에서 나오는 붉게 팔락이는 빛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샬럿 브론테를 읽는 것은 인물에 대한 절묘한 관찰때문도 아니고(그녀의 인물들은 건강하고 단순하다), 유머때문도 아니며(그녀의 유머는 음울하고 투박하다), 인생에대한 철학적 견해 때문도 아니라(그녀의 인생관은 시골 목사 딸의 인생관이다), 그녀의 시(詩) 때문이다.  - P148

작품의 의미란, 일어나는 일이나 말해진 것과는 별도로다양한 사물들이 작가와 맺어온 모종의 관계 속에 있을 때가 많으므로,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브론테 자매처럼 작가가 시적이고 그가 뜻하는 바가 그의 언어와 불가분일때, 그리고 그 자체가 특정한 고찰이라기보다 기분에 가까울때는 특히 그렇다. 『폭풍의 언덕』은 『제인 에어』보다 한층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인 것이, 에밀리가 샬럿보다 더 위대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샬럿은 자기 글에서 웅변적이고 장려하고 열렬한 어조로 〈나는 사랑한다>, <나는 미워한다>, <나는 괴로워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경험은 좀 더 강렬할지는모르지만 어떻든 우리와 같은 수준에 있다. 하지만 『폭풍의언덕에는 <나>가 없다. 가정 교사도 없고 고용주도 없다. 사랑은 있지만, 그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다. 에밀리에게영감을 준 것은 좀 더 일반적인 개념이었다.  - P150

문장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그녀가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그 할 말을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그것은 캐서린 언쇼의 앞뒤없는 말 가운데 차츰 드러난다. <다른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갈 거야. 다른 모든 것이 남고그가 없어진다면, 온 우주가 낯설어지고 나는 더 이상 그 일
‘부가 아니게 될 거야. 그것은 망자의 앞에서도 또다시 터져나온다. <나는 지상도 지옥도 깨뜨릴 수 없는 안식을 보며,
끝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내세를, 그들이 들어간 영원을 확신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삶이 무한히 지속되며, 사랑은 그공감 안에서, 기쁨은 그 충만함 안에서 영원할 것이다.〉 이작품이 다른 소설들 가운데서 우뚝 솟아오르는 것은 인간본성이라는 불가사의를 떠받치며 그것을 위대함의 면전으로 들어 올리는 이런 힘에 대한 암시 때문이다. 하지만 에밀리 브론테는 몇 줄의 서정적인 문장을 쓰고, 한마디 외침을내고, 신조를 표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 P151

하워스



개스켈 부인이 쓴 샬럿 브론테의 『전기』‘를 보면, 하워스 와 브론테 일가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워스는 브론테를, 브론테는 하워스를 나타내는것이, 마치 달팽이와 그 껍데기처럼 서로 들어맞는다. 환경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는 새삼스레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피상적으로 말하더라도 그 영향은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 유명한 목사관이런던의 슬럼에 있었다 해도, 화이트채플의 빈민굴이 외딴요크셔 황야와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 볼 만하다. 하여간, 하워스를 여행하는 내 구실은 단한 가지였다. 말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에 요크셔를여행한 주된 동기 중 하나가 하워스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줄지은 이름들이 짧은 간격을 두고 차례로 세상을 떠났음을 보여 준다. 어머니 마리아, 딸 마리아,
엘리자베스 브랜웰, 에밀리, 앤, 샬럿, 그리고 마지막으로이들 모두보다 더 오래 살았던 늙은 아버지. 에밀리는 겨우서른 살에 죽었고, 샬럿도 그보다 아홉 살밖에 더 먹지 못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것이 그들의 이름 아래쪽에 새겨진 구절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싸움이 아무리 험했다 하더라도, 에밀리는, 그리고 누구보다도 샬럿은, 그 싸움에서 승리했으니말이다. - P162

조지 엘리엇



조지 엘리엇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그녀에 대해 아는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된다. 또한 그녀에 대한 빅토리아 후기의 시각을 별생각 없이, 다분히 심술궂게 받아들였던 어수룩함도 돌아보게 된다. 그런 시각에 따르면, 그녀는 미망에 빠진 여인으로 자신보다 한층 더 미망에 빠진대중에게 허망한 지배력을 휘둘렀다는 것인데, 그녀의 그런 마력이 힘을 잃은 것이 딱히 언제였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그녀의 『전기』가 출간되면서였다고도 한다.  - P163

 그 진지한 일요일 오후들에 대한추억이 그의 유머 감각을 자극했던 것을 넌지시 비치곤 했다. 그는 나지막한 의자에 앉은 그 근엄한 여성 때문에 잔뜩긴장했고, 뭔가 지적인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아 초조했었다.
고 한다. 분명 대화는 아주 진지한 것이었던 듯, 위대한 소설가의 친필로 된 편지가 이를 증언한다. 월요일 아침에 쓴 것.
으로 되어 있는 이 편지에서 그녀는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크고서 언뜻 마리의 이름을 잘못 말했다고 하지만 듣는 이가 이미 제대로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고 했다." 하여간 어느 일요일 오후 조지 엘리엇과 더불어 마리보에 대해 이야기하던 추억은 그다지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가면서바래기는 했어도 좀처럼 근사해지지 않았다. - P165

그와 결합한 직후부터 나오기 시작한 그녀의 책들은 개인적 행복과 함께 찾아온 크나큰 해방감을 십분 보여 준다. 그책들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풍성한 향연을 제공한다. 하지만 문학적 경력의 문턱에서 그녀의 마음이 자기 자신과 현재로부터 벗어나 과거로, 시골 마을로, 조용하고 아름답고 단순한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향했던 사정의 일단은 그녀의 삶의 정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첫 책이 미들마치』가아니라 『목사 생활의 정경Scenes of Clerical Life』이었던 데는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이스와의 결합은 그녀를 애정으로 감쌌지만, 상황과 관습에 비추어 보면 그녀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1857년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만, 저로서는 제게 초대를 요청하지 않은 이상 아무에게도저를 만나러 와달라고 초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세상이라 불리는 것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훗날 말했지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 P170

<아득한 과거의 세계 속에서 자유를구가하며 퍼져 나가는 드넓고 성숙한 정신을 느끼노라면, 상귀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부적절해 보인다. 그런 정신에게는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다. 모든 경험이 층층의 지각과 성찰을 통해 걸러져서 정신을 한층 더 풍부하고 견실하게 한다.
그녀의 생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는 것에 비추어 소설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평하려 할 때 우리가 기껏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흔히 배우기 어려운, 특히 젊은 시절에 배우기는어려운 몇 가지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그녀에게 가장 깊이 각인된 것은 인내라는 서글픈 미덕이었다. 그녀의 공감은 일상적인 삶을 향하며, 평범하고 소박한 기쁨과 슬픔을 지켜보는 데서 가장 훌륭하게 발휘된다. 그녀에게는 만족시킬 수도 억누를 수도 없는 자기만의 개성을 의식하고 세상이라는 배경 위에 그 윤곽을 선명히부각시키고자 하는 낭만적 걱정이라고는 없다.  - P171

엘리엇이 어느 한 인물이나 장면마다 추억과 유머의 홍수를 쏟아부어 옛 영국 농촌의 정경전체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은 자연의 과정과도 너무나 흡사하여, 도무지 비판할 것이 있다는 의식조차 들지 않게 한다.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위대한 창조적 작가들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감미로운 온기와 정기의 발산을 느낀다. 여러해 만에 다시 펼쳐 보아도 그 책들은 기대를 벗어날 만큼 여전한 힘과 열기를 지니고 있어서, 우리는 붉은 과수원 담장에 반사되는 햇볕 속에서처럼 그 따사로움에 감싸인 채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렇듯 잉글랜드 중부 지방의 농부와그 아내의 유머에 굴복한다는 데 대책 없는 방기의 요소가들어 있다 해도, 그 상황에는 그조차도 합당하다.  - P172

 일찍이 그것들을 움켜쥐어 본 여성이얼마나 되련만, 그녀는 그것들을 움켜쥐고서 자기 몫의 유산- 견해 차이, 기준 차이 -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합당치않은 보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녀를그 기억할 만한 모습을 보게 된다―과도한 칭송을 받고, 자신의 명성으로부터 움츠러들어 의기소침해져서, 오직 그곳에만 만족과 정당화가 있다는 듯 사랑의 품안으로 물러나는모습, 그러면서도 <까다롭지만 굶주린 야심>으로 인생이 자유롭고 탐구하는 정신에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향해 손 뻗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여성적인 열망들을 남성들의 실제 세계와 맞대면시키는 모습을 그녀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어떠했든 간에, 그녀 자신의 결말은 승리에 찬 것이었다. 그녀가도전하고 성취했던 모든것을 돌아볼 때, 그녀가 어떻게 성별, 건강, 인습 등 온갖 장애물에 맞서 그 이중의 짐에 짓눌린몸이 소진하여 가라앉을 때까지 더 많은 지식과 자유를 구했던가를 돌아볼 때,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무덤에 월계수와 장미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 P180

캐서린 맨스필드


단편소설 작가로서 캐서린 맨스필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데 영국의 저명한 단편소설 작가들이 모두 동의했다고 머리 씨는 말한다. 그녀만 한 작가는 다시없으며, 일찍이어떤 비평가도 그녀의 특질을 정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일기를 읽는 독자는 그런 문제들에 개의치 않아도 좋다. 우리가 그녀의 일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녀가 뛰어나고 유명한 작가라서가 아니라 마음의 정경, 인생의 8년동안 차례로 스쳐 간 우연한 인상들이 한 끔찍하게 민감한 - P181

마음에 남긴 흔적들 때문이다. 그녀에게 일기는 신비로운 벗이었다. <아직 본 적 없는 미지의 벗이여, 함께 이야기하자>라고 그녀는 새 공책의 서두에 썼다. 일기 안에 그녀는 날씨며 약속 같은 사실들도 적어 두었고, 장면들을 스케치하고,
자신의 성격을 분석하고, 한 마리 비둘기나 꿈이나 대화를묘사하기도 했다. 그보다 더 단편적이고 사적인 글도 없을것이다. 우리는 자신과 단둘이 마주한 마음, 청중을 의식하지 않은 나머지 이따금 자기만의 속기법을 사용하는 마음을보게 된다. 마음은 홀로 있을 때 흔히 그러듯 둘로 나뉘어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캐서린 맨스필드에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 P182

다시금 순간 그 자체가 갑작스러운 중요성을 띠고, 그녀는 그 순간을 붙잡아 두려는 듯 그 윤곽을 그린다. <비가 내리고 있지만, 공기는 온화하고 흐릿하고 따스하다. 굵은 빗방울들이 나른한 나뭇잎들을 두들기고, 담배 꽃들은 고개가기운다. 담쟁이덩굴 속에서 뭔가 바스락거린다. 이웃집 정원에서 윙리가 나오더니 담장에서 뛰어내린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앞발을 들고 귀를 쫑긋거리며 큰 물살에 휩쓸릴까 잔뜩겁이 난 듯, 호수 같은 푸른 풀밭을 건너간다. > 나사렛 수녀회의 수녀는 <핏기 없는 잇몸과 변색된 큼직한 이빨을 드러내며 돈을 요구했다. 너무 말라서 몸이 말뚝 네 개에 얹어둔 새장>처럼 깡마른 개가 길거리를 달려간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그 마른 개가 곧 길거리 그 자체라고 느낀다. 이런대목들은 마치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들 같다. 어떤 것은 시작이고 어떤 것은 결말이다. 그저 단어들을 엮어 두르기만하면 완성될 것 같다. - P183

 그녀보다 더 글쓰기를 중요하게여긴 이는 없었다. 본능적이고 빠른 필치로 써 내려간 그녀의 일기 어디를 펼쳐 보아도, 자기 일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감탄할 만하다. 건전하고 치밀하고 엄격하다. 문단의 뒷담화도 허영심도 질투도 없다.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에는 자신이 성공한 것을 분명 알고 있었겠지만, 그 점에 대한 언급도 없다. 자기 작품에 대한 그녀의 논평은 항상 예리하고 통렬하다. 자신의 작품은 풍부하지 못하고 깊이도 없다, 자기는 <그저 표면을 훑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사물을 적절하고 예민하게 표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표현되지 않은 무엇인가에 기초해야하며, 그 무엇인가는 견고하고 온전한 것이라야 한다.  - P184

여성 노동자 조합의 추억


그렇듯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지성이 힘차고 활동적인지성이라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습니다. 1913년 6월에 그 지성은 이혼법의 개혁에 대해, 토지 가치세 부과에 대해, 최저임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모성 보호에 대해, 임금위원회 법에 대해, 14세 이상 청소년의 교육에 대해 관심을갖고 있었고, 정부가 성인의 선거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만장일치로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온갖 종류의 공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건설적으로, 투쟁적으로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애크링턴은 핼리팩스와, 미들즈브러는 플리머스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논쟁과 반대가있었고, 결의안이 통과되지 않자 수정안이 가결되었습니다.
치켜든 손들이 검(劍)처럼 빳빳했고, 아침나절은 종소리에따라 정확히 5분 길이로 잘렸습니다. - P204

그런데 - 17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런던과 그 밖의 지역으로부터, 연설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으러 왔던 당신의 손님들의 마음속에 오갔을 생각들을 정리해 봅시다 —그 회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여자들은 이혼과 교육과 투표권을 요구했고 다 좋은 일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또한 임금 인상과 근무시간 단축을 요구했으니, 그보다 더 지당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토록 지당한데도, 그중 상당부분은 설득력이 있고 어떤 부분은 유머러스하기까지 했는데도, 당신의 방문객들의 마음속에는 묵직한 불편함이 생겨나 이리저리 요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질문이 - 아마도 이것이 그 바닥에 있었을 텐데 -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중요한 위생과 교육과 임금 문제, 1실링을 더 달라는요구, 학교에서 1년을 더 배우게 해달라는 요구, 카운터나방앗간에서 아홉 시간 대신 여덟 시간을 일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내게는 전혀 피와 살로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 P205

확실히 그런 이야기는 뉴캐슬의 연사들의 얼굴에서 보았던 힘과 강인함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원고들을
‘계속 읽어 나가다 보니, 인간정신의 엄청난 활기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징후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낳고 빨래를 많이 해도 닳아 없어지지 않는 저 타고난 힘은 과월호 잡지에까지 뻗쳐서, 그녀들은 디킨스를 읽고 번스의 시를 베껴 접시 뚜껑에 기대 놓고 요리를 하면서 읽었답니다. 식사 때도 읽었고, 방앗간에 가기 전에도 읽었지요. 디킨스도 읽고 스콧‘도 읽고 헨리 조지‘와 불워 리턴‘ 엘라 휠러 윌콕스‘와 앨리스 메이넬도 읽었으며, <프랑스 혁명사책을 한 권 구했으면, 하지만 칼라일의 것은 말고〉라는 소원을 말하는가 하면, 중국에 대해서는 버트런드 러셀을 읽었 - P221

고, 윌리엄 모리스와 셀리와 플로렌스 바클리, 그리고 새뮤얼 버틀러의 『노트북Note Books」도 읽었어요. 그녀들은 굶주림에서 나오는 무차별적인 식욕으로 과자와 소고기와 파이와 식초와 샴페인을 한입에 삼켜 버리듯이, 그렇게 왕성한지식욕을 가지고서 읽어 댔습니다. 당연히 그런 독서는 토론으로 이어졌지요. 젊은 세대는 빅토리아 여왕이라 해도 자식들을 떳떳이 키워 낸 정직한 잡역부 여성보다 나을 게 없다.
고 말할 만큼 대담해졌어요. 그녀들은 남성 모자의 테두리에똑바른 바늘땀을 박아 넣는 것이 여성의 삶에서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를 느낄 만큼 용감해졌습니다.
그녀들은 토론을 시작했고, 공장 마룻바닥에 모여 초보적인토론 모임을 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든 <테두리박기 > 여공들도 지금까지의 신념에 회의를 품고 세상에는똑바른 바늘땀을 박는 일과 빅토리아 여왕 외에 다른 이상들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실로 낯선 사상들이그녀들의 머릿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지요.  - P222

조합은 남편과 자식이 있는 나이 든 여성들에게, 한때 베스널 그린의 소녀에게 깨끗한 흙이 주었던, 또는 모자 공장의 소녀들에게 언덕 위로 해 뜨는 광경이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을 주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선 조합은 그녀들에게 무엇보다도 갖기 힘든 것을, 그녀들이 끓는 냄비나 우는 아이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분히 앉아 생각할 수 있는 방을주었습니다. 이윽고 그 방은 거실이자 회의실일 뿐 아니라,
한데 머리를 두고 자신들의 집과 삶을 개조하고 이런저런 개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작업장이 되었습니다. 회원 수가 늘어 20~30명의 여성이 매주 모이게 되자, 아이디어가 늘어나고 관심의 폭도 커졌습니다. 그녀들은 자신의 수도꼭지와자신의 싱크대와 자신의 긴 작업 시간과 적은 급료에 대해토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 전체의 교육과 조세와 노동조건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지요. 1883년 애클랜드 부인의거실로 쭈뼛거리며 모여들어 바느질을 하며 조합 간행물을소리 내어 읽던> 여성들이 시민 생활의 제반 문제에 대해 대담하고 권위 있게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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