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포


누군가 또는 뭔가의 1백 주년을 기념하는 사람은 자신이사라져 가는 유령을 평가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 다가오는 해체를 예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로빈슨크루소』의 경우에는 그런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1919년 4월 25일에 『로빈슨 크루소』가 2백 주년을 맞이한다는 사실은 아직도 그 작품을읽는가 또 계속 읽을 것인가 하는 통상적인 논의가 아니라,
오히려 영구 불멸의 『로빈슨크루소』가 나온 지 그렇게 짧은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데 대한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니말이다. 이 책은 한 개인의 노력의 산물이라기보다 종족 전 - P31

체가 만들어 낸 익명의 소산 중 하나로 보인다. 그 2백 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스톤헨지의 세월을 기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우리의 이런 반응에는 아마 다들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읽어 주는 로빈슨크루소」를 들었고, 그래서디포‘나 그의 이야기에 대해 마치 그리스인들이 호메로스에대해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 든다는 사실도 한몫했을것이다. 디포라는 사람이 있었다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으며,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가 손에 펜을 든 어떤 사람의 작품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언짢아지든가 아니면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인상이야말로 가장깊이 새겨져 가장 오래 남는 것이니 말이다. 대니얼 디포라는 이름은 로빈슨 크루소』의 표지에 나올 자격이 영 없어보인다. 그러니 이 책의 2백 주년을 기린다는 것은 마치스톤헨지가 아직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 그것이 여전히건재함을 불필요하게 상기시키는 일이 될 터이다. - P32

 우리는 디포의 전기‘를 쓴 라이트 씨가 이런 소설들은<응접실 테이블용 작품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에 동의해도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용한 가구를 취향의 최종 심판자로 삼는 데 동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작품들이 겉보기의조야함이나 『로빈슨크루소』의 보편적 인기로 인해 마땅히누려야 할 명성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통탄해 마땅하다. 제대로 된 기념비를 세우려 한다면 적어도 『플랜더스』와 『나의 이름은 디포의 이름만큼이나 깊이 새겨야한다. 이것들은 이론의 여지없이 위대하다고 부를 수 있는몇 안 되는 영국 소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같은 작가의 더유명한 작품의 2백 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 작품들의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 P33

디포는 소설가가 되었을 때 이미 나이가 꽤 들어 :슨‘이나 필딩‘보다 여러해 연장자였으며, 소설이라는 것이모양을 갖추어 출범시킨 최초의 작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구적 역할을 강조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그가 소설을 쓴 최초의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서 소설이라는예술에 대한 특정한 개념을 가지고 소설 쓰기에 임했다는 사실만 말해 두면 될 것이다. 즉, 소설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덕이 되는 교훈을 말함으로써 그 존재를 정당화해야만 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분명 수치스러운 범죄〉라고 그는셨다. <그것은 마음속에 큰 구멍을 내는 일종의 거짓말이다. 그 구멍 안으로 조금씩 거짓말하는 버릇이 들어오는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작품의 서문과 본문에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결코 지어낸 것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에근거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목적은 악인을 회심시키고순진한 자들에게 경고하려는 지극히 고상한 소망에 있음을굳이 강조하고 있다.  - P34

디포가 따분하다고 불평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하찮은 것들에 골몰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는 실로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그리는 위대한 작가에속한다. 그의 작품은 인간 본성의 가장 매혹적인 면이 아니라 가장 지속적인 면에 대한 앎에 기초해 있다. 헝거퍼드 브리지"에서 바라보는 런던, 잿빛에, 심각하고, 육중하고, 오가는 차량과 장사하는 이들의 가라앉은 소음으로 가득한, 배들의 돛과 도시의 탑과 놈들만 아니라면 산문적이었을 풍경 - P43

이 그를 떠올리게 한다. 길모퉁이에서 제비꽃 다발을 파는누더기 걸친 소녀들, 다리의 아치 아래 성냥이니 신발끈이니하는 것들을 참을성 있게 늘어놓는 풍상에 찌든 노파들은 그의 책에서 빠져나온 인물들 같다. 그는 크랩과 기싱의 유파에 속하지만, 그저 엄격한 배움의 장소에 함께 앉은 동학이 아니라 그 유파의 창시자이며 스승이다. - P44

소설 다시 읽기


우선, 지루하다. 우리 국민의 독서 습관은 연극에서 시작된 것인데, 연극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섯 시간 이상 계속무대 앞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 왔다.
『해리 리치먼드』를 다섯 시간 동안 내리 읽어 봤자 빙산의일각일 것이다. 여러 날을 더 읽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전체 줄거리도 희미해지고 책은 맛이 가시며 결국 자책만이남아 급기야는 작가를 비난하게 된다. 그보다 더 짜증스럽고힘 빠지는 일도 없다. 그것이 극복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기질로나 전통으로나 시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시야말로 문학의윗길이라는 믿음이 은연중에 퍼져 있다. 만일 한 시간쯤 책을 읽을 여유가 생긴다면, 매콜리‘보다는 키츠‘를 읽는 편이 낫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물며 소설은 장황하고 그리 유려하지도 못하며 케케묵은 가정사를 다루기 일쑤이다. - P55

소설이 그의 직업이다. 그것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적합한 형식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그것은 아름다움을, 전에 지니지 못했던 섬세하고 고귀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것은 자신을 해방하고 비슷한 무리로부터 구분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유물에 걸리적거리지 않고, 자기가 가장잘 할 수 있는 말을 골라 말할 것이다. 플로베르는 늙은 하녀와 박제한 앵무새를 주제로 삼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응접실 테이블 주위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이다. 나이팅게일과 장미꽃은 추방되었다. 아니, 적어도 나이팅게일은 교통 소음을 배경으로 해서는 전과 다른 소리를 내며, 장미꽃도 아크등 불빛 아래서는 그다지 붉지 않다. 오래된 재료들의 새로운 결합이 있으며, 소설은 그 약점들을 위해서가아니라 그 장점들을 위해 쓰일 때 영원한 이야기의 참신한면모를 강화한다. - P67

러시아인의 관점


체호프를 읽을 때면 우리는 <영혼>이라는 말을 되뇌게 된다. <영혼>이라는 말이 그의 책 곳곳을 누비고 있다. 늙은 주정뱅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쓴다. <너는 군대에서 아주 높아져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됐지만, 네게는진짜 영혼이 없어. (……) 네 영혼에는 아무 힘도 없어.> 정말이지 러시아 소설에서 주된 등장인물은 영혼이다. 체호프에게 있어 영혼은 섬세하고 미묘하며 무수한 기질과 장애에달려 있는 반면,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영혼은 한층 깊이 있고풍부한 것이 되며 격심한 질병과 신열을 불러일으키지만 여전히 주된 관심사이다. 아마도 영국 독자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나 『악령』을 재차 읽을 때 그토록 노력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P79

심지어 반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거기에는 유머 감각이라고는 없으며 희극적인 구석도 없다. 영혼이란 형태가 없다. 지성과도 별로 관계가 없다. 그것은 혼란스럽고산만하고 소란스럽고 논리의 통제나 시의 규율에 전혀 굴복하지 못하는 성싶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은 절절 끓는 소용돌이,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 맹렬하게 맴돌며 우리를 끌어들이는 용오름이다. 그것들은 순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영혼이라는 재료로만 되어 있다. 우리는 원치 않게 끌려들어휘돌아가며 눈이 멀고 숨이 막히고 그러면서도 현기증 나는희열로 충만해진다.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보다 더 흥분된 독서는 없다. 문을 열면 러시아 장군들과 러시아 장군들의 가정 교사들과 그들의 의붓딸들과 사촌들, 그밖에 잡다한 사람들로 가득한 방에 들어서게 된다. 이들 모두가 목청 높여 제각기 극히 사적인 일들에 대해 떠들고 있다. 대관절 우리는 어디 있는 것일까?  - P80

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영혼이라는 저 당혹스러운 액체, 뿌옇고 거품 나는 소중한 것이 담긴 그릇일 뿐이다. 영혼은 어떤 장벽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그것은 넘쳐흐르며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섞인다. 포도주 한 병 값을 치르지 못한 은행원의 이야기가 어느 곁에 그의 장인과 장인이 형편없이 다루는다섯 명의 정부들의 삶 속으로, 우편배달부의 삶과 날품팔이여자의 삶 속으로, 그리고 같은 구역에 사는 귀족 여성들의삶 속으로 퍼져 나간다. 도스토옙스키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지쳐도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다. 우리를 덮치는 이 뜨겁고 펄펄끓어오르는 것, 마구 뒤섞이고 경이롭고 끔찍하고 숨 막히는것 - 이것이 인간 영혼이다. - P83

이제 남은 이는 모든 소설가 중에 가장 위대한 소설가이니, 『전쟁과 평화』의 작가를 달리 어떤 말로 부를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톨스토이 역시 이질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외국인으로 느껴지는가? 적어도 우리가 그의 제자가 되어우리 자신의 기준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우리를 의심과 당혹감으로 물러서게 할 어떤 기이한 면이 그에게 있는가? 그의 첫마디에서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보는 것을 보며,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즉 안에서 밖으로 나가기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우편배달부가 아침 8시에 문을 두드리고, 사람들은 저녁 - P83

영혼이 도스토옙스키를 지배하듯이, 톨스토이를 지배하는 것은 삶 그 자체이다. 모든 찬란하고 빛나는 꽃잎의 중심에는항상 이 <왜 사는가>라는 전갈이 숨어 있다. 책의 중심에서는 항상 올레닌, 피에르, 레빈‘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모든경험을 자신 안에 거둬들이고 세상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려보며, 그것을 즐기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의 욕망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산산조각 내는것은 사제가 아니라 그 욕망들을 아는 사람, 자신도 그것들에 탐닉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그것들에 조소할 때,
세상은 발밑의 먼지요 재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의 즐거움에는 두려움이 섞여 든다. 세 사람의 위대한 러시아 작가 중 가장 우리를 매혹하면서도 반발하게 하는 것은 톨스토이이다.
하지만 마음은 태어난 장소의 영향을 받는 법이니, 러시아 문학처럼 이질적인 문학과 마주치게 되면 한껏 날개 쳐진실에서 멀어지려 할 것이 분명하다. - P86

미국 소설


외국 문학으로의 소풍은 해외여행도 많이 비슷하다. 주민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광들이 우리에게는 놀랍게 보인다. 그 언어를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나면서부터 그말을 써온 사람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소리는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는마음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찾아다니며 그것이야말로 프랑스나 미국 정신의 본질이라고 선언하고는 앞뒤 없는 맹신 위에 이론의 구조물을 쌓아올린다. 나면서부터 프랑스인이나 미국인인 사람들이 그런이론을 들으면 재미있어하거나 짜증스러워하거나 아니면잠시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 P97

테크닉, 자기 재료를 형성하고 통제하는 힘을 결여하고있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견지에서 『배빗』은 금세기에 영어로쓰인 어떤 소설 못지않다. 그러므로 관광객은 양단 간에 선
‘택해야 한다. 즉, 영국 작가와 미국 작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라고는 없으며 그들의 경험은 워낙 비슷해서 같은 형식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과, 루이스 씨는 자신을 영국 문학에 맞추어 형성했으므로 ㅡH. G. 웰스가 그 명백한 스승일것이다 ㅡ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미국적 특성들을 희생시켰다는 주장 말이다. 하지만 만일 작가들이 녹색인지 파랑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면, 독서의 기술은 훨씬 더 단순하고 덜 모험적이 될 것이다. 루이스 씨를 연구하면 할수록 드는 생각은 표면적인 판단은 기만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외적인 침착성은 내부의 갈등하는 요소들을 거의 통제하지 못하며, 색깔들은 희미해져 버린다. - P105

 우리는 프랑스나 영국의 문학이 더 단순하다고, 모든 현대 문학이 이 새로운 미국 문학보다 더 단순하게 요약되고 이해하기 쉽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뿌리에는 불화가 있으니, 미국인의 자연스러운 성향은 처음부터 엇나갔던 것이다. 민감할수록 영문학을 읽어야 하는데, 영문학을 읽을수록그는 자기 입으로 말하는 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자기 것이아닌 경험을 표현하고 자기가 알지 못했던 문명을 비추는 그거대한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수수께끼와 당혹감에 더 민감해진다. 굴복이냐 저항이냐의 선택을 해야 한다. 더 민감할수록, 아니 적어도 더 세련되었을수록, 헨리 제임스 같은 이들, 허게셰이머 같은 이들, 이디스 워튼 같은 이들은 영국의편을 들어 영국 문화를, 전통적인 영국 예법을 과장함으로써, 그리고 그 사회적 차이들을 너무 심하게 혹은 엉뚱하게강조함으로써 벌금을 치른다. - P112

 책을 덮고 영국의 들판을내다보노라면, 귓전에 새된 소리가 들려온다. 3백 년 전에그 부모가 바위투성이 해안에 버린, 그래서 자신의 노력만으로 살아남은 아이의 첫 정사, 첫웃음의소리이다. 그는 다소생채기가 났지만 자존심이 강하며 따라서 소심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그는 이제 성년의 문턱에 서 있다. - P116

소로


백년 전인 1817년 7월 12일,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연필 장수의 아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태어났다. 전기 작가들은 그의 명성보다는 그의 인생관에 대한 공감 때문에 매료되어 호의적인 전기를 써주었지만, 그의 책들에서 발견할수 없는 것은 그다지 말해 줄 수 없었다. 그의 삶에는 이렇다할 사건이 없었다. 그 자신이 말하듯 <그냥 집에 있는 것이타고난 재주였다. 그의 어머니는 동작이 재고 달변이었으며 혼자 쏘다니기를 워낙 좋아해서 자식 중 하나는 하마터면들판에서 세상에 태어날 뻔했다고 한다. 반면 아버지는 <작고 조용하고 우직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최고의 연필을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의 비결은 빵은 흑연과 백토와 - P117

물을 섞은 것을 밀대로 밀어 납작하게 만든 다음 가늘고 길게 잘라서 태우는 데 있었다. 하여간 그는 근면 절약하고 또주위의 도움도 좀 받아서 아들을 하버드에 보낼 수 있었다.
소로 자신은 그런 값비싼 기회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가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것은 하버드에서이다. 한우가 기억하는 그의 소년 시절모습에서 우리는 나중에 성인이 된 그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 P118

그는 손재주가뛰어나서, 연중 40일 정도만 일해도 1년의 나머지 기간을 놀며 지낼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옛 인류의 후예라해야 할지, 아니면 장차 도래할 인류의 첫 사람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에게는 강인함과 극기심, 인디언과도 같이때 묻지 않은 감각과 동시에, 자의식과 까다로운 불만과 극히 현대적인 감수성이 있었다. 때로 그는 인간에게 가능한이상의 것을 지각하는 능력 때문에 여느 인간 이상의 능력을지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박애주의자도 인간에게 그보다 더 큰 기대를 걸거나 더 고결한 소임을 고취하지 않았다. 가장 고상한 정열과 봉사의 이상을 지닌 이들이 가장 기꺼이 주는 능력을 지닌 법이다. 삶은 그들에게 가진 것을 다내 놓으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낭비하기보다 아껴 두라고하지만 말이다. 소로는 아무리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해도,
여전히 그 이상의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 터이다. 어떤의미로 그는 언제까지나 만족하지 못했을 터이니, 그것이 그가 더 젊은 세대의 벗이 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는 앞날이 아직 창창한 나이에 죽었으며, 오래 병석에 - P130

서 갇혀 지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연으로부터 침묵과 인내를 배운 터였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거의말한 적이 없다. 자연으로부터 그는 만족하되, 생각없이 이기적으로 만족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지혜를건강하게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그가 말하듯, 자연에는 슬픔이라는 것이 없다. <나는 가능한 한 삶을 즐기고 있으며,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말했다. 마침내 고통 없이 죽음을 맞아들였을 때, 그의 마지막 말은 <큰사슴>과 <인디언>이었다. - P131

조지 기싱


마침내 중년에 이르러 그가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을 때, 한 친구가 죽으면서 연 3 백 파운드의 연금을 남겨주었다. 그리하여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는 원하는 글올쓸 수 있게 되었고 이 사색의 기록과 그에게 가장 소중하게 된 책들을 마지막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이 글의 매력은 건실하고 담담한 데 있다. 마치 날이 저문 후 더는 소망하거나 두려워할 장래의 빛이 없을 때 비쳐드는 잿빛 미광과도같다. 그런데도 그 최종적인 인상은 결코 울적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아 그토록 외적인 사치라고는 없는 삶이 그 자체로 충분할 수 있는 선물들을 발견한다는 것이 찬사를 받을만하다. 그는 드물게 빼어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머리는 우수한 편이었고 책을 좋아했지만, 오로지 그 두 가지재능만으로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재능으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 사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적어도 그가 독립적이고 무해한 인간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그처럼 불굴의 삶에 고작 이런 형용사들을 쓴다는 것은 다소 빈약하게보이기도 하나, 그런 형용사들에는 흠결 없는 진실함의 매력이 있다. 헨리 라이크로프트는 모든 감정, 모든 생각, 모든책을 꾸준히 깎아 내 고갱이만 남겨 놓았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은 진실 아닌 것을 느끼거나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는 듯 - P135

이 말이다. 그러고서 남은 것은 강하고 변함없는 열기를 지닌 순수한 체질이니,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빛나게하여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든다. 그런 재능조차도 그가 필요로 하는 오죽잖은 것들을 갖게 해주기에 충분치 않았다는것은 가혹한 일이다. 그는 온기와 빛을 얻기 위해 가진 책을 팔아야 했고, 시골에 가는 즐거움도 없이 지내야 했다. 이런 희생은 다른 많은 희생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다시금 그는 자신의두뇌를 팔아야 했으니, 이중적인 의미에서였다. 만일 그가 자신의 두뇌를 제대로 사용할 방법이 있었더라면 그 가치가 줄어들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모든 깎아 냄은 의심할 바 없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으니, 마침내 행복할 기회가 왔을 때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마저 현저히 약해져 있었다. 젊은 날의 고된 투쟁, 그나마 독서와 산책에서 작은 기쁨이나마 얻기 위한 투쟁으로 근육을 혹사한 나머지, 그는 말년에자신을 둘러싸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보물들을 제대로 붙잡을수 없었다. 마침내 봄에, 아직 그것을 맛볼 시간이 있을 때, 그가 느끼는 기쁨은 그와 함께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으로 떨린다. 그는 자신에게 <이 신성한 평정의 시간에 대해 무엇인가 재난으로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아닌지> 자문한다.‘
- P136

이처럼 풍부케 하는 과정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항상낯설고 새로운 섬들이 어딘가 먼바다에 떠다니고 있어서 탐험과 보물찾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는 <고대 소아시아지리>가 있고, 저기에는 이집트가 있다. 모든 역사가 심연으로부터 그림들을 불러냈다가 도로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한다. 하지만 아무러면 어떠랴. <아마도 내가 평생 고치지 못할 결점은 나로 하여금 지식을 찾게 하는 마음의 습성일 것이다. > 마지막에 가서 그는 <여러 해를 더 살고 싶다고 말한다." 다가올 해들이 그에게 새로운 것들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해서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수동적인 육신과 온세상을 넘나드는정신, 마침내 돌아와 그가 택한 그 한구석에 정착하는 정신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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