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닐거나 쏘다닌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에게 더 큰의미가 있었다는 것은 그의 친구 몇몇이 각기 나름으로 그원정들에 대한 회고담을 내놓으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는 아침 식사 후에 혼자서 또는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출발하여 저녁 식사 직전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 도보 여행이 성공적이었을 때는 커다란 지도를 꺼내 새로운 지름길을 붉은잉크로 표시해 두었다. 그는 온종일 동행과 한두 마디 이상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황야를 돌아다닐 수 있었던 모양이다. - P12
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항상 그 배경에 있었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의 일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고 일어난 일들을 잘 기억하지도못했지만, 어떤 사람을 묘사할 때면 그는 유명 무명의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냈다ㅡ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불과 두세 마디로 정확하게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그의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일 때도 있었다. 자신에게 진실하게 비치는 느낌은 누구보다도 존중했지만, 기존의평판이나 전통적인 가치들은 예사로 뒤엎고 무시하는 특유의 버릇이 있어, 당혹스럽고 때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추상적인 상념에 빠져 있는 듯하다가 문득 깨어나 그 선명한 푸른 눈을 뜨고서 자기의견을 말할 때면, 도저히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런 버릇은- 특히 그가 점점 귀가 어두워져서 그렇게 중얼대는 의견이 남에게도 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불편한 것이 되었다. - P15
그의 딸들도- 비록 그는 여성의 고등 교육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똑같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마땅했다. 한때 딸 하나가 담배 피우는 것은 무섭게 꾸짖었지만 그의 견해로는 여성이 담배 피우는 것은 좋은 버릇이 못 되었다 - 그녀가 화가가 되어도 좋은지는 그저 묻기만하면 되었다. 그는 딸이 자기 일을 진지하게 여기기만 한다면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주겠노라고 확답해 주었다. 그는딱히 그림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약속을 지켰다. 그런 종류의 자유가 천 개비 담배보다 낫다. 문학이라는 아마도 좀 더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오늘날도, 열다섯 난 딸이 따로 검열하지 않은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락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에 대해 의심하는 부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허락했다. 몇몇 사실에 대해, 그는 아주 간략하게, 아주수줍게 언급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읽고 싶은 것을 읽으라고 말해 주었고,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라하고무가치한〉, 하지만 분명 다양했던 그의 많은 책들을 허락받지 않고도 다 읽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책들을 좋아하니까읽는다는 것, 실제로 좋아하지 않는 책들을 좋아하는 척하지 - P19
말아야 한다는 것 - 그것이 독서에 관한 그의 유일한 지침이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능한 한 적은 말로, 가능한 한 명료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 글쓰기에 관한 그의 유일한 지침이었듯이 말이다. 그밖의 다른 것은 스스로 배워야 할 터였다. 하지만 비록 그가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거나지식을 과시한 적은 결코 없었다 해도, 그것이 뛰어난 학식과 폭넓은 경험을 지닌 사람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정말이지 철없는 아이일 것이다. 언젠가 본드가의 양복점 주인이 자기 가게 앞을 지나는 아버지를 가리켜 <좋은 옷을 좋은 줄도 모르고 입고 가는 신사분>이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 P20
실제로 거리가 단점이기는 했다. 우리는 여름에만 그곳에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골 생활은 1년에두 달, 길어야 석 달로 제한되었다. 다른 달들은 내내 런던에서 지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누렸던어떤 것도 콘월에서 보낸 여름만큼 대단하고 중요하지는않았다. 런던에서 몇 달씩 지내고 난 뒤에 콘월로 떠나게 되니 시골 생활이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우리 집과 우리정원이 있고, 만과 바다와 황야가 있고, 클로지, 헤일스타운늪지, 카비스 베이, 릴런트, 트리베일, 제너, 거나즈 헤드 같 - P24
은 곳들이 있고, 도착한 첫날 밤 노란 차양 뒤에서 파도가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모래를 파고,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바위틈을 뒤져 빨갛고 노란 말미잘이 촉수를 하늘거리는 것을, 아니면 젤리처럼 바위에 들러붙은 것을 보고, 물웅덩이에서 파닥거리는 작은 물고기를 발견하기도 하고, 별보배고둥을 줍기도 하고, 식당에서 문법책을 대충 훑으며만의 불빛들이 바뀌는 것이나 에스칼로니아 잎이 회색이나밝은 녹색인 것을 바라보고, 마을로 내려가 1페니짜리 압정한 통이나 주머니칼을 사고, 라 씨 - 하인들의 말에 따르면, 찰랑이는 곱슬머리 가발을 쓴 부인과 <광고를 통해 결혼했다는 ㅡ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가파르고 좁은 골목에서 나는 온갖 생선 냄새를 맡고, 생선 뼈를 물고 다니는무수한 고양이들과 집 바깥에 돋운 계단 위에서 구정물을수채로 쏟아 버리는 여자들을 보고, 날마다 노란 막이 덮인콘월 크림을 먹고, 블랙베리에 흑설탕을 듬뿍 뿌려 먹고・・・・・・ 이런 기억들로 몇 페이지라도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세인트아이브스에서 보내는 여름이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인생 서막이 되게 했다. - P25
깃발들이 펄럭이고, 총성이 울리고, 배들이 질주하고, 수영 선수들이 물에 뛰어들거나 갑판 위로 끌어 올려지는 등아주 신나는 광경이었다. 세인트아이브스 사람들이 모여서구경하는 곳은 테라스 끝의 말라코프라는 이름의 팔각형 뜰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크리미아 전쟁 때 만들어졌을 마을에서 유일하게 장식적인 장소였다. 세인트아이브스에는오락 시설이 딸린 부두나 산책로가 없고 오로지 이 자갈 깔린 팔각형 뜰뿐이었고, 거기 있는 몇 개의 돌 벤치에는 특유의 푸른 세타를 입은 은퇴한 어부들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잡담을 하곤 했다. 레가타 날은 내 기억 속에 그 머나먼 음악소리와 작은 깃발들이 달린 줄과 돛을 올린 배들, 그리고 모래 위에 점점이 흩어진 사람들과 함께, 마치 한 폭의 프랑스 그림처럼 남아 있다. - P33
한 번은 우리가 성대와 가자미를 연거푸 낚아 올리며 한참이나 열중해 있자,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다음에 너희가낚시하러 올 때는 난 오지 말아야겠다. 물고기들이 잡히는걸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너는 원하면 와도 된다.> 완벽한교훈이었다. 무엇을 비난하거나 금지하는 대신 단지 자신의느낌을 말하고, 그 점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게 한 것이었다. 미끼를 문 물고기가 낚싯줄을 휙 잡아채는느낌은 내가 그때까지 알던 가장 짜릿한 전율을 주었지만, 아버지의 말에 그 매력은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아무 불평없이 낚시를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열정의 기억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그런 활동의 즐거움을 떠올려 볼수있다. 사람이 모든 경험을 충분히 해볼 수는 없을진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그려 보는 무엇을 키울 수 있는 무한히소중한 씨앗 중 하나이다. 종종 우리는 그런 씨앗으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다.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일어날 수도 있었을 일의 씨앗 말이다. 나는 그렇듯 <낚시>를 다른 여러 일시적으로 스쳐 간 일들, 예컨대 런던 거리를 거닐 때 지하층에홀긋 던지는 일별 같은 것들과 함께 분류해 두고 있다. - P39
세인트아이브스 서쪽 해안에 있는 트리베일이라는 내포(內浦)까지 도보 여행을 갔던 길에, 우리 일행이 집을 향해출발하기도 전에 가을 저녁이 저물기 시작했다. 어스름 속에서도 풍경은 너무나 선명하여 다들 말없이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바다를 향해 장엄하게 줄지은 거대한 절벽들이밤과 대서양의 파도를 맞이하며 서 있었는데, 마치 태곳적명령에 다시 한번 순종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의연하고 고고한 모습이었다. 이따금 멀리서 등대의 불빛이 안개를 뚫고황금빛살을 던지며 문득문득 바위들의 거친 형태를 드러내곤 했다. 그 광경만으로도 아직 6~7마일을 더 걸어가기에는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P43
창밖에서 짓누르는 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잠들지 못하고 밖에 나와 어둠 속에 팔이라도 뻗어 보는 것이리라. 불빛은 그 주위에 밀어닥치는 밤의 무한한 파도에비하면 얼마나 미약한 것일까! 바다의 배도 외롭겠지만, 이황량한 땅에 닻을 내리고 밤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물살에 홀로 노출된 이 작은 마을은 훨씬 더 외로워 보였다. 그런데도, 이 낯선 분위기에 일단 익숙해지자, 그 안에는크나큰 평화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마치 실체의 세계에서 유령과 정령들만이 나와 돌아다니는 듯했다. 언덕이 있던 자리에는 구름이 떠돌았고, 집들 대신 불꽃들만이 남았다. 눈은현실의 거친 외관에 긁힘이 없이 밤의 심연에 맑게 씻겨 기 - P46
운을 되찾는 것만 같았다. 대지는 그 무한한 세부들과 함께모호한 공간으로 용해되었다. 그처럼 감각이 새로워지고 민감해진 자들에게는, 집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불빛들은 너무 강하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막 날아오르다 말고 붙잡혀 새장에 넣어진 새들과도 같았다. - P47
이제 나의 아버지를 묘사해 보겠다. 네사와 내가 그 이상한성격의 작렬에 아무 보호막 없이 노출된 것은 1897년 스텔라가 죽은 후 1904년 그 자신이 죽기까지의 7년 동안이었다. 스텔라가 죽었을 때 네사는 갓 열여덟 살, 나는 열다섯 살 반이었다. 내가 왜 <노출되었다고 하는지, 그리고 그를 왜 <이상한 성격>이라고 하는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어린마음과 몸의 닳아버린 껍질 속에 다시 들어가 살아야만 할 것이다. 나는 이제 당시의 내 나이보다는 그의 나이에 훨씬 더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때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하는지? 아니면 그 엄청나게 중요한 관계의 각을 뭉개 버려, 그의 관점에서도 나 자신의 관점에서도 묘사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인지? - P55
나는 이제 모퉁이를 돌아 그를 보고 있다. 정면으로 보고 있지않다. 더구나, 『등대로』에서 어머니에 대해 글을 씀으로써 그추억의 힘을 상당히 지워 버린 것처럼, 거기서 아버지의 추억도 많이 지워 버렸다. 하지만 그도 여러 해 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에 대해 쓰기까지는, 입술이 절로 달싹이면서 그와 논쟁을 벌이고, 그에게 화를 내고, 그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곤 했다.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내 속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었던지, 그중 어떤 것들은 여전히 말할 만하다. 가령, 네사가매주 수요일에 검사받던 가계부 얘기를 꺼낼 때면, 나는 여전히 그 말 못하고 쌓인 해묵은 분노를 온몸으로 느낀다. - P56
외그의 책들을 통해 나는 작가로서의 아버지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네사와 내가 집안 살림을 물려받았을 때, 나는 사교적인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작가로서의 아버지는 그를 책에서만 만나게 된 지금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집요했다. 그 무렵 나를 지배했던 것은 폭군적인 아버지 -까다롭고, 격렬하고, 연극적이고, 노골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연민에 빠진, 귀가 먹은, 애절한 - 애증이 교차할수밖에 없는 아버지였다.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에 갇혀 있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만일 열다섯 살의 내가 과민하고겁 많은 어린 원숭이로, 노상 침을 뱉거나 견과를 깨뜨려먹고, 껍질을 사방에 던지고, 잔뜩 찌푸린 채 꿍얼거리다 어두운 구석으로 훌쩍 몸을 날려, 우리 이쪽저쪽으로 그네를 - P69
타며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고 하자. 그는 우리 안을 어슬렁대는 시무룩하고 위험한 사자였다. 뭔가 기분이 언짢고 마음이 상해 화가 잔뜩 나서, 갑자기 사나워졌다가는 또 아주겸손해지고, 그러다 또 위엄을 부린다. 그러고는 먼지투성이에파리가 들끓는 우리 한구석에 드러눕는 것이다. 나는 1897년부터 1904년까지 그 불행했던 7년 앞에서 음츠러든다. 그 당시 우리의 삶만큼 고통에 시달리고 초조하고<비존재non-being〉로 무감각해졌던 삶도 별로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저 두 차례의 불필요한 타격‘ 때문이었다. 그 시절을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을 두 사람을 잔인하고 무의미하게 죽여 버린 무차별적이고 생각 없는 도리깨질 때문이었다. - P70
그에게 어떤 사상을, 가령 밀이나 벤담이나 홉스의 사상을 분석해 보라고 하면, 그는 (메이나드ㅅ가 내게 말해 준 대로) 예리함과명석함과 공정성의 본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인물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그는 극히 조야하고 유치하고인습적이라 그의 인물 묘사는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리는 그림만도 못할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려면, 케임브리지의 편파적인 교육이 내는 절름발이 효과를 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의 작가라는 직업과 강도 높은 두뇌 노동의 폐해도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결코 육체노동을 한 적이없었다. 그 두 가지 영향이 음악이나 미술에는 소질이 없고청교도적으로 키워진 바탕에 어떻게 작용했을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과 그것이 어떤 감수성을 강화하고 다른 어떤 감수성을 위축시켰을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 P76
그래서 그런 격렬한 분노의표출로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발작에는무엇인가 맹목적이고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데가 있었다. 로저 프라이" 는 문명이란 자각을 의미한다고 말한 적이 있거니와, 아버지는 그처럼 자각이 결여되었으니 깨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아무도 그를 깨우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괴로워했고, 자기감옥의 벽들을 통해 이따금 깨달음의 순간들을 얻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즉, 자기 본위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을 그토록 잔인하게 해치지 못하며, 어떤 것도 어쩔 수 없이 거기 맞닥뜨린 사람들을 그토록 심하게 상처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 무렵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즉, 아버지와 우리의 나이차 때문에 가로놓여 있던 심연 말이다. 하이드 파크게이트의 응접실에는 서로 다른 두 시대, 즉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 P77
우리 사이에는 완충 역할을 할한세40대가 있어야만 했다. 그가 격노할 때 우리 눈에 왠지 우스꽝스럽게 비쳤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는눈으로 그를 보았다. 우리가 본 것은 이제는 열여섯이나 열여덟 살 난 소년 소녀에게도 너무 명백하여 설명할 필요조차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철저히과거의 권력 아래 놓여 있었다. 버네사와 나는 둘 다 타고난모험가요 혁명가였음에도, 우리보다 50년은 더 늙은 사회의지배하에서 살았다. 우리의 투쟁을 그토록 힘들고 격렬하게만든 것은 이런 기묘한 사실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사회는여전히 빅토리아 사회였다. 아버지 자신이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었다. 조지와 제럴드는 빅토리아 사람들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두 가지 싸움을 치러야만 했다. 개인적인 싸움과 동시에 사회적인 싸움을 말하자면, 우리는 1910년대에, 그들은 1860년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 P78
음악은 아직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을 흔히 듣게되는데, 그 말을 가장 잘 입증해 주는 것은 음악 비평의 애매한 상태이다. 음악 비평의 전통은 아주 얕으며, 음악 그 자체가 워낙 생동하는 예술이라 그것을 다루고자 하는 이들을 압도해 버리는 것만 같다. 문학 비평가는 놀랄 일이 별로 없으니, 거의 모든 문학 형식이 그 이전 것과 비교 가능하고 모든성취를 전부터의 기준에 비추어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에서 슈트라우스나 드뷔시‘가 하고 있는 일을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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