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이후에 사라진 언어의 화석이 그곳에서는 아직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馬)의 마늘이란 뜻이다. 여리고 아름다운 꽃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데, 그 여린 꽃 또한 생명력이 강해서 예전부터 제주 사람들의 괄시를 받으면서도 아직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밭에 번지는 수선화를 그곳농부들은 호미로 캐어서 밭둑으로 던져버리곤 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그곳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 광경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시를쓴 것이 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수선화는 그 던져진 돌더미위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모진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러므로 수선화는 이중적이다. 가녀리고 아름답지만 그 뒤에 아주 강한 삶의 의지를 감추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의 식물 사전에는 수선화가 화훼식물로 분류되어 있다. 그것은 야생의 수선화는 없다는 뜻이다. - P14
그러나 제주 남녀 대정 땅의 수선화는 엄연히 야생으로 여러 대를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머나먼 옛날 중국 땅으로부터 해류에 실려온 모진 뿌리들이 제주 땅에 정착한 것이리라. 수선화는 저, 물에비친 아름다운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황홀해하다가 빠져 죽은 미소년 나르시스가 꽃으로 피어났다는 신화의 바로 그 꽃이다. 그래서꽃말이 "자기애‘ 이다. 바닷가뿐만이 아니라 그때쯤의 볕바른 한라산 자락에서는 복수초가 샛노랗게 피어나며 새봄의 깃발을 수줍게 편다. 눈 속에서도 - P14
핀다고 하여 설련화(蓮花) 또는 얼음새꽃이라고도 하는 복수초는온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두루 핀다. 그러나 중부지방에서는 4, 5월에야 그 꽃을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의 그것은 꽃이 먼저 피었다 진뒤에 잎이 나지만, 제주의 것은 꽃과 잎이 함께 핀다. 그러므로 초록빛 후광을 두른 제주의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 이 꽃 또한 저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가 서양 이름이다. 유럽의 복수초는붉은빛인데, 아도니스의 피가 꽃이 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서양에서는 꽃말이 "슬픈 추억이다. 그러나 그 신화와 관계없는동양에서는 전혀 다른 꽃말인 "영원한 행복" 이다. 서양과 동양은 그만큼 멀고 멀다. 짐승이건 식물이건 간에 다 같은 종족끼리 모여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제가끔 대를 이으며 번성하기 좋은 조건을 찾아서정착한다. 수선화 무리, 복수초 무리 같은 몇백 년 또는 몇천 년에걸쳐서 이루어진 그런 무리들은 이제 이 땅에서 서서히 와해되어가고 있다. 산중을 가로지르는 느닷없는 길, 그리고 개발이라는 이름의 무참한 파괴에 맞설 대책이 작고 아름다운 꽃들에게는 없다. - P19
그에 견주면 산과 들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나마 기나긴 겨울잠을자고 스스로 깨어나 꽃피우는 얼레지, 둥굴레, 원추리, 은방울꽃은행복하다. 그래서 저 자연의 품속은, 자연의 것은 더 아름답다. "자연을 보호하자"라고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물론 없다. 그것을 있는 자리에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하면 된다. 그 것을 자기 집, 자기 방으로 못 옮겨서 안달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한 해에 두어 번 들이나 산의 숲에 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의 모든 꽃은 그 사람의 것이다. 북한산, 오대산, 태백산, 설악산의 숲에서, 숲의 녹음이 짙어지기 전에 풀들은 서두른다. 그늘이 덜 질 때 빨리 꽃피우고 열매 맺으려고 숨가쁘게 뛴다. 그래서 숲 그늘의 풀들은, 풀꽃들은 날마다다르게 아름답다. - P33
세상이 어수선하기 때문에 식물들 중에도 얼이 빠져서 얼떨떨해하는 것들이 더러 있다. 온도만 비슷하면 언제든지 피는 민들레나따스한 늦가을을 봄인 줄 착각하고 피는 개나리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른 봄에 피는 꿀풀과의 광대나물이 따스한 늦가을에 피어났다가 느닷없이 눈을 맞고 있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때가 아닌 계절에 잘못 피어난 것들은 다행히 기온이 내내 따스하다고 치더라도꽃가루를 매개해주는 곤충들을 만날 수가 없다. 이미 겨울잠에 들었다가도 따스한 기온이면 나와서 돌아다니는 얼빠진 곤충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 얼빠진 것들끼리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봄의 광대나물부터 여름의 꿀풀, 그리고 가을의 꽃향유에 이르기까지 꿀풀과의 꽃들은 차례로 곤충들을 불러들여서 꽃가루를 옮기게 한다. 수정하여 씨를 맺게 하려는 식물들의 종족 보존 본능은 꽃을 아름답고 향내 나며 꿀이 많게 한다. 꽃들은 곤충을 찾아 떠날 수는 없으므로 꽃 빛깔의 파장이나 향내로 멀리 있는 곤충들을 초대하여 꿀을 대접한다. 한갓 미물이라는 곤충들도 먹을 꿀만 밝히는 게아니라, 그 향내와 빛깔과 모양까지도 제가끔 좋아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면서도 작디작은 곤충이 좋아하는 것은다 좋아한다. - P41
복수초도 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이며, 매발톱, 자주종덩굴, 꿩의바람꽃, 동의나물, 작약, 그리고 미나리아재비는 말할 것도 없이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이다. 미나리아재비꽃은 노랗게 무리지어있어서 신선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미나리아재빗과의 다른 식물들처럼 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의 여러 이치들과 크게 다르지않아서, 잘 쓰면 약이 되나 잘못 쓰면 독이 된다. 봄비에 흰 작약 꽃잎이 힘없이 스러져 땅 위에 뒹굴고 미나리아재비꽃의 노란빛이 사위고 나면 이내 여름이다. 봄의 함성은 그렇게 지나가는 바람결에 실려가버린다. - P89
장마철이 지나면 그동안의 흐림을 보상하려는 듯이 해가 작열한다. 그 빛을 받은 식물들은 견디기 힘들어 잠시 시들기도 하지만 영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식물들은 막바지의 결실을 위해서 그 뜨거운 빛을 묵묵히 소화한다. 그래서 여름에 피는 꽃들은 빛깔이 더 선명하다. 고원지대의 한여름은 뜨겁고 밝은 해와 뭉게구름이 장대한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다. - P90
봉선화과의 학명은 임파티엔스(Impatiens)인데, "참지 못한다"는뜻의 라틴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래서 꽃말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이다. 그런데 그 말은 실제로는 "나를 건드리세요" 라고 유혹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씨앗이 여물었을 때 건드리면 탄력 있는 껍질이 터지면서 씨앗들이 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앗이 무거워서 그리 멀리 튀지는 못한다. 한해살이 풀이면서도 한곳에 무리지어 사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높아가는 하늘에 비낀 저녁노을이 펼쳐졌다. 그것은 그 하늘 아래의 모든 것에게 가을이 왔다고, 서두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 P107
참 더웠다. 지난 여름은 그래서 이 가을이 더 반갑다. 잎들은 눈부신 빛깔로 일생을 끝낸다. 저물어가는 숲을 잠깐 밝하는 저 물든 잎들의 아름다움은, 해질 녘 대기를 물들이는 장엄한노을과 같다. 해가 차츰차츰 짧아지고, 아침저녁의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하면, 나무들의 시계는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포기할 때는 포기하자. 더 버티다가 느닷없이 겨울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빛깔도모양도 내보지 못하고 쪼그라든다. 나무는 내년을 기약하지만, 올해의 잎에게는 올해 가을이 모든 시간의 끝이다. 이 세상 한 귀퉁이의 저물어가는 작은 산비탈을 잠깐 밝히다가, 실바람의 도움으로 미련 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눈부신 나뭇잎들은 이렇게 살랑살랑속삭인다. 그렇다고 모든 종류의 잎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낼때라고 해서 다 아름답지는 않다. - P117
싱그러운 풀빛 잎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일렁이는 봄빛을 받은 푸른 파장은 현란한 빛으로 번쩍인다. 봄빛을 받고 어른거리는 생명의 빛깔은 눈부시다. 우리는 그 빛깔을 모두 "푸르다"고 한다. 그러나 푸르름은 초록빛이다. 풀빛이다. 그런 풀빛은 다 푸른빛에 노란빛을 합한 것이다. 그 비율에 따라 풀빛은 몇백 가지나 된다. 거기에 먹 또는 붉거나 흰빛이 아주 조금이라도 섞이면 또다른 풀빛이된다. 나무에 따라서, 풀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그 풀빛은 다 다르다. 푸른 잎으로 된 배경 없이, 냅다 꽃부터 피운 성질 급한 것들보다는, 푸른 잎을 후광으로 두르고 핀 꽃들의 빛깔이 더 고와 보인다. 풀빛은 저 혼자 튀기보다는, 꽃들을 더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보색 노릇을 한다. 풀빛은 모든 다른 빛을 떠받치는 보색이다. 들판에서부터 산꼭대기로 스멀스멀 풀빛은 번져나간다. 신록은 생명력이 뻗어나가는 싱싱하고 화려한 풀빛의 잔치이다. - P150
세상에는 늘푸른나무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고, 갈잎나무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 나무들이 그렇듯이 사람으로서의 도리만 지킨다면 어느 쪽이 더 낫거나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무와는 달리, 몇십 년마다 오는 사람의 계절은 양쪽 모두의 모습을 변하게 한다. 그런데 늘푸른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계절에 따른 변화를 담담하게받아들이지만, 갈잎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갈잎나무와는 달리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늘푸른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주름살이 늘고, 머리칼이 낙엽 지듯이 우수수 빠지거나, 머리에 서리가 내려도 그것을 제 나이에 알맞은 모습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갈잎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성형수술을 받기도 하고, 가발을 쓰거나 물을 들이기도 하며, 오히려 변화를 거스르는 경향이 있다. 삶의 가을에 찾아오는 백발은 단풍과 같은 것이다. 나잇값을 하고 사는 이의 곱게 물든 은빛 백발은 투명한 가을 빛을 받은 단풍처럼 아름답다. - P178
작은 씨앗들을 바람에 날려서 멀리까지 이민을 보내기도 하고, 큰 열매들을 잘 익혀서 그 그루터기에 떨어지게 하거나 더러는비탈에 굴려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싹이 돋아나도록 한다. 어떤 식물이건 좋아하는 자리가 있게 마련이며, 제가 좋아하는 곳에 자리잡은 식물들은 그 근처에 많은 동족들을 자라게 하여 군락을 형성한다. 굳이 군락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물이건 그 근처에는 똑같은종류가 얼마쯤은 있기 마련이다. 흡사 우리나라의, 지금은 비록 내력뿐인 곳이 많지만, 씨족부락 같은 것이다. 식물들도 살기 위한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은 동족끼리 벌이는 수도 있으나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솔 숲, 그 빽빽한 줄기 위를 수더분한 곡선의, 꼭 공동으로 쓰고 있는 듯한 지붕 같은 잎들의 어울림이 그런 것의 한 보기가 되겠다. 그러나 키 큰 나무와 키 작은 나무또는 잎이 크고 많은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가 우연히 곁에서 자랄때는, 한 나무가 마침내 죽을 때까지 몇십 년 또는 몇백 년에 걸친 길 - P236
고 집요한 싸움을 한다(비유를 잘못 드는 것일까? 그것은 꼭 사람들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 싸움과 닮아 보인다). 상대방보다 먼저 가지를 길게 뻗고 키를 보다 높게 자라게 하는것은, 시야가 툭 터진 경치를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많은빛과 땅속의 물과 자양분을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그야 그 나무가사는 동안 쾌적하고 튼튼하게 살자는 뜻인데, 그것은 사람들처럼내가 더 잘났다고 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열매를 잘 맺어서 종족을 번성하게 하겠다는 거룩한 본능을 따른 것일 터이다. 꽃이 지고 나서부터 자라기 시작했을 야생의 열매들은 잎이 무성할 때는 애써 찾아보기 전까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해가빨리 설핏해지고 밤이 그만큼 더 길어질 무렵부터 한 해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눈치챈 식물들은 마지막 모양을 낸다. 마지막 잎새들은 장엄한 빛 부심, 그 현란한 빛깔로 차린잔치를 끝내면 훌훌미련없이 날려서 영원한 흙으로 돌아간다. 마침내 앙상한 가지들만 - P237
남아 문득 산이 여위었다고 느꼈을 때 이미 가을은 가버린다. 진한빛으로 여문 작은 열매들은 그럴 때쯤에는 눈으로 쉽게 다가온다. 열매 맺은 나무들은 해거리를 한다. 어떤 해에는 열매가 작고 적게 열리기도 한다. 열매를 크고 많이 맺는 해에 나무들은 섭취한 영양분을 열매를 만드는 데에 다 써버린 것이다. 그런 해의 나무들은거의 자라지 못한다. 열매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을 키우는 데에만 골몰하면 다른 나무들보다 몸집이 허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나무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2-3년에 한 번은 열매를 포기하고제 몸을 돌보는 해가 있는데, 그것을 해거리라고 부른다. 나무들도 나이를 먹으면 노파심이 생겨서 더 강한 본능의 지배를받는다. 그리하여 늙은 나무는 자잘한, 그러나 수없이 많은 열매를맺는다. 그것은 곧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쓰러지기 전에 종자나 많이 퍼뜨리겠다는 뜻이다. 야생이 아닌 과수원의 나무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이 든 나무는 좋은 거름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결코 큰 열매를 맺지 않는다. 작으나 많은 열매를 맺을 뿐이다. 과수의 나이를 셈하고 있던 농부는 나무들이 그런 망녕을 부리기 전에 베어버린다. 그러므로 천수를 다할 수 있는 자연의 나무는, 곧 제 수명을 다하고 나서도 몇 년씩이나 기념비처럼 의연하게버티고 서 있는 고사목은 그에 비하면 행복하고 행복하다. - P242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가령 개미 한 마리라고 할지라도 온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한다던가? 그렇다면 산에서 자란 작은열매들 또한 예외는 아니겠다. 작은 열매, 그 견고하고 정교한 조직과 모양, 그리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지만 그 빛깔! 그 속에 여러 대를 이 세상에서 이어나가게 할 미래의 생명까지 잉태하고 있으니 그 자체가 아름다운 우주라고 하겠다. 산과 들에 자란 식물의 열매는 사람이 먹을거리로 보면 보잘것없으나 볼거리로 보자면 보석보다 낫다. 저무는 계절에 이윽고 빛을 내는 작은 열매, 결실, 한 해의 그 정교한 집약을 보노라면 연말이 다가오는 것이 문득 두렵다. - P243
가을에 수확한얼마 안 되는 곡식들은 긴 겨우내 다 먹어버렸고, 먹을 것이 아직 자라지 않은 배고픈 봄을 그렇게 불렀다. 그때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어린 소나무의 줄기를 벗겨서 먹기도 했다. 그와는 달리 좀 사치스러운 것이지만, 일부의 잘사는 계층에서는 소나무의 꽃가루를 받아서 꿀로 버무린 송화다식을 만들어먹기도 했다. 또한 가을에는솔잎과 함께 쪄서 그 향기를 배게 한 송편을 빚어먹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 사람들의 전통 가옥인 초가집이나기와집들은 다 소나무를 중요한 재료로 삼아 지었다. 그리고 그 집들에는 온돌이라는 난방시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그 중요한 땔감은 역시 소나무였다.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가구들 또한 소나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죽으면 거개가 소나무로 만든 관 속에 넣어져서 그 사람 고향의 솔밭에 묻히게 된다. 그 솔밭에 비 오고 눈 오면서 세월이 흐르고 흐른다. - P266
단풍은 내장산이 최고라고 하더라, 아니다 설악산이라던데, 아니야그보다는...…… 하고 사람들은 외우기를 좋아한다. 단풍조차 자기 눈으로 찾거나, 자기만이 좋아하는 어떤 단풍을 가지기보다는, 이렇다더라는 평판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다. 평판 좋은 곳이 좋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단풍보다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므로 어지러워서 단풍을 보기가 쉽지 않다. 단체로 줄을 서서 내장산이나설악산을 넘는다고 한들 단풍잎을 들여다볼 겨를이 있을 리 없다. - P270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인 낙엽송은 그런 것의 잎보다도 짧고가는 잎에 노랗게 물을 들여서 떠나는 통과의례를 성의껏 치른다. 보잘것없는 잎일지라도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물든 낙엽송은 눈부시며, 절정일 때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소리도 없이 꽃가루처럼날려서 쌓인다. 어째서 남아 있는 것들은 무심한 척하며, 떠나는 것들은 빛깔이 아름답게 차려입는 것일까? 늘 마지막 순간은 처참하게 아름다워야 한다고 떠나는 잎새들은 간곡하게 말한다. 10월 초부터 텔레비전과 신문들은 마치 그해에 처음 벌어진 진기한 일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단풍, 단풍 하며 야단들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덩달아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들처럼 단풍을 따라 몰려다닌다. 어디냐에 따라서, 취향에 따라서 단풍이 절정인 시기는 다르다. 내내 무심한 척하며 버티는 상록수보다는 솔직하게 때에 순응할줄 아는 나무들이 더 담백한 식물이다. 그런 나무들은 아직 맑고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숲을 비출 때, 곱게 차려입었던 치장을 훌훌 털어버리며 이 땅의 가을과 아름다운 이별을 한다. 절정이 한참 지나거개의 잎들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11월 중순께, 이미 가을은 - P282
다 가버린 거라고 사람들이 체념할 때쯤 남쪽 지방의 여러 낮은 산자락 호젓한 숲에서 뜻밖의 아름다운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알몸을드러낸 숲의 나무들이 텅 빈 것 같은 공간에 허허롭게 자리잡을 때, 여름 내내 은밀했던 숲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피기라도한다는 듯이 맑은 가을 햇살이 두리번거린다. 그럴 즈음 그 숲 가장자리의 작은 나뭇가지 끝에 겨우 남아 있는 몇 잎이 가장 아름답다. 잎새의 저 무게, 또는 건듯 스치는바람 한 자락, 아니면 안개 같은부슬비가 잠깐 지나간 뒤에 가을의 마지막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만다. 그리고 떨어져서도 제 빛깔을 잃지 않은 채로 저희끼리 몸 비비며 뒹구는 것들은 다른 깊이로 아름답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운 시간은 길지 않다. 이윽고 그런 시간은 다음 계절의 급습에 어느 날 문득 소멸되어버린다. 낙엽처럼 떨어져 뒹구는 시간위에 다른 시간이 겹치며 한 해는 이윽고 막바지로 치닫는다. 막바지에는 늘 숨가쁘다. - P283
담백한 나무들은 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다 털어버린 알몸, 그 정수만으로 기나긴 침묵을 지키다가 차디찬 바람이 스치고 지나갈 때는 때로는 마지못해 우우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하며 여윈 팔을하늘로 벌리고 서 있다. - P283
우리나라의 식물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이 땅의 고유한풍경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꽃을 포함한 자연 그 자체가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이 땅의 사람들과 풍경을 떠받치고 있었으므로 관찰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꼴 난 사진하는 데온갖 잡학이 다 소용된다. 그래서 자생식물에도 꽤 많은 시간과 정성을바쳤다. 그러다 한 발 더 들어가자 이른바 "토종 식물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설악산에서 한라산까지, 그 사이의 거의 모든 땅을 오래도록 여러번 헤매었다. 들길이나 산자락을 지나다가 어떤 작은 풀꽃 한송이가 눈에 뜨이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무릎 꿇고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꽃을 "이름 모를 꽃" 항목에 밀어넣고 말 수만은 없었으므로 이리저리 묻거나 이 책 저 도감을 뒤져서 조금씩 이름과 생태를 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꽃들이 점점 더 예뻐 보였다. 그래서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것에 더 다가갔다. - P285
우리가 애착을 가지는 토종식물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자생식물이나특산식물과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말을 사전에서는 특산식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몇 종 되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세포나 염색체, 형태와 빛깔이 좀 달라서 특산식물이 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보통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구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큰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사전에 나와 있는 뜻과는 좀 다르게흔히 쓰는 "토종"이란 이 땅에서 몇 세대나 살아온 것을 일컫는지도 알수 없는 막연하고 애매한 말이지만, 대개는 그 말이 주는 정서적인 울림에는 친숙하다. 이 땅의 고유성, 전통, 애국…… 마침내는 국수주의에까지 이르는 숨은 뜻을 그 단어는 가지고 있는 듯하다. - P286
누구나의 고향 집 마당에, 장독대에 토종인 듯 피어 있는 맨드라미는열대지방이, 채송화는 남아메리카가, 접시꽃은 중국이 고향이다. 장미나 해바라기, 미루나무, 나는 수입되거나 귀화한 식물이라고 해서무조건 타박하지 않는다. 토종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고, 확실한 토종이라도 미운 것은 밉다. 들어온 것들에는, 이국적이어서, 어쩌면 더 끌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정서와 연계될 때는 가능하다면 그런 식물들은 배제하려고 한다. - P286
다른 경계-토종과 아닌 것의 구별도 그렇다. 다만 "토종"과 전래된 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외래식물이나 화훼식물은구별하기가 쉽다. 우리나라 자연에 없는 것들은 다 언젠가 들어온 외래종이다. 그게 몇 세대나 이 땅에서 살아야 "토종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울 밑에 선 봉선화는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이, 쌀은 인도와 말레이시아가, 여름날 해질 녘에 초가지붕 위에서 흰 꽃을 피우는 박은 아프리카가, 호박은 열대 아메리카가 고향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의를 바치는 무궁화는 시리아가 본적이다. 그렇다면, 일본이나 중국 또는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에도 있는 것들을 우리의 토종이라고 부를수 있을까? - P287
풍경, 한국 풍경, 이 땅만의 풍경은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이뤄내는 것이다. 마침내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풍경에 나오는 소재들보다는 그것들이 발산하는 정서적인 울림에 이 땅의 아우라가 깃들어 있다.
"...... 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는 사회적인 풍경을 찾는다고 쏘다녔다. 그러나 온종일 긴장한 채 두리번거리며 헤매다가 느닷없이 다가오는 자연 풍경도 마다하지 않고 즐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쏘다니는 일이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다" (시간의 빛」)라고 쓴 적이 있다.
이 사진과 글들은 즐거움의 열매이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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