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이후에 사라진 언어의 화석이 그곳에서는 아직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馬)의 마늘이란 뜻이다. 여리고 아름다운 꽃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데, 그 여린 꽃 또한 생명력이 강해서 예전부터 제주 사람들의 괄시를 받으면서도 아직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밭에 번지는 수선화를 그곳농부들은 호미로 캐어서 밭둑으로 던져버리곤 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그곳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 광경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시를쓴 것이 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수선화는 그 던져진 돌더미위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모진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러므로 수선화는 이중적이다. 가녀리고 아름답지만 그 뒤에 아주 강한 삶의 의지를 감추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의 식물 사전에는 수선화가 화훼식물로 분류되어 있다. 그것은 야생의 수선화는 없다는 뜻이다.  - P14

그러나 제주 남녀 대정 땅의 수선화는 엄연히 야생으로 여러 대를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머나먼 옛날 중국 땅으로부터 해류에 실려온 모진 뿌리들이 제주 땅에 정착한 것이리라. 수선화는 저, 물에비친 아름다운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황홀해하다가 빠져 죽은 미소년 나르시스가 꽃으로 피어났다는 신화의 바로 그 꽃이다. 그래서꽃말이 "자기애‘ 이다.
바닷가뿐만이 아니라 그때쯤의 볕바른 한라산 자락에서는 복수초가 샛노랗게 피어나며 새봄의 깃발을 수줍게 편다. 눈 속에서도 - P14

핀다고 하여 설련화(蓮花) 또는 얼음새꽃이라고도 하는 복수초는온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두루 핀다. 그러나 중부지방에서는 4, 5월에야 그 꽃을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의 그것은 꽃이 먼저 피었다 진뒤에 잎이 나지만, 제주의 것은 꽃과 잎이 함께 핀다. 그러므로 초록빛 후광을 두른 제주의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 이 꽃 또한 저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가 서양 이름이다. 유럽의 복수초는붉은빛인데, 아도니스의 피가 꽃이 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서양에서는 꽃말이 "슬픈 추억이다. 그러나 그 신화와 관계없는동양에서는 전혀 다른 꽃말인 "영원한 행복" 이다. 서양과 동양은 그만큼 멀고 멀다.
짐승이건 식물이건 간에 다 같은 종족끼리 모여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제가끔 대를 이으며 번성하기 좋은 조건을 찾아서정착한다. 수선화 무리, 복수초 무리 같은 몇백 년 또는 몇천 년에걸쳐서 이루어진 그런 무리들은 이제 이 땅에서 서서히 와해되어가고 있다. 산중을 가로지르는 느닷없는 길, 그리고 개발이라는 이름의 무참한 파괴에 맞설 대책이 작고 아름다운 꽃들에게는 없다. - P19

그에 견주면 산과 들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나마 기나긴 겨울잠을자고 스스로 깨어나 꽃피우는 얼레지, 둥굴레, 원추리, 은방울꽃은행복하다. 그래서 저 자연의 품속은, 자연의 것은 더 아름답다. "자연을 보호하자"라고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물론 없다. 그것을 있는 자리에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하면 된다.
그 것을 자기 집, 자기 방으로 못 옮겨서 안달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한 해에 두어 번 들이나 산의 숲에 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의 모든 꽃은 그 사람의 것이다.
북한산, 오대산, 태백산, 설악산의 숲에서, 숲의 녹음이 짙어지기 전에 풀들은 서두른다. 그늘이 덜 질 때 빨리 꽃피우고 열매 맺으려고 숨가쁘게 뛴다. 그래서 숲 그늘의 풀들은, 풀꽃들은 날마다다르게 아름답다. - P33

세상이 어수선하기 때문에 식물들 중에도 얼이 빠져서 얼떨떨해하는 것들이 더러 있다. 온도만 비슷하면 언제든지 피는 민들레나따스한 늦가을을 봄인 줄 착각하고 피는 개나리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른 봄에 피는 꿀풀과의 광대나물이 따스한 늦가을에 피어났다가 느닷없이 눈을 맞고 있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때가 아닌 계절에 잘못 피어난 것들은 다행히 기온이 내내 따스하다고 치더라도꽃가루를 매개해주는 곤충들을 만날 수가 없다. 이미 겨울잠에 들었다가도 따스한 기온이면 나와서 돌아다니는 얼빠진 곤충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 얼빠진 것들끼리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봄의 광대나물부터 여름의 꿀풀, 그리고 가을의 꽃향유에 이르기까지 꿀풀과의 꽃들은 차례로 곤충들을 불러들여서 꽃가루를 옮기게 한다. 수정하여 씨를 맺게 하려는 식물들의 종족 보존 본능은 꽃을 아름답고 향내 나며 꿀이 많게 한다. 꽃들은 곤충을 찾아 떠날 수는 없으므로 꽃 빛깔의 파장이나 향내로 멀리 있는 곤충들을 초대하여 꿀을 대접한다. 한갓 미물이라는 곤충들도 먹을 꿀만 밝히는 게아니라, 그 향내와 빛깔과 모양까지도 제가끔 좋아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면서도 작디작은 곤충이 좋아하는 것은다 좋아한다. - P41

복수초도 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이며, 매발톱, 자주종덩굴, 꿩의바람꽃, 동의나물, 작약, 그리고 미나리아재비는 말할 것도 없이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이다. 미나리아재비꽃은 노랗게 무리지어있어서 신선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미나리아재빗과의 다른 식물들처럼 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의 여러 이치들과 크게 다르지않아서, 잘 쓰면 약이 되나 잘못 쓰면 독이 된다.
봄비에 흰 작약 꽃잎이 힘없이 스러져 땅 위에 뒹굴고 미나리아재비꽃의 노란빛이 사위고 나면 이내 여름이다. 봄의 함성은 그렇게 지나가는 바람결에 실려가버린다. - P89

장마철이 지나면 그동안의 흐림을 보상하려는 듯이 해가 작열한다.
그 빛을 받은 식물들은 견디기 힘들어 잠시 시들기도 하지만 영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식물들은 막바지의 결실을 위해서 그 뜨거운 빛을 묵묵히 소화한다. 그래서 여름에 피는 꽃들은 빛깔이 더 선명하다. 고원지대의 한여름은 뜨겁고 밝은 해와 뭉게구름이 장대한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다. - P90

봉선화과의 학명은 임파티엔스(Impatiens)인데, "참지 못한다"는뜻의 라틴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래서 꽃말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이다. 그런데 그 말은 실제로는 "나를 건드리세요" 라고 유혹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씨앗이 여물었을 때 건드리면 탄력 있는 껍질이 터지면서 씨앗들이 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앗이 무거워서 그리 멀리 튀지는 못한다. 한해살이 풀이면서도 한곳에 무리지어 사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높아가는 하늘에 비낀 저녁노을이 펼쳐졌다. 그것은 그 하늘 아래의 모든 것에게 가을이 왔다고, 서두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 P107

참 더웠다. 지난 여름은 그래서 이 가을이 더 반갑다.
잎들은 눈부신 빛깔로 일생을 끝낸다. 저물어가는 숲을 잠깐 밝하는 저 물든 잎들의 아름다움은, 해질 녘 대기를 물들이는 장엄한노을과 같다.
해가 차츰차츰 짧아지고, 아침저녁의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하면, 나무들의 시계는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포기할 때는 포기하자. 더 버티다가 느닷없이 겨울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빛깔도모양도 내보지 못하고 쪼그라든다. 나무는 내년을 기약하지만, 올해의 잎에게는 올해 가을이 모든 시간의 끝이다. 이 세상 한 귀퉁이의 저물어가는 작은 산비탈을 잠깐 밝히다가, 실바람의 도움으로 미련 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눈부신 나뭇잎들은 이렇게 살랑살랑속삭인다. 그렇다고 모든 종류의 잎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낼때라고 해서 다 아름답지는 않다.  - P117

싱그러운 풀빛 잎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일렁이는 봄빛을 받은 푸른 파장은 현란한 빛으로 번쩍인다. 봄빛을 받고 어른거리는 생명의 빛깔은 눈부시다. 우리는 그 빛깔을 모두 "푸르다"고 한다. 그러나 푸르름은 초록빛이다. 풀빛이다. 그런 풀빛은 다 푸른빛에 노란빛을 합한 것이다. 그 비율에 따라 풀빛은 몇백 가지나 된다. 거기에 먹 또는 붉거나 흰빛이 아주 조금이라도 섞이면 또다른 풀빛이된다. 나무에 따라서, 풀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그 풀빛은 다 다르다. 푸른 잎으로 된 배경 없이, 냅다 꽃부터 피운 성질 급한 것들보다는, 푸른 잎을 후광으로 두르고 핀 꽃들의 빛깔이 더 고와 보인다. 풀빛은 저 혼자 튀기보다는, 꽃들을 더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보색 노릇을 한다. 풀빛은 모든 다른 빛을 떠받치는 보색이다. 들판에서부터 산꼭대기로 스멀스멀 풀빛은 번져나간다. 신록은 생명력이 뻗어나가는 싱싱하고 화려한 풀빛의 잔치이다. - P150

세상에는 늘푸른나무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고, 갈잎나무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 나무들이 그렇듯이 사람으로서의 도리만 지킨다면 어느 쪽이 더 낫거나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무와는 달리,
몇십 년마다 오는 사람의 계절은 양쪽 모두의 모습을 변하게 한다.
그런데 늘푸른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계절에 따른 변화를 담담하게받아들이지만, 갈잎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갈잎나무와는 달리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늘푸른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주름살이 늘고,
머리칼이 낙엽 지듯이 우수수 빠지거나, 머리에 서리가 내려도 그것을 제 나이에 알맞은 모습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갈잎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성형수술을 받기도 하고, 가발을 쓰거나 물을 들이기도 하며, 오히려 변화를 거스르는 경향이 있다. 삶의 가을에 찾아오는 백발은 단풍과 같은 것이다. 나잇값을 하고 사는 이의 곱게 물든 은빛 백발은 투명한 가을 빛을 받은 단풍처럼 아름답다. - P178

작은 씨앗들을 바람에 날려서 멀리까지 이민을 보내기도 하고, 큰 열매들을 잘 익혀서 그 그루터기에 떨어지게 하거나 더러는비탈에 굴려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싹이 돋아나도록 한다. 어떤 식물이건 좋아하는 자리가 있게 마련이며, 제가 좋아하는 곳에 자리잡은 식물들은 그 근처에 많은 동족들을 자라게 하여 군락을 형성한다. 굳이 군락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물이건 그 근처에는 똑같은종류가 얼마쯤은 있기 마련이다. 흡사 우리나라의, 지금은 비록 내력뿐인 곳이 많지만, 씨족부락 같은 것이다.
식물들도 살기 위한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은 동족끼리 벌이는 수도 있으나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솔 숲, 그 빽빽한 줄기 위를 수더분한 곡선의, 꼭 공동으로 쓰고 있는 듯한 지붕 같은 잎들의 어울림이 그런 것의 한 보기가 되겠다. 그러나 키 큰 나무와 키 작은 나무또는 잎이 크고 많은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가 우연히 곁에서 자랄때는, 한 나무가 마침내 죽을 때까지 몇십 년 또는 몇백 년에 걸친 길 - P236

고 집요한 싸움을 한다(비유를 잘못 드는 것일까? 그것은 꼭 사람들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 싸움과 닮아 보인다).
상대방보다 먼저 가지를 길게 뻗고 키를 보다 높게 자라게 하는것은, 시야가 툭 터진 경치를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많은빛과 땅속의 물과 자양분을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그야 그 나무가사는 동안 쾌적하고 튼튼하게 살자는 뜻인데, 그것은 사람들처럼내가 더 잘났다고 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열매를 잘 맺어서 종족을 번성하게 하겠다는 거룩한 본능을 따른 것일 터이다.
꽃이 지고 나서부터 자라기 시작했을 야생의 열매들은 잎이 무성할 때는 애써 찾아보기 전까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해가빨리 설핏해지고 밤이 그만큼 더 길어질 무렵부터 한 해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눈치챈 식물들은 마지막 모양을 낸다. 마지막 잎새들은 장엄한 빛 부심, 그 현란한 빛깔로 차린잔치를 끝내면 훌훌미련없이 날려서 영원한 흙으로 돌아간다. 마침내 앙상한 가지들만 - P237

남아 문득 산이 여위었다고 느꼈을 때 이미 가을은 가버린다. 진한빛으로 여문 작은 열매들은 그럴 때쯤에는 눈으로 쉽게 다가온다.
열매 맺은 나무들은 해거리를 한다. 어떤 해에는 열매가 작고 적게 열리기도 한다. 열매를 크고 많이 맺는 해에 나무들은 섭취한 영양분을 열매를 만드는 데에 다 써버린 것이다. 그런 해의 나무들은거의 자라지 못한다. 열매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을 키우는 데에만 골몰하면 다른 나무들보다 몸집이 허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나무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2-3년에 한 번은 열매를 포기하고제 몸을 돌보는 해가 있는데, 그것을 해거리라고 부른다.
나무들도 나이를 먹으면 노파심이 생겨서 더 강한 본능의 지배를받는다. 그리하여 늙은 나무는 자잘한, 그러나 수없이 많은 열매를맺는다. 그것은 곧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쓰러지기 전에 종자나 많이 퍼뜨리겠다는 뜻이다. 야생이 아닌 과수원의 나무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이 든 나무는 좋은 거름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결코 큰 열매를 맺지 않는다. 작으나 많은 열매를 맺을 뿐이다. 과수의 나이를 셈하고 있던 농부는 나무들이 그런 망녕을 부리기 전에 베어버린다. 그러므로 천수를 다할 수 있는 자연의 나무는, 곧 제 수명을 다하고 나서도 몇 년씩이나 기념비처럼 의연하게버티고 서 있는 고사목은 그에 비하면 행복하고 행복하다. - P242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가령 개미 한 마리라고 할지라도 온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한다던가? 그렇다면 산에서 자란 작은열매들 또한 예외는 아니겠다. 작은 열매, 그 견고하고 정교한 조직과 모양, 그리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지만 그 빛깔! 그 속에 여러 대를 이 세상에서 이어나가게 할 미래의 생명까지 잉태하고 있으니 그 자체가 아름다운 우주라고 하겠다.
산과 들에 자란 식물의 열매는 사람이 먹을거리로 보면 보잘것없으나 볼거리로 보자면 보석보다 낫다.
저무는 계절에 이윽고 빛을 내는 작은 열매, 결실, 한 해의 그 정교한 집약을 보노라면 연말이 다가오는 것이 문득 두렵다. - P243

가을에 수확한얼마 안 되는 곡식들은 긴 겨우내 다 먹어버렸고, 먹을 것이 아직 자라지 않은 배고픈 봄을 그렇게 불렀다. 그때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어린 소나무의 줄기를 벗겨서 먹기도 했다. 그와는 달리 좀 사치스러운 것이지만, 일부의 잘사는 계층에서는 소나무의 꽃가루를 받아서 꿀로 버무린 송화다식을 만들어먹기도 했다. 또한 가을에는솔잎과 함께 쪄서 그 향기를 배게 한 송편을 빚어먹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 사람들의 전통 가옥인 초가집이나기와집들은 다 소나무를 중요한 재료로 삼아 지었다. 그리고 그 집들에는 온돌이라는 난방시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그 중요한 땔감은 역시 소나무였다.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가구들 또한 소나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죽으면 거개가 소나무로 만든 관 속에 넣어져서 그 사람 고향의 솔밭에 묻히게 된다.
그 솔밭에 비 오고 눈 오면서 세월이 흐르고 흐른다. - P266

단풍은 내장산이 최고라고 하더라, 아니다 설악산이라던데, 아니야그보다는...…… 하고 사람들은 외우기를 좋아한다. 단풍조차 자기 눈으로 찾거나, 자기만이 좋아하는 어떤 단풍을 가지기보다는, 이렇다더라는 평판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다. 평판 좋은 곳이 좋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단풍보다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므로 어지러워서 단풍을 보기가 쉽지 않다. 단체로 줄을 서서 내장산이나설악산을 넘는다고 한들 단풍잎을 들여다볼 겨를이 있을 리 없다. - P270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인 낙엽송은 그런 것의 잎보다도 짧고가는 잎에 노랗게 물을 들여서 떠나는 통과의례를 성의껏 치른다.
보잘것없는 잎일지라도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물든 낙엽송은 눈부시며, 절정일 때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소리도 없이 꽃가루처럼날려서 쌓인다. 어째서 남아 있는 것들은 무심한 척하며, 떠나는 것들은 빛깔이 아름답게 차려입는 것일까? 늘 마지막 순간은 처참하게 아름다워야 한다고 떠나는 잎새들은 간곡하게 말한다.
10월 초부터 텔레비전과 신문들은 마치 그해에 처음 벌어진 진기한 일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단풍, 단풍 하며 야단들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덩달아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들처럼 단풍을 따라 몰려다닌다. 어디냐에 따라서, 취향에 따라서 단풍이 절정인 시기는 다르다.
내내 무심한 척하며 버티는 상록수보다는 솔직하게 때에 순응할줄 아는 나무들이 더 담백한 식물이다. 그런 나무들은 아직 맑고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숲을 비출 때, 곱게 차려입었던 치장을 훌훌 털어버리며 이 땅의 가을과 아름다운 이별을 한다. 절정이 한참 지나거개의 잎들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11월 중순께, 이미 가을은 - P282

다 가버린 거라고 사람들이 체념할 때쯤 남쪽 지방의 여러 낮은 산자락 호젓한 숲에서 뜻밖의 아름다운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알몸을드러낸 숲의 나무들이 텅 빈 것 같은 공간에 허허롭게 자리잡을 때,
여름 내내 은밀했던 숲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피기라도한다는 듯이 맑은 가을 햇살이 두리번거린다. 그럴 즈음 그 숲 가장자리의 작은 나뭇가지 끝에 겨우 남아 있는 몇 잎이 가장 아름답다.
잎새의 저 무게, 또는 건듯 스치는바람 한 자락, 아니면 안개 같은부슬비가 잠깐 지나간 뒤에 가을의 마지막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만다. 그리고 떨어져서도 제 빛깔을 잃지 않은 채로 저희끼리 몸 비비며 뒹구는 것들은 다른 깊이로 아름답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운 시간은 길지 않다. 이윽고 그런 시간은 다음 계절의 급습에 어느 날 문득 소멸되어버린다. 낙엽처럼 떨어져 뒹구는 시간위에 다른 시간이 겹치며 한 해는 이윽고 막바지로 치닫는다. 막바지에는 늘 숨가쁘다. - P283

담백한 나무들은 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다 털어버린 알몸,
그 정수만으로 기나긴 침묵을 지키다가 차디찬 바람이 스치고 지나갈 때는 때로는 마지못해 우우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하며 여윈 팔을하늘로 벌리고 서 있다. - P283

우리나라의 식물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이 땅의 고유한풍경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꽃을 포함한 자연 그 자체가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이 땅의 사람들과 풍경을 떠받치고 있었으므로 관찰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꼴 난 사진하는 데온갖 잡학이 다 소용된다. 그래서 자생식물에도 꽤 많은 시간과 정성을바쳤다. 그러다 한 발 더 들어가자 이른바 "토종 식물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설악산에서 한라산까지, 그 사이의 거의 모든 땅을 오래도록 여러번 헤매었다. 들길이나 산자락을 지나다가 어떤 작은 풀꽃 한송이가 눈에 뜨이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무릎 꿇고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꽃을 "이름 모를 꽃" 항목에 밀어넣고 말 수만은 없었으므로 이리저리 묻거나 이 책 저 도감을 뒤져서 조금씩 이름과 생태를 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꽃들이 점점 더 예뻐 보였다. 그래서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것에 더 다가갔다. - P285

우리가 애착을 가지는 토종식물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자생식물이나특산식물과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말을 사전에서는 특산식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몇 종 되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세포나 염색체, 형태와 빛깔이 좀 달라서 특산식물이 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보통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구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큰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사전에 나와 있는 뜻과는 좀 다르게흔히 쓰는 "토종"이란 이 땅에서 몇 세대나 살아온 것을 일컫는지도 알수 없는 막연하고 애매한 말이지만, 대개는 그 말이 주는 정서적인 울림에는 친숙하다. 이 땅의 고유성, 전통, 애국…… 마침내는 국수주의에까지 이르는 숨은 뜻을 그 단어는 가지고 있는 듯하다. - P286

누구나의 고향 집 마당에, 장독대에 토종인 듯 피어 있는 맨드라미는열대지방이, 채송화는 남아메리카가, 접시꽃은 중국이 고향이다. 장미나 해바라기, 미루나무, 나는 수입되거나 귀화한 식물이라고 해서무조건 타박하지 않는다. 토종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고,
확실한 토종이라도 미운 것은 밉다. 들어온 것들에는, 이국적이어서,
어쩌면 더 끌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정서와 연계될 때는 가능하다면 그런 식물들은 배제하려고 한다. - P286

다른 경계-토종과 아닌 것의 구별도 그렇다.
다만 "토종"과 전래된 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외래식물이나 화훼식물은구별하기가 쉽다. 우리나라 자연에 없는 것들은 다 언젠가 들어온 외래종이다. 그게 몇 세대나 이 땅에서 살아야 "토종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울 밑에 선 봉선화는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이, 쌀은 인도와 말레이시아가, 여름날 해질 녘에 초가지붕 위에서 흰 꽃을 피우는 박은 아프리카가, 호박은 열대 아메리카가 고향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의를 바치는 무궁화는 시리아가 본적이다. 그렇다면, 일본이나 중국 또는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에도 있는 것들을 우리의 토종이라고 부를수 있을까? - P287

풍경, 한국 풍경, 이 땅만의 풍경은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이뤄내는 것이다. 마침내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풍경에 나오는 소재들보다는 그것들이 발산하는 정서적인 울림에 이 땅의 아우라가 깃들어 있다.

"...... 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는 사회적인 풍경을 찾는다고 쏘다녔다. 그러나 온종일 긴장한 채 두리번거리며 헤매다가 느닷없이 다가오는 자연 풍경도 마다하지 않고 즐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쏘다니는 일이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다" (시간의 빛」)라고 쓴 적이 있다.


이 사진과 글들은 즐거움의 열매이다. - P2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티나 램 Christina Lamb

영국 출신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작가다. 1980년대 후반부터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중동, 아프리카, 유럽,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대륙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가장 위험하고 치열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에서 활동하면서 전쟁의 메커니즘과 참상을 보도해왔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철학, 정치,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22세 때인1987년 우연한 기회에 파키스탄에 가게 된 이후 본격적으로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88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점령을 보고하여 ‘올해의 젊은 기자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 ‘올해의 기자‘로 선정되었고, 유럽 최고의 전쟁 보도상인 바이외칼바도상을 비롯해 15개의 주요 언론상을 받았다. 2013년에는언론 활동에 대한 공헌을 기려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라크에서 리비아, 앙골라에서 시리아 등 국가 간 전쟁이 벌어지는 곳뿐 아니라 에리트레아와 짐바브웨 등 내전이 일어나는 곳을 취재했다. 브라질 원주민에 대한 탄압을 취재하기 위해 아마존 오지에가기도 했다.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탈레반의 매복 공격을 받아 간신히 살아남은 적도 있다. 2007년에는 베나지르 부토파키스탄 총리가 폭탄 테러로 사망했을 당시 같은 버스에있기도 했다. 최근에는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에 의해 납치된 소녀들과 이라크의 야지디족 여성을 비롯해 버마와 르완다, 아르헨티나, 독일, 세르비아 등 전쟁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집중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말랄라 유사프자이와 함께 쓴 《나는 말랄라Am Malala》를 비롯해 《아프리카 하우스The Africa House》《카불이여 안녕 Farewell Kabul》 《알레포의 소녀The Girl from Aleppo》 등을썼다.
현재 런던에 거주하며 비영리단체인 전쟁·평화보고연구소(IWPR)와 아프간커넥션의 이사이자 옥스퍼드대학교 유니버시티칼리지 명예교수로 있다.

이 책은 2000년대 들어 세계 곳곳에서 행해진 전시 강간 피해자들과의인터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버마의 로힝야 집단 학살부터방글라데시 해방 전쟁, 르완다의 투치족 집단 학살, 보스니아 전쟁,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과 함께 중동의 ISIS와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의등장, 콩고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까지, 역사를 살아낸 개인의 이야기를엮었다. 전쟁 성폭력 피해자는 네 살부터 여든아홉 살까지 다양하다.
강간은 "세계에서 가장 방치된 전쟁 범죄"이며, 그 피해자들은 강간이차라리 죽음보다 끔찍하다고 호소한다. 그럼에도 강간은 테러와인종 청소라는 범죄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일일 뿐이라는 잘못된 믿음때문에 거의 법정에 오르지 않는다. 다루는 역사적 사건이 다양하고감정적으로 견뎌내기 쉽지 않지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제니퍼 플래허티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

전쟁에서 강간이 얼마나 심각하고 끔찍한 일인지 일깨워주는 책이다.
강간은 세계에서 가장 무시되는 전쟁 범죄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에우리는 눈물을 흘리고 세계의 무관심에 분노할 것이다.

아말 클루니  국제 인권변호사

크리스티나 램은 이 책에서 여성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무척 어려운일을 해냈다. 이 책에 담긴 강한 여성 생존자들의 모습은 인간의 의지와마음이 빚어낸 비범한 성취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역사적·세계적으로강간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지경고한다. 올해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이다.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저자미시 모드

수천 년 동안 집단 강간은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역사에서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마침내 이 용감하고아름답고 혹독한 책이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인상적이고 감동적으로 담았다.

베터니 휴즈 ㅣ <아테네의 변명>, <여신의 역사》의 저자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충격적인 책이다. 조사하고집필하는 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의무는 이 끔찍한 진실,
즉 여성에게 남성이 가한 비인간적 범죄의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앤터니 비버 역사학자, <제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의 저자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겼고 속으로 여러 번 죽었지만우리의 이름은 어느 기념비에도, 어느 전쟁기념관에도새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 아이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강간 생존자

옮긴이-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국가 Islamic State in Iraq and Syria의 약자다. 이조직의 아랍어 명칭인 ‘알다울라 알이슬라미야 피 알이라크 와 알샴al-Dawla al-Islamiya fi al-Iraq wa al-Sham‘에서 ‘알샴al-Sham‘의 범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ISIS, 또는 ISIL(이라크와 레반트 지역의 이슬람국가 Islamic State in Iraq and Syria)이라 옮겨지며, 아랍어 명칭의 머리글자를 따서 다에시 Daesh 라 불리기도 한다. 2014년 모술을 점령한 ISIS는 지도자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를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인 칼리프로 추대하며 그가 이끄는 칼리프 국가의 수립을 선포했고, 이슬람국가 Islamic State(IS)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IS,
ISIS, ISIL, 다에시, ‘자칭 이슬람국가self-styled Islamic State‘, ‘이른바 이슬람국가 -called Islamic Stat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요즘까지도 이런 분쟁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남자다. 남자에 대해 쓰는 남자. 그리고 가끔은 남자에 대해 쓰는 여자. 여성의 목소리는 빠질 때가 너무 많았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초반에 나는 <선데이 타임스》 현장 통신원 여섯 명에 속해 있었고,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나중에 나는 이 시기에 보도된 기사를 읽다가 여자 동료 두 사람 중하나와 남자 동료 셋 모두 이라크 여성의 말은 단 한 줄도 인용하지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이라크 여성은 그곳에 없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분쟁지역을 남자의 땅으로 여기는 것은 기자만이 아니다. 여러연구가 거듭 입증한 바에 따르면 여성이 참여할 때 평화협정이 더 오래 유지될 가능성이 큰데도 종전 협상에서 여성은 배제될 때가 많다.
한때 교전 지역에서는 우리 같은 여성이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여성을 대우하는 어떤 명예 규율 같은 것이 있다고.
그러나 테러리스트 집단과 죽음을 파는 장사꾼에게 명예 같은 것은없었다. 오늘날의 많은 분쟁지역에서는 분명 여자인 것이 더 위험하다. 최근 5년간 나는 해외 통신원으로 보낸 지난 30년 동안 목격한것보다 더 충격적인 잔학 행위가 여성에게 자행되는 것을 이 나라저 나라에서 목격했다. - P18

고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로마인부터 시작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중앙아시아 곳곳에 남겨진파란 눈의 금발 아이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제국군의 ‘위안부‘와, 붉은군대가 독일 여성에게 저지른 집단 강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성이 오랫동안 전쟁의 전리품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성기를 공포를 낳는 무기로 쓸 수 있다는 남자의 발견은 최초의 조악한 돌도끼와 불의 사용과 함께 선사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될 것이다." 미국의 저자 수전 브라운밀러 SusanBrownmiller가 1975년 강간을 다룬 획기적인 책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Against Our Will)에서 내린 결론이다. - P19

그래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 강간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사실, 모든 분쟁 당사자가 전시 강간에 책임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자행된 잔학 행위에 분노하며 승전국은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최초의 국제재판소를 세웠다. 그러나 성폭력 기소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사과도 없었다. 침묵만 있었다. 성노예로 고통받은 위안부 여성에 대한 침묵. 스탈린의 군대에 강간당했으나 역사 교과서에는 한줄도 언급되지 않은 수천 명 독일 여성에 대한 침묵, 스페인에서 프랑코 장군의 팔랑헤 당원에게 강간당하고 가슴에 낙인이 찍힌 여성에 대해서도 침묵.
이런 반응이 너무나 오래 이어졌다. 전시 강간은 묵인되었고,
처벌받지 않았다. 군과 정치 지도자는 부수적인 문제인 양 넘기거나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를 부인했다. - P22

그리고 미투(#MeToo)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에게 2017년은 아마 성폭력에 대한 발언에서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할리우드의 여배우들과 제작 보조들이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 HarveyWeinstein의 성폭력을 진술한 뒤 이를 이어 등장한 미투 운동으로 많은 피해 여성은 자신들이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걷어내고 목소리를 낼 용기를 얻었다.
많은 여성처럼 나도 미투 운동을 기쁨과 경악이 뒤섞인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렇게 많은 여성이 목소리를 낸다는 것, 그리고 나 같은 중년 여성이 한때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추행을 거부한다는 것에기뻤고, 성폭력이 그토록 만연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여성은 살아가는 동안 세 명 중 한 명꼴로 성폭력을 경험한다. 성폭력은 인종도계급도 국경도 가리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변호사를 찾아갈 여력이 없고 미디어에도 접근할 수 없는 여성은 어떻게 할까? 강간이 무기로 쓰이는 나라의 여성은 어떻게 할까? - P24

그러니 총이나 마체테를 든 사람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에서 돈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여성들의 상황을 상상해보라. 성폭력 상담도, 배상도 없다. 오히려 그들 자신이 비난을 받는다. 신체적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평생의 트라우마와 잠 못 들고 뒤척이는밤,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어려움, 그리고 어쩌면 자식 없는 삶까지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 심지어 공동체로부터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느린 살인 slow murder‘이라 불렀다.
세계 곳곳에서 여성의 몸은 여전히 전장이 될 때가 많고 수많은여성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상처를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로 들려주려고한다. 이 책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 남아메리카를 관통하며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어두운 행위를 살펴보는 충격적인 여정의 출발이 될 것이다. 더 많은 장소를 돌아볼수록 나는 강간이 곳곳에 만연하며 그 이유는 국제 사회와 각국의 법정이 가해자를 법의 심판대에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말하기도 듣기도 쉽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놀라운 용기와 영웅적 행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은 그저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다. 이제 이야기의 절반만 말하기를 멈춰야 할 시간이다. - P25

찌는 듯 더웠던 8월, 폐허가 된 그 정신병원에서 야지디 여성이한 사람씩 그림자에서 나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해외통신원으로 30년간 들어온 그 어떤 이야기보다 참담했다.
부서진 사람들. 가냘픈 몸과 빛이 사라진 지친 얼굴에 자줏빛이감도는 길고 짙은 머리를 드리운 여성들. 그들은 살아 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들 모두 부모와 형제, 자매를 잃었다. 그들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들이 싱갈Shingal이라 발음하는 사랑하는 고향 신자르 Sinjar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이 은신처로여겼지만 결국 많은 이들이 허기와 갈증으로 죽어가야 했던 신자르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코초 Kocho라 불리는 작은 마을에 대해 이야기했다. ISIS는 그곳을 13일간 포위한 뒤 모든 남자와 나이 든 여자를 학살했고 처녀들을 잡아갔다. 그리고 티그리스강 동안에 있다는갤럭시시네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녀들 몇몇은 그들의 언니이거나 동생이었다. 이 못생긴 부류와 예쁜 부류로 분류된 다음 시장의 ISIS 대원들에게 팔리기 위해 끌려간 곳이었다. -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다림

정수리를 기점으로 오른쪽이 아프다. 무거운 것에 짓눌린느낌이 목까지 이어진다. 하늘에 걸려 있는 것들은 구름이아니고, 해가 아니고, 달이 아니다. 풍경은 배경이 되고, 시간은나를 누르며 흘러간다.
시간이라는 무형의 감옥에 갇혀,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이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무, 꽃, 지나가는 별들을보지 못한다.
영혼은 발목만 두고 사라졌다. 없는 머리통과 없는 가슴과팔, 허벅지, 없는 보지와 없는 무릎을 발목이 견딘다. 발목만이견딘다. 기다리는 사람은 발목이 견디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못한 채 커피를 마시고 걸어 다니고, 전화를 하고, 책을 읽는다.
그러나 발목은 안다. 아무것도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목만이 안다.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어느 날, 기다리는사람 모르게 혼자 남은 발목이 조용히, 떠나버린다. - P205

오늘의 불안이 등짝을 맞고 시무룩해졌던 유년의나에게 귓속말을 하는 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그게 뭔지 모를 때가 있다. 내 진짜 모습. 깎이기 전 원석의내 모습, 아무것도 아닌 첫 찰흙 그대로의 내모습! 어쩌면 처음느낀 부끄러움이나 가벼운 죄의식, 그리움이나 불안, 연민과두려움, 날것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술렁이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오래된 터널을 걸어가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유년에 가 산다. 유년에서 아직 살고 있다.
때문에 오늘 낮에 내 옆모습이 굳어졌고 불안했으며,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유년에 아직 살고 있는 무엇 때문에내일 나는 우울하거나 발랄하거나 어쩌면 축축할 것이다.
만져보고 싶은 것은 등짝을 얻어맞기 전에, 아니 등짝을맞더라도 만져보자. 유년에 아직 많은 것들이 살고 있을 테니까. - P211

나는 언어를 이리저리 늘어놓거나 빼보면서 골몰하는 사람중 하나이지만 언어를 쉽게 믿지 않는다. 언어만큼 한계에부딪치기 쉬운 게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떤 감정이 몸속에들어와 휘몰아치고 위아래로 걸어 다니며 장기와피를교란시킨다. 그런데 이 감정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없어 무력함을 느낄 때가 있다. 가끔 긴 글을 써야 할 때나 아주많은 말을 해야 할 때면 숨이 턱 막히기도 한다. 긴 이야기를듣거나 읽는 일은 즐길 수 있지만 내가 나서서 장대한 이야기를해야 한다면 어디로든 숨을 곳부터 찾는 타입이다. 마치 장한복판에 서서, 수없이 많은 콩들을 줄 맞춰 길게 늘어놓는임무를 맡은 사람처럼 버겁다. - P217

감정이나 스토리를 전달하는 데 있어 완벽한 도구는 말이아니다. 말은 감정과 상황과 스토리가 다 지나간 뒤에 ‘겨우‘
남는 찌꺼기일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말이 먼저인 경우는없다. 말은 가장 마지막에 혼자 남은 자가 긁어모아 기록할 수있는 연약한 도구일 뿐이다. 물론 말이 전부이거나 완전할 때도있다. 선언과 예언, 잘 표현된 문학작품에서는 말의 위력이 크다.
그러나 일상에서 많은 경우 말은 참 무용지물이거나 요령부득, 사고뭉치일 때가 많다. 말보다 더 효율적이고 강한 도구는몸이다. 몸은 말보다 적절한 언어를 더 잘 찾는다. 말은 수없이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은 웬만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먹는 대로 찌는 살들을 생각해보라! 몸은 냉정하다). - P217

춤은 말보다 앞선 언어다. 독일의 무용가이자 안무가인피나 바우쉬는 "나는 무용수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지가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고말했다. 춤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몸과 박자를 같이한다.
감정과 몸을 거의 동시에 움직이게 한다. 무용수가 슬픔에대해 춤을 추려 할 때, 몸속에서 일어나는 슬픈 감정과표현으로써 동작은 동시 사건으로 벌어진다. 춤은 그 자체로사건이다(말은 사건 이후에 오거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등장한다). 무용수가 점프를 할 때 그의 몸을 타고 뛰어오르는두려움이나 슬픔, 격정과 환희의 감정은 몸을 통해 실제 높이를입는다. 무용수가 사랑을 연기할 때, 그는 발가락 끝부터머리카락 끝까지 사랑을 소용돌이처럼 이끌고 돈다. 관객에게알린다. 사랑이라고, 내가 사랑이라고! - P218

피나 바우쉬는 살아 있는 나무 인간, 유연한 나뭇가지다. 오른손을 왼쪽으로 움직일 때 꽃 피는 나뭇가지를 오른쪽에서왼쪽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얼굴과목, 쇄골, 앙상한 가슴, 팔꿈치, 손목, 손가락, 허리, 고관절, 대퇴골, 무릎, 정강이, 발목,발가락이 모두 입을 가진다.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몸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를 제압할 수 없다. 그녀의무용수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넘어 황홀하고, 슬프고, 생각이 많은 몸을 가지고 있다. 몸이 저렇게 많은 생각을 표현할수 있다니! 생각의 주체가 뇌가 아니라 무릎이라니, 엉덩이라니, 기다란 목이라니! - P219

언어가 가진 슬픔은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의 ‘섣부름‘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무용수에 대해 노래하려 애썼지만 표현에 한계를 느끼고 만다. 미숙한 내 언어만으로는 무용수를 제대로표현하기 어렵다. 발레리나의 춤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 춤 때문에 나온 말은 아닐지. - P222

속상해, 라는 말은 이상하지.
속삭이는 것 같잖아요.

내가 아프기 전에
당신이 곪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달이 반 뼘 정도 상해 있습니다.

나는 왜 샅을 적실까요?
나는 왜 당신의 껍질만 먹을까요?
나는 왜 껍질처럼 질겨질까요?

귀는 길게 자라 당나귀 귀를 넘어버리고,
나는 비밀을 덮고 잠들겠습니다.

"여름도 이제 거의 다 읽혔어."
당신이 혼잣말하고

한동안 시를 못 쓴 나는
시 곁을 기웃거리기만 했습니다. 괜찮아요.
그 일도 시의 한 부분일 거예요.

뱀에게 물리기 전에
당신도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 P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이별. 미련과 기대와 슬픔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리는깨끗한 결단. 종지부, 두부를 삼키면 두부가 눈앞에서사라지듯이 죽음은 그들을 삼켜없애버린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경하고 암울한 사태, 피하고 싶은 사건일까? - P187

불건전이란, 마음속에서 자신의 죽음과 결별한어른들의 발명품이다. 현자들과 어린아이들에게죽음은 불길하거나 음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서 있는 탁자처럼, 부스러진 빵조각처럼, 이불깃을 접어 넣은 침대처럼 거기 ‘있을 뿐‘이다.

- 크리스티안 생제르『우리 모두는 시간의 여행자이다』 중에서 - P187

살아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새삼 이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어떻게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온 걸까? 내 몸속을 흐르는 피는어떻게 한순간도 흐름을 멈추지 않고 지금껏 움직여 왔을까?
새들과 한철 피고 지는 꽃들과 난쟁이 같은 버섯들, 크고 작은 - P190

동물들에 비해 사람은 태어나 죽기까지의 주기가 길다. 창문 앞에흐드러진 목련은 나를 한 철 보겠지만, 나는 저 목련이 죽고나서도 내년에 다른 얼굴로 오는 목련들을 ‘또‘ 볼 수 있다.
내게 죽음은 유예되고, 유예되고, 유예되고, 한없이 유예가능할 것 같은 무거운 숙제다. 물론 오겠지. 결국엔 올 것이다.
내게도, 다른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도. 죽음을 기약하지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 침대 아래 죽음이 잠들어 있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죽음. 훗날 죽음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려 할 때, 피하지 않고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후회 없이 살았고, 즐거웠다고. 사랑이 충만했다고 말하며 다 읽은 책을 덮듯이삶을 탁, 닫고 싶다. 그다음 죽음의 손을 잡을 것이다. - P191

아침은 멀고, 또 진정으로 밝은 아침은 불가능하다 해도.
눈이 부신 ‘척‘이라도 하며, 꽃 피는 계절을 나는 또기다릴 것이다. - P1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은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나는 것‘ 이란 생각이 시인의 산문집을 읽는 내내 따라다닌다.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진정으로 속상해하던 때가 언제였지?
나는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면서도 멀쩡한 얼굴로잘도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마음이 말랑했을 때되풀이해 읽던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건조한 세상에서 눈 뜬 장님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나는 안녕한지, 잘 지내는지, 자신이 없다. - P76

양지에 발을 들이는 일이 내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이든 사랑이든 생각이든, 바르고 멀쩡하게 생긴 것.
온화하고 근사한 것, 떳떳하고 따뜻한 것, 좌우대칭에 맞춰균형을 이루는 것이 힘들었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단조인, 장조로 흘러가다가도정신 차리고 보면 여전히 단조를 노래하는, 낮은음자리표와 16분 쉼표들의 숨가쁜 행진. 전깃줄로 말하자면 얼키설키 얽혀 참새들이 앉기 싫어하는 자리 방으로 따지자면 볕은 가난하고 곰팡이만 승승장구 번식하는 곳.
이를테면 나는 서자, 변방, 덤, 가시랭이, 꽃받침, 맹장 같은존재다. 중심이나 주인공이 아닌, 원래 있으면 안 되는 것이불룩 생긴 것. 말하자면 혹 같은, 둘 곳이 없어 잠시 얹어둔존재 같은 것.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할말이 많으면서도 할말이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 P79

그러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봄은 공평하니 낮고 음침하고 축축한 곳에도 내려와 간혹 고개를 쳐든 음지식물들과 마주하기도 하니까. ‘곰팡이도 꽃처럼‘ 피어나는 거니까.
말하자면 달의 반쪽을 덮고 자던 날들이 내 생활인 것인데 시간은 흘러 ‘‘을 만들고 ‘집‘은 자라나 뭉텅이인 삶을 만들어그 삶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더란 얘기다. 몸 어느 자리는습기가 빠져 제법 뽀송해지기도 하더란 말이다. - P79

삶에 있어 영원한 양지도 영원한 음지도 없다.


걸음걸이가 땅을 만든다. 운동화를 신고 마른 흙길을걸어가다보면 알 수 있다. 짜부라진 개구리나 백발을 휘날리며시드는 중인 할미꽃, 흙탕물에서 꼬물꼬물 뒹구는 올챙이,
자동차 바퀴에 옆구리가 터져 죽은 새끼 뱀도 제각각 자기구역에서 열심히 살았다. 죽고 사는 건 모두 팔자소관. 주어진제 몫을 열심히 살아내기만 하면 된다.
희망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냥 열심히 걷다가 운동화에 묻은 마른 흙을 털고, 맨발과 젖은 뿌리를공들여 말리면 된다. 양지바른 길에서 둥근 무릎을 쉬게 하면된다.
생각대로 되는 것이 없는 삶에 싫증이 나 어느 날은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술에 취하기도 하겠지만 어쩌랴모든 게 팔자소관이란 말이다(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모든 게괜찮아진다). 휘청휘청, 기필코 내게 기어오겠다는 기다란 뱀같은 팔자를 긍정해야지! 즐겁게 피리라도 불며, 환영해야지. - P80

등뒤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느긋한 기다림도 요리의 즐거움중 하나다. 저쪽에서 기대를 품고 기다리는 소중한 사람(대개 소중한 사람에게만 요리를 해주는 법). 마치 이쪽의 나와 저쪽의 당신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있어, 동선에 따라 흔들흔들 기분좋게 흔들리는 것 같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재료들, 혹은 나와 요리를 기다리는 사람과의 무언의 대화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요리하는 시간이 행복한순간으로 바뀐다. 물론 요리를 매일같이 ‘일처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료와의 대화가 오래 살아 지겨워진 부부 간의대화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요리해주는 사람에게 아무쪼록 감사하면서, 엎드려 공손히, 음식을 받아먹어야 할 것이다. - P113

아프게 되면 아픈 부위가 곧 ‘손님‘이다. 머리가 아프면머리가 손님이 되고, 배가 아프면 배가, 발톱이 아프면 발톱이,
이가 아프면 이가(이는 손님 중 VIP! 각별한 고통을 주신다)손님이자 왕이 된다.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손님은 모시지않았으면 좋겠다. 몸 곳곳의 부위들이 죽을 때까지 도드라지지않고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게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다면그게 가장 감사한 일일 텐데.
재채기와 함께 눈에서 눈물이 코에서 콧물이찍, 하고나오는 순간! ‘코‘께서 유자차라도 끓여오라고 호통을 치신다.
이때 비죽, 고개를 내밀며 웃고 있는 콧물이 코보다 더 밉다.
시간이 두 배 속도로 지나 ‘코‘께서 예전처럼 부드럽게숨쉬고 심심할 때 코딱지나 모으시면서, 제발 도드라지지 않고몸의 일부로서 겸손히 살아주셨으면 좋겠다. 비죽 나온 콧물을손등으로 훔치며 유자차를 끓이러 가는 길, 가스레인지까지 멀고도 높구나. - P122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꽃진 다음 이파리가 주인공이라고 외치듯, 막 태어난색깔인 듯 화사하게, 처녀의 종아리처럼 빛난다. 아직은 떨어질일이 없다고, 아마 영영 없을 거라고 자신하는 저 몸짓! 앳된얼굴들. 자전거를 막 배운 아이처럼 생동하는 움직임!


눈물이나 떨어짐, 기우는 일 따위는 모르는 듯 떨다 웃다선명해지는 저 잎사귀들.


저건 어느 나라 사파이어지?
그늘마저 화사한 4월의 나무들! 좋다. 참 좋다! - P145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알았다. 세상의 강물들이가난해지고 있음을, 구절초가 중심부터 썩듯이 빈 젖의 까만꼭지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어릴 때 할머니의 젖이나 팔뚝 안쪽, 늘어진 살을 만지며잠들었다. 할머니는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보다 진했고나긋나긋했으며, 낙관적이었다. 엄마들에게는 없는 삶을관조하는 관록이 있었고, 엄마들에게는 있는 긴장과 호들갑이할머니에겐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적당한 늙음‘이 좋았다.
나 말고 다른 아이를 낳을 가망 없음이, 언제나 품에 나만 안을것 같은 안정감이 좋았다. - P147

고모 방은 작고 아늑했다. 하이든 사진이 걸려 있었고침대와 화장대, 키 낮은 책장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고모의 책장에서 신경숙 소설 『깊은 슬픔이나 최영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었다. 신경숙 소설에는 야한 장면이나와 심장이 두근거렸고, 최영미의 시집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알아듣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서정윤 시집 『홀로서기도있었는데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떤 슬픈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마음의 출처를 찾아서성거리는 게 재밌었다. 고모 방에는 당대의 베스트셀러들과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고모가피아노 학원에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고 나면 혼자서 책을 꺼내보거나, 침대에 잠깐 누워 졸기도 했다. - P171

어느 날 고모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혼자 영화를 봤다.
어린애들은 볼 수 없는 영화라고 했는데, 볼 수 없다니까 더욱 궁금했다. 비디오테이프 제목을 살짝 봤더니 <퐁네프의 연인들>이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고모를 바라봤지만, 보게해달라고 조를 수는 없었다. 고모는 목소리와 분위기만으로아이들을 제압하는 사람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프랑스 영화감독 레오 까락스를 좋아해작품을 하나씩 찾아보던 중 <퐁네프의 연인들>을 발견했다.
당연히 고모가 떠올랐다. 영화를 두 번 봤고 가슴이 아팠고, 두근거렸다. 고모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고모는 씩씩하고활기차 보였고, 어떤 일이든 혼자 해결하려 했다.  - P172

피아노 학원을운영하며 살림을 책임졌던 집안의 큰 어른이었고 강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모도 나처럼, 나와 똑같이 상처받기 쉽고삶이 간단치만은 않은, 때로 삶을 힘겨워하며 어둠 속을 헤매던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랑과 예술에 대해 두근거리고 풍부한감성과 꿈이 있던 평범한 여자. 강철로 만든 사람이 아닌 그냥약한 사람. 고모는 많은 날들을 고모부와 소원하게 지내며,
외롭고 찬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때,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 P172

생각난다. 어릴 적 철없는 내가 고모는 피아노를 아주 잘치잖아요, 그런데 왜 피아니스트가 안 됐어요? 라고 질문을 하면어두운 종이 한 장이 얼굴에 내려오듯, 슬픈 표정으로 변하곤했던 고모의 얼굴. 툭, 떨어지던 고개.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다리 위를 걷는 줄리엣 비노쉬의얼굴을 보며, 젊고 예쁜 아가씨였던 고모, 아직 삶의 어두운면을 보기 전 발랄했을 고모를 떠올려본다. 지금도 신문에서읽은 문태준이나 안도현의 시에 대해 나와 이야기하길 좋아하는고모. 작고 어두운 방에서 혼자 웅크리고 낮잠을 자던 고모.
내게 피아노와 클레멘타인 노래와 수많은 인형극과 책을보여주고, 문학의 씨앗을 심어준 고모가 벌써 육십대 중반이다.
한없이 강할 것만 같던 고모가 얇아지고 있다. 무릎 수술을해서 목발을 짚어야 걸을 수 있다. 부스러지기 쉬운 꽃잎 같은고모의 인생이 내 앞에 흘러간다. - P173

이십대는 감정 과잉과 열망이 엉킨 소란한 시기다. 많은젊은이들에게 슬픔은 죽음과 맞닿은 듯한 슬픔이며, 걱정과불안이 고약하게 활개를 치는 시기이다. 고래떼 같은 걱정이 몰려오거나 침대를 휘감고 사라지는 파도 앞에서 젊은이들은 슬픔의 먹이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슬픈 일들은 유독 나를 통해 뿌리내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이던 그 시절.
멍하니 앉아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왜 우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데도 우는 것처럼 보였던 시절, 시엔처럼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저녁도, 바닥에 엎드려 시를쓰다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새벽도 있었다. - P181

오랫동안 고흐의 그림들 위를 서성였고, 슬픔 속에 척추를세우고 살다 간 프리다 칼로의 고통에서 위로를 받았다. 오븐에머리를 처박고 죽을 수밖에 없던 실비아 플라스나 슬픔으로짓무른 듯한 최승자의 얼굴, 비석처럼 기괴하게 서 있는 에곤실레의 자화상을 사랑했다. 방문을 닫고 이성복의 첫 시집 중아무 곳이나 펴서 소리 내 읽기도 했다. 울기 위해서. 슬픔을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픔을 해소하는유일한 방법은 슬픔에 젖었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었다.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독이 필요한 것처럼.
그때 슬픈 시를 많이 썼다. 슬픔에 대한 시를 쓰다, 열한편을 모아 공모전에 보내고 자연스럽게 등단을 했지만 중요한일은 아니었다. 등단보다 중요한 것은 슬픔을 적극적으로느끼고, 슬픔에 삶을 빌어먹는 일이었다. - P182

사랑이 질병인 것처럼, 내 이십대는 질병과 같았다. 슬픔도가장 격렬한 슬픔만, 아픔도 가장 치명적인 아픔만 골라껴안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슬픔은 폭죽처럼터져버렸고, 이미 사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폭죽에 대한 기억도,
귓가를 울리던 굉음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슬픔을 지나온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은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 P185

슬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것이고, 힘없는 자들을 가여워하지 않을 것이며, 나누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슬퍼하지 않으면 더이상 어떤 시나 노래도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 -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