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정수리를 기점으로 오른쪽이 아프다. 무거운 것에 짓눌린느낌이 목까지 이어진다. 하늘에 걸려 있는 것들은 구름이아니고, 해가 아니고, 달이 아니다. 풍경은 배경이 되고, 시간은나를 누르며 흘러간다. 시간이라는 무형의 감옥에 갇혀,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이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무, 꽃, 지나가는 별들을보지 못한다. 영혼은 발목만 두고 사라졌다. 없는 머리통과 없는 가슴과팔, 허벅지, 없는 보지와 없는 무릎을 발목이 견딘다. 발목만이견딘다. 기다리는 사람은 발목이 견디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못한 채 커피를 마시고 걸어 다니고, 전화를 하고, 책을 읽는다. 그러나 발목은 안다. 아무것도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목만이 안다.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어느 날, 기다리는사람 모르게 혼자 남은 발목이 조용히, 떠나버린다. - P205
오늘의 불안이 등짝을 맞고 시무룩해졌던 유년의나에게 귓속말을 하는 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그게 뭔지 모를 때가 있다. 내 진짜 모습. 깎이기 전 원석의내 모습, 아무것도 아닌 첫 찰흙 그대로의 내모습! 어쩌면 처음느낀 부끄러움이나 가벼운 죄의식, 그리움이나 불안, 연민과두려움, 날것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술렁이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오래된 터널을 걸어가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유년에 가 산다. 유년에서 아직 살고 있다. 때문에 오늘 낮에 내 옆모습이 굳어졌고 불안했으며,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유년에 아직 살고 있는 무엇 때문에내일 나는 우울하거나 발랄하거나 어쩌면 축축할 것이다. 만져보고 싶은 것은 등짝을 얻어맞기 전에, 아니 등짝을맞더라도 만져보자. 유년에 아직 많은 것들이 살고 있을 테니까. - P211
나는 언어를 이리저리 늘어놓거나 빼보면서 골몰하는 사람중 하나이지만 언어를 쉽게 믿지 않는다. 언어만큼 한계에부딪치기 쉬운 게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떤 감정이 몸속에들어와 휘몰아치고 위아래로 걸어 다니며 장기와피를교란시킨다. 그런데 이 감정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없어 무력함을 느낄 때가 있다. 가끔 긴 글을 써야 할 때나 아주많은 말을 해야 할 때면 숨이 턱 막히기도 한다. 긴 이야기를듣거나 읽는 일은 즐길 수 있지만 내가 나서서 장대한 이야기를해야 한다면 어디로든 숨을 곳부터 찾는 타입이다. 마치 장한복판에 서서, 수없이 많은 콩들을 줄 맞춰 길게 늘어놓는임무를 맡은 사람처럼 버겁다. - P217
감정이나 스토리를 전달하는 데 있어 완벽한 도구는 말이아니다. 말은 감정과 상황과 스토리가 다 지나간 뒤에 ‘겨우‘ 남는 찌꺼기일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말이 먼저인 경우는없다. 말은 가장 마지막에 혼자 남은 자가 긁어모아 기록할 수있는 연약한 도구일 뿐이다. 물론 말이 전부이거나 완전할 때도있다. 선언과 예언, 잘 표현된 문학작품에서는 말의 위력이 크다. 그러나 일상에서 많은 경우 말은 참 무용지물이거나 요령부득, 사고뭉치일 때가 많다. 말보다 더 효율적이고 강한 도구는몸이다. 몸은 말보다 적절한 언어를 더 잘 찾는다. 말은 수없이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은 웬만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먹는 대로 찌는 살들을 생각해보라! 몸은 냉정하다). - P217
춤은 말보다 앞선 언어다. 독일의 무용가이자 안무가인피나 바우쉬는 "나는 무용수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지가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고말했다. 춤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몸과 박자를 같이한다. 감정과 몸을 거의 동시에 움직이게 한다. 무용수가 슬픔에대해 춤을 추려 할 때, 몸속에서 일어나는 슬픈 감정과표현으로써 동작은 동시 사건으로 벌어진다. 춤은 그 자체로사건이다(말은 사건 이후에 오거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등장한다). 무용수가 점프를 할 때 그의 몸을 타고 뛰어오르는두려움이나 슬픔, 격정과 환희의 감정은 몸을 통해 실제 높이를입는다. 무용수가 사랑을 연기할 때, 그는 발가락 끝부터머리카락 끝까지 사랑을 소용돌이처럼 이끌고 돈다. 관객에게알린다. 사랑이라고, 내가 사랑이라고! - P218
피나 바우쉬는 살아 있는 나무 인간, 유연한 나뭇가지다. 오른손을 왼쪽으로 움직일 때 꽃 피는 나뭇가지를 오른쪽에서왼쪽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얼굴과목, 쇄골, 앙상한 가슴, 팔꿈치, 손목, 손가락, 허리, 고관절, 대퇴골, 무릎, 정강이, 발목,발가락이 모두 입을 가진다.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몸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를 제압할 수 없다. 그녀의무용수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넘어 황홀하고, 슬프고, 생각이 많은 몸을 가지고 있다. 몸이 저렇게 많은 생각을 표현할수 있다니! 생각의 주체가 뇌가 아니라 무릎이라니, 엉덩이라니, 기다란 목이라니! - P219
언어가 가진 슬픔은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의 ‘섣부름‘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무용수에 대해 노래하려 애썼지만 표현에 한계를 느끼고 만다. 미숙한 내 언어만으로는 무용수를 제대로표현하기 어렵다. 발레리나의 춤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 춤 때문에 나온 말은 아닐지. - P222
속상해, 라는 말은 이상하지. 속삭이는 것 같잖아요.
내가 아프기 전에 당신이 곪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달이 반 뼘 정도 상해 있습니다.
나는 왜 샅을 적실까요? 나는 왜 당신의 껍질만 먹을까요? 나는 왜 껍질처럼 질겨질까요?
귀는 길게 자라 당나귀 귀를 넘어버리고, 나는 비밀을 덮고 잠들겠습니다.
"여름도 이제 거의 다 읽혔어." 당신이 혼잣말하고
한동안 시를 못 쓴 나는 시 곁을 기웃거리기만 했습니다. 괜찮아요. 그 일도 시의 한 부분일 거예요.
뱀에게 물리기 전에 당신도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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