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나는 것‘ 이란 생각이 시인의 산문집을 읽는 내내 따라다닌다.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진정으로 속상해하던 때가 언제였지?
나는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면서도 멀쩡한 얼굴로잘도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마음이 말랑했을 때되풀이해 읽던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건조한 세상에서 눈 뜬 장님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나는 안녕한지, 잘 지내는지, 자신이 없다. - P76

양지에 발을 들이는 일이 내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이든 사랑이든 생각이든, 바르고 멀쩡하게 생긴 것.
온화하고 근사한 것, 떳떳하고 따뜻한 것, 좌우대칭에 맞춰균형을 이루는 것이 힘들었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단조인, 장조로 흘러가다가도정신 차리고 보면 여전히 단조를 노래하는, 낮은음자리표와 16분 쉼표들의 숨가쁜 행진. 전깃줄로 말하자면 얼키설키 얽혀 참새들이 앉기 싫어하는 자리 방으로 따지자면 볕은 가난하고 곰팡이만 승승장구 번식하는 곳.
이를테면 나는 서자, 변방, 덤, 가시랭이, 꽃받침, 맹장 같은존재다. 중심이나 주인공이 아닌, 원래 있으면 안 되는 것이불룩 생긴 것. 말하자면 혹 같은, 둘 곳이 없어 잠시 얹어둔존재 같은 것.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할말이 많으면서도 할말이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 P79

그러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봄은 공평하니 낮고 음침하고 축축한 곳에도 내려와 간혹 고개를 쳐든 음지식물들과 마주하기도 하니까. ‘곰팡이도 꽃처럼‘ 피어나는 거니까.
말하자면 달의 반쪽을 덮고 자던 날들이 내 생활인 것인데 시간은 흘러 ‘‘을 만들고 ‘집‘은 자라나 뭉텅이인 삶을 만들어그 삶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더란 얘기다. 몸 어느 자리는습기가 빠져 제법 뽀송해지기도 하더란 말이다. - P79

삶에 있어 영원한 양지도 영원한 음지도 없다.


걸음걸이가 땅을 만든다. 운동화를 신고 마른 흙길을걸어가다보면 알 수 있다. 짜부라진 개구리나 백발을 휘날리며시드는 중인 할미꽃, 흙탕물에서 꼬물꼬물 뒹구는 올챙이,
자동차 바퀴에 옆구리가 터져 죽은 새끼 뱀도 제각각 자기구역에서 열심히 살았다. 죽고 사는 건 모두 팔자소관. 주어진제 몫을 열심히 살아내기만 하면 된다.
희망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냥 열심히 걷다가 운동화에 묻은 마른 흙을 털고, 맨발과 젖은 뿌리를공들여 말리면 된다. 양지바른 길에서 둥근 무릎을 쉬게 하면된다.
생각대로 되는 것이 없는 삶에 싫증이 나 어느 날은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술에 취하기도 하겠지만 어쩌랴모든 게 팔자소관이란 말이다(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모든 게괜찮아진다). 휘청휘청, 기필코 내게 기어오겠다는 기다란 뱀같은 팔자를 긍정해야지! 즐겁게 피리라도 불며, 환영해야지. - P80

등뒤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느긋한 기다림도 요리의 즐거움중 하나다. 저쪽에서 기대를 품고 기다리는 소중한 사람(대개 소중한 사람에게만 요리를 해주는 법). 마치 이쪽의 나와 저쪽의 당신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있어, 동선에 따라 흔들흔들 기분좋게 흔들리는 것 같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재료들, 혹은 나와 요리를 기다리는 사람과의 무언의 대화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요리하는 시간이 행복한순간으로 바뀐다. 물론 요리를 매일같이 ‘일처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료와의 대화가 오래 살아 지겨워진 부부 간의대화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요리해주는 사람에게 아무쪼록 감사하면서, 엎드려 공손히, 음식을 받아먹어야 할 것이다. - P113

아프게 되면 아픈 부위가 곧 ‘손님‘이다. 머리가 아프면머리가 손님이 되고, 배가 아프면 배가, 발톱이 아프면 발톱이,
이가 아프면 이가(이는 손님 중 VIP! 각별한 고통을 주신다)손님이자 왕이 된다.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손님은 모시지않았으면 좋겠다. 몸 곳곳의 부위들이 죽을 때까지 도드라지지않고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게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다면그게 가장 감사한 일일 텐데.
재채기와 함께 눈에서 눈물이 코에서 콧물이찍, 하고나오는 순간! ‘코‘께서 유자차라도 끓여오라고 호통을 치신다.
이때 비죽, 고개를 내밀며 웃고 있는 콧물이 코보다 더 밉다.
시간이 두 배 속도로 지나 ‘코‘께서 예전처럼 부드럽게숨쉬고 심심할 때 코딱지나 모으시면서, 제발 도드라지지 않고몸의 일부로서 겸손히 살아주셨으면 좋겠다. 비죽 나온 콧물을손등으로 훔치며 유자차를 끓이러 가는 길, 가스레인지까지 멀고도 높구나. - P122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꽃진 다음 이파리가 주인공이라고 외치듯, 막 태어난색깔인 듯 화사하게, 처녀의 종아리처럼 빛난다. 아직은 떨어질일이 없다고, 아마 영영 없을 거라고 자신하는 저 몸짓! 앳된얼굴들. 자전거를 막 배운 아이처럼 생동하는 움직임!


눈물이나 떨어짐, 기우는 일 따위는 모르는 듯 떨다 웃다선명해지는 저 잎사귀들.


저건 어느 나라 사파이어지?
그늘마저 화사한 4월의 나무들! 좋다. 참 좋다! - P145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알았다. 세상의 강물들이가난해지고 있음을, 구절초가 중심부터 썩듯이 빈 젖의 까만꼭지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어릴 때 할머니의 젖이나 팔뚝 안쪽, 늘어진 살을 만지며잠들었다. 할머니는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보다 진했고나긋나긋했으며, 낙관적이었다. 엄마들에게는 없는 삶을관조하는 관록이 있었고, 엄마들에게는 있는 긴장과 호들갑이할머니에겐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적당한 늙음‘이 좋았다.
나 말고 다른 아이를 낳을 가망 없음이, 언제나 품에 나만 안을것 같은 안정감이 좋았다. - P147

고모 방은 작고 아늑했다. 하이든 사진이 걸려 있었고침대와 화장대, 키 낮은 책장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고모의 책장에서 신경숙 소설 『깊은 슬픔이나 최영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었다. 신경숙 소설에는 야한 장면이나와 심장이 두근거렸고, 최영미의 시집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알아듣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서정윤 시집 『홀로서기도있었는데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떤 슬픈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마음의 출처를 찾아서성거리는 게 재밌었다. 고모 방에는 당대의 베스트셀러들과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고모가피아노 학원에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고 나면 혼자서 책을 꺼내보거나, 침대에 잠깐 누워 졸기도 했다. - P171

어느 날 고모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혼자 영화를 봤다.
어린애들은 볼 수 없는 영화라고 했는데, 볼 수 없다니까 더욱 궁금했다. 비디오테이프 제목을 살짝 봤더니 <퐁네프의 연인들>이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고모를 바라봤지만, 보게해달라고 조를 수는 없었다. 고모는 목소리와 분위기만으로아이들을 제압하는 사람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프랑스 영화감독 레오 까락스를 좋아해작품을 하나씩 찾아보던 중 <퐁네프의 연인들>을 발견했다.
당연히 고모가 떠올랐다. 영화를 두 번 봤고 가슴이 아팠고, 두근거렸다. 고모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고모는 씩씩하고활기차 보였고, 어떤 일이든 혼자 해결하려 했다.  - P172

피아노 학원을운영하며 살림을 책임졌던 집안의 큰 어른이었고 강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모도 나처럼, 나와 똑같이 상처받기 쉽고삶이 간단치만은 않은, 때로 삶을 힘겨워하며 어둠 속을 헤매던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랑과 예술에 대해 두근거리고 풍부한감성과 꿈이 있던 평범한 여자. 강철로 만든 사람이 아닌 그냥약한 사람. 고모는 많은 날들을 고모부와 소원하게 지내며,
외롭고 찬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때,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 P172

생각난다. 어릴 적 철없는 내가 고모는 피아노를 아주 잘치잖아요, 그런데 왜 피아니스트가 안 됐어요? 라고 질문을 하면어두운 종이 한 장이 얼굴에 내려오듯, 슬픈 표정으로 변하곤했던 고모의 얼굴. 툭, 떨어지던 고개.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다리 위를 걷는 줄리엣 비노쉬의얼굴을 보며, 젊고 예쁜 아가씨였던 고모, 아직 삶의 어두운면을 보기 전 발랄했을 고모를 떠올려본다. 지금도 신문에서읽은 문태준이나 안도현의 시에 대해 나와 이야기하길 좋아하는고모. 작고 어두운 방에서 혼자 웅크리고 낮잠을 자던 고모.
내게 피아노와 클레멘타인 노래와 수많은 인형극과 책을보여주고, 문학의 씨앗을 심어준 고모가 벌써 육십대 중반이다.
한없이 강할 것만 같던 고모가 얇아지고 있다. 무릎 수술을해서 목발을 짚어야 걸을 수 있다. 부스러지기 쉬운 꽃잎 같은고모의 인생이 내 앞에 흘러간다. - P173

이십대는 감정 과잉과 열망이 엉킨 소란한 시기다. 많은젊은이들에게 슬픔은 죽음과 맞닿은 듯한 슬픔이며, 걱정과불안이 고약하게 활개를 치는 시기이다. 고래떼 같은 걱정이 몰려오거나 침대를 휘감고 사라지는 파도 앞에서 젊은이들은 슬픔의 먹이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슬픈 일들은 유독 나를 통해 뿌리내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이던 그 시절.
멍하니 앉아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왜 우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데도 우는 것처럼 보였던 시절, 시엔처럼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저녁도, 바닥에 엎드려 시를쓰다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새벽도 있었다. - P181

오랫동안 고흐의 그림들 위를 서성였고, 슬픔 속에 척추를세우고 살다 간 프리다 칼로의 고통에서 위로를 받았다. 오븐에머리를 처박고 죽을 수밖에 없던 실비아 플라스나 슬픔으로짓무른 듯한 최승자의 얼굴, 비석처럼 기괴하게 서 있는 에곤실레의 자화상을 사랑했다. 방문을 닫고 이성복의 첫 시집 중아무 곳이나 펴서 소리 내 읽기도 했다. 울기 위해서. 슬픔을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픔을 해소하는유일한 방법은 슬픔에 젖었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었다.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독이 필요한 것처럼.
그때 슬픈 시를 많이 썼다. 슬픔에 대한 시를 쓰다, 열한편을 모아 공모전에 보내고 자연스럽게 등단을 했지만 중요한일은 아니었다. 등단보다 중요한 것은 슬픔을 적극적으로느끼고, 슬픔에 삶을 빌어먹는 일이었다. - P182

사랑이 질병인 것처럼, 내 이십대는 질병과 같았다. 슬픔도가장 격렬한 슬픔만, 아픔도 가장 치명적인 아픔만 골라껴안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슬픔은 폭죽처럼터져버렸고, 이미 사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폭죽에 대한 기억도,
귓가를 울리던 굉음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슬픔을 지나온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은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 P185

슬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것이고, 힘없는 자들을 가여워하지 않을 것이며, 나누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슬퍼하지 않으면 더이상 어떤 시나 노래도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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