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이며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 그러하다. 그에게 나는 그저 쓸모 있는 육체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 나는 짐을 싣지 않은 배,
포도주가 담겨져 있지 않은 잔이 아니며, 속된 말로 빵 하나 못 굽는 오븐이 아니다. 그에게 나는 그저 텅 빈 존재가 아니다. - P282

"저도 이제부터 여기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하지만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 하마터면 나는 그가두려워한다고 생각할 뻔했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오."
"제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고 싶으신 거군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직설적인 지적처럼 느껴졌다. 단호하고 의도가 분명한 진술, 내 삶이 견딜만하다면, 그럼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이 다 정당화된다.
"그래 맞아, 나는 그랬으면 좋겠소."
"좋아요, 그럼" - P326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내가 그의 약점을 쥐었다. 그에 대항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나 자신의 죽음이다. 내가 잡은 약점은 바로 사령관의 죄책감이다. 드디어.
"당신은 뭘 갖고 싶소?"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볍기만 하다. 이게 단순한 금전 거래에 지나지 않는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사탕이나 담배를 사듯이 거래 규모도 아주 하찮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핸드로션 말고 말씀이시죠?"
‘핸드로션 말고."
그가 동의한다.
저는...... 저는 알고 싶어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말이라, 우유부단하고 심지어 어리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저한테 알려줄 일이 있으시다면 뭐든지." 하지만 그건 너무 경솔하게 들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이에요." - P327

밤이 내린다. 아니 이미 내린 지 오래다. 어째서 밤은 여명처럼 솟아오르는 게 아니라 떨어져 내리고 저문다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일몰 시각에 동편을 보면, 밤이 내리는 게 아니라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름의 장막 너머 검은 태양처럼 어둠이 지평선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뭉게뭉게 하늘로 솟아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불길로부터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산불이나 도시가 불탈 때 지평선바로 아래 죽 늘어서 타오르는 불길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아마 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지 모른다. 두꺼운 커튼이눈앞을 가린다. 양모 담요,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밤이 내렸다고 해야겠지. 돌덩이처럼 나를 짓누르는 밤의무게가 느껴진다. 산들바람 한 점 없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 곁에앉아 있다. 커튼은 활짝 걷어두었다.  - P331

더 좋은 세상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되뇐다. 어떻게 이걸 더 좋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 - P366

늦은 오후, 하늘은 아지랑이가 피고, 햇살은 퍼져, 마치 황동 먼지처럼 사방에 무겁게 깔려 있다. 나는 오브글렌과 함께 인도를 미끄러지듯 걸어간다. 우리 둘이 한 쌍, 우리 앞에는 한 쌍이 더 있고, 길건너에 또 한 쌍이 있다. 멀리서 보면 우리는 보기 좋을 것이다. 마치 벽지의 부조 장식에 붙어 있던 네덜란드의 젖 짜는 처녀들처럼.
옛날 도자기로 된 소금 그릇, 후추 그릇이 가득 얹혀 있는 찬장 선반처럼,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변화 없이 이어지는 백조들의 선단 뭐 그런 것처럼, 그림같이 보기 좋긴 하겠지. 눈에 눈들에, ‘눈‘들에게 보기 좋겠지. 이 모든 쇼는 그들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기도부흥성회‘에 참석해 우리가 얼마나 순종적이고 경건한지 보여 주러가는 길이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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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엄마는 울기도 했다. 너무 외로웠다면서.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넌 상상도 못할 거야. 난 친구들도 있었고 재수가 좋은 편이었는데, 하지만 그래도 외로웠어.
나는 어떤 면에서 우리 엄마를 존경했지만, 우리 관계는 한번도 쉽지 않았다. 내게 거는 엄마의 기대가 너무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당신의 생을 옹호하고, 당신의 선택을 편들어 주길 바랐다. 나는 내 인생을 엄마가 내건 조건에 맞춰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사상을 온몸으로 보여 주는 완벽한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래서 싸웠다. 나는 엄마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나는 한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다.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바람은. - P212

여긴 덥고, 너무 시끄럽다. 주위의 여자들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나지막하게 읊는 음송이라도 날마다 침묵 속에서 지내던 내게는지나치게 시끄럽다. 역시 방구석에는 양수가 터져 나왔을 때 닦은피로 얼룩진 이불 홑청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다. 나는 이제야 그걸 알아챘다.
방 안에서는 냄새가 나고 공기도 텁텁하다. 창문을 하나 열어야하는데, 냄새는 다름 아닌 우리들의 살내다. 유기적인 냄새, 땀과 홑청의 피에서 나는 희미한 철분 냄새, 그리고 또 다른 냄새가 난다.
좀 더 동물적인 이 냄새는 틀림없이 재닌한테서 풍기는 냄새다. 동굴의 냄새, 사람이 살고 있는 동굴의 냄새, 난소를 제거하지 않은 고양이가 침대에서 출산을 했을 때 체크 무늬 담요에서 나던 냄새. 자궁의 냄새. - P213

나는 말한다. 이젠 나도진이 빠지고, 완전히 초주검이 되었다. 젖가슴이 탱탱하게 아파왔고, 심지어 젖이 약간 새기까지 했다. 가짜젖 간간이 이런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벤치에 앉아 이송되어 간다. 우리는 이제 아무런 느낌도 없어져 빨간 옷 뭉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는 아파한다.
우리 모두 무릎 위에 유령 하나씩을 존재하지도 않는 아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 흥분이 사그라진 지금, 우리는 저마다의 실패와 대면해야 한다. - P221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받지 않아도 된다든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 P235

나는 어두침침한 복도와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지나, 몰래 내 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불을 끄고, 단추와 후크를 하나도 끄르지 않은 채, 빨간 드레스를 그대로 입은 채로 의자에 앉는다. 옷을 다 입고 있을 때만 맑은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내게 필요한 건 올바른 시각이다. 액자 하나와 평면 위에 배열된형상들을 통해 만들어진 깊이의 환영, 원근법이 필요하다. 그렇지않으면 고작해야 2차원뿐일 테니, 원근법이 없으면 벽에 부딪혀 납작하게 으깨진 얼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 만물이 거대한 전경(前景)이 되어 시시콜콜한 세부 사항, 클로즈업, 털이며 이불 홑청의싸임까지 눈앞에 훤히 보일 것이다. 심지어 얼굴의 분자들까지도 보일 것이다. 내 이 피부 위에 마치 지도(地圖)처럼 불모의 도해가 되어,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작은 길들이 지그재그로 교차하리라.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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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에 누워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유리잔의 테두리를물로 적신 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 소리가 난다. 지금 내가 꼭 그런 느낌이다. 유리잔에서 울리는 이 소리. 지금 내 기분은 꼭 ‘산산조각 나다‘라는 단어 같다. 내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곁에는 루크가 둥근 내 배에 손을 대고 있다. 우리 세 식구가 침대에 함께 누워 있다. 그 애는 내 안에서 발로차며, 몸을 뒤치고 있다. 창 밖에 천둥 번개가 치고 있어서, 아기도잠을 못 이루는 모양이다. 심장 소리가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 소리처럼 포근하게 어루만져주는 그곳에서도, 아기들은 듣기도 하고 자다 놀라서 깨기도 하는 거다. 아주 가까운 데서 번개가 번쩍 비치고, - P179

왔기를 기도한다.
나는 이 사실을 믿는다.
나는 또한 루크가 어딘가에서 사각형의 물체 같은 것 위에 똑바로앉아 있다고 믿는다. 회색 시멘트나 일종의 선반이나, 침대나 의자같은 물건 끝에.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그들이 어떤 옷을 입혔는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하지만 하느님 외에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어쩌면 알아볼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는 생각날 때마다 그들이 이가 쾬다며 깎아 주었지만, 면도는 1년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모습이다. 아니, 이 부분은 수정해야겠다. 이 때문에 머리를 깎았다면 수염도 깎아야 할테니까. 그렇지않겠는가. - P182

아무튼 그들의 이발 솜씨는 별로 좋지 않다. 머리카락은 들쭉날쭉하고, 뒷덜미에는 면도칼에 벤 상처가 있다. 하지만 더 나쁜 건 그가10년, 20년은 족히 더 늙어 보인다는 거다. 늙은이처럼 구부정하고, 눈 밑의 살은 축 처졌고, 뺨에는 조그만 자줏빛 혈관들이 불끈 솟아올라 있으며, 흉터가, 아니 상처가 있다. 아직 아물지 않아 튤립 꽃의 붉은 줄기 끝 부분 같은 검붉은 상처가, 왼편 얼굴을 따라 아래로 죽그어져 있다. 최근에 살갗이 찢어진 상처다. 육신은 참으로 쉽게 다칠 수 있고 쉽게 버릴 수 있다. 육신이란 수분과 화학 물질뿐, 결국모래사장에서 말라붙어 죽어가는 해파리와 다를 바가 별로 없다.
루크는 고통스러워 손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었는지조차 모른다. 이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뭔가, 뭔가 죄목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면 그를 왜 불 - P182

잡아두겠는가? 어째서 아직도 시체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틀림없이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정보가 루크에게 있다. 그게 뭔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지만, 뭔지 몰라도 루크가 아직까지 말하지 않았다는걸 상상할 수 없다. 나라면 벌써 불어 버렸을 텐데.
그의 온몸에서는 냄새가 자신의 냄새, 더러운 우리에 갇힌 동물의 냄새가 펄펄 풍긴다. 나는 휴식 시간의 그를 상상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을 상상하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칼라 아래, 소맷부리 위의 몸을 차마 상상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의 몸에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신발은 있을까? 아니, 없다. 그런데 바닥은 차갑고 축축하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서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까? 그렇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렇게 비참하게 전락한 상황에서는 뭐든 무조건 믿어야한다. 나는 이제 텔레파시라든가 에테르의 진동 따위 같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믿는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 P183

나는 또한 그들이 그를 붙잡기는커녕 따라잡지도 못했다고 믿기도 한다. 그가 탈출에 성공했다고, 강물을 헤엄쳐 강둑에 이르렀고,
국경을 넘어, 발을 질질 끌고 머나먼 해변에, 이를 딱딱 맞부딪치며헤엄쳐 어느 섬에 다다랐다고 믿는다. 가까스로 근처의 농가에 가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거라고 믿는다. 집주인도 처음에는 의심했겠지만 나중에는 그의 본심을 알고선 친절하게 대해 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를 고발할 사람들은 아니었고, 어쩌면 퀘이커 교도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들이 몰래 그를 본토로 데그리고 가, 이 집 저집을 전전하며 숨겨 주었고 여자는 뜨거운 커피를 - P183

끓여주고 남편의 옷가지를 그에게 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 옷차림을 그려 본다. 루크에게 따뜻한 옷을 입혀 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접선했다. 틀림없이 레지스탕스가, 망명 정부가 있을 거다. 저 밖에 누군가 있어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을 거다.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없음을 믿는 것처럼, 아니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있을 수 없음을 믿듯이 나는 레지스탕스의 존재를 믿는다.
레지스탕스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텔레비전에 나오는범죄자들은 다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오늘이라도 그에게서 전갈이 올지 모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상상도 못한 사람을 통해서, 꿈에도 생각 못했던 사람에게서.
저녁 식사를 받쳐 내오는 쟁반 위 음식 접시 밑에 있을까? ‘순살코기정육점‘ 카운터 너머로 토큰을 내미는 내 손에 누군가가 쥐여 줄까? - P184

전갈에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씌어 있으리라. 조만간 나를 꺼내 주겠다고 그들이 어디로 데리고 갔건 우리 함께 그 애를 찾아내자고 씌어 있으리라. 그 애는 우리를 잊지 않았을 거라고, 우리 세식구가 함께 살게 될 거라고. 그동안은 꾹 참고 훗날을 기약하며 몸성히 있으라고, 내가 겪은 일들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씌어 있으리라. 전언에는 그 이야기도 꼭 씌어 있으리라. 끝내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건 바로 이 전갈이다. 나는 전갈의 존재를 믿는다.
내가 믿는 것들이 전부 사실일 리는 없다. 그중 하나는 틀림없이 사실이겠지만. 하지만 나는 셋 다. 세 가지 다른 모습의 루크를 한꺼 - P184

번에 믿는다. 이렇게 모순에 찬 믿음만이 지금 내가 무엇이든 믿을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하고 있을 수 있으니까.
이것 역시 나의 믿음일 뿐이다. 이것 역사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장 오래된 교회 근처 공동묘지 묘석들 중에는 닻과 모래시계,
그리고 ‘소망 속에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
‘소망 속에서‘, 어져서 죽은 사람 위에다 그런 말을 써놓았을까?
소망하고 있던 것은 시체였을까.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루크는 소망할까? - P185

커튼을 통해 희미한 빛, 회색의 여명이 들어온다. 오늘은 별로 해가 좋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딱딱하고 작은믿음의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바깥을 내다본다. 아무것도 보이지다른 쿠선 두 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생각한다. 한때는 세 개가 있었을 텐데, ‘소망‘과 ‘사랑‘까지. 그것들은 다 어디 처박혔을까?
세레나 조이는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다. 아주 해어져서 못 쓰는 물건이 아니라면 절대 버렸을 리가 없다. 하나는 리타에게, 하나는 코라에게 준 걸까?
벨이 울리고, 나는 시간이 되기 전에 벌써 일어선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옷을 입는다. - P190

내 앞에는 쟁반이 있고, 쟁반 위에는 사과 주스 한 컵, 비타민정한 알, 숟가락 하나, 갈색 토스트 세 쪽이 담긴 접시 하나가 있다. 또끝이 담긴 좋지 하나, 달걀 받침이 놓여진 또 다른 접시 하나가 있다.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몸처럼 생겨서, 치마 밑에는 달걀 하나를 더넣어 따뜻하게 보관해 두는 그런 용기다. 달걀 받침은 파란 줄무늬가 있는 백색 도자기다.
첫 번째 달걀은 흰색이다. 달걀 받침을 살짝 옮겼더니, 창문에서들어오는 축축한 햇살을 반사한다. 햇살은 밝아졌다. 시들었다. 다시밝아지면서 쟁반으로 툭 떨어진다. 달걀 껍질은 매끈하면서도 까칠까칠하다. 미세한 자갈 같은 칼슘 입자들이 햇살에 도드라져, 달 표면의 크레이터처럼 보인다. 황량한 풍경이지만 흠 하나 없이 완벽하다. 풍요에 마음이 어지러워질까 봐 성자들이 들어갔던 사막이 이러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이 이 달걀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달의 생명체는 표면이 아니라, 안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달걀은 이제 자체적인 에너지가 있는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달걀을 바라보고 있자니 커다란 기쁨이 밀려든다.
햇빛이 사라지자 달걀은 빛을 잃는다. - P191

미니멀리즘 신봉자의 삶에서 쾌락은 달걀이다. 한쪽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래반응해야 하는 정상적인 방식인지도 모른다. 달걀만 있으면 되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이렇게 전락한 상황에서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이상한 대상에 집착케 한다. 나는 애완 동물을 키우고 싶다. 새나 고양이같이 뭐든 친근한 동물을, 영 형편이 안 된다면 쥐라도 좋지만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집은 너무 청결하다.
나는 숟가락으로 달걀 윗부분을 잘라내고 내용물을 먹는다. - P192

두 번째 달걀을 먹는 동안,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진다. 처음엔 아주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다가, 커다란 저택들과 바짝 깎은 잔디밭들을 꼬불꼬불 지나 내게로 점점 다가온다. 곤충이 윙윙거리듯이 가느다란 소리였다가, 가까워지면서 꽃처럼 피어나 급기야 트럼펫 소리처럼 활짝 벌어진다. 이 사이렌 소리는 일종의 선포다. 나는 먹다말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심장 고동이 빨라진다. 다시 창가로 가 본다. 파란색일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걸까? 하지만 모퉁이를 돌고 거리를 지나쳐 저택 앞에서 멈추는 걸 보니 빨간색이다. 아직도 소리는 커다랗게 울려퍼지고 있다. 아, 기쁘다, 이런 일은 요즘 정말 흔치않다. 두 번째 달걀을 반쯤 먹다 말고, 옷장으로 달려가 겉옷을 찾아입고 있는데 벌써 계단에서 발소리가 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 P192

옷을 입혀 주는 코라의 얼굴에는 정말로 미소가 떠올라 있다.
복도를 거의 달려가다시피 한다. 계단은 스키를 타는 기분으로 질주한다. 현관문은 드넓다. 오늘은 나도 정문으로 나갈 수 있다. 수호자가 서서 경례를 붙인다.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고, 임신한 흙과 풀의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운다.
빨간 ‘출산차‘가 진입로에 주차하고 있다. 뒷문이 열려 있고 나는기어 올라탄다. 마룻바닥의 카펫은 빨간색이고, 창문에도 빨간 커튼이 쳐져 있다. 차 안에는 벌써 다른 여자들이 셋이나 타고 있다. 그녀들은 밴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되어 있는 긴 의자에 앉아있다. 수호자는 이중문을 닫아 잠그고 운전석 옆의 앞자리로 올라탄다. 유리가 끼워져 있는 철창 사이로 그들의 뒤통수가 보인다. 머리위에서 사이렌이 ‘비켜 비켜!‘라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와중에 우리 차는 한 번 펄쩍 요동을 치더니 출발한다. - P193

확률은 1/4이라고 센 배웠다. 한때 화학 물질, 방사선, 방사터에서능 물질로 대기가 가득 차고, 물 속에는 독성이 있는 분자 화합물들이 녹아들었다. 이를 청소하는 데 수년이 걸리는데, 그동안 이러한물질들은 우리 몸으로 스며들어 지방 세포 속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누가 알겠는가? 바로 우리들의 육체가 오염되어 기름 범벅이 된해변처럼 더러울지도 모른다. 해변의 새들이 죽어가듯 태아들에게도 치명적이다. 어쩌면 당신의 몸을 먹은 대머리 수리는 죽을지 모른다. 밤이 되면 낡은 시계처럼 어둠 속에서 당신의 몸이 빛을 발할지도 모른다. 죽음의 시계라는 살짝수염벌레 일종의 딱정벌레인데, 시체를 매장한다.
- P195

오브오렌은 주인 침실에 있다.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사령관과 아내가 밤마다 잠을 자니까. 그녀는 그들의킹 사이즈 침대에다 베개를 쌓아 몸을 받치고 앉아 있다. 몸은 커다게 부풀었지만 초라하게 작아진 재난, 옛 이름을 빼앗긴 재닌, 그녀는 하얀 면 잠옷 차림이지만, 잠옷은 허벅지까지 걷어올린 채다.
금작화 색깔의 긴 머리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나로 모아 머리 뒤로 묶었다. 두 눈은 꼭 감고 있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심지어 이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그래 봤자 그녀도 우리 일원이다. 최대한 쾌적하게 살아 보자는 것 뿐이지, 무슨 지나친 욕심을부린 것도 아니다. 우리 중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말이다. ‘가능한 한‘이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재난이 잘하고 있는 셈이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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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여자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나는 당시의 규칙들을 기억한다. 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아무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던 그 규칙들 말이다. 설사 상대가 경찰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지 마라. 문 아래로 신분증을 밀어 넣으라고 해라. 곤경에 처한 척하는 오토바이운전자를 도와준답시고 길가에 정차하지 마라. 자동차 문을 잠그고계속 가라, 누군가 휘파람을 불어도 절대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마라. 밤에 혼자 빨래방에 가지 마라.
나는 빨래방을 생각한다. 빨래방에 갈 때 입었던 옷들, 반바지, 청바지, 운동복,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던 것들, 내 옷들, 내 비누, 내 돈,
내가 번 돈, 그런 통제력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빨간 옷을 입고 짝을 지어 같은 거리를 걷고 있지만아무도 우리를 보고 음담패설을 퍼붓지 않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아무도 만지지 않는다. 아무도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 P48

목표를 향한 자유가 있는가 하면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있지. 무정부 시대의 자유는 무엇을 행할 자유였어. 하지만 지금 여러분에게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거야. 그것을 얕보지 마. - P49

우리 앞 오른편에는 우리가 드레스를 주문하는 가게가 있다. 어떤이들은 그 옷을 ‘해빗‘이라고도 부르는데, 아주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벗어던지기 힘든 것이 습관이니까. 가게 바깥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간판이 달려 있는데 황금색 백합 모양이다. 가게 이름은 ‘들판의 백합들‘이다. 백합 밑에 보면 글씨가 페인트로 지워진 부분이 보이는데, 그건 가게의 이름마저도 우리에게 지나친 유혹이 될수 있다고 그들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제 가게들은 간판 모양으로만 구별할 수 있다.
‘백합들‘은 예전엔 영화관이었다. 학생들은 그곳을 몹시 자주 찾았다. 봄이 오면 ‘백합‘ 영화관에서는 험프리 보가트 페스티벌이열렸는데, 그때 상영한 영화들에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들, 로렌 바콜과 캐서린 헵번이 나왔다. 그녀들은 앞에 단추가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는데, 그 의상은 ‘타락‘이라는 단어를 은근히 시사하고 있었다. 이런 여자들은 단추를 풀고(undone) 타락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들은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49

꽃받침 쪽 재생되어 가는 부분의 색깔. 빨간색은 같지만 둘 사이엔 전혀 연관성이 없다. 튤립은 피로 물든 튤립이 아니고, 빨간 미소도 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해 줄 말이 전혀 없다. 튤립은 교수형을 당한 시체들을 믿지 않는 이유가 아니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두 개체는 각자 유효하며 실존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유효한 사물들이 널려 있는 들판을 지나나는 내 길을 찾아가야만 한다. 매일매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그런 구분들을 하느라 대단한 노력을 쏟아붓는다. 구분하고 분별할필요가 있다. 마음속에선 아주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 P65

내 곁의 여자에게서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그녀는 울고 있는 걸까? 여기서 운다고 해서 어떤 식으로 내게 잘 보일 수 있는 거지? 그런 걸 알아줄 만한 여유가 내게는 없다. 내 두 손이 바구니 손잡이를으스러져라 불끈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무엇이든 절대로 그리 순순히 내주지 않을 테다.
예사라는 건, 여러분이 익숙해져 있다는 뜻이야. 리디아 아주머니는 말했다. 지금은 보통으로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그렇게 될 거야. 예사가 될 거야. - P65

방금 눈앞에서 뭔가 벌어졌는데, 도대체 뭐지? 고지의 둥근 곡선위로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진, 모르는 나라의 국기를 본 것 같다. 공격을 의미할 수도, 협상을 의미할 수도, 아니면 뭔가의 경계, 영역을뜻하는지도 모른다. 동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몸짓. 내리깐 푸른눈꺼풀, 뒤로 젖힌 귀, 곧추세운 털, 희번덕거리며 드러낸 이빨, 그는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걸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를보지 못했다. 아니 못 보았길 바란다. 그는 침범하려 한 건가? 내 방에 들어갔을까?
아, 그만 나도 모르게 ‘내 방‘이라고 불러 버리고 말았다. - P89

그때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가? 하지만 우리는 평상시처럼 살았다. 다들 대개는 그렇기 마련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심지어 지금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살고 있는 거니까.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시하며 살았다. 무시한다는 건 무지와 달리,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즉시 변화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자기도 모르게 끓는 물에 익어 죽어 버리는 거다. - P101

"고맙습니다."
기분상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겨야 한다.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여운을 흘려야 한다. 그는 느릿하게, 아쉽다는 듯이, 손을치한다. 그의 입장에선 이걸로 끝이 아니다. 검사 결과를 위장할 수도 있고, 내가 암이나 불임이라고 보고해서 나를 ‘여성‘들과 함께식민지로 추방시킬 수도 있다. 지금 듣고 본 일은 없었던 일로 쳐야하지만 어쨌든 내가 맡게 된 이상 지금 우리 사이의 공기 중에는 그가 지닌 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떠돌고 있다. 그는 은근슬쩍 내 허버지를 가볍게 툭툭 두들기더니 장막 뒤로 물러난다.
"다음 달에 봅시다."
나는 장막 뒤에서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다. 손이 떨린다.
나는 왜 겁에 질린 걸까? 경계를 넘어서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덥석 사람을 믿어 버린 것도 아니고, 위험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안전한데도, 나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건 선택 그 자체다.
탈출구, 구원의 길. - P110

나는 기다린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내 자아는 지금부터내가 구성해야만 하는 물건이다. 연설을 짜맞춰 구성하듯이. 지금부터 내가 내놓아야 하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무엇이다. - P119

시간이 남는다. 이건 내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일들 중 하나다. 어마어마한 양의 채워지지 않은 시간, 아무 내용도 없는 기나긴 괄호들 하얀 소리로 존재하는 시간 수를 놓을 수만 있다면, 베를 짜든뜨개질을 하든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다. 화랑에 들어가 19세기 전시관을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19세기는 하렘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수십 개에 달하는 하렘의 그림들, 긴 의자에 축 늘어져 기댄 뚱뚱한 여자들이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거나 벨벳 모자를 쓰고서 공작새 깃털을 부채 삼아 부치고 있고 뒤에는 내시가 보초를 서고 있는 그림들. 한 번도 하렘에 가보지 못한 남자들의 손으로 그린, 앉아 있는 육신에 대한 수많은 탐구들, 이 그림들은 에로틱하다고 여겨졌고 나도 에로틱하다고 생각했다.  - P123

나는 씻기고, 솔질하고, 배불리 먹인 포상용 암퇘지처럼 기다린다.
80년대 언제쯤인가 우리에 갇힌 돼지들을 위한 공이 발명된 적이 있다. 돼지용 공은 커다란 색색의 공이었는데, 돼지들은 납작한 코로공을 굴리며 놀곤 했다. 양돈업자들은 이 운동이 돼지의 육질을 향상시킨다고 말했다. 돼지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생각할 거리가 될만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심리학 개론』에서 읽었다. 이 이야기와 할 일이 있어 스스로 전기 충격을 받는 우리에 갇힌 쥐들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옥수수 한 알을 나오게 만드는 버튼을 쪼도록 훈련받은 비둘기들 이야기도. 비둘기들은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그룹은 한 번 폴 때마다 옥수수가 한 알씩 나왔고, 두 번째 그룹은 두 번에 한 알씩 옥수수가 나왔으며 세 번째 그룹은 정해진 원칙이 없었다. 담당자가 옥수수 배급을 끊으면 첫 번째 그룹은 상당히 일찍 포기했고, 두 번째 그룹은 그보다 약간 늦게 포기했다. 하지만 세 번째 그룹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버튼을 쪼는 쪽을 택했다. 어떻게 해야 옥수수가 나오는지 처음부터 몰랐으니까. - P124

숲속으로 소택지 속으로 침전하듯 내 몸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발 디딜 만한 곳이 어딘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내 영토는방심할 수 없는 땅이다. 나는 귀를 대고 미래의 풍문을 들어야 하는대지가 된다. 찌르는 듯한 아픔 하나하나, 미미한 고통의 중얼거림,
허물 벗은 살갗의 잔물결, 조직의 부종과 축소, 육신이 흘리는 침, 이모든 것이 계시이고, 내가 알아야만 하는 지표들이다. 매달 나는 겁에 질려 핏자국을 찾아 헤맨다. 피가 비치면 실패라는 뜻이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배반하고 말았고 또한 나 자신의 좌절이기도 하다. - P131

이제 육신은 스스로를 다른 형태로 재배열했다. 나라는 존재는 중심이 되는 대상을 둘러싸고 응집된 구름 같은 형상이 되어버렸다.
이 형상은 서양배와 비슷한 모양인데 나 자신보다 오히려 더 단단하고 현시적이다. 핵은 투명한 껍데기에 싸여 빨갛게 빛나고 있다. 그핵 안에는 밤하늘처럼 거대하고 어둡고 굴곡이 진 공간이 하나 있다. 이 공간은 검은색이 아니라 검붉은색에 가깝지만,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빛의 미세한 점들이 그 속에서 불어나서 반짝거리고 터져 시들어간다. 달마다 달이 뜬다. 거대하고, 둥글고, 무거운 달이 징조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절망이 기근처럼 내게 다가오는 걸바라본다. 핵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또다시 되풀이해 느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파도에 파도가 이어진다. 짜고 붉은 파도가 시간을 기록하며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밀려온다. - P132

망원경을 거꾸로 보는 것처럼 아주 작은 창문이다. 크리스마스카드에 있던 것 같은 창문, 낡은 창문이다. 바깥은 밤이고 얼음이 있고, 안에는 촛불과, 빛나는 나무와 가족이 있고, 심지어 종소리,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썰매의 종소리, 오래된 음악까지 귓전에 들려온다. 하지만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작지만 아주 또렷한 창문으로 보이는 그 모습은 내 딸이다. 내게서 멀어져 가는 내딸, 어느새 노랗고 빨갛게 변색하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두 팔을나를 향해 뻗은 채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멀어져 가는 그 애다.


종소리에 잠이 깬다. 코라가 내 방문을 두들긴다. 나는 깔개 위에일어나 앉아,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소매로 닦는다. 무수한 꿈 중에서도 이것은 최악의 악몽이다. - P135

식구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린다. 식구(household). 그게 우리다. 사령관은 이 식구들의 가장이다. 우리는 이 집(house)을 받들고(hold)있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소유할지어다, 받들지이다.
배의 균형을 잡는 화물창(hold)처럼. 화물창은 텅텅 비어 있다.
코라가 처음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리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들어온다. 그들 역시 종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지만, 불만스런표정이다. 설거지와 다른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이곳에 참석해야 한다. 식구들이 이 자리에 모이는 것은 모두의 의무다. 어떤 식으로든 결국 전부 의례가 끝날 때까지 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
리타는 슬쩍 들어와 내 뒷자리에 서려 하다가 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이렇게 그녀의 시간을 낭비하는 건, 전부 다 내 탓이다. 내탓은 아니지만 내 몸 탓이다.  - P142

그들은 항상 승리만을 보여 줄 뿐, 패배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다.
나쁜 소식을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 남자는 배우인지도 모른다.
다시 앵커가 화면에 등장했다. 그의 매너는 친절하고 자상하다.
스크린 속에서 바깥에 있는 우리를 내다보며 똑바로 쳐다보는 그 모습, 햇볕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피부에 하얀 백발과 솔직해 보이는두 눈, 현명해 보이는 눈가의 주름살, 그는 마치 우리 모두의 이상적인 할아버지 상 같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온화한미소가 시사하듯 다 우리를 위한 것이다. 곧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다. 내가 약속한다.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믿어야만 한다. 착한 아이들처럼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믿고 싶은 일을 말해 준다. 몹시, 대단히 설득력이있다. - P146

이름이란 건 전화번호와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나 쓸모 있는 거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름은 중요한 문제다. 나는 그 이름의 기억을 숨겨놓은 보물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와 파낼나만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 이름이 묻혀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나의 진짜 이름에는 마력이 있다. 상상할 수도 없이 아득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부적 같은 마력이 밤마다 내 싱글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으면 그 이름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떠다닌다. 손에 닿을락 말락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떠다닌다.
- P149

9월의 토요일 아침이라, 나는 내 빛나는 이름을 걸치고 있다. 이제는 죽은 어린 소녀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 두 개를 안고 뒷좌석에 앉아 있다. 봉제 토끼 인형은 낡은 데다 사랑을 듬뿍 받아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나는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감상적인 기억이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토끼 인형 생각에 넋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여기서, 세레나의 몸속에 들어갔다나온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중국산 깔개 위에 무릎을 꿇고 울음을터뜨릴 수는 없다. 여기서는 안 된다. 지금은 안 된다. 우는 건 나중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 P149

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스스로 묘사한다.
그는 안도의 한숨처럼 숨죽인 신음소리를 토해 내며 마침내 사정한다. 세레나 조이도 마침내 큰소리로 참았던 숨을 토한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사령관은 우리들의 합체된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차마 우리 위로 쓰러질 수는 없었던 거다. 잠시 숨을 돌리고물러서더니 다시 지퍼를 올린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돌아서 방을 나가면서, 우리 둘이 병든 노모인 것처럼 과장되게 조심을 하며등 뒤로 문을 닫는다. 이건 어쩐지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감히 웃음을 터뜨릴 용기가 내겐 없다.
세레나 조이는 내 손을 놓는다.
"일어나도 좋아."
그녀는 말한다.
"일어나서 나가"
그녀는 내가 10분간 휴식을 취하게 해 줘야 한다. 발을 베개 위에올려놓고 휴식을 취해야 아기를 가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동안 말없이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그 목소리에서는 혐오감이 묻어난다. 내 살을건드리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고 병이 옮을 것 같다는 식의 진한 혐오감. 나는 그녀의 몸에 얽혀 있는 육신을 훌훌 풀고 일어난다. 사령 - P168

관의 정액이 다리 가랑이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돌아서기 전에 나는그녀가 파란 치마를 매만지고 두 다리를 꼭 모으는 모습을 본다. 그녀는 머리 위의 덮개를 바라보며, 저주할 때 쓰는 인형처럼 빳빳하고 반듯하게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다.
이 일이 누구한테 더 끔찍할까? 그녀일까, 나일까? - P169

다시금 이불을 걷고, 잠옷 바람에 맨발로 살금살금 일어나서 어린처럼 창문가로 간다. 바깥이 보고 싶다. 새로 내린 눈(雪)의 젖가슴위에 달이 걸려 있다. 하늘은 맑지만 탐조등 불빛 때문에 잘 보이지않는다. 하지만 희미해진 하늘 위에 달은 확실히 둥둥 떠 있다. 새초승달, 소원을 비는 달, 오래된 암석으로 된 은 덩어리, 여신, 눈 깜박임. 달은 돌이고 하늘은 치명적인 무기로 가득 차 있지만, 아, 그래도 어쨌든 얼마나 숨 막히게 아름다운가.
보지금 여기 내 곁에 루크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의 품에안겨서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걸 듣고 싶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다. 단순히 소중한 존재 이상이 되고 싶다. 나는 내 옛 이름을 되풀이해 부르고 또 불러본다. 내게 한때 가능했던 일들, 한때 다른 이들이 나를 바라봐주던 그 시선을 떠올리기 위하여.
뭔가를 훔치고 싶다. - P172

닉이 말한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사무실에서."
"무슨뜻이에요?"
내가 말한다. 그는 사령관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나를 만난다고?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나하고는 볼일이 끝나지 않았던가?
"내일입니다."
그는 겨우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말한다. 어두운 거실에서 우리는 천천히 서로에게서 멀어져 간다. 마치 어떤 힘이나, 조류에 의해 서로에게 이끌렸고 똑같이 강력한 어떤 손들이 우리를 떼어내는것처럼,
나는 문을 찾아서 차가운 도자기 손잡이에 손가락을 대고 돌려 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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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 래커 칠을 한 나두 바닥 위엔 한때 그곳에서 열리던 경기들을 위한 직선이며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농구 그물은 없었지만 링은 여전히 제자리에달려 있었다. 실내를 빙 둘러 관중석으로 쓰던 발코니가 있었는데그곳에 있으면 추잉 껌의 달콤한 흔적과 관전하는 소녀들의 향수 냄새, 그 속에 어우러진 자극적인 땀 냄새의 흔적이 희미하게 코끝에닿았다. 사진을 보면 여자아이들은 처음에 펠트 스커트를 입다가,
나중에는 미니스커트를, 그다음에는 바지를 입었고, 훨씬 더 훗날에는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하고 머리에 요란한 초록색으로 군데군데물들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댄스 파티도 열렸을 법한 곳이었다. 음악의 여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머무른다. 덧쓰고 지우고 그 위에 다시 덧쓴 양피지의 글씨처럼 영영 들리지 않은 소리들 - P11

이 겹겹이 포개져 있고, 스타일 위에 스타일이 겹치고, 나지막히 깔리는 드럼 소리, 허허로운 흐느낌, 휴지로 만든 꽃다발, 마분지로 만든 악마들, 춤추는 사람들 위로 빛의 눈발을 흩뿌리며 빙빙 돌아가는 유리의 공들.
방 안에는 옛날의 섹스와 고독과, 형체도 이름도 없는 뭔가를 기다리는 기대가 있었다. 그 갈망이 기억난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던 어떤 일을 기다리던 그리움이 그러나 그때 그 순간 그네들의 손이 옴폭 팬 등허리를 만지고, 저 뒷마당에서, 주차장에서 들썩거리는 육신 위로 희미한 영상이 명멸하던 소리 죽인 TV 시청실에서 우리 몸에 그 손들이 닿은 후로 모든 것이 딴판으로 달라져 버렸다. - P12

우리는 미래를 갈망했다. 우리는 어쩌다 터득하게 되었을까? 영영채울 수 없는 허기를 갈구하는 이런 재능을, 도대체 어디서 배워버린걸까? 갈망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기 중에 감돌고 있다. 서로 이야기도 나눌 수 없도록 멀찍이 간격을 두고 일렬로배치해 둔 군용 간이침대 위에서 잠을 청할 때면 허기는 공중을 떠돌다 무심코 표면으로 자주 떠올랐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플란넬 시트를 깔고 군용 담요를 덮고 자는데, 담요는 구시대 것이어서 아직도 U.S.라는 글자가 찍혀 있다. 옷은 곱게 개켜서 침대 밑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놓아두었다. 조도는 낮추었지만 소등은 하지 않았다.
순찰을 도는 사라 ‘아주머니‘와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는 가죽 띠에 달린 가죽 끈에 가축용 전기 충격기를 매달아 덜렁거리며 다녔다.
하지만 그들에게 총은 없었다. 제아무리 ‘아주머니‘라도 총을 덥석 맡길 만큼 신뢰받지는 못했다. 총을 지닐 수 있는 건 ‘천사‘ 중에 - P12

서도 특별히 뽑은 간수들뿐이었다. 그 간수들도 호출 없이는 건물안으로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고, 우리 또한 산책할 때가 아니면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산책은 하루 두번,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축구장을 도는 것인데, 경기장 주위엔 철조망이 달린 사슬 울타리가둘러쳐져 있었다. 천사들은 등을 돌리고 철조망 바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솔직히 약간 다른 감정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이 쳐다봐 주기만 한다면 말을 걸어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뭔가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아직 몸이 있으니까. 그게 우리가 꿈꾸는 환상이었다.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 재닌, 돌로레스 모이라 준 - P13

의자 하나, 탁자 하나, 등 하나, 머리 위 하얀 천장에는 화환 모양의 부조 장식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덕지덕지 석고 칠을 한 텅빈 공간이 보였다. 그곳은 얼굴에서 눈알을 뽑아낸 자리 같았다. 틀림없이 전에는 그 자리에 샹들리에가 있었을 것이다. 밧줄을 걸 수있을 만한 물건은 그들이 모조리 들어내 버렸다.
창문 하나, 하얀 커튼 두장.창문아래 작은 방석이 놓인 걸상 창문이 살짝 열려 있을 때면 (어차피 창문은 활짝 열리지 않는다.) 바람이통해 커튼이 흔들린다. 나는 의자나 창가 자리에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이런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 유리창에 비친 햇살이 마룻바닥으로 툭 떨어지곤 한다. 좁고 긴 나무 널이 깔린 마룻바닥은 공들여닦아서 광택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다. 마룻바닥에는 천을 땋아 만든 타원형 바닥 깔개가 하나 있다.  - P17

침대 하나. 싱글, 적당히 딱딱한 매트리스에 자투리 털들을 모아넣은 하얀 침대보 침대에서는 그저 잠만 잘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는다. 아니면 잠도 못 자든지.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애쓴다. 지금은 다른 모든 물품들처럼 생각도 군용식량처럼 배급해야 한다. 생각하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일이 너무 많다. 생각이 많으면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줄어드는데, 나는 되도록이면 끝까지버틸 작정이다. 푸른 붓꽃의 수채화 액자에 왜 유리가 끼워져 있지않은지, 창문은 왜 활짝 열리지 않으며 어째서 안전유리가 끼워져있는지 나는 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탈주가 아니다. 어차피 멀리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뭔가 날카로운 흉기를 손에 넣기만 하면우리가 우리 몸에다 활짝 그어버릴 또 다른 탈출구가 겁나는 거다. - P18

그래도 의자, 햇살, 꽃들. 이런 것들을 쉽사리 무시해선 안 된다.
나는 목숨이 붙어 있고, 살아가고 있고, 숨 쉬고 있다. 꼭 모아쥐고있던 두 손을 펴고 햇살을 받아본다. 내가 있는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특혜의 장소다. 흑백 논리를 사랑하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말대로. - P19

리타가 커피를 끓여 주면(사령관들의 집에는 아직도 진짜 커피가 있다.) 우리는 리타의 식탁에 둘러앉아아, 물론 내 식탁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리타 역시 식탁의 주인이 아니지만) 맘껏 수다를 떨 수도 있을 텐데, 각양각색의 통증이나 질병을 호소하며 다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며,
도대체 말을 안 듣는 말썽꾸러기처럼 우리의 몸이 부려 대는 갖가지장난들을 얘기할 수도 있을 텐데. 서로의 이야기에, 그래, 그런 마음알아라는 표시로 고개를 구두점처럼 끄덕거려 보일 수도 있을 텐데.
특효약을 서로 알려 주고, 서로 자기가 더 아픈 데가 많다고 궁상맞게 경쟁이라도 하듯 한탄을 늘어놓고, 처마에 앉은 비둘기들처럼 보드랍고 서글픈 단조)의 음색으로 소곤소곤 불평을 늘어놓을 텐데, 아, 무슨 말인지 알아라고 우리는 말하겠지. 아니면 연세 드신 분들한테서 요즘도 가끔 들을 수 있는 그 야릇한 표현처럼, 어디서 온얘긴 줄 알겠군이라고 하든가. 마치 목소리 그 자체가 아주 먼 곳에서 방금 도착한 여행자인 양 말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 그래. - P23

콧수염이 있는 수호자가 작은 행인용 문을 열어 주고 뒤로 멀찌감치 둘러서면, 우리는 문을 통과한다. 멀어져 가는 우리 뒷모습을 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아직 여자를 건드릴 수 없는 이두 남자가 눈으로 여자를 애무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엉덩이를 살짝 흔들어 풍만한 붉은 스커트가 내 몸 주위로 흔들리게 한다. 이건 울타리 너머에서 약 올리거나 절대로 먹을 수 없는뼈다귀를 개의 눈앞에서 흔드는 거나 마찬가지짓이다. 그런 짓을하는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저 아이들의 잘못은 아닐 테니까. 저 아이들은 너무 어리다.
그러다 나는 자신이 수치심조차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 - P44

는다. 나는 그 힘을 즐긴다. 개뼈다귀처럼 활기 없는 권력이지만, 그래도 힘은 힘이다. 우리를 보고 그들이 딱딱하게 발기를 해서 남몰래 페인트칠한 울타리에 대고 몸을 문질러야만 할 지경이 된다면 좋겠다. 나중에 밤이 되면, 부대의 침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겠지. 지금 그들에게 남은 욕망의 배출구라곤 자기 자신밖에 없지만 자위는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잡지도, 영화도, 대체물도 없다. 꼿꼿하게 차렷 자세를 취한 채로 목책 옆에 서서 멀어져 가는 우리의 형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두 남자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나, 그리고 나의 그림자가 있을 뿐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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