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여자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나는 당시의 규칙들을 기억한다. 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아무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던 그 규칙들 말이다. 설사 상대가 경찰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지 마라. 문 아래로 신분증을 밀어 넣으라고 해라. 곤경에 처한 척하는 오토바이운전자를 도와준답시고 길가에 정차하지 마라. 자동차 문을 잠그고계속 가라, 누군가 휘파람을 불어도 절대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마라. 밤에 혼자 빨래방에 가지 마라.
나는 빨래방을 생각한다. 빨래방에 갈 때 입었던 옷들, 반바지, 청바지, 운동복,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던 것들, 내 옷들, 내 비누, 내 돈,
내가 번 돈, 그런 통제력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빨간 옷을 입고 짝을 지어 같은 거리를 걷고 있지만아무도 우리를 보고 음담패설을 퍼붓지 않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아무도 만지지 않는다. 아무도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 P48

목표를 향한 자유가 있는가 하면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있지. 무정부 시대의 자유는 무엇을 행할 자유였어. 하지만 지금 여러분에게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거야. 그것을 얕보지 마. - P49

우리 앞 오른편에는 우리가 드레스를 주문하는 가게가 있다. 어떤이들은 그 옷을 ‘해빗‘이라고도 부르는데, 아주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벗어던지기 힘든 것이 습관이니까. 가게 바깥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간판이 달려 있는데 황금색 백합 모양이다. 가게 이름은 ‘들판의 백합들‘이다. 백합 밑에 보면 글씨가 페인트로 지워진 부분이 보이는데, 그건 가게의 이름마저도 우리에게 지나친 유혹이 될수 있다고 그들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제 가게들은 간판 모양으로만 구별할 수 있다.
‘백합들‘은 예전엔 영화관이었다. 학생들은 그곳을 몹시 자주 찾았다. 봄이 오면 ‘백합‘ 영화관에서는 험프리 보가트 페스티벌이열렸는데, 그때 상영한 영화들에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들, 로렌 바콜과 캐서린 헵번이 나왔다. 그녀들은 앞에 단추가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는데, 그 의상은 ‘타락‘이라는 단어를 은근히 시사하고 있었다. 이런 여자들은 단추를 풀고(undone) 타락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들은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49

꽃받침 쪽 재생되어 가는 부분의 색깔. 빨간색은 같지만 둘 사이엔 전혀 연관성이 없다. 튤립은 피로 물든 튤립이 아니고, 빨간 미소도 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해 줄 말이 전혀 없다. 튤립은 교수형을 당한 시체들을 믿지 않는 이유가 아니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두 개체는 각자 유효하며 실존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유효한 사물들이 널려 있는 들판을 지나나는 내 길을 찾아가야만 한다. 매일매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그런 구분들을 하느라 대단한 노력을 쏟아붓는다. 구분하고 분별할필요가 있다. 마음속에선 아주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 P65

내 곁의 여자에게서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그녀는 울고 있는 걸까? 여기서 운다고 해서 어떤 식으로 내게 잘 보일 수 있는 거지? 그런 걸 알아줄 만한 여유가 내게는 없다. 내 두 손이 바구니 손잡이를으스러져라 불끈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무엇이든 절대로 그리 순순히 내주지 않을 테다.
예사라는 건, 여러분이 익숙해져 있다는 뜻이야. 리디아 아주머니는 말했다. 지금은 보통으로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그렇게 될 거야. 예사가 될 거야. - P65

방금 눈앞에서 뭔가 벌어졌는데, 도대체 뭐지? 고지의 둥근 곡선위로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진, 모르는 나라의 국기를 본 것 같다. 공격을 의미할 수도, 협상을 의미할 수도, 아니면 뭔가의 경계, 영역을뜻하는지도 모른다. 동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몸짓. 내리깐 푸른눈꺼풀, 뒤로 젖힌 귀, 곧추세운 털, 희번덕거리며 드러낸 이빨, 그는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걸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를보지 못했다. 아니 못 보았길 바란다. 그는 침범하려 한 건가? 내 방에 들어갔을까?
아, 그만 나도 모르게 ‘내 방‘이라고 불러 버리고 말았다. - P89

그때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가? 하지만 우리는 평상시처럼 살았다. 다들 대개는 그렇기 마련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심지어 지금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살고 있는 거니까.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시하며 살았다. 무시한다는 건 무지와 달리,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즉시 변화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자기도 모르게 끓는 물에 익어 죽어 버리는 거다. - P101

"고맙습니다."
기분상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겨야 한다.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여운을 흘려야 한다. 그는 느릿하게, 아쉽다는 듯이, 손을치한다. 그의 입장에선 이걸로 끝이 아니다. 검사 결과를 위장할 수도 있고, 내가 암이나 불임이라고 보고해서 나를 ‘여성‘들과 함께식민지로 추방시킬 수도 있다. 지금 듣고 본 일은 없었던 일로 쳐야하지만 어쨌든 내가 맡게 된 이상 지금 우리 사이의 공기 중에는 그가 지닌 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떠돌고 있다. 그는 은근슬쩍 내 허버지를 가볍게 툭툭 두들기더니 장막 뒤로 물러난다.
"다음 달에 봅시다."
나는 장막 뒤에서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다. 손이 떨린다.
나는 왜 겁에 질린 걸까? 경계를 넘어서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덥석 사람을 믿어 버린 것도 아니고, 위험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안전한데도, 나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건 선택 그 자체다.
탈출구, 구원의 길. - P110

나는 기다린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내 자아는 지금부터내가 구성해야만 하는 물건이다. 연설을 짜맞춰 구성하듯이. 지금부터 내가 내놓아야 하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무엇이다. - P119

시간이 남는다. 이건 내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일들 중 하나다. 어마어마한 양의 채워지지 않은 시간, 아무 내용도 없는 기나긴 괄호들 하얀 소리로 존재하는 시간 수를 놓을 수만 있다면, 베를 짜든뜨개질을 하든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다. 화랑에 들어가 19세기 전시관을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19세기는 하렘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수십 개에 달하는 하렘의 그림들, 긴 의자에 축 늘어져 기댄 뚱뚱한 여자들이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거나 벨벳 모자를 쓰고서 공작새 깃털을 부채 삼아 부치고 있고 뒤에는 내시가 보초를 서고 있는 그림들. 한 번도 하렘에 가보지 못한 남자들의 손으로 그린, 앉아 있는 육신에 대한 수많은 탐구들, 이 그림들은 에로틱하다고 여겨졌고 나도 에로틱하다고 생각했다.  - P123

나는 씻기고, 솔질하고, 배불리 먹인 포상용 암퇘지처럼 기다린다.
80년대 언제쯤인가 우리에 갇힌 돼지들을 위한 공이 발명된 적이 있다. 돼지용 공은 커다란 색색의 공이었는데, 돼지들은 납작한 코로공을 굴리며 놀곤 했다. 양돈업자들은 이 운동이 돼지의 육질을 향상시킨다고 말했다. 돼지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생각할 거리가 될만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심리학 개론』에서 읽었다. 이 이야기와 할 일이 있어 스스로 전기 충격을 받는 우리에 갇힌 쥐들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옥수수 한 알을 나오게 만드는 버튼을 쪼도록 훈련받은 비둘기들 이야기도. 비둘기들은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그룹은 한 번 폴 때마다 옥수수가 한 알씩 나왔고, 두 번째 그룹은 두 번에 한 알씩 옥수수가 나왔으며 세 번째 그룹은 정해진 원칙이 없었다. 담당자가 옥수수 배급을 끊으면 첫 번째 그룹은 상당히 일찍 포기했고, 두 번째 그룹은 그보다 약간 늦게 포기했다. 하지만 세 번째 그룹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버튼을 쪼는 쪽을 택했다. 어떻게 해야 옥수수가 나오는지 처음부터 몰랐으니까. - P124

숲속으로 소택지 속으로 침전하듯 내 몸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발 디딜 만한 곳이 어딘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내 영토는방심할 수 없는 땅이다. 나는 귀를 대고 미래의 풍문을 들어야 하는대지가 된다. 찌르는 듯한 아픔 하나하나, 미미한 고통의 중얼거림,
허물 벗은 살갗의 잔물결, 조직의 부종과 축소, 육신이 흘리는 침, 이모든 것이 계시이고, 내가 알아야만 하는 지표들이다. 매달 나는 겁에 질려 핏자국을 찾아 헤맨다. 피가 비치면 실패라는 뜻이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배반하고 말았고 또한 나 자신의 좌절이기도 하다. - P131

이제 육신은 스스로를 다른 형태로 재배열했다. 나라는 존재는 중심이 되는 대상을 둘러싸고 응집된 구름 같은 형상이 되어버렸다.
이 형상은 서양배와 비슷한 모양인데 나 자신보다 오히려 더 단단하고 현시적이다. 핵은 투명한 껍데기에 싸여 빨갛게 빛나고 있다. 그핵 안에는 밤하늘처럼 거대하고 어둡고 굴곡이 진 공간이 하나 있다. 이 공간은 검은색이 아니라 검붉은색에 가깝지만,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빛의 미세한 점들이 그 속에서 불어나서 반짝거리고 터져 시들어간다. 달마다 달이 뜬다. 거대하고, 둥글고, 무거운 달이 징조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절망이 기근처럼 내게 다가오는 걸바라본다. 핵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또다시 되풀이해 느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파도에 파도가 이어진다. 짜고 붉은 파도가 시간을 기록하며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밀려온다. - P132

망원경을 거꾸로 보는 것처럼 아주 작은 창문이다. 크리스마스카드에 있던 것 같은 창문, 낡은 창문이다. 바깥은 밤이고 얼음이 있고, 안에는 촛불과, 빛나는 나무와 가족이 있고, 심지어 종소리,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썰매의 종소리, 오래된 음악까지 귓전에 들려온다. 하지만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작지만 아주 또렷한 창문으로 보이는 그 모습은 내 딸이다. 내게서 멀어져 가는 내딸, 어느새 노랗고 빨갛게 변색하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두 팔을나를 향해 뻗은 채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멀어져 가는 그 애다.


종소리에 잠이 깬다. 코라가 내 방문을 두들긴다. 나는 깔개 위에일어나 앉아,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소매로 닦는다. 무수한 꿈 중에서도 이것은 최악의 악몽이다. - P135

식구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린다. 식구(household). 그게 우리다. 사령관은 이 식구들의 가장이다. 우리는 이 집(house)을 받들고(hold)있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소유할지어다, 받들지이다.
배의 균형을 잡는 화물창(hold)처럼. 화물창은 텅텅 비어 있다.
코라가 처음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리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들어온다. 그들 역시 종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지만, 불만스런표정이다. 설거지와 다른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이곳에 참석해야 한다. 식구들이 이 자리에 모이는 것은 모두의 의무다. 어떤 식으로든 결국 전부 의례가 끝날 때까지 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
리타는 슬쩍 들어와 내 뒷자리에 서려 하다가 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이렇게 그녀의 시간을 낭비하는 건, 전부 다 내 탓이다. 내탓은 아니지만 내 몸 탓이다.  - P142

그들은 항상 승리만을 보여 줄 뿐, 패배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다.
나쁜 소식을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 남자는 배우인지도 모른다.
다시 앵커가 화면에 등장했다. 그의 매너는 친절하고 자상하다.
스크린 속에서 바깥에 있는 우리를 내다보며 똑바로 쳐다보는 그 모습, 햇볕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피부에 하얀 백발과 솔직해 보이는두 눈, 현명해 보이는 눈가의 주름살, 그는 마치 우리 모두의 이상적인 할아버지 상 같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온화한미소가 시사하듯 다 우리를 위한 것이다. 곧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다. 내가 약속한다.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믿어야만 한다. 착한 아이들처럼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믿고 싶은 일을 말해 준다. 몹시, 대단히 설득력이있다. - P146

이름이란 건 전화번호와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나 쓸모 있는 거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름은 중요한 문제다. 나는 그 이름의 기억을 숨겨놓은 보물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와 파낼나만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 이름이 묻혀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나의 진짜 이름에는 마력이 있다. 상상할 수도 없이 아득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부적 같은 마력이 밤마다 내 싱글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으면 그 이름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떠다닌다. 손에 닿을락 말락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떠다닌다.
- P149

9월의 토요일 아침이라, 나는 내 빛나는 이름을 걸치고 있다. 이제는 죽은 어린 소녀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 두 개를 안고 뒷좌석에 앉아 있다. 봉제 토끼 인형은 낡은 데다 사랑을 듬뿍 받아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나는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감상적인 기억이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토끼 인형 생각에 넋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여기서, 세레나의 몸속에 들어갔다나온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중국산 깔개 위에 무릎을 꿇고 울음을터뜨릴 수는 없다. 여기서는 안 된다. 지금은 안 된다. 우는 건 나중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 P149

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스스로 묘사한다.
그는 안도의 한숨처럼 숨죽인 신음소리를 토해 내며 마침내 사정한다. 세레나 조이도 마침내 큰소리로 참았던 숨을 토한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사령관은 우리들의 합체된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차마 우리 위로 쓰러질 수는 없었던 거다. 잠시 숨을 돌리고물러서더니 다시 지퍼를 올린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돌아서 방을 나가면서, 우리 둘이 병든 노모인 것처럼 과장되게 조심을 하며등 뒤로 문을 닫는다. 이건 어쩐지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감히 웃음을 터뜨릴 용기가 내겐 없다.
세레나 조이는 내 손을 놓는다.
"일어나도 좋아."
그녀는 말한다.
"일어나서 나가"
그녀는 내가 10분간 휴식을 취하게 해 줘야 한다. 발을 베개 위에올려놓고 휴식을 취해야 아기를 가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동안 말없이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그 목소리에서는 혐오감이 묻어난다. 내 살을건드리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고 병이 옮을 것 같다는 식의 진한 혐오감. 나는 그녀의 몸에 얽혀 있는 육신을 훌훌 풀고 일어난다. 사령 - P168

관의 정액이 다리 가랑이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돌아서기 전에 나는그녀가 파란 치마를 매만지고 두 다리를 꼭 모으는 모습을 본다. 그녀는 머리 위의 덮개를 바라보며, 저주할 때 쓰는 인형처럼 빳빳하고 반듯하게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다.
이 일이 누구한테 더 끔찍할까? 그녀일까, 나일까? - P169

다시금 이불을 걷고, 잠옷 바람에 맨발로 살금살금 일어나서 어린처럼 창문가로 간다. 바깥이 보고 싶다. 새로 내린 눈(雪)의 젖가슴위에 달이 걸려 있다. 하늘은 맑지만 탐조등 불빛 때문에 잘 보이지않는다. 하지만 희미해진 하늘 위에 달은 확실히 둥둥 떠 있다. 새초승달, 소원을 비는 달, 오래된 암석으로 된 은 덩어리, 여신, 눈 깜박임. 달은 돌이고 하늘은 치명적인 무기로 가득 차 있지만, 아, 그래도 어쨌든 얼마나 숨 막히게 아름다운가.
보지금 여기 내 곁에 루크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의 품에안겨서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걸 듣고 싶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다. 단순히 소중한 존재 이상이 되고 싶다. 나는 내 옛 이름을 되풀이해 부르고 또 불러본다. 내게 한때 가능했던 일들, 한때 다른 이들이 나를 바라봐주던 그 시선을 떠올리기 위하여.
뭔가를 훔치고 싶다. - P172

닉이 말한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사무실에서."
"무슨뜻이에요?"
내가 말한다. 그는 사령관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나를 만난다고?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나하고는 볼일이 끝나지 않았던가?
"내일입니다."
그는 겨우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말한다. 어두운 거실에서 우리는 천천히 서로에게서 멀어져 간다. 마치 어떤 힘이나, 조류에 의해 서로에게 이끌렸고 똑같이 강력한 어떤 손들이 우리를 떼어내는것처럼,
나는 문을 찾아서 차가운 도자기 손잡이에 손가락을 대고 돌려 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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