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대에 누워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유리잔의 테두리를물로 적신 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 소리가 난다. 지금 내가 꼭 그런 느낌이다. 유리잔에서 울리는 이 소리. 지금 내 기분은 꼭 ‘산산조각 나다‘라는 단어 같다. 내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곁에는 루크가 둥근 내 배에 손을 대고 있다. 우리 세 식구가 침대에 함께 누워 있다. 그 애는 내 안에서 발로차며, 몸을 뒤치고 있다. 창 밖에 천둥 번개가 치고 있어서, 아기도잠을 못 이루는 모양이다. 심장 소리가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 소리처럼 포근하게 어루만져주는 그곳에서도, 아기들은 듣기도 하고 자다 놀라서 깨기도 하는 거다. 아주 가까운 데서 번개가 번쩍 비치고, - P179

왔기를 기도한다.
나는 이 사실을 믿는다.
나는 또한 루크가 어딘가에서 사각형의 물체 같은 것 위에 똑바로앉아 있다고 믿는다. 회색 시멘트나 일종의 선반이나, 침대나 의자같은 물건 끝에.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그들이 어떤 옷을 입혔는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하지만 하느님 외에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어쩌면 알아볼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는 생각날 때마다 그들이 이가 쾬다며 깎아 주었지만, 면도는 1년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모습이다. 아니, 이 부분은 수정해야겠다. 이 때문에 머리를 깎았다면 수염도 깎아야 할테니까. 그렇지않겠는가. - P182

아무튼 그들의 이발 솜씨는 별로 좋지 않다. 머리카락은 들쭉날쭉하고, 뒷덜미에는 면도칼에 벤 상처가 있다. 하지만 더 나쁜 건 그가10년, 20년은 족히 더 늙어 보인다는 거다. 늙은이처럼 구부정하고, 눈 밑의 살은 축 처졌고, 뺨에는 조그만 자줏빛 혈관들이 불끈 솟아올라 있으며, 흉터가, 아니 상처가 있다. 아직 아물지 않아 튤립 꽃의 붉은 줄기 끝 부분 같은 검붉은 상처가, 왼편 얼굴을 따라 아래로 죽그어져 있다. 최근에 살갗이 찢어진 상처다. 육신은 참으로 쉽게 다칠 수 있고 쉽게 버릴 수 있다. 육신이란 수분과 화학 물질뿐, 결국모래사장에서 말라붙어 죽어가는 해파리와 다를 바가 별로 없다.
루크는 고통스러워 손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었는지조차 모른다. 이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뭔가, 뭔가 죄목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면 그를 왜 불 - P182

잡아두겠는가? 어째서 아직도 시체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틀림없이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정보가 루크에게 있다. 그게 뭔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지만, 뭔지 몰라도 루크가 아직까지 말하지 않았다는걸 상상할 수 없다. 나라면 벌써 불어 버렸을 텐데.
그의 온몸에서는 냄새가 자신의 냄새, 더러운 우리에 갇힌 동물의 냄새가 펄펄 풍긴다. 나는 휴식 시간의 그를 상상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을 상상하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칼라 아래, 소맷부리 위의 몸을 차마 상상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의 몸에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신발은 있을까? 아니, 없다. 그런데 바닥은 차갑고 축축하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서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까? 그렇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렇게 비참하게 전락한 상황에서는 뭐든 무조건 믿어야한다. 나는 이제 텔레파시라든가 에테르의 진동 따위 같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믿는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 P183

나는 또한 그들이 그를 붙잡기는커녕 따라잡지도 못했다고 믿기도 한다. 그가 탈출에 성공했다고, 강물을 헤엄쳐 강둑에 이르렀고,
국경을 넘어, 발을 질질 끌고 머나먼 해변에, 이를 딱딱 맞부딪치며헤엄쳐 어느 섬에 다다랐다고 믿는다. 가까스로 근처의 농가에 가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거라고 믿는다. 집주인도 처음에는 의심했겠지만 나중에는 그의 본심을 알고선 친절하게 대해 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를 고발할 사람들은 아니었고, 어쩌면 퀘이커 교도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들이 몰래 그를 본토로 데그리고 가, 이 집 저집을 전전하며 숨겨 주었고 여자는 뜨거운 커피를 - P183

끓여주고 남편의 옷가지를 그에게 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 옷차림을 그려 본다. 루크에게 따뜻한 옷을 입혀 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접선했다. 틀림없이 레지스탕스가, 망명 정부가 있을 거다. 저 밖에 누군가 있어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을 거다.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없음을 믿는 것처럼, 아니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있을 수 없음을 믿듯이 나는 레지스탕스의 존재를 믿는다.
레지스탕스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텔레비전에 나오는범죄자들은 다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오늘이라도 그에게서 전갈이 올지 모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상상도 못한 사람을 통해서, 꿈에도 생각 못했던 사람에게서.
저녁 식사를 받쳐 내오는 쟁반 위 음식 접시 밑에 있을까? ‘순살코기정육점‘ 카운터 너머로 토큰을 내미는 내 손에 누군가가 쥐여 줄까? - P184

전갈에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씌어 있으리라. 조만간 나를 꺼내 주겠다고 그들이 어디로 데리고 갔건 우리 함께 그 애를 찾아내자고 씌어 있으리라. 그 애는 우리를 잊지 않았을 거라고, 우리 세식구가 함께 살게 될 거라고. 그동안은 꾹 참고 훗날을 기약하며 몸성히 있으라고, 내가 겪은 일들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씌어 있으리라. 전언에는 그 이야기도 꼭 씌어 있으리라. 끝내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건 바로 이 전갈이다. 나는 전갈의 존재를 믿는다.
내가 믿는 것들이 전부 사실일 리는 없다. 그중 하나는 틀림없이 사실이겠지만. 하지만 나는 셋 다. 세 가지 다른 모습의 루크를 한꺼 - P184

번에 믿는다. 이렇게 모순에 찬 믿음만이 지금 내가 무엇이든 믿을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하고 있을 수 있으니까.
이것 역시 나의 믿음일 뿐이다. 이것 역사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장 오래된 교회 근처 공동묘지 묘석들 중에는 닻과 모래시계,
그리고 ‘소망 속에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
‘소망 속에서‘, 어져서 죽은 사람 위에다 그런 말을 써놓았을까?
소망하고 있던 것은 시체였을까.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루크는 소망할까? - P185

커튼을 통해 희미한 빛, 회색의 여명이 들어온다. 오늘은 별로 해가 좋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딱딱하고 작은믿음의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바깥을 내다본다. 아무것도 보이지다른 쿠선 두 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생각한다. 한때는 세 개가 있었을 텐데, ‘소망‘과 ‘사랑‘까지. 그것들은 다 어디 처박혔을까?
세레나 조이는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다. 아주 해어져서 못 쓰는 물건이 아니라면 절대 버렸을 리가 없다. 하나는 리타에게, 하나는 코라에게 준 걸까?
벨이 울리고, 나는 시간이 되기 전에 벌써 일어선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옷을 입는다. - P190

내 앞에는 쟁반이 있고, 쟁반 위에는 사과 주스 한 컵, 비타민정한 알, 숟가락 하나, 갈색 토스트 세 쪽이 담긴 접시 하나가 있다. 또끝이 담긴 좋지 하나, 달걀 받침이 놓여진 또 다른 접시 하나가 있다.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몸처럼 생겨서, 치마 밑에는 달걀 하나를 더넣어 따뜻하게 보관해 두는 그런 용기다. 달걀 받침은 파란 줄무늬가 있는 백색 도자기다.
첫 번째 달걀은 흰색이다. 달걀 받침을 살짝 옮겼더니, 창문에서들어오는 축축한 햇살을 반사한다. 햇살은 밝아졌다. 시들었다. 다시밝아지면서 쟁반으로 툭 떨어진다. 달걀 껍질은 매끈하면서도 까칠까칠하다. 미세한 자갈 같은 칼슘 입자들이 햇살에 도드라져, 달 표면의 크레이터처럼 보인다. 황량한 풍경이지만 흠 하나 없이 완벽하다. 풍요에 마음이 어지러워질까 봐 성자들이 들어갔던 사막이 이러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이 이 달걀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달의 생명체는 표면이 아니라, 안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달걀은 이제 자체적인 에너지가 있는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달걀을 바라보고 있자니 커다란 기쁨이 밀려든다.
햇빛이 사라지자 달걀은 빛을 잃는다. - P191

미니멀리즘 신봉자의 삶에서 쾌락은 달걀이다. 한쪽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래반응해야 하는 정상적인 방식인지도 모른다. 달걀만 있으면 되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이렇게 전락한 상황에서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이상한 대상에 집착케 한다. 나는 애완 동물을 키우고 싶다. 새나 고양이같이 뭐든 친근한 동물을, 영 형편이 안 된다면 쥐라도 좋지만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집은 너무 청결하다.
나는 숟가락으로 달걀 윗부분을 잘라내고 내용물을 먹는다. - P192

두 번째 달걀을 먹는 동안,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진다. 처음엔 아주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다가, 커다란 저택들과 바짝 깎은 잔디밭들을 꼬불꼬불 지나 내게로 점점 다가온다. 곤충이 윙윙거리듯이 가느다란 소리였다가, 가까워지면서 꽃처럼 피어나 급기야 트럼펫 소리처럼 활짝 벌어진다. 이 사이렌 소리는 일종의 선포다. 나는 먹다말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심장 고동이 빨라진다. 다시 창가로 가 본다. 파란색일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걸까? 하지만 모퉁이를 돌고 거리를 지나쳐 저택 앞에서 멈추는 걸 보니 빨간색이다. 아직도 소리는 커다랗게 울려퍼지고 있다. 아, 기쁘다, 이런 일은 요즘 정말 흔치않다. 두 번째 달걀을 반쯤 먹다 말고, 옷장으로 달려가 겉옷을 찾아입고 있는데 벌써 계단에서 발소리가 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 P192

옷을 입혀 주는 코라의 얼굴에는 정말로 미소가 떠올라 있다.
복도를 거의 달려가다시피 한다. 계단은 스키를 타는 기분으로 질주한다. 현관문은 드넓다. 오늘은 나도 정문으로 나갈 수 있다. 수호자가 서서 경례를 붙인다.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고, 임신한 흙과 풀의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운다.
빨간 ‘출산차‘가 진입로에 주차하고 있다. 뒷문이 열려 있고 나는기어 올라탄다. 마룻바닥의 카펫은 빨간색이고, 창문에도 빨간 커튼이 쳐져 있다. 차 안에는 벌써 다른 여자들이 셋이나 타고 있다. 그녀들은 밴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되어 있는 긴 의자에 앉아있다. 수호자는 이중문을 닫아 잠그고 운전석 옆의 앞자리로 올라탄다. 유리가 끼워져 있는 철창 사이로 그들의 뒤통수가 보인다. 머리위에서 사이렌이 ‘비켜 비켜!‘라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와중에 우리 차는 한 번 펄쩍 요동을 치더니 출발한다. - P193

확률은 1/4이라고 센 배웠다. 한때 화학 물질, 방사선, 방사터에서능 물질로 대기가 가득 차고, 물 속에는 독성이 있는 분자 화합물들이 녹아들었다. 이를 청소하는 데 수년이 걸리는데, 그동안 이러한물질들은 우리 몸으로 스며들어 지방 세포 속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누가 알겠는가? 바로 우리들의 육체가 오염되어 기름 범벅이 된해변처럼 더러울지도 모른다. 해변의 새들이 죽어가듯 태아들에게도 치명적이다. 어쩌면 당신의 몸을 먹은 대머리 수리는 죽을지 모른다. 밤이 되면 낡은 시계처럼 어둠 속에서 당신의 몸이 빛을 발할지도 모른다. 죽음의 시계라는 살짝수염벌레 일종의 딱정벌레인데, 시체를 매장한다.
- P195

오브오렌은 주인 침실에 있다.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사령관과 아내가 밤마다 잠을 자니까. 그녀는 그들의킹 사이즈 침대에다 베개를 쌓아 몸을 받치고 앉아 있다. 몸은 커다게 부풀었지만 초라하게 작아진 재난, 옛 이름을 빼앗긴 재닌, 그녀는 하얀 면 잠옷 차림이지만, 잠옷은 허벅지까지 걷어올린 채다.
금작화 색깔의 긴 머리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나로 모아 머리 뒤로 묶었다. 두 눈은 꼭 감고 있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심지어 이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그래 봤자 그녀도 우리 일원이다. 최대한 쾌적하게 살아 보자는 것 뿐이지, 무슨 지나친 욕심을부린 것도 아니다. 우리 중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말이다. ‘가능한 한‘이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재난이 잘하고 있는 셈이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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