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 래커 칠을 한 나두 바닥 위엔 한때 그곳에서 열리던 경기들을 위한 직선이며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농구 그물은 없었지만 링은 여전히 제자리에달려 있었다. 실내를 빙 둘러 관중석으로 쓰던 발코니가 있었는데그곳에 있으면 추잉 껌의 달콤한 흔적과 관전하는 소녀들의 향수 냄새, 그 속에 어우러진 자극적인 땀 냄새의 흔적이 희미하게 코끝에닿았다. 사진을 보면 여자아이들은 처음에 펠트 스커트를 입다가,
나중에는 미니스커트를, 그다음에는 바지를 입었고, 훨씬 더 훗날에는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하고 머리에 요란한 초록색으로 군데군데물들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댄스 파티도 열렸을 법한 곳이었다. 음악의 여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머무른다. 덧쓰고 지우고 그 위에 다시 덧쓴 양피지의 글씨처럼 영영 들리지 않은 소리들 - P11

이 겹겹이 포개져 있고, 스타일 위에 스타일이 겹치고, 나지막히 깔리는 드럼 소리, 허허로운 흐느낌, 휴지로 만든 꽃다발, 마분지로 만든 악마들, 춤추는 사람들 위로 빛의 눈발을 흩뿌리며 빙빙 돌아가는 유리의 공들.
방 안에는 옛날의 섹스와 고독과, 형체도 이름도 없는 뭔가를 기다리는 기대가 있었다. 그 갈망이 기억난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던 어떤 일을 기다리던 그리움이 그러나 그때 그 순간 그네들의 손이 옴폭 팬 등허리를 만지고, 저 뒷마당에서, 주차장에서 들썩거리는 육신 위로 희미한 영상이 명멸하던 소리 죽인 TV 시청실에서 우리 몸에 그 손들이 닿은 후로 모든 것이 딴판으로 달라져 버렸다. - P12

우리는 미래를 갈망했다. 우리는 어쩌다 터득하게 되었을까? 영영채울 수 없는 허기를 갈구하는 이런 재능을, 도대체 어디서 배워버린걸까? 갈망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기 중에 감돌고 있다. 서로 이야기도 나눌 수 없도록 멀찍이 간격을 두고 일렬로배치해 둔 군용 간이침대 위에서 잠을 청할 때면 허기는 공중을 떠돌다 무심코 표면으로 자주 떠올랐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플란넬 시트를 깔고 군용 담요를 덮고 자는데, 담요는 구시대 것이어서 아직도 U.S.라는 글자가 찍혀 있다. 옷은 곱게 개켜서 침대 밑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놓아두었다. 조도는 낮추었지만 소등은 하지 않았다.
순찰을 도는 사라 ‘아주머니‘와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는 가죽 띠에 달린 가죽 끈에 가축용 전기 충격기를 매달아 덜렁거리며 다녔다.
하지만 그들에게 총은 없었다. 제아무리 ‘아주머니‘라도 총을 덥석 맡길 만큼 신뢰받지는 못했다. 총을 지닐 수 있는 건 ‘천사‘ 중에 - P12

서도 특별히 뽑은 간수들뿐이었다. 그 간수들도 호출 없이는 건물안으로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고, 우리 또한 산책할 때가 아니면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산책은 하루 두번,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축구장을 도는 것인데, 경기장 주위엔 철조망이 달린 사슬 울타리가둘러쳐져 있었다. 천사들은 등을 돌리고 철조망 바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솔직히 약간 다른 감정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이 쳐다봐 주기만 한다면 말을 걸어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뭔가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아직 몸이 있으니까. 그게 우리가 꿈꾸는 환상이었다.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 재닌, 돌로레스 모이라 준 - P13

의자 하나, 탁자 하나, 등 하나, 머리 위 하얀 천장에는 화환 모양의 부조 장식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덕지덕지 석고 칠을 한 텅빈 공간이 보였다. 그곳은 얼굴에서 눈알을 뽑아낸 자리 같았다. 틀림없이 전에는 그 자리에 샹들리에가 있었을 것이다. 밧줄을 걸 수있을 만한 물건은 그들이 모조리 들어내 버렸다.
창문 하나, 하얀 커튼 두장.창문아래 작은 방석이 놓인 걸상 창문이 살짝 열려 있을 때면 (어차피 창문은 활짝 열리지 않는다.) 바람이통해 커튼이 흔들린다. 나는 의자나 창가 자리에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이런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 유리창에 비친 햇살이 마룻바닥으로 툭 떨어지곤 한다. 좁고 긴 나무 널이 깔린 마룻바닥은 공들여닦아서 광택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다. 마룻바닥에는 천을 땋아 만든 타원형 바닥 깔개가 하나 있다.  - P17

침대 하나. 싱글, 적당히 딱딱한 매트리스에 자투리 털들을 모아넣은 하얀 침대보 침대에서는 그저 잠만 잘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는다. 아니면 잠도 못 자든지.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애쓴다. 지금은 다른 모든 물품들처럼 생각도 군용식량처럼 배급해야 한다. 생각하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일이 너무 많다. 생각이 많으면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줄어드는데, 나는 되도록이면 끝까지버틸 작정이다. 푸른 붓꽃의 수채화 액자에 왜 유리가 끼워져 있지않은지, 창문은 왜 활짝 열리지 않으며 어째서 안전유리가 끼워져있는지 나는 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탈주가 아니다. 어차피 멀리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뭔가 날카로운 흉기를 손에 넣기만 하면우리가 우리 몸에다 활짝 그어버릴 또 다른 탈출구가 겁나는 거다. - P18

그래도 의자, 햇살, 꽃들. 이런 것들을 쉽사리 무시해선 안 된다.
나는 목숨이 붙어 있고, 살아가고 있고, 숨 쉬고 있다. 꼭 모아쥐고있던 두 손을 펴고 햇살을 받아본다. 내가 있는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특혜의 장소다. 흑백 논리를 사랑하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말대로. - P19

리타가 커피를 끓여 주면(사령관들의 집에는 아직도 진짜 커피가 있다.) 우리는 리타의 식탁에 둘러앉아아, 물론 내 식탁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리타 역시 식탁의 주인이 아니지만) 맘껏 수다를 떨 수도 있을 텐데, 각양각색의 통증이나 질병을 호소하며 다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며,
도대체 말을 안 듣는 말썽꾸러기처럼 우리의 몸이 부려 대는 갖가지장난들을 얘기할 수도 있을 텐데. 서로의 이야기에, 그래, 그런 마음알아라는 표시로 고개를 구두점처럼 끄덕거려 보일 수도 있을 텐데.
특효약을 서로 알려 주고, 서로 자기가 더 아픈 데가 많다고 궁상맞게 경쟁이라도 하듯 한탄을 늘어놓고, 처마에 앉은 비둘기들처럼 보드랍고 서글픈 단조)의 음색으로 소곤소곤 불평을 늘어놓을 텐데, 아, 무슨 말인지 알아라고 우리는 말하겠지. 아니면 연세 드신 분들한테서 요즘도 가끔 들을 수 있는 그 야릇한 표현처럼, 어디서 온얘긴 줄 알겠군이라고 하든가. 마치 목소리 그 자체가 아주 먼 곳에서 방금 도착한 여행자인 양 말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 그래. - P23

콧수염이 있는 수호자가 작은 행인용 문을 열어 주고 뒤로 멀찌감치 둘러서면, 우리는 문을 통과한다. 멀어져 가는 우리 뒷모습을 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아직 여자를 건드릴 수 없는 이두 남자가 눈으로 여자를 애무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엉덩이를 살짝 흔들어 풍만한 붉은 스커트가 내 몸 주위로 흔들리게 한다. 이건 울타리 너머에서 약 올리거나 절대로 먹을 수 없는뼈다귀를 개의 눈앞에서 흔드는 거나 마찬가지짓이다. 그런 짓을하는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저 아이들의 잘못은 아닐 테니까. 저 아이들은 너무 어리다.
그러다 나는 자신이 수치심조차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 - P44

는다. 나는 그 힘을 즐긴다. 개뼈다귀처럼 활기 없는 권력이지만, 그래도 힘은 힘이다. 우리를 보고 그들이 딱딱하게 발기를 해서 남몰래 페인트칠한 울타리에 대고 몸을 문질러야만 할 지경이 된다면 좋겠다. 나중에 밤이 되면, 부대의 침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겠지. 지금 그들에게 남은 욕망의 배출구라곤 자기 자신밖에 없지만 자위는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잡지도, 영화도, 대체물도 없다. 꼿꼿하게 차렷 자세를 취한 채로 목책 옆에 서서 멀어져 가는 우리의 형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두 남자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나, 그리고 나의 그림자가 있을 뿐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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