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이며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 그러하다. 그에게 나는 그저 쓸모 있는 육체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 나는 짐을 싣지 않은 배,
포도주가 담겨져 있지 않은 잔이 아니며, 속된 말로 빵 하나 못 굽는 오븐이 아니다. 그에게 나는 그저 텅 빈 존재가 아니다. - P282

"저도 이제부터 여기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하지만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 하마터면 나는 그가두려워한다고 생각할 뻔했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오."
"제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고 싶으신 거군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직설적인 지적처럼 느껴졌다. 단호하고 의도가 분명한 진술, 내 삶이 견딜만하다면, 그럼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이 다 정당화된다.
"그래 맞아, 나는 그랬으면 좋겠소."
"좋아요, 그럼" - P326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내가 그의 약점을 쥐었다. 그에 대항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나 자신의 죽음이다. 내가 잡은 약점은 바로 사령관의 죄책감이다. 드디어.
"당신은 뭘 갖고 싶소?"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볍기만 하다. 이게 단순한 금전 거래에 지나지 않는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사탕이나 담배를 사듯이 거래 규모도 아주 하찮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핸드로션 말고 말씀이시죠?"
‘핸드로션 말고."
그가 동의한다.
저는...... 저는 알고 싶어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말이라, 우유부단하고 심지어 어리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저한테 알려줄 일이 있으시다면 뭐든지." 하지만 그건 너무 경솔하게 들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이에요." - P327

밤이 내린다. 아니 이미 내린 지 오래다. 어째서 밤은 여명처럼 솟아오르는 게 아니라 떨어져 내리고 저문다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일몰 시각에 동편을 보면, 밤이 내리는 게 아니라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름의 장막 너머 검은 태양처럼 어둠이 지평선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뭉게뭉게 하늘로 솟아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불길로부터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산불이나 도시가 불탈 때 지평선바로 아래 죽 늘어서 타오르는 불길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아마 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지 모른다. 두꺼운 커튼이눈앞을 가린다. 양모 담요,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밤이 내렸다고 해야겠지. 돌덩이처럼 나를 짓누르는 밤의무게가 느껴진다. 산들바람 한 점 없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 곁에앉아 있다. 커튼은 활짝 걷어두었다.  - P331

더 좋은 세상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되뇐다. 어떻게 이걸 더 좋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 - P366

늦은 오후, 하늘은 아지랑이가 피고, 햇살은 퍼져, 마치 황동 먼지처럼 사방에 무겁게 깔려 있다. 나는 오브글렌과 함께 인도를 미끄러지듯 걸어간다. 우리 둘이 한 쌍, 우리 앞에는 한 쌍이 더 있고, 길건너에 또 한 쌍이 있다. 멀리서 보면 우리는 보기 좋을 것이다. 마치 벽지의 부조 장식에 붙어 있던 네덜란드의 젖 짜는 처녀들처럼.
옛날 도자기로 된 소금 그릇, 후추 그릇이 가득 얹혀 있는 찬장 선반처럼,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변화 없이 이어지는 백조들의 선단 뭐 그런 것처럼, 그림같이 보기 좋긴 하겠지. 눈에 눈들에, ‘눈‘들에게 보기 좋겠지. 이 모든 쇼는 그들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기도부흥성회‘에 참석해 우리가 얼마나 순종적이고 경건한지 보여 주러가는 길이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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