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는 교회 안에 들어가 보곤 했다. 나는 예술 작품을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내가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여행 안내책자에 나와 있거나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았으며,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그 생각자체가 싫었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이지 그 안에서진행되는 일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우연히 교회를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일단 교회 안에 들어서면 건축물 자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건축 관련 용어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클리어스토리*와 신랑(身廊)에 대해서 논문을 쓴 적도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으면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개신교 교회보다 가톨릭 성당을 선호했다. - P9

그 다음에는 동정녀 마리아를 보았다. 보통 때처럼 푸른색이나하얀색, 황금색이 아니라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동정녀 마리아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왕관도 쓰고 있지 않았다. 머리는 앞으로 숙이고, 얼굴에는 그늘이 지고, 손은 양옆으로 펼쳐져있었다. 발치에는 양초 토막이 있고, 검은 드레스 전체에 별처럼 보이는 것이 잔뜩 달려 있었다. 실제로는 동이나 주석으로 만들어진조그마한 팔과 다리, 양, 당나귀, 닭, 하트 모양이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잃어버린것들의 동정녀, 상실된 것들을 회복시켜 주는 동정녀 마리아였다. - P11

내 두 딸은 "그래서요?"라고 되묻곤 하던 시기를 거쳐 갔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라는 의미다. 첫째가 열두 살인가 열세 살이되던 즈음이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나를, 자기들 친구를,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말하곤 했다. "그러지 마. 미칠 것 같아."
"그래서요?"
코딜리어 역시 같은 나이에 같은 짓을 했다. 똑같이 팔짱을 끼고똑같이 고정된 표정을 하고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코딜리어! 장갑을 껴라, 밖은 무척 추워. 그래서? 나는 너희 집에 갈 수 없어, 숙제를 끝내야 하거든.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코딜리어, 너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여기도록 만들었어.‘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없다. - P12

여름이 오고 다시 가고, 그 다음에 가을, 다음에 겨울이 오고, 왕이 서거한다. 나는 점심시간에 뉴스에서 그 소식을 듣는다. 나는 눈덮인 거리를 따라 학교로 돌아가면서 생각한다. ‘왕이 서거했구나.‘
그의 생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이제 다 지난 일이 되었다. 전쟁,
한쪽 날개만 남은 비행기, 우리 집 밖의 진흙, 그외 많은 일들이 나는 동전에 새겨진 그의 수천 개의 머리를 생각한다. 이제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의 머리다. 동전의 문장도, 우표도 바뀔 것이다. 왕 대신 여왕의 모습을 그려 넣을 것이다. 여왕은 이전에는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나는 그녀가 훨씬 더 어릴 적의 사진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에 대한 다른 기억도 있지만, 그것은 희미하게만 남아 있으며 내 마음을 막연히 불안하게 만든다. - P13

나는 무언가를 망각했다. 내가 망각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이전에 다니던 학교를 오직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다. 마치 그곳에 다녔던 것이 다섯 달 전이 아닌 5년 전 일인 것처럼. 나는 주일학교에 가던 것을 기억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스미스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왜 그런지는 잊어버렸다. 나는 기절하던 것과 접시 더미에 대해서, 시내에 빠진 것과 동정녀 마리아를 보았던 것에 대해서도 잊어버렸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모든 나쁜 일을 잊어버렸다. 비록 코딜리어와 그레이스와 캐럴을매일 만나지만 나는 이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다. 오직 내가 어렸을때, 다른 친구를 사귀기 전에 그들이 나의 친구였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들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옛 전투의 날짜와같이 매끈한 책장에 작고 건조한 글자로 새겨진 문장. 그들의 이름은 주석에 있는 이름들, 마구 번지는 잉크로 성경책 앞장에 써 놓은이름들과 같다. 그런 이름에는 어떤 감정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먼 친척, 먼 곳에 사는 사람들,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 같은 것이다. - P14

그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이 사라져 버린 시간에 대해서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언급하지 않는다. 가끔씩 어머니는 말한다. "네가 거쳤던 그 나쁜 시기. 그러면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어머니는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나쁜 시기에 관해 언급하는 것에 대해 막연한위협과 막연한 모욕을 느낀다. 나는 나쁜 시기를 거쳤던 그런 부류의 아이가 아니다. 나는 좋은 시기만을 경험했다. 6학년 학급 사진속에서 나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다. "조개처럼 행복하지." 어머니는 행복함을 그렇게 표현한다. 나는 조개처럼 행복하다. 딱딱한 껍질이 굳게 닫힌 조개처럼. - P15

부모님은 계속해서 집 안 공사를 한다. 아버지가 틈이 날 때마다망치질과 톱질을 무수히 한 끝에 지하층에는 서서히 방들이 만들어진다. 암실, 단지와 젤리와 잼을 보관하는 창고. 잔디밭은 이제 제대로 모양을 갖추었다. 부모님은 정원에 복숭아나무와 배나무를 심고,
화단 가득 아스파라거스와 열을 지어 심은 채소를 재배한다. 정원가장자리에는 꽃들이 풍성하다. 튤립과 수선화, 붓꽃, 작약, 패랭이꽃 국화, 각 계절에 나는 각종 꽃들. 이따금 내가 도와야 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부모님이 진흙 밭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진흙 얼룩을묻히면서 땅을 파고 잡초를 뽑아내는 동안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을뿐이다. 부모님은 모래밭에서 노는 아이들 같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만 꽃을 피우기 위해 그런 노력을 들이고 흙투성이가 될 만큼 정성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 P15

"4차원이라고?" 나는 되묻는다.
"시간도 차원이야. 시간은 공간에서 분리될 수 없는 거야. 우리는시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거지."
오빠가 말한다. 변화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서 동떨어져 있는이산 물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설명한다. 시공간은 곡선 모양이며, 이 곡선의 시공간에서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 아니라 그 곡선을 따라 그은 선이라고 한다. 또 시간은 늘이거나수축할 수 있으며, 어떤 장소에서는 다른 장소에서보다 시간이 빨리흘러갈 수도 있다고 한다. 일란성 쌍둥이 중에 한 명만 초고속 로켓을 태워 보내면, 그는 돌아와서 다른 쌍둥이가 자신보다 열 살이나더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오빠는 말한다. 나는 그건 매우 슬픈 일이라고 말한다.
오빠가 미소를 짓는다. 우주는 공기가 주입되고 있는 점박 무늬풍선 같은 것이라고 오빠는 말한다. 각각의 점은 바로 별들이다. 별들은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정말 흥미로운 질문은 우 - P43

주가 무한하면서 경계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한하면서도 풍선처럼 경계가 있는 것인지 여부라고 오빠는 말한다. 내가 풍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터질 때 나는 폭발음뿐이다.
오빠는 우주 공간은 대부분 비어 있으며 물질이란 정말로 딱딱한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빠르거나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게자리 잡은 원자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어쨌든 물질과 에너지는서로의 한 측면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이 단단한 빛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과학적 지식이 좀 더 있다면 벽을 공기처럼통과할 수 있을 것이고,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되면 빛보다 빨리 움직될 수 있을 것이며, 그때에는 공간은 시간이 되고 시간은 공간이 되어 시간 속을 여행해 과거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오빠는 말한다.
이것은 오빠의 말 중에서 처음으로 내 흥미를 끌었다. 나는 공룡이나 다른 많은 것들,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인들 같은 것을 보고 싶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에는 뭔가 위협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 내가 정말로 과거 여행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 P44

그녀의 수다스러운 문체는 진지하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때로 내가 자신을 쳐다보는 줄 모를 때 코딜리어를 보곤 한다. 그녀의 얼굴은 잠잠하고 아득하고 무감각하게 보인다. 마치 그녀가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이내 코딜리어는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웃는다. 그녀는 말한다. "저 애들이 저렇게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담뱃갑을 그 안에 넣는 거 너무 멋지지 않니? 저렇게 하려면 이두근이 있어야지!"
그러고는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간다.
시간을 재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나는 여건이 되면 호수에서 수명을 하고,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건포도와 땅콩버터와 꿀을 두껍게바른 크래커를 먹고, 내 또래 아이들이 없어 뚱한 표정으로 시간을보낸다. 부모님의 지치지 않는 활기도 안도가 되지 못한다. 부모님이 나처럼 퉁명스러우면, 아니 아예 더 퉁명스러우면 더 나을 것 같다. 그러면 적어도 나는 좀 더 정상적이라는 느낌이 들 것 같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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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돌아오는 것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투명함과 서늘함과 흐트러지지 않은 빛의 층을 지나고, 마지막 노출화강암 광맥과 마지막 울퉁불퉁한 언저리가 있는 작은 호수를 지나서 남쪽의 탁한 공기와 축축함과 따스한 나른함과 귀뚜라미 소리와잡초투성이 목초지 냄새 속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오후에 집에 도착한다. 집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이상하게, 다르게 보인다. 엉겅퀴와 미역취가 집 주변의 진흙 속에서 가시투성이 울타리처럼 자라났다. 문 옆의 커다란 구덩이와 흙더미는 사라졌고 그 장소에 새로운 집이 생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말인가? 나는 그런 변화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레이스와 캐럴은 우리와 헤어졌던 바로 그 자리, 사과나무 사이에 서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과 같지 않다. 내가 지난 넉 달동안 머릿속에 간직하고 다녔던 영상과 전혀 다르다. 몇 개의 특징만이 남고 나머지는 계속 변화하던 그 영상. 다른 점 한 가지를 들자면, 그들은 더 커졌다. 그리고 다른 옷을 입고 있다. - P114

어머니들이 말해 주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점점 깊어지기만하는 큰 간극, 심연이 존재한다. 그 심연은 말 없음으로 채워져 있다.
어머니들은 쓰레기를 신문지로 여러 겹 싸고 끈으로 꽁꽁 묶지만 그래도 쓰레기는 왁스를 새로 칠한 마룻바닥으로 떨어진다. 빨랫줄에는 속바지, 잠옷, 양말, 더럽혀진 은밀한 부분이 나열되어 있다. 어머니들이 탁하고 걸쭉한 물에 손을 담가서 세탁하고 헹군 것이다. 그들은 화장실 청소용 솔에 대해, 용변기에 대해, 병균에 대해 알고 있다. 어머니들이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세상은 여전히 지저분하며, 그들은 우리의 더럽고 시시한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대신 긴 귓속말이 한 아이에서 다음 아이로 전해져 공포감을 증폭시키며 우리 사이에 떠돌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 다리 사이에는 당근이 있다고 코딜리어는 말한다. 사실그것은 당근이 아니라 더 끔찍한 무엇이다. 그것은 털로 뒤덮여 있다. 그 끝에서 씨가 나와서 여자 배 속에 들어가서 아기로 자라나는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일어나게 된다. 어떤 남자들은 마치 귀걸이처럼 당근에 구멍을 뚫어서 고리를 끼워 놓는다고 한다. - P151

여학생들은 운동장이나 언덕 위에 작게 무리지어 서서 계속 귓속발을 주고받으며 실패를 감고 있다. 이제는 한쪽에 못이 네 개 박힌실패와 실 뭉치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다. 털실을 못에 차례대로 두 번씩 감은 다음, 다섯 번째 못으로 바닥에 있는 털실 고리와제일 위쪽에 있는 털실 고리를 연결하는 것이다. 실패 다른 쪽 끝에서 둥글고 두꺼운 털실 매듭이 대롱거리게 되면 납작한 달팽이 껍질처럼 감아 바느질을 해서 찻주전자 받침을 만든다. 나도 그런 실패가 있고 그레이와 캐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비록 제멋대로 엉클어지기는 했지만 코딜리어까지도 하나 가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이렇게 실패와 색색가지 털실 매듭을 손에 들고 귓속말을 하며 무리지어 있는 것은 남학생들과 관련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학생들의 그런 행동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리를 지음으로써 그들은 무리 밖의여학생들과 남학생 전체를 소외시킨다.  - P164

이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 유일한 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인 중요성, 텅 빈백지와 같은 중요성이다. 나는중요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 비밀을 전수받은 것이다. 나는선발되었다는 자부심과 동시에 상실감을 느낀다. 또한 오빠를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 삶에서 처음으로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것이다. 오빠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나는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비밀을 누설해서 그를 조롱거리로 만들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있다. 그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려있으며,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나는 오빠가 예전 모습으로, 이전처럼 정복할 수 없는 그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 P167

처음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터널처럼 멀어져 가는어두움뿐 그러나 잠시 후 무엇인가가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진초록색 잎과 자주색 꽃, 짙은 자주색, 슬프도록 강렬한 그 색깔. 그리고물처럼 반투명한 붉은 열매 송이로 이루어진 덤불, 덩굴은 서로 감아오르며 자라나고, 다른 식물들 위로 너무나 많이 얽혀 있어 울타리치럼 보인다. 비옥한 흙 냄새와 또 다른, 찌르는 듯한 냄새가 잎사귀 사이에서 올라온다. 오래된 것들, 무성하고 무거우며 잊힌 것들의 냄새가, 바람은 불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고양이가 움직이는 것처럼 잔잔한 파문으로, 저 혼자서 움직이는 것처럼, 이파리들이 흔들린다.
‘벨라도나, 나는 생각한다. 어두운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11월에는 벨라도나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흔한 잡초다. 우리는 그것을정원에서 뽑아서 버린다. 벨라도나 식물은 감자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래서 꽃의 형태가 비슷한 것이다. 감자 역시 녹색이 될 때까지태양 아래 놓아두면 유독한 식물이 될 수 있다. 그런 일을 알아내는것이 내 취미다.
나는 이 기억이 틀린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강렬하고몽환적이며 황폐하고 슬픔으로 가득 찬 꽃들, 그 냄새, 이파리의 흔들림은 계속된다. - P174

학교의 남자 아이들은 서로 적이다. 우리는 적에게 눈덩이를 던지고, 적을 맞추면 기뻐한다. 적에 대해서우리는 증오와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코딜리어는 내 친구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고 나를 돕고 싶어 하며,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친구들, 여자 친구들이며,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나는여자 친구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잃게 될까무척 두렵다.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싶다.
증오라면 오히려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증오가 있었더라면 나는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을 것이다. 증오는 분명하고 금속처럼 차가우며 편향적이고 동요하지 않는다. 사랑과는 달리. - P192

이 모든 것이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다.
어떤 날에는 이번에는 캐럴이 개선될 차례라고 코딜리어가 결정한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그레이스와 코딜리어와 함께 앞에서 걷고, 캐럴은 뒤에서 따라오며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각한다. 이때 나는 캐럴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일을 당해 마땅하다. 지나간 그 시간에 그녀도 내게 똑같은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그녀 차례인 것이 기쁘다.
그러나 이 기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캐럴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시끄럽게 운다. 그녀는 자기 울음에 자기가 휩쓸려 버린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고, 비밀을 지키리라는 신뢰를 주지못한다. 그녀에게는 무모한 구석이 있으며, 어느 한도까지만 압력을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는 지조가 부족하고, 그저 정보 조달자로나 적합하다. 이런 점이 나에게조차 빤히 들여다보인다면 코딜리어에게는 더 분명히 보일 것이다. - P193

우유가 얼어붙는다. 우유 크림이 울퉁불퉁한 기둥 모양으로 얼어서 우유병 목 위까지 올라와 있다. 럼리 선생은 내 책 위로숙인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짙푸른색 블루머는 그녀의 주변에 유쾌한 분위기를 퍼뜨린다. 그녀의 코 옆 피부는 불독의 뺨처럼 아로 처져 있다. 입가에는 말라붙은 침 자국이 보인다. "네 필체는자꾸만 나빠지는구나." 그녀는 말한다. 나는 당황해서 내 공책을 들여다본다. 선생의 말은 옳다. 내가 쓴 글씨는 둥그스름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거미줄처럼 미친 듯이 보인다. 어떤 곳은 강철 펜촉을 너무 세게 눌러 쓰는 바람에 잉크가 거무스름한 녹처럼 번져 글씨가기형적으로 보인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 나는 손을 오므려 손가락을 감춘다. 나는 럼리 선생이 너덜너덜한 내 손톱 가장자리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을 모두 캐럴이 듣고 보고 있으며, 나중에 코딜리어에게 보고할 것이다. - P203

나는 이 외국에 대한 그림들을 좋아한다. 이것들이 진실이라고믿기 때문이다. 나는 어딘가에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믿어야 한다. 비록 주일학교에서는그런 사람들은 굶주리거나 이교도이거나 아니면 둘 다라고 배웠을지라도, 내가 매주 내는 헌금이 그들을 개종시키고, 그들에게 음식을 주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데 사용된다하더라도, 럼리 선생은 그들이 교활하며, 기이하거나 혐오스러운 음식을 먹고, 영국 사람들을배반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스튜어트 선생의 말이 더 마음에 든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태양은 활기찬노란색이며 종려나무는 선명한 초록색이고 옷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들의 민요는 흥겹다고 한다. 여자들은 빠르고 알아들을수 없는 언어로 함께 수다를 떨고, 완벽하고 순수하게 하얀 치아를드러내며 웃는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나도 언젠가 그곳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머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 P257

나는 발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발은 장화에 찬 물 때문에 아주무겁게 느껴진다. 원한다면 나는 그냥 계속해서 이곳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제는 정말 어두움이 내렸고, 땅을 덮고 있는 눈은 푸르도록 희다. 시내의 낡은 타이어와 녹슨 쓰레기 조각들은 눈에 덮여 있다. 주위에는 동굴처럼 반원형으로 휜 푸른 나뭇가지들밖에 없다.
모두 깨끗하고 고요하다. 시냇물은 차갑고 평화롭다. 이 시냇물은공동묘지에서, 무덤과 그 속에 묻혀 있는 뼈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것이다. 이것은 맑게 용해되어 버린 죽은 사람들로부터 나온 물이며, 나는 그 안에 서 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대로 얼어 버릴것이다. 나 역시 죽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처럼, 평화롭고 맑게. - P295

나는 하늘을 보며 시내 옆에 누워 있다. 더 이상 어디도 아프지 않다. 하늘은 불그스름한 기를 띠고 있다. 다리가 달라 보인다. 더 높이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마치 난간이 사라져 버렸거나 아니면 난칸 사이가 다 메워진 것처럼 더 단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빛이 흘러나온다. 그 주변에는 초록색 도는 노란색이며 내가 이제까지 본그 어떤 빛과도 다른 빛의 무리가 있다. 나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일어나 앉는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누군가가 다리 위에 서 있다. 검은 윤곽이 보인다. 처음에는 코딜리어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곧 그 사람이 아이가아니라는 것을, 아이치고는 키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얼굴은 볼 수 없고 그저 형상만 보일 뿐이다. 머리 뒤쪽에서 노란색 도는 초록빛 줄기가 흘러나온다.
나는 일어나 집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곳에 눈 속에작은 눈송이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매우 졸리다. 나는 눈을 감는다. - P296

누군가가 말을 건네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 입을 가리고 말하는 것처럼 매우 나직한 목소리다. 내가 이 소리를 정말로 들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나는 억지로 눈을 뜬다. 다리에 서 있던 그 사람은 난간을 뚫고 움직인다. 아니, 그 안으로 녹아 없어진다. 그 사람은 여자다. 이제 긴 치마가 보인다. 아니, 긴 외투인가? 그녀는 다리 아래로 추락하지 않고 마치 걷는 것처럼 나를향해 온다. 그러나 그곳에는 디딜 수 있는 발판 같은 것이 전혀 없다. 나는 무서워할 기운조차 없다. 나는 혼수상태로 눈 위에 누워서둔한 호기심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나도 저렇게 허공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297

이제 그녀는 아주 가까이 다가온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과 머리에 두른 검은 스카프, 아니면 후드를 볼 수 있다. 아니, 머리칼인가?
그녀가 내게 팔을 내밀자기쁨이 솟아난다. 반쯤 열린 외투 안에서붉은 무엇이 언뜻 내비친다. ‘그녀의 심장이로구나.‘ 나는 생각한다. 심장일 것이다. 몸 바깥에서 네온처럼, 석탄처럼 타오르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 그녀를 느낄수 있다. 나를 안아 주는 팔처럼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작은 바람 같은 그녀의 존재를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한다.
"이제 집에 가도 된단다. 모든 것이 괜찮을 거야. 집으로 가렴."
그녀는 말한다.
목소리는 크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 P297

내가 눈속에서 얼어 죽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으며, 보이지 않지만 나를 따스함과 고통 없음으로 감싸 주고있다. 그녀는 나의 기도를 들은 것이다.
나는 이제 큰길로 올라왔다.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이제 내의 양쪽에서 더 가깝게 빛나고 있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똑바로 걷지도 못한다. 그러나 내 발은 한 발짝씩 계속 움직이고 있다.
앞쪽에 거리가 펼쳐져 있다. 거기서 매우 빨리 걸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코트 단추도 채우지 않았고 머플러도 두르지 않았으며, 제대로 꿰어 신지 않은 덧신에서는 찰싹거리는 소리가 난다. 나를 보자 어머니가 뛰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서서,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불편한 덧신을 신고 뛰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양, 달리기 경주를 하는 사람인 양 바라본다. 어머니는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내게 달려오고 나는 커다랗고눈물로 젖은 그녀의 눈을, 싸락눈이 먼지처럼 앉은 머리를 쳐다본다. 어머니는 장갑도 끼지 않고 있다. 그녀는 팔을 벌려 나를 안는다.
그와 동시에 동정녀 마리아가 사라진다. 아픔과 추위가 다시 솟구친다. 나는 심하게 떨기 시작한다. - P299

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인 겁쟁이다.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몸을 돌려 걸어가 버린다. 이것은 공기가 나를 받쳐 주리라고 믿으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흡사하다. 그리고공기는 나를 받쳐준다. 나는 코딜리어의 말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그녀의 말대로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
"감히 우리를 무시하고 가 버리다니. 당장 이리 돌아와!"
코딜리어가 뒤에서 소리친다. 나는 이제 그녀가 하는 말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그것은 모방이며 연기일 뿐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놀이다. 내가 개선해야 할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놀이였으며, 나는속임을 당한 것이다. 나는 바보 같았다.  - P303

나는 주일학교에 가지 않는다. 방과 후에 그레이스나 코딜리어, 심지어는 캐럴과도 놀지 않는다. 더이상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공동묘지를 지나가는 더 먼 길을 이용한다. 그들이 무리를 지어 뒷문으로 나를 데리러 오면 나는 바쁘다고 말한다. 그들은나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친절을 베풀지만 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않는다. 나는 마치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그들 눈에 어린 탐욕을 볼 수 있다. 왜 이전에는 이렇게 하지 못했던가?
나는 주인 없는 오빠의 방에서 만화책을 읽으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도 고층 건물에 올라가고, 망토를 두르고 날아다니고, 손끝으로 금속을 뚫고, 가면을 쓰고, 벽을 투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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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선이 아니라 공간의 차원과 같은 하나의 차원이다. 만일공간을 구부릴 수 있다면 시간 역시 구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만일 필요한 지식이 충분히 있고 빛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스티븐 오빠였다. 그 당시 오빠는 공부할 때면 늘 여행용 적갈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두뇌에 피가 잘 흘러 영양이 잘 보급되도록 오랫동안 물구나무서기를 하곤 했다. 나는 오빠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오빠는 그때 이미 모호한 언어의 영역을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나는 시간을 어떤 형태를 가진 것, 볼 수 있는 무엇, 켜켜이 쌓여 있는 일련의 액체 투광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시간 선을 따라 회고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물속을 헤엄 - P15

치듯 시간의 심연을 통과해 가며 회고한다. 때로는 이것이, 때로는저것이 수면 위에 떠오르며 때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 P16

이제 나는 우리가 전차에서 내리곤 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보도에 쌓여 있는 1월의 눈 진창 속으로,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도회적으로 보였던 초라한 납작 지붕의 빌딩들 사이로 끽끽 째지는 소리를내며 불던 호수 바람 속으로 발을 내딛곤 했던 그곳. 하지만 이 지역은 더 이상 낮고 초라한 사양지가 아니다. 흘림체의 튜브형 네온사인이 개조된 벽돌 건물 전면을 장식했고 수많은 놋쇠 외장과 수많은부동산과 수많은 돈이 있다. 바로 앞쪽에는 차가운 빛으로 이루어진거대한 비석처럼 전체를 유리로 발라 번쩍거리는 거대한 긴 네모꼴건물들이 서 있다. 얼어붙은 재산,
나는 그 건물들이나 유행하는 옷, 수입품, 수제 가죽, 스웨이드 등등의 옷을 입고 나를 스쳐 가는 사람들을 거의 쳐다보지 않는다. 대신 추적자처럼 보도만 내려다보며 걷는다.
나는 목이 조여 오는 것을, 턱 선을 따라 퍼지는 통증을 느낀다.
나는 다시 손가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손에서 나오는 피, 그 피 맛을 기억한다. 그것은 오렌지 맛 아이스 바, 싸구려 풍선껌, 붉은 감초, 잘근잘근 씹은 머리카락, 더러운 얼음의 맛이다. - P25

지금은 내 인생의 중반기다. 나는 이것을 공간으로 생각한다. 반을 건너고 반은 남은 강의 중간, 다리의 중간처럼. 이때쯤이면 여러가지를 축적해 두었어야 한다. 재산, 책임, 성취, 경험과 지혜. 상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않는다. 마치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떨어뜨린 것처럼, 분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내 뼈에서 칼슘이, 내 피에서 세포가 빠져나간 것처럼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내 몸이 수축하는 것만 같고 차가운 공기나 부드럽게 내리는 눈으로 채워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가벼워졌지만 나는 상승하지 않고 하강한다. 아니, 유사속으로 미끄러지듯 아래쪽으로, 이 장소에 겹겹이 쌓여 있는 층 속으로 끌려 내려간다. - P30

진짜 삶과 더불어 나는 직업을 정확히 말해 진짜라고는 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나는 화가다. 허세를 부리고 싶었을 때는 여권에 화가라고 써넣기도 했다. 그 외에는 써넣을 수 있는것이 주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주부가 되었다는 것은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때는 이것 때문에 위축되기도 한다. 품위 있는 사람은 화가가 되지 않는다. 오직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며 꾸며대는 사람들만이 화가가 된다. 예술가라는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나는 화가라는 직함이 더 좋다. 그것이 더 확실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말하듯 예술가란 대개 번지르르하고 게으른부류다. 만일 당신이 화가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한시선으로 쳐다볼 것이다. 야생동물을 그리거나 돈을 아주 많이 벌지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화가들의 질투를 자아낼 만큼만돈을 벌 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꺼져 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많이 벌지는 못한다.
하지만 보통은 나는 내 직업에 만족하며, 가까스로 탈출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 P33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힘든 날들이 있다. 말을 하려 해도 애를 써야 하며, 목욕탕까지 가려면 한 걸음 또 한 걸음 한 발짝씩 천천히가야 한다. 한 발 한 발이 커다란 성취인 것이다. 치약 뚜껑을 열고칫솔을 입에 넣으려면 집중을 해야 한다. 팔을 입까지 올리는 것조차 힘겹다. 나는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고 내가 하는 일도 무엇이든 가치가 없으며 기껏해야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느낀다.
"뭐 변명할 말 있어?"
코딜리어는 그렇게 묻곤 했다.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와 연관된 그 단어. 마치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어젯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무(無)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 P71

캐럴은 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우리 가족은 마룻바닥에서 잔다고말한다. 우리가 시외에서 왔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신념 때문에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면서. 우리의 진짜 침대가, 다른 사람들 것과 마찬가지로 다리가 넷 달리고 매트리스 있는침대가 창고에서 도착하자 캐럴은 무척 실망한다. 그녀는 내가 어떤교회에 나가는지도 모른다는 것과 우리 가족이 카드놀이용 탁자에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다. 이런 사실을 경멸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국적인 특별함을 가미해서 말한다. 결국 나는그녀의 줄서기 짝이며, 그녀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럴은 그런 놀라운 사실을밝힌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이 경외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 P84

이 놀이를 하면 나는 늘 피곤해진다. 이 모든 물건의 축적, 돌보고포장하고 차에 싣고 다시 포장을 풀어야 할 이 모든 소유물이 지닌그 무게에 눌려서 그런 것이다. 나는 이사에 대해 잘 안다. 하지만캐럴과 그레이스는 단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다. 그들의 마님들은 집에 혼자서 살고 있으며, 언제나 그곳에 산다. 마님들은 물건들을 자꾸만 보탤 수 있으며 식탁 세트, 침대, 타월 무더기, 그릇 세트로 스크랩북을 페이지 가득 채워 넣은 다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되는 것이다.
나는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들을 원하게 되었다. 땋은 머리, 실내용 가운, 나만의 손가방. 그 무엇인가가 내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펼쳐지고 있다. 내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여자 아이들과 그들의 행동이라는 세계가 있으며, 나도 자연스럽게 그 세계의 일부가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빨리 달리거나 과녁을 잘 맞추거나 폭탄처럼 큰 소리를내거나 메시지를 해독하거나 신호에 따라 죽은 시늉을 하지 않아도된다. 이런 일을 잘했는지, 남자 아이처럼 잘했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바닥에 앉아서 이튼 카탈로그에서 프라이팬을 자수가위로 잘라 내고, 내가 한 것은 형편없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안도가 되기도 한다.
- P92

술래들은 자신이 내놓은 상품의 이름을 외친다. "순수, 순수, 철공, 철공,"이 두 음절짜리 단어들을 외치는 소리는 잃어버린 개나아이들을 부를 때처럼 일정한 리듬을 띠다가 점점 낮아진다. 외치는소리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구슬프게 들린다. 나 역시 다리를 벌리고앉아 차가운 구슬들을 다리 사이에서 굴리다가 넓게 펼친 치마에 그러모으며 후회하는 듯한 목소리로 외친다. "고양이 눈, 고양이 눈."
오직 탐욕과 쾌락 섞인 공포감만을 느끼면서.
고양이 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슬이다. 그 구슬을 따게 되면나는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꺼내 들고 빛에 비추어돌려 보며 점검한다. 고양이 눈은 진짜 눈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고양이 눈 같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존재의눈처럼 생겼다. 라디오에 달린 녹색 눈처럼, 먼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눈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푸른색이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내빨간 플라스틱 손가방에 넣어 둔다. 다른 고양이 눈은 위험을 감수하며 목표물로 내놓지만 이것은 예외다. - P105

나는 구슬치기에 그리 능하지 않기 때문에 구슬을 많이 모으지못한다. 오빠는 악착같다. 아침에 크라운 로열위스키의 푸른색 주머니에 평범한 구슬 다섯 개를 넣고 학교에 가서는 위스키 주머니와호주머니까지 터질 듯 채워서 갖고 온다. 오빠는 따 온 구슬을 어머니가 준 마개 달린 크라운 보관용 단지에 담아 책상 위에 일렬로 세워 놓는다. 자기 기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단지를 늘어놓을 뿐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오빠는 자기가 모은 최상의 구슬들을, 순수, 물아기, 고양이 눈, 보물과 진귀한 것들을 단지에 모아 담는다. 그러고는 다리 아래, 협곡 어딘가에 갖고 가 묻어 버린다. 그런 후 정교한보물 지도를 만들어 그 장소를 표시하고 다른 단지에 넣어 마찬가지로 땅에 묻는다. 그렇게 했다고 내게 말해 주지만 왜, 어디에 묻었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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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카와 나는 최선을 다해서 리디아 아주머니가 요청한 대로 새 진주인 제이드를 교육했지만 허공에 대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손을 무릎에 모은 채로 참을성 있게 앉아 있는 법도 몰랐거든요. 몸을 비틀고 꼬물거리고 발을 가만히 두지 못했어요
"여자들은 이렇게 앉아야 해." 베카가 시범을 보이며 말하곤 했죠.
"네, 임모르텔 아주머니." 그렇게 말하며 노력하는 시늉을 하더군요. 그러나 이런 시도는 오래가지 않았고, 금세 다시 구부정하니 앉아 무릎 위로 발목을 꼬고 앉았어요.
아르두아 홀에서 제이드가 처음 저녁식사를 할 때는 어찌나 부주의한지, 우리 둘이 제이드를 가운데 두고 앉아 보호해야 했어요.  - P458

C 현관의 젊은 두 아주머니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금세 깨달았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는 말을 섞고 지내는 관계가 아니라 내게는 그 두 사람밖에 없었어요. 베아트리스 아주머니는 토론토에서 나를 개종하려 할 때는 그렇게 친절하더니, 내가 일단 여기온 후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지나칠 때면 거리를 두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게 다였지요.
생각해 보면 나는 두려웠는데 두려움에 좌우되지 않으려 애썼던거예요. 그리고 몹시 외로웠어요. 여기에는 내 친구가 하나도 없었고, 그곳 사람들과 연락할 길도 없었어요. 에이다와 일라이자는 머나먼 곳에 있었어요. 조언을 구할 사람도 없었어요. 설명서도 없이 무작정 내 힘으로 해 나가야 했어요. 가스가 정말로 그리웠어요. 백일몽으로 함께했던 일들을 꿈꾸었어요.  - P462

제이드는 몹시 칠칠치 못했어요. 공용 거실에 제 물건을(스타킹, 새컨습 탄원자 유니폼 벨트, 심지어 구두까지) 아무렇게나 두고 다녔죠. 화장실을 쓰고 물을 꼬박꼬박 내리지도 않았어요. 머리를 빗을 때 빠진 그 애 머리카락이 욕실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고, 세면대에서 치약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샤워도 허가되지 않은 시간에 자꾸해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해야만 했어요, 그것도 여러 번 저도 이런 게 사소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비좁은 데서 함께 살다 보면 문제가 쌓이기 마련이에요.
게다가 왼팔의 문신 문제도 있었어요. 하느님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십자가 형태로 그려져 있었어요. 그 애 말로는 참된 신앙으로 개종한 증표라지만, 나는 그 말이 의심스러웠지요. 한 번은 하느님이 ‘상상 속의 친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흘린 적이 있거든요. - P464

그 밑에는 생물학적 아버지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이름 역시 편집되어 있었어요. 주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현 소재 캐나다.
메이데이 요원으로 알려짐. 소재 불명.
내가 어머니를 닮았을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어요.
어머니 기억이 났느냐고요?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기는 했지요. 기억해 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과거는 너무 어두웠어요.
참으로 잔인한 것이죠. 기억이란 우리는 우리가 잊은 게 무엇인지 기억할 수 없잖아요. 우리에게 잊으라고 강요한 것도 여기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척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잊어야 했던 것도미안해요, 나는 속삭여 말했어요. 어머니를 되살릴 수가 없네요.
아직은.
나는 어머니의 사진 위에 손을 얹었어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느냐고요? 나는 그걸 바랐죠. 사랑과 온기가 이 사진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예쁘게 찍힌 사진은 아니지만, 그건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이 사랑이 내 손으로 흘러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유치한 공상이죠, 나도 알아요. 그러나 그래도 위로가되었어요. - P471

문서의 마지막 문단 아래, 파란 잉크로 쓴 흔들리는 필체의 글이한 줄 쓰여 있었어요. 일급비밀. 아기 니콜은 현재 여기 길리어드있을 수 없는 일만 같았어요.
울컥 감사하는 마음이 복받쳤어요. 내게 여동생이 있다니! 하지만 덜컥 무섭기도 했어요. 아기 니콜이 여기 길리어드에 있다면 왜 모두에게 알리지 않은 걸까? 온 국민이 기뻐하며 대규모의 축하 행사가 열릴 텐데, 왜 나한테는 알려 주는 걸까? 그물이 내 몸을 옭아맨 느낌이었지만, 칭칭 몸을 감은 그물은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내 동생이 위험한 걸까? 그 애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그리고 저들은 동생을 어떻게 할까?
이때쯤은 내가 보도록 파일을 갖다 놓는 사람은 리디아 아주머니가 분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 - P472

그리고 내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는 걸까요? 내 어머니는 살아있지만,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었어요. 범죄자로 취급되고 있었어요.
아니, 심지어 테러리스트였죠. 내 안에는 어머니가 얼마나 있을까요? 나는 어떤 면에서 더럽혀진 걸까요? 그것이 내게 전하려던 메시지였을까요? 길리어드가 나의 반역자 어머니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그러면 나는 기뻐해야 하나요, 유감으로 여겨야 하나요? 내충성심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요?
그때, 충동적으로 아주 위험한 짓을 했어요. 보는 눈이 없다는 걸확인하고, 혈통 파일에서 풀로 붙인 사진이 붙은 두 페이지를 뜯어내서 여러 번 접은 후 내 소맷자락에 슬쩍 넣은 거예요. 어쩐지 그사진들과 헤어지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어리석고 무모한것이었지만, 내가 저지른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 그 일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지요. - P473

리디아 아주머니의 집무실을 나와서 베카는 주간 근무시간을 채우리 도서관으로 갔고, 니콜과 나는 함께 다시 우리 아파트로 걸어
"우리는 자매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그네스 언니라고 불러도좋아." 
"알았어요. 그렇게 해 볼게요." 니콜이 말했어요.
우리는 거실로 들어갔어요.
"너한테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 잠깐만 기다려."
그리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어요. 혈통 파일에서 몰래 빼낸 두페이지를 작게 접어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두고 있었거든요. 나는 돌아와서 조심조심 다시 펼쳐서 판판하게 만들었어요. 내가 테이블에올려놓자 니콜도 (나처럼) 우리 어머니의 사진에 손을 얹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어요. - P485

"감사기도를 올려야 해." 아그네스가 경건한 아주머니의 말투를쓰는 걸로 보아, 아직 나한테 화가 난 모양이었어요. 우리 언니라고생각하면 이상했어요.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달랐거든요. 그렇지만 아직 그런 걸 알아볼 시간을 가진 적이 없으니까요.
"언니가 있어서 기뻐요." 화해하려고 내가 말했어요.
"나도 기뻐" 아그네스가 말했어요. "그래서 감사를 드리는 거야."
하지만 별로 고마운 말투가 아니었어요.
"저도 감사를 드려요." 내가 말했어요. 그게 그 대화의 끝이었어요.
나는 언제까지 이걸, 이런 길리어드식 말투를 유지해야 하느냐고 물어볼까 생각했어요. 이제 도망 길에 올랐으니까 우리 다 집어치우고자연스럽게 행동하면 안 돼요? 하지만 어쩌면 언니에게는 이게 자연스러운지도 몰라요. 어쩌면 다른 방식은 모를 거예요. - P518

막상 영원히 길리어드를 떠나려 하니 질라와 로사와 베라와, 내가예전에 살던 집과, 타비사가 죽도록 그리워 향수병에 걸릴 것만 같았어요. 오히려 초반에는 어머니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엄마 없는 아이가 된 느낌이 들었지요. 리디아 아주머니도 엄하기는 했지만 일종의 어머니였는데,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거예요.
리디아 아주머니는 니콜과 내게 우리 진짜 어머니가 살아 있고, 캐나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지만, 거기로 가는 길에 내가죽을지 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죽는다면 이 생애에서는 어머니를 끝내 만나지 못하겠지요. 그 당시에 어머니는 그저 찢어 낸 사진 한장에 불과했어요. 부재였고, 내 안의 어떤 간극이었어요. - P526

알코올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운전을 잘했고 빨랐어요. 길은 구불구불했고 부슬비 때문에 번들거렸어요. 몇 킬로미터가 스쳐 지나갔어요. 달이 구름 위로 떠올라 우듬지의 검은 윤곽선을 은빛으로 물들였어요. 이따금 집이 나타났는데, 어둡거나 불이 몇 개밖에 켜져있지 않았어요. 나는 불안을 잠재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잠이 들고 말았어요.
나는 베카의 꿈을 꾸었어요. 베카가 트럭 앞자리 내 바로 옆에 앉아 있었어요. 볼 수는 없었지만 거기 있다는 걸 알았어요. 꿈속에서 나는 베카에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너도 우리와 함께 왔구나. 정말 행복해"
그러나 그 애는 대답이 없었어요. - P526

흘러가는 시간을 셌다. 몇 시간, 몇 분, 몇초인지. 내가 보낸 연락책들이 길리어드 붕괴의 씨앗을 가지고 멀리까지 갔으리라 기대할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아르두아 홀 최고 기밀의 범죄 파일을 복제해 놓은 것이 헛되지 않았다.
버몬트의 버려진 하이킹 도로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서 진주 소녀배낭 두 개가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진주 소녀 드레스 두 벌과 오렌지 껍질 약간, 진주목걸이 하나가 있었다. 수색견을 동원해 그 지역을 뒤졌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장치였으니, 몹시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 P558

현관 A와 현관 B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자 설비부서에서 조사를 시작했고, 물탱크 속에서 불쌍한 임모르텔아주머니가 배출구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아이는 다른 사람이 나중에 입도록 겉옷을 벗어두었다. 그 옷은 단정히 개어져 사다리맨위 가로대에 놓여 있었다. 속옷은 입고 있었던 것은 조신함 탓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임모르텔이 했을 법한 행동이었다. 그녀를 잃은 것을 내가 슬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자발적인 희생이었음을 잊지 않는다.
이 소식으로 또 한 차례 무성한 추측이 나왔다. 임모르텔 아주머니가 살해당했는데, 제이드라는 행방불명이 된 캐나다인 신입보다그런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 P558

그분이 틀림없다는 느낌에 두 팔을, 성한 팔과 낫고 있는 팔을 모두 뻗었고, 우리 어머니는 내 병상 위로 허리를 숙여서 우리는 한 팔로 서로를 포옹했어요. 그분은 다른 팔로 아그네스를 안고 있어서한 팔만 썼어요. 그리고 그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내 소중한 딸들."
어머니의 냄새가 났어요. 그건 마치, 또렷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메아리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작게 미소 짓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물론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너무 어렸으니까."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네, 기억 안 나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리고 언니가 말했어요.
"아직은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기억날 거예요."
그리고 나는 다시 잠들었어요. - P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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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발소에 들르면 새삼스레 격식을 차려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다. 나는 이발하러 들른 것이고, 이발사는 이발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고리를 벗고, 의자에 올라앉는다. 이발사는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나일론 보자기를 두르고, 특별한주문이 없으면 알아서 머리를 깎는다. 얘기가 필요없는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일론 보자기와 면타월을 목에서 떼어낸다. 면타월을 탁탁 턴다. 그것으로 이발은 끝이다.
드라이한 과정이다. 그녀와의 섹스가 그랬다.
그녀는 말이 없을뿐더러 표정도 별로 없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얼굴은 희고 머리는 갈색이었다. 조금 살이 찐 편이었다. 키는 보통이었다. 말하자면, 별 특징이 없는 그런 여자였다. - P230

또 몇 날이 지났습니다.
남편은 제게서 바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제가 외출하고 온 날이면 제게서 끼치는 바깥바람 냄새가 좋다고 말하던 남편이었습니다. 그것을살아있는 것으로부터의 서슬‘이라고 남편은 명명했습니다.
바람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저로서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외출에 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남편은 급기야 저에게 바람다운 바람을 쐬어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바다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남편이 왜 그런저런 말을 했던가 알았지요. 남편은 은밀히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255

아이 여자는 세상과 얼마간의 완강한 거리를두고 있구나. 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타입이었던 것입니다. 집착 뒤에 올지도 모르는 허무와 환멸 따위를감당해낼 저항력, 그것이 그녀의 몸에는 단 하나도없는 것처럼 보였지요.
허무와 환멸 따위를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것 같았습니다. 그 두려움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유지하도록 그녀를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다 그녀는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걸까. 궁금했지만 그런 건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건 대개는 원형질과도 같은 것이어서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은 거니까요. - P266

저는 공주로 달려가기로 맘먹었던 겁니다. 갑사라는 절이 공주에 있으며, 그 공주라는 곳이 대천으로부터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같은 충청도 안에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기막힌 겨자소스를 먹는 순간, 저는 그곳 갑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있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밤바다에 남겨두고, 저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어떤 남자한테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충동적이며 비현실적입니다.
- P287

미친 해일이 일어 파도는 제 몸을 무너뜨립니다. 저는 소리를 지릅니다. 대지가 사정없이 요동치고, 어디선가 용암이 펑소리를내며분출합니다. 저는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바람이 자고, 바다가 잔잔해졌을 때, 그는 제 몸에서 천천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보았지요.
그의 두 뺨에 번들거리던 눈물을, 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순 있다. - P361

거기엔 거리가 있고 시간이 개입돼 있다. 두 달이조금 넘었을 뿐인데, 그녀와 나 사이엔 감히 겁(劫)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거리가 존재한다. 특별히 내가 비정하고 몰인정한 타입의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뭔가가 잘 정리된 듯하다. 정돈된 듯하다. 성적인 욕구를 모르고 살아가던 예전의 그 질서가 다시찾아온 듯했으나, 결코 예전의 그것은 아니었다. 훨씬 더 정리되고 정돈된 느낌.
어쩌면 나는 이런 형태의 안정을 찾기 위해 강보경이라는 혼돈의 늪을 건넌 건지도 모른다. 거듭말하지만, 물론 내 의지가 시킨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나도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 P378

그것은 오히려 저를 비이성적이고 원시적이고어쩌면 신화적이며 상징적인 관계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점차 다른 세상으로 멀어져가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몇날 며칠 그를 지독히도 그리워하고, 흐느끼고, 격정에 휘말리고, 관계의 해체를 두려워하고, 죽음처럼 고통스러워한 뒤로는 이제 그다지 혼돈스럽지만도 않습니다.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이제 차라리 자유롭다고까지 느끼니 말입니다. 저어쪽 사납게 흐르는물 너머로 아이들의 땅이 보입니다. 남편의 땅이 보입니다. 저의 땅이 보입니다. 한 사내가 저를 태우고 격류를 가로질러 이쪽 땅 위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사내는 물을 따라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이제 이곳에, 이쪽 세상에 또 다른 제가존재하는 것입니다. - P392

가생각해 보면 그런 암시는 이전에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한 여인의 낯선 오피스텔에서 제가 그를 처음 안던 날, 저는 혼돈을 느끼면서도 15층 상공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 같다는 생각을 얼핏 했었지요. 침대에 누워<인도방랑>을 읽는 저를 제가 내려다보기도 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지요. 애드벌룬을탄 제가 지상의 또 다른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덕수궁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입원한 남편의 병간호를 하는 저는 전혀 다른사람이 돼 있었지요. 하루에 밥을 일곱 번이나 먹는괴상한 여자로 변해 있었다는 게 아니고, 소프트웨어를 갈아끼운 인간이란 게 가능하다면, 바로 그런인간이 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 P393

눈물을 흘리면서도 저는 문득문득 이 세상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신발끈을 조여매고 먼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어쩌면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자라 허공을 떠올라야할 것 같았습니다. 선녀처럼. 제가 살던 곳은 이곳이 아닌 다른 혹성인 것 같더란 말입니다.
저 자신이 불쑥불쑥 낯설게 느껴질 때마다 이게꿈이지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껏 내가살아온 현실이 오히려 꿈이지 싶었습니다. 이렇게무책임하게 세상과의 관계를 저버려도 되는 건가생각되다가도, 더 크고 원초적인 세계와의 관계에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레는 자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 P408

잠시 떠났던 세상의 구조로 다시 돌아간다는 게 저에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력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구조가 좋아서면 그건 이제 아닙니다. 분명 그건 아니지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제가 불편함과 낯설음과 어색함을 감수하자는 것뿐이지요. 견뎌보자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게 최선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저를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나. 저는 언제까지나 남편 곁에 있고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럭저럭 다시 그런 생활과 구조에 자연스럽게 물들어버리면 이전과 흡사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도 끝내 견딜 수 없어지면 독수리가 되든 선녀가 되든 해서 하늘이든 바다 건너든어디론가 날아가버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서.
- P409

그녀의 기록은 거기까지였다. 더이상 그녀의 글은 이어지지 않았다.
WAF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만난건 짧은 꿈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현실로 잠깐 퉁겨져 나갔다 긴 꿈으로 되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그녀는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린 존재였다.
느닷없이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찬란하게 불타오르다.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 환상이었다. 내게 있어 그녀가 그랬듯, 그녀에게 있어 내가 그랬나보다.
그녀는 날 더 이상 그리워하지도 않는다지 않은가. 다만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말했듯, 나로 인해일상적인 경험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버린 것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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