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발소에 들르면 새삼스레 격식을 차려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다. 나는 이발하러 들른 것이고, 이발사는 이발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고리를 벗고, 의자에 올라앉는다. 이발사는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나일론 보자기를 두르고, 특별한주문이 없으면 알아서 머리를 깎는다. 얘기가 필요없는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일론 보자기와 면타월을 목에서 떼어낸다. 면타월을 탁탁 턴다. 그것으로 이발은 끝이다. 드라이한 과정이다. 그녀와의 섹스가 그랬다. 그녀는 말이 없을뿐더러 표정도 별로 없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얼굴은 희고 머리는 갈색이었다. 조금 살이 찐 편이었다. 키는 보통이었다. 말하자면, 별 특징이 없는 그런 여자였다. - P230
또 몇 날이 지났습니다. 남편은 제게서 바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제가 외출하고 온 날이면 제게서 끼치는 바깥바람 냄새가 좋다고 말하던 남편이었습니다. 그것을살아있는 것으로부터의 서슬‘이라고 남편은 명명했습니다. 바람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저로서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외출에 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남편은 급기야 저에게 바람다운 바람을 쐬어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바다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남편이 왜 그런저런 말을 했던가 알았지요. 남편은 은밀히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255
아이 여자는 세상과 얼마간의 완강한 거리를두고 있구나. 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타입이었던 것입니다. 집착 뒤에 올지도 모르는 허무와 환멸 따위를감당해낼 저항력, 그것이 그녀의 몸에는 단 하나도없는 것처럼 보였지요. 허무와 환멸 따위를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것 같았습니다. 그 두려움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유지하도록 그녀를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다 그녀는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걸까. 궁금했지만 그런 건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건 대개는 원형질과도 같은 것이어서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은 거니까요. - P266
저는 공주로 달려가기로 맘먹었던 겁니다. 갑사라는 절이 공주에 있으며, 그 공주라는 곳이 대천으로부터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같은 충청도 안에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기막힌 겨자소스를 먹는 순간, 저는 그곳 갑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있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밤바다에 남겨두고, 저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어떤 남자한테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충동적이며 비현실적입니다. - P287
미친 해일이 일어 파도는 제 몸을 무너뜨립니다. 저는 소리를 지릅니다. 대지가 사정없이 요동치고, 어디선가 용암이 펑소리를내며분출합니다. 저는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바람이 자고, 바다가 잔잔해졌을 때, 그는 제 몸에서 천천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보았지요. 그의 두 뺨에 번들거리던 눈물을, 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순 있다. - P361
거기엔 거리가 있고 시간이 개입돼 있다. 두 달이조금 넘었을 뿐인데, 그녀와 나 사이엔 감히 겁(劫)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거리가 존재한다. 특별히 내가 비정하고 몰인정한 타입의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뭔가가 잘 정리된 듯하다. 정돈된 듯하다. 성적인 욕구를 모르고 살아가던 예전의 그 질서가 다시찾아온 듯했으나, 결코 예전의 그것은 아니었다. 훨씬 더 정리되고 정돈된 느낌. 어쩌면 나는 이런 형태의 안정을 찾기 위해 강보경이라는 혼돈의 늪을 건넌 건지도 모른다. 거듭말하지만, 물론 내 의지가 시킨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나도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 P378
그것은 오히려 저를 비이성적이고 원시적이고어쩌면 신화적이며 상징적인 관계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점차 다른 세상으로 멀어져가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몇날 며칠 그를 지독히도 그리워하고, 흐느끼고, 격정에 휘말리고, 관계의 해체를 두려워하고, 죽음처럼 고통스러워한 뒤로는 이제 그다지 혼돈스럽지만도 않습니다.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이제 차라리 자유롭다고까지 느끼니 말입니다. 저어쪽 사납게 흐르는물 너머로 아이들의 땅이 보입니다. 남편의 땅이 보입니다. 저의 땅이 보입니다. 한 사내가 저를 태우고 격류를 가로질러 이쪽 땅 위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사내는 물을 따라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이제 이곳에, 이쪽 세상에 또 다른 제가존재하는 것입니다. - P392
가생각해 보면 그런 암시는 이전에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한 여인의 낯선 오피스텔에서 제가 그를 처음 안던 날, 저는 혼돈을 느끼면서도 15층 상공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 같다는 생각을 얼핏 했었지요. 침대에 누워<인도방랑>을 읽는 저를 제가 내려다보기도 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지요. 애드벌룬을탄 제가 지상의 또 다른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덕수궁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입원한 남편의 병간호를 하는 저는 전혀 다른사람이 돼 있었지요. 하루에 밥을 일곱 번이나 먹는괴상한 여자로 변해 있었다는 게 아니고, 소프트웨어를 갈아끼운 인간이란 게 가능하다면, 바로 그런인간이 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 P393
눈물을 흘리면서도 저는 문득문득 이 세상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신발끈을 조여매고 먼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어쩌면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자라 허공을 떠올라야할 것 같았습니다. 선녀처럼. 제가 살던 곳은 이곳이 아닌 다른 혹성인 것 같더란 말입니다. 저 자신이 불쑥불쑥 낯설게 느껴질 때마다 이게꿈이지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껏 내가살아온 현실이 오히려 꿈이지 싶었습니다. 이렇게무책임하게 세상과의 관계를 저버려도 되는 건가생각되다가도, 더 크고 원초적인 세계와의 관계에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레는 자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 P408
잠시 떠났던 세상의 구조로 다시 돌아간다는 게 저에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력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구조가 좋아서면 그건 이제 아닙니다. 분명 그건 아니지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제가 불편함과 낯설음과 어색함을 감수하자는 것뿐이지요. 견뎌보자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게 최선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저를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나. 저는 언제까지나 남편 곁에 있고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럭저럭 다시 그런 생활과 구조에 자연스럽게 물들어버리면 이전과 흡사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도 끝내 견딜 수 없어지면 독수리가 되든 선녀가 되든 해서 하늘이든 바다 건너든어디론가 날아가버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서. - P409
그녀의 기록은 거기까지였다. 더이상 그녀의 글은 이어지지 않았다. WAF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만난건 짧은 꿈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현실로 잠깐 퉁겨져 나갔다 긴 꿈으로 되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그녀는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린 존재였다. 느닷없이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찬란하게 불타오르다.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 환상이었다. 내게 있어 그녀가 그랬듯, 그녀에게 있어 내가 그랬나보다. 그녀는 날 더 이상 그리워하지도 않는다지 않은가. 다만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말했듯, 나로 인해일상적인 경험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버린 것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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