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선이 아니라 공간의 차원과 같은 하나의 차원이다. 만일공간을 구부릴 수 있다면 시간 역시 구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만일 필요한 지식이 충분히 있고 빛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스티븐 오빠였다. 그 당시 오빠는 공부할 때면 늘 여행용 적갈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두뇌에 피가 잘 흘러 영양이 잘 보급되도록 오랫동안 물구나무서기를 하곤 했다. 나는 오빠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오빠는 그때 이미 모호한 언어의 영역을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나는 시간을 어떤 형태를 가진 것, 볼 수 있는 무엇, 켜켜이 쌓여 있는 일련의 액체 투광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시간 선을 따라 회고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물속을 헤엄 - P15

치듯 시간의 심연을 통과해 가며 회고한다. 때로는 이것이, 때로는저것이 수면 위에 떠오르며 때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 P16

이제 나는 우리가 전차에서 내리곤 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보도에 쌓여 있는 1월의 눈 진창 속으로,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도회적으로 보였던 초라한 납작 지붕의 빌딩들 사이로 끽끽 째지는 소리를내며 불던 호수 바람 속으로 발을 내딛곤 했던 그곳. 하지만 이 지역은 더 이상 낮고 초라한 사양지가 아니다. 흘림체의 튜브형 네온사인이 개조된 벽돌 건물 전면을 장식했고 수많은 놋쇠 외장과 수많은부동산과 수많은 돈이 있다. 바로 앞쪽에는 차가운 빛으로 이루어진거대한 비석처럼 전체를 유리로 발라 번쩍거리는 거대한 긴 네모꼴건물들이 서 있다. 얼어붙은 재산,
나는 그 건물들이나 유행하는 옷, 수입품, 수제 가죽, 스웨이드 등등의 옷을 입고 나를 스쳐 가는 사람들을 거의 쳐다보지 않는다. 대신 추적자처럼 보도만 내려다보며 걷는다.
나는 목이 조여 오는 것을, 턱 선을 따라 퍼지는 통증을 느낀다.
나는 다시 손가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손에서 나오는 피, 그 피 맛을 기억한다. 그것은 오렌지 맛 아이스 바, 싸구려 풍선껌, 붉은 감초, 잘근잘근 씹은 머리카락, 더러운 얼음의 맛이다. - P25

지금은 내 인생의 중반기다. 나는 이것을 공간으로 생각한다. 반을 건너고 반은 남은 강의 중간, 다리의 중간처럼. 이때쯤이면 여러가지를 축적해 두었어야 한다. 재산, 책임, 성취, 경험과 지혜. 상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않는다. 마치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떨어뜨린 것처럼, 분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내 뼈에서 칼슘이, 내 피에서 세포가 빠져나간 것처럼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내 몸이 수축하는 것만 같고 차가운 공기나 부드럽게 내리는 눈으로 채워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가벼워졌지만 나는 상승하지 않고 하강한다. 아니, 유사속으로 미끄러지듯 아래쪽으로, 이 장소에 겹겹이 쌓여 있는 층 속으로 끌려 내려간다. - P30

진짜 삶과 더불어 나는 직업을 정확히 말해 진짜라고는 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나는 화가다. 허세를 부리고 싶었을 때는 여권에 화가라고 써넣기도 했다. 그 외에는 써넣을 수 있는것이 주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주부가 되었다는 것은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때는 이것 때문에 위축되기도 한다. 품위 있는 사람은 화가가 되지 않는다. 오직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며 꾸며대는 사람들만이 화가가 된다. 예술가라는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나는 화가라는 직함이 더 좋다. 그것이 더 확실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말하듯 예술가란 대개 번지르르하고 게으른부류다. 만일 당신이 화가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한시선으로 쳐다볼 것이다. 야생동물을 그리거나 돈을 아주 많이 벌지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화가들의 질투를 자아낼 만큼만돈을 벌 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꺼져 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많이 벌지는 못한다.
하지만 보통은 나는 내 직업에 만족하며, 가까스로 탈출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 P33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힘든 날들이 있다. 말을 하려 해도 애를 써야 하며, 목욕탕까지 가려면 한 걸음 또 한 걸음 한 발짝씩 천천히가야 한다. 한 발 한 발이 커다란 성취인 것이다. 치약 뚜껑을 열고칫솔을 입에 넣으려면 집중을 해야 한다. 팔을 입까지 올리는 것조차 힘겹다. 나는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고 내가 하는 일도 무엇이든 가치가 없으며 기껏해야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느낀다.
"뭐 변명할 말 있어?"
코딜리어는 그렇게 묻곤 했다.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와 연관된 그 단어. 마치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어젯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무(無)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 P71

캐럴은 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우리 가족은 마룻바닥에서 잔다고말한다. 우리가 시외에서 왔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신념 때문에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면서. 우리의 진짜 침대가, 다른 사람들 것과 마찬가지로 다리가 넷 달리고 매트리스 있는침대가 창고에서 도착하자 캐럴은 무척 실망한다. 그녀는 내가 어떤교회에 나가는지도 모른다는 것과 우리 가족이 카드놀이용 탁자에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다. 이런 사실을 경멸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국적인 특별함을 가미해서 말한다. 결국 나는그녀의 줄서기 짝이며, 그녀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럴은 그런 놀라운 사실을밝힌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이 경외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 P84

이 놀이를 하면 나는 늘 피곤해진다. 이 모든 물건의 축적, 돌보고포장하고 차에 싣고 다시 포장을 풀어야 할 이 모든 소유물이 지닌그 무게에 눌려서 그런 것이다. 나는 이사에 대해 잘 안다. 하지만캐럴과 그레이스는 단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다. 그들의 마님들은 집에 혼자서 살고 있으며, 언제나 그곳에 산다. 마님들은 물건들을 자꾸만 보탤 수 있으며 식탁 세트, 침대, 타월 무더기, 그릇 세트로 스크랩북을 페이지 가득 채워 넣은 다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되는 것이다.
나는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들을 원하게 되었다. 땋은 머리, 실내용 가운, 나만의 손가방. 그 무엇인가가 내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펼쳐지고 있다. 내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여자 아이들과 그들의 행동이라는 세계가 있으며, 나도 자연스럽게 그 세계의 일부가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빨리 달리거나 과녁을 잘 맞추거나 폭탄처럼 큰 소리를내거나 메시지를 해독하거나 신호에 따라 죽은 시늉을 하지 않아도된다. 이런 일을 잘했는지, 남자 아이처럼 잘했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바닥에 앉아서 이튼 카탈로그에서 프라이팬을 자수가위로 잘라 내고, 내가 한 것은 형편없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안도가 되기도 한다.
- P92

술래들은 자신이 내놓은 상품의 이름을 외친다. "순수, 순수, 철공, 철공,"이 두 음절짜리 단어들을 외치는 소리는 잃어버린 개나아이들을 부를 때처럼 일정한 리듬을 띠다가 점점 낮아진다. 외치는소리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구슬프게 들린다. 나 역시 다리를 벌리고앉아 차가운 구슬들을 다리 사이에서 굴리다가 넓게 펼친 치마에 그러모으며 후회하는 듯한 목소리로 외친다. "고양이 눈, 고양이 눈."
오직 탐욕과 쾌락 섞인 공포감만을 느끼면서.
고양이 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슬이다. 그 구슬을 따게 되면나는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꺼내 들고 빛에 비추어돌려 보며 점검한다. 고양이 눈은 진짜 눈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고양이 눈 같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존재의눈처럼 생겼다. 라디오에 달린 녹색 눈처럼, 먼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눈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푸른색이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내빨간 플라스틱 손가방에 넣어 둔다. 다른 고양이 눈은 위험을 감수하며 목표물로 내놓지만 이것은 예외다. - P105

나는 구슬치기에 그리 능하지 않기 때문에 구슬을 많이 모으지못한다. 오빠는 악착같다. 아침에 크라운 로열위스키의 푸른색 주머니에 평범한 구슬 다섯 개를 넣고 학교에 가서는 위스키 주머니와호주머니까지 터질 듯 채워서 갖고 온다. 오빠는 따 온 구슬을 어머니가 준 마개 달린 크라운 보관용 단지에 담아 책상 위에 일렬로 세워 놓는다. 자기 기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단지를 늘어놓을 뿐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오빠는 자기가 모은 최상의 구슬들을, 순수, 물아기, 고양이 눈, 보물과 진귀한 것들을 단지에 모아 담는다. 그러고는 다리 아래, 협곡 어딘가에 갖고 가 묻어 버린다. 그런 후 정교한보물 지도를 만들어 그 장소를 표시하고 다른 단지에 넣어 마찬가지로 땅에 묻는다. 그렇게 했다고 내게 말해 주지만 왜, 어디에 묻었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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