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난간이 투우장 황소를 꿰뚫은 칼처럼 나를 꿰뚫어 버렸다.
행인 한 사람이 피를 많이 흘리는 나를 길 위로 옮겨놓았고, 적십자 요원들이 나를 돌봐 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순결을 잃었다. 신장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소변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척추였다.
하지만 아무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X선 검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서 적십자 요원들에게 가족을 불러달라고 했다. 신문에서 소식을 읽은 마티타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녀는 석 달간 밤낮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돌봐주었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한 달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고 나를 보러오지도 않았다. 언니 아드리아나는 사고소식을 듣고 기절했다. 그리고아버지는 몹시 상심해서 몸져누웠기에 이십 일이 지나서야 볼 수있었다." - P70

사고결과는 너무도 끔찍해서 프리다를 진찰한 의사 대부분은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했다. 척추는 허리부분에서 세 군데가 부러져 있었다. 대퇴골의 경부가 부러졌고, 갈비뼈도마찬가지였다. 왼쪽 다리에 열한 군데의 골절상을 입었고, 오른발은 짓이겨져서 탈구되었다. 왼쪽 어깨가 빠졌고, 골반뼈도 세군데나 부러졌다. 버스의 쇠난간이 그녀의 배를 뚫고 들어가 왼쪽 옆구리를 관통해서 질을 통해 다시 빠져나왔다.
그러나 프리다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버텨냈다. 그녀는 사고와그에 따르는 절망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병원에서도 그녀는 참기 힘든 고통을 견뎌냈다. - P70

적십자 병원에서 퇴원한 프리다는, 코요아칸의 집으로 돌아가서도 침대에서만 지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고통과 고독에서 생겨난 의지였다. 프리다는 자신의 결심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게다가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건 바로 그림이에요."
어머니는 그녀의 잠자리 위에 일종의 닫집을 만들고 침대의 천장 위치에 큰 거울을 붙여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스스로의 모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프리다 자신을 묘사하는 작품에 등장했던, 바로 그 침대와 거울이었다. 그것은 마치 김이 서린 유리창에 그려진 문을 통해 핀손의 ‘6‘ 를 지나 언제나 명랑하고 경쾌하게 춤을추며 함께 비밀을 나누던 상상 속의 프리다를 만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항해사나 유명한 여행가가 되기를 꿈꾸던 변덕스럽고 냉소적인 소녀에게 남은 것은 그림과 씁쓸한 냉소와 고독이었다. 약혼자 알레한드로는 편지가 오가는 데도 몇 달씩 걸리는 독일로 유학을떠났고, 고독은 그만큼 더 깊어졌다. 알레한드로의 유학은 우연이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방탕하고 불손하며 게다가 불구가 된처녀와 교제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 P71

그녀가 겪은 사고는, 인간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육체적 고통을 겪게 했다. 그러나 사고 이후가 더 어려웠다. 그녀는 육체의 자유를 회복해야 했고, 이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코요아칸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투쟁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무리해서 외출도 하고 국립예비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만나기도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삼 개월 후에는 멕시코시티 중심부까지 버스를 타고 나갔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그림이 중심이었고, 존재의 이유였다.
1923년부터 습작을 시작하여, 첫 번째 작품으로 보티첼리풍의 자화상을 완성했다. 프리다는 알레한드로를 붙잡기 위해 그에게 이그림을 선물했다. 라파엘 이전 화풍으로 (혹은 멕시코 화가 사투르니노에란풍으로) 그려진 낭만적인 자화상 속에서, 그녀는 육체적인 고통으로 창백함이 두드러지는 어두운 보라빛 배경 위에 몹시 연약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이 그림에서 그녀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불거진 눈썹 아래, 지적으로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그림하단부에 독일어로 쓰여진 ‘오늘도 여전히 힘들다‘ 라는 말이었다. - P75

사랑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프리다는 실패와 불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났을 때, 달라진 모습을 볼수 있었다. 여윈 가운데 불타는 듯한 시선은 둥글고 짙은 눈썹으로더욱 그늘져 보였으며 꽉다문 입술은 냉정해 보였다. 1926년 2월,
아버지가 찍은 사진에서 누이들과 사촌들 사이에 소년으로 가장한채 나무 지팡이에 기대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그녀는 살고자 했다. 상처가 재발하고 코요아칸의 방안에 갇혀지내면서도, 그리고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야 함에도, 자신을 짓누르는 고독에 맞서 싸웠다. 그녀는 이제 스무 살이었고, 젊음이지니는 조급함과 열정이 상처 입은 육신 속에서 꿈틀거렸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오브레곤과 카예스 사이의 권력 투쟁, 북아메리카의 위협, 대중세력에 대한 탄압, 그리고 오브레곤과 판초 비야의암살과 학생운동 등 바깥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사건들을알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과 중국 신해혁명에 관한 기사를 열심히 읽었다. - P77

"내가 다룰 주제는 분명하다. 이것은 정의와 계급철폐를 위해싸우는 멕시코 노동자라면 누구라도 선택할 주제이다. 나는 다른눈으로 멕시코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최대한의 열정을 기울여 일해왔다."
1932년,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혁명운동에는 예술적인 표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술은전세계 노동자와 농부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점이 있다. 중국의 농부나 노동자는 혁명미술을 어떤 책보다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부르주아 계급은 붕괴상태에놓여 있으며, 그들의 예술은 유럽예술에 의존한다. 이 사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의 창조가 없다면 진정한 아메리카 예술의 발전이 있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 나라의 예술이 좋은 예술이 되기위해서는 혁명적인 예술이어야 한다."
또한 대중 종교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리한 어조로 예술에 관한 자기 견해를 요약했다.
"농부와 도시 노동자가 단순히 곡식과 채소, 공산품만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름다움도 만들어낸다." - P134

유산이후의 몇 주 동안 프리다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데생을 했다. 그림은 그녀에게 현실의 고뇌를 피할 수 있는 방편이었고, 데생 하나하나, 그림 하나하나가 주위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렇게 생겨난 자화상이 <두 세계사이에서이다. 이 그림은 디에고의 산업도시 디트로이트와 멕시코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상처받고 있는 그녀 자신의 삶을 연출한 것이다. 또한 디트로이트 중심가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윤곽, 수정된 알, 별처럼 떠있는 디에고의 얼굴, 울고 있는 하늘 등 난해한 꿈들과 입원실에서 느꼈던 현실적인 두려움을 단번에 그려낸 데생들도 있었다. - P152

1934년 여름, 크리스티나의 고백으로 그들의 배신을 알게된 프리다는 악몽에 시달렸다. 건망증에 걸린 아버지, 결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 프리다는 단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성격상 거짓말을 견디지 못했던 그녀는 위선적인 가면을 부숴버리기로 하고 디에고를 떠나 혼자 지냈다. 꿈속에서라도 크리스티나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파트에 혼자 묵으면서 시련을 이기려고 애썼다. 그녀는 디에고에게 돌아오기 위해 그의몸짓, 그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디에고와 프리다의 파국은 단순히 부부생활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화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것은 가면이 벗겨진 일이었다. 미국에 머물 때, 프리다는 디에고 곁에서 멍하니 무의미한 생활을 했다. 그녀가 그토록 혐오했던 디트로이트나 뉴욕의 앵글로색슨 사회는 어떤 점에서 멕시코 현실에 대한 방벽 구실을 했다. 디에고가 구원의 사자 역할을 맡고 그녀가 아스텍 공주 역을 연기하는 동안 겉치레와 장식이 되어준 방벽이었다.  - P180

그런 까닭에 그녀는 디에고가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속한 이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돌아가고 싶었다.
자기 여동생과 바람을 핀 디에고의 배신은 멕시코 여성의 고통스런 운명을 상징한다. 디에고는 어린시절에 겪었던 가정의 비극을 이번에는 자신이 재연했을 뿐이다. 그의 어머니 도나 마리아는*카자치카(남자가 정부와 딴살림을 차리는 풍속)‘ 를 답습한 남편의 애정행각 때문에 평생 고통을 겪었다. 심지어 그녀는 스페인까지 찾아가서 아들의 도움을 받으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디에고와 안젤리나의 아들인 첫손자 디에고의 첫돌을 축하하며 그녀가 보낸 사진에는 드물게도 자신의 고통을 암시하는 씁쓸한 글이 적혀있다.
"아이들에게 불행이 없기를" - P182

그녀가 견뎌야 했던 크나큰 희생과 부부간의 굴종에 대해 언급하는 글이었다.
디에고는 성의 자유가 필요했다. 바로 그것이 그의 예술의 자양분이며, 혁명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자유는 파리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모방한 반부르주아적 비도덕주의와는 전혀 달랐다. 디에고에게 여체의 탐구는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고갱이나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여인과의 쾌락을 통한 자기확인이 필요했고, 지속적인 육체적 접촉이 필요했다. 여체의 아름다움, 모델들의 아름다움은 격렬한 생명의 상징이며, 머릿속 이념들과 지성의 무력함에 맞서는 현실적인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그의 그림은 - P182

쾌락과 생명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고 있으며, 남성에속한 죽음과 전쟁의 본능에 대립해서 빛을 발하는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고 있었다.
디에고의 지칠 줄 모르는 육체적 욕망과 거리낌없이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태도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런 것만이 디에고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과일만 먹고 전분질이나 고기는 거의 먹지 않으면서 미네랄 워터만 마시는 고행자이기도 했다. 또한 열여덟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전혀 잠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여인의 육체에서 자신의 그림을 위한 모든 형태를 끌어냈고, 이 형태들을 조각가의 희열로 빚어냈다. 마티스나 세잔처럼 그는 둥그스름한 모양과 몹시 부드러운 윤곽 속에서 균형을 찾고자했다.  - P183

사람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균형이었고 그는 바로 이 균형을 일생에 걸쳐서 화폭과 벽화 위에담아냈다. 똬리를 튼 것 같은 여인들의 형체는 전쟁이나 가난한 자들의 예속, 강자의 사악함을 순화시켜 준다. 그 곡선은 과일의 모양과 닮았고, 대지의 꿈틀대는 창조력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화가도 그처럼 강한 신념으로 남성과 여성, 전쟁과 사랑, 태양과 달의 힘 사이에 작용하는 상호보완성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디에고자신의 육체도 이런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 이 거인은 둥그스름한 몸매를 가졌고, 못생긴 얼굴에 대조되는 아름다운 두 눈을 가졌으며, 거친 성격에 대조되는 다정다감함을 보여주곤 했다. 그 자신이 농담조로 자신은 남자인 동시에 여자라고 말하면서 증거로 자기가슴을 보여주곤 했다.
디에고는 무기와 연장을 생산하는 산업세계, 디트로이트와 뉴욕의 현실세계에 그가 추구했던 부드러운 형체, 율동적인 선, 마티스가 여인을 응시하면서 발견했던 몹시 순수한 곡선들을 대입시켰다.  - P183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변함없는 사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균열된 믿음은 복구할 길이 없었다. 바로 이 1935년부터 프리다는활기를 되찾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뒤덮은 끔찍한 흉터처럼 드러난상처의 기억‘ (1938년에 그린 데생의 제목이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피, 죽음, 기생식물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는 억누를 길 없는강박관념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공허함, 이런 것들이 그녀의 일부가 되었고,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드러났다.
디에고는 감각적인 생활을 했고,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을 끄는 것들과 그 상징들로 쉴새없이 벽을 뒤덮었다. 프리다는 자신의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상,
차갑게 식어서 지옥 같은 허무에 빠져들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역경을 이기고 살아남고 싶었다. - P189

그림이 프리다의 출산을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모순과 저주를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제를 외적 현실로 노출시킴으로써 마음 속의 고통으로 남지 않도록 해준 덕분이었다. 예술은 프리다에게 다른 종류의 동물성이었고, 자연적이며 즉흥적인 충동이었다(이 때문에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녀의 그림에 열광했다). 운명이 그녀를 가차없이 몰아냈던 현실세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예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예술, 아이, 아름다움, 폭력, 사랑, 이모든 것이 그녀가 자기 주위에 늘어놓은 화려한 장치를 통해 밀접하게 뒤섞였다. 화려한 장치들이란 이를테면 새들이나 식물의 화려한 모습과 비슷한 원주민 의상들, 원주민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의 가면, 대지의 여신 틀라솔테오틀이 의식을 행할 때처럼 땋아 묶은 머리, 그녀를 옭아매면서 고통을 가하는 자연이 마술을 부릴 때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눈물, 가장 값비싼 술처럼 붉게 흘러내리는 피 등이다. - P228

집으로 돌아온 후, 몸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진 프리다는 육체와 집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계속 살아갈 힘을 주는 정신세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프리다와 디에고 사이에 설치된 개폐식 다리(산 앙헬에 있는 두 사람의 개별 작업실을 이어주는 다리로, 그녀가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폐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그녀가 일종의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제는 그녀 자신이 자기 세계의 확고한 중심이 되었고,
그녀는 이 세계가 자기 주위로 서서히 선회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영원한 아이이자 태양이며 모든 것의 근원인 디에고는 이 우주를 비추는 빛의 원동력이었다. 디에고의 잔인함과 프리다의 몸에 쏜 화살과도 같은 배신행위들은 어떻게 보면 고통과 행복이한 몸을 이루는 이 우주의 균형을 완성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우주의 피창조자는 제식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창조자와 영원히 결합한다. - P230

프리다가 자신의 척추를 그리스의 부서진 원기둥으로 표현했던 <부서진 기둥>의 크로키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말없는 고뇌 속에서 부서진 기둥과 끝없는 시선을 기다릴 것. 강철로 둘러싸인 나의 생명을 자극하면서 광활한 길위에서 꼼짝도 하지 말것."
‘푸른집‘ 과 견고한 코르셋의 이중 감옥에 갇힌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바친 사랑은 실로 초인적이어서, 오직 그녀만이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인,
식인귀, 폭군, 신비적인 숭배의식의 사제, 현대를 떠도는 신화의 창조자이자 피창조자. 이 모든 것인 디에고는 그 이유도 모른 채, 자신에게 스며들어 빛이 되어주는 한없는 사랑에 감동했고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불화와 이혼은 그를 휩쓸어버릴듯한 이 두려운 감정에서 벗어나려 했던 단 한번의 시도였다. 이 시도는 그 자신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다. 이로인해 자신의 진정한 존재이유에서도 멀어졌기 때문이다. - P241

그녀는 생애 말기의 절친한 친구 라켈 티볼에게 "내 그림은 혁명적이지 않아. 굳이 내 그림이 전투적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가뭐겠어? 난 그럴 수 없어" 라고 털어놓았다. 프리다의 혁명은 디에고의 혁명과 달랐다. 그녀의 투쟁은 사실상 정치참여나 당이 예술에 부여한 교화적 목적과는 아무관련도 없었다. 그녀는 평생동안 필요하다고 여길 때는 항상 디에고와 함께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지만, 정치 투쟁에 있어서는 디에고의 뒤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그녀의 의지속에는 어딘지 애매하고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고, 자신의 예술을 당의 행동노선에 맞추기 꺼려했다. 프리다에게 예술은 의사전달의 수단이나 상징적인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딛고 일어나 자기자신으로 남는 유일한 길이었고 존재의 수단이었다. 예술이 그녀의 전부였기에 그녀는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 의미를 변질하는 어떤 타협도 받아들일 수없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후원을 거부했던 것처럼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안이한 목적론에 이용되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 - P262

그녀는 고열에 시달렸지만 의식은 극도로 맑았다. 포사다를 도취시키던 최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그녀는 머지않아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확신에 찬 글을 일기장에 남겼다. 코요아칸의 집에는 그녀와 하녀들 밖에 없었다. 정원에서는 그녀의 개들이 굳게 닫힌 문앞에서 차가운 비를 피하고 있었다.
후에 디에고는 프리다와 함께 보낸 마지막 순간에 대해 글라디마치에게 들려주었다.
"전날 밤, 그녀는 아직 17 일이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일을 위해 사둔 반지를 내게 주었다. 왜 선물을 미리 주느냐고 묻자, 그녀는 ‘머지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 라고 했다."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죽음의 사자를 그린 그녀는 그 옆에아주 처절하면서도 그녀의 완벽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을써놓았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는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7월 13일 숨을 거뒀다.

다음날은 폭우가 내렸고, 디에고는 흰색 셔츠를 입고 뚜껑 없는관에 곱게 누운 프리다를 따라 그녀의 추모식이 열릴 미술 궁전까지 갔다. 그 후관은 별과 낫, 망치가 그려진 붉은 기로 덮여서, 돌로레스 시립 묘지의 화장터로 옮겨졌다. - P299

디에고 리베라 (1886~1957)

대형 벽화 작품을 통해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었던디에고 리베라는 1886년 멕시코의 광산 도시 과나후아토에서출생하였다.
몽마르트르에서 큐비즘의 세례를 받았지만,
타고난 색채감각으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창조해냈다.
멕시코 혁명이후 귀국을 하여 멕시코 토착문화에 기반을 둔 벽화주의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대담하고 산뜻한 색과 평면적이고 단순화한 형태의 그가 그린 대형벽화는 멕시코 현대미술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아내 프라다와는 이념과 예술을 서로 교감하는 동지였으며 프리다가 사망한 지 3년 후인 1957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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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0월 5일, 아스텍 왕조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멸망한후 별다른 변화도 없이 고요하던 멕시코를 뒤흔들어 놓는 사건이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이던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절대 권력의 영화를 누리며 독립 백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디아스의 부정선거 무효를 선언하며 들고일어난 것이다. 마데로가 산 루이스 작전을 통해 봉기의 신호탄을 올리자 전국민이 이에 호응하여 나라 전체가 순식간에 광분에휩싸였고, 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끝에 기존체제를 뒤엎어 버렸다.
멕시코 혁명은 러시아 혁명을 예고하는 최초의 사회혁명으로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멕시코 전체를 휩쓴 이 혁명운동은 자생적이었고 농민들이 주역이었다. 멕시코의 1910년상황은 스페인 지배자들이 남겨 놓은 그대로였다. 대다수 농민들이대지주의 핍박을 받았고, 그들의 사병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다.
열다섯 명의 지주가 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농지와 강물까지 소유하며 원주민 마을을 지배하는 절대자로 군림했다.  - P11

당시 멕시코의 상권은 외국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광업과 시멘트 공업은 미국인이, 군수업과 철공업은 독일인이, 식품업은 스페인 사람이, 섬유업과 도매업은 프랑스의 바르셀로네트 가(家)가독점하고 있었다. 영국인과 벨기에 인은 철도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유전은 도헤니 가와 구겐하임 가, 쿠크가와 같은 미국 재벌의수중에 있었다.
디아스가 지배하던 멕시코는 유럽의 영향 아래 있었고, 예술과문화도 유럽을 모델로 삼았다. 독재자 디아스는 멕시코시티를 파리처럼 만들었고, 모든 도시에 왈츠곡과 카드리유 무도곡을 연주하는 오스트리아식 음악당을 세웠다. 원주민의 고유한 예술, 민속,
문화는 경멸 당했다. 기껏해야 갑옷 입은 전사복장의 원주민들과로마식 옷을 입은 원주민 여인들을 그린, 화가 사투르니노 에란의고풍스런 작품에서나 아스텍 문화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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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이 소설적 관습의 허위성을 혐오한다 해도, 『노생거사원」의 초반부에서 그녀와 동업에 종사하는 자[소설가]들을거부하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나는 소설가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옹졸하고 무례한(경멸적인 비난으로 창작물을 깎아내리면서도 그들 스스로 그런 창작물을 생산하고 있는) 관습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1부 5장] 오스틴은 소설 비평가들을 비범하게 공격하면서 골드스미스, 밀턴, 포프, 프라이어, 에디슨, 스틸,
스턴 등 선집에 수록된 남성 작가들이 세실리아』 『카밀라』 『벨린다. 같은 작품을 쓴 여성 작가들보다 (비록 그 남성들의 작품이 독창적이지도 문학적이지도 않지만) 관습적으로 훨씬 더 칭송받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힌다. - P272

오스틴은 소설에 대한 편견이 널리 퍼져 있다는 자신의 느낌을 입증하려는 듯, (대다수 소녀들처럼 소설 읽기가 공식적인 교육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로맨스 소설에 중독된 독자조차 로맨스 장르에 대한 경멸을 내보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천 클리프로 가는 중요한 여행에서우리는 소설 형식을 경멸하는 캐서린을 보게 된다. 캐서린은 소설이란 헨리 틸니가 읽을 만큼 ‘훌륭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사는 더 나은 책을 읽기 때문이다.‘ [1부 14장] 두말할 나위없이 캐서린의 비판은 실제로 자기 비하의 한 형태다.
오스틴은 소설이 신분을 박탈당한 장르임을 암시한다. 소설은 신분을 박탈당한 젠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소설을 열등한 문학으로 간주하는데, 소설이 이미 여성 작가와 빠르게 확산되는 여성 독자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 - P272

다. 우리는 소설이 캐서린을 잘못 교육하는 양상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즉 소설은 부풀려지고 과장된 상투어로 말하도록 캐서린을 가르치고,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동기가 훨씬 복잡한 사람들에게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만큼 악하거나 선한 행동을 기대하게 만들며, 캐서린으로 하여금 동시대인의 세속적인 이기심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오스틴은 소설가들이 ‘상처받은 집단‘이었음을 선언하고, ‘오만, 무지, 유행 [1부 5장] 같은말로 부당하게 비난받아온 작가라는 종을 명백하게 옹호해나간다.
오스틴의 열정적인 소설 옹호는 겉으로 보이는 만큼 그렇게부적절하지 않다. ‘노생거 사원』이 상투적인 소설의 패러디라면, 그것은 바로 그런 상투적인 소설의 관습에 의존하려는 경향면에서 나머지 초기 작품과 형식상 유사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 P273

처칠 부인은 오스틴의 여자 주인공에게 경고의 이미지로 나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빠르게 닮아가고 있는 바로 그 인붙이기도 하다. 만일 작가로서 자신의 인물들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오스틴의 죄의식을 처칠부인이 대변한다면, 그녀는 또한 여성적인 정숙, 과묵함, 겸손이 마녀 같은 교활함에 굴복할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마녀란 처음부터 젊은아가씨의 역할과 가치가 함축하고 있는 측면으로, (우리가 보았듯이) 공모와 조작과 속임수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처칠 부인 자신은 자신의 숙녀다운 침묵, 회피, 거짓말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처칠 부인의 이야기를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처칠 부인을 죽게 만든병이 자신이 조작한 허구 이상이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녀의 (오스틴의 후기 소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죽음은상처받기 쉬운 여성의 속성을 드러내는 불길한 예시다. 오스틴은 자신의 마지막 소설에서 이런 속성을 더욱 충분하게 탐색해나간다. - P341

영국 사회의 사회적 인습에 물들어 있고, 또 그것을 특징짓는부패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스미스 부인의 호기심 많은 지적 원천인 그녀의 정보 제공자 또는 그녀의 뮤즈다. 아픈 사람들을 간호해서 건강한 상태로 되돌려놓는 여자, 루크라는 기막힌 이름을 가진 이 간호사는 이 소설에 부재한다는 점에서 오스턴의 가장 중요한 화신들과 닮았다. 환자의 침대 곁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간호사 루크는 고통받은 자들의 구원자이자 독수리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루크가 누리는 이동의 자유는체스 말의 이동과 닮아 있는데, 그 말은 체스판의 가장자리와나란히 이동하면서 게임의 한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루크는 - P353

자신의 환자들을 ‘속여서 그들의 숨겨진 저장물을 발견한다.
갇혀 있는 스미스 부인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전지적으로 보이는 이 간호사는 병상의 모든 비밀에 내밀하게 관여한다. 루크는 스미스 부인에게 뜨개질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작은 바느질 상자와 바늘 방석‘, 그리고 오스틴의 ‘5세티미터 폭의) 작은 상아 조각과 다르지 않은 ‘카드상자‘를 판다. 루크가 봉사의 일부로 가져온 것은 병실에서 나온 책들, 즉나약함과 이기심과 참을성 없음의 이야기들이다. 개인적인 삶의 역사가라 할 수 있는 간호사 루크는 전형적인 여성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즉 여성의 수공예품을 상류사회에 파는 형식, 외관상으로는 매우 하찮아 보이는 자선과 관련된 형식으로 말이다. 루크의 일과 가십은 물론 상류사회의 점잖은 외관뒤에 감추어진 더러운 실체를 들추어내는 전복적인 관심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크는 오스틴 자신의 훌륭한 초상화다. - P354

오스틴이 사회의 병, 특히 적극적인 활동의 삶에서 배제당한사람들에게 그 병이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샌디턴의 파커 자매를 통해 마지막으로 예증된다. 이 작품에서 친절한 다이앤은 장애인 동생 수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열홀 동안 하루에 거머리 여섯 마리를 붙여서 피를 뽑고 적출한치아를 관리한다. 한 자매는 ‘정신 나갈 정도의 활동‘ [9장]을 보여주고 또 다른 자매는 소파에서 시들어가고 있는데, 두 자매는둔감한 버트램 부인, 장애가 있는 스미스 부인, 병든 제인 패어팩스, 열병 걸린 메리앤 대시우드, 감염된 크로퍼드, 건강염려증인 메리 머스그로브, 병약한 루이자 머스그로브, 창백하고 허약한 패니 프라이스를 연상시킨다.  - P355

그러나 간호사 루크의 치료기술이 암시하듯, 병든 잔소리꾼들과 죽어가는 실신자들은 오스틴의 가장 성공적인 인물들이 일반적으로 정착하는 상태의경계를 설정한다. 소수의 여자 주인공들만 문화가 야기한 어리석음과 가정의 감금과 여성의 사회화가 초래한 무능을 피할 뿐이다. 실신해서 침묵 속으로 빠지지도 않고 자기를 파괴해가며다변 속으로 빠지지도 않으면서, 엘리자베스 베넷, 에마 우드하우스, 앤 엘리엇은 그들의 창조자인 오스틴을 반향한다. 그들모두 자신들이 여성적인 온순함을 회피하고 보류할 때, 한편으로는 몽유병으로 빠지지 않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멸하는 그들이 오염되어 비속함으로 빠지지 않게 해주는, 이중적으로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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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은 벽난롯가 장면으로 유명하다. 소설 속 벽난롯가 장면에서는 몇몇 인물들이 아주 하찮아 보이는 선택을 두고편안하고 조용하게 논쟁하곤 한다. 그 과정에서 아주 하찮아 보였던 선택은 놀랍게도 중요하고도 윤리적인 딜레마로 변형된다. 또한 그런 장면들이 중요성을 띠는 것은 화자의 기술 덕분이라는 느낌이 매번 든다. 오스틴은 진부함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잘 알고 그 때문에 아주 하찮은 제스처라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던 것 같다. 『사랑과 우정』 (1790)에서한 가족은 그들 ‘둥지‘의 난롯가에 앉아 있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 P243

노크 소리 하나에도 심사숙고하는 이 장면은 어이없을 정도로 아주 하찮은 사건까지 기록하는 경향이 있는 감상 소설 작가들을 조롱한다. 그러나 이것은 왕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예의 바른 대화를 유지해야 하는 평범한 여성의 권태도 보여준다.
말하자면 오스틴의 초기 작품은 작가의 표현을 깎아내리는 잘못된 문학적 인습을 조롱함으로써 특히 여성 독자의 기대치를위험이 따를 정도까지 저버리고, 나아가 그런 인습이 바로 여성의 삶을 결정했다는 인식을 드러내기 때문에 중요하다. 제인 오스턴은 문학적 인습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함으로써 여성을 지속적으로 그런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문화를 공격하려고 했다. - P244

오스틴이 존경하는 듯한 존슨 박사조차 예언자인 체하는 수사학적문체로 인해 오스틴의 풍자 대상이 된다. 이런 풍자는 처음에는오스틴의 초기 작품 속 공허한 추상 개념과 대구를 통해 나타나고, 나중에는 진부한 말로 거만을 떨며 자랑하는 『오만과 편견」의 메리 베넷의 입을 통해 나타난다. 또 오스틴은 여성 독자를 깔보는 태도를 취하는 <스펙테이터>를 거듭 공격한다. 여성인 자신의 사적인 관점과 더불어 섭정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도그녀가 흔히 놓이는 신고전주의 시대의 맥락에서 그녀를 분명히 떼어낸다. 가장 성숙한 여자 주인공인 『설득』의 앤 엘리엇처럼 오스틴도 한 번씩 젊은 독자에게 ‘최고의 가르침과 가장 강력한 도덕적 종교적 인내의 본보기를 통해 정신을 깨우치고 강건하게‘ 해주었던 에세이스트들의 지혜를 성찰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오스틴도 ‘스스로도 잘 실천하지 못한 일에 말만 앞세우고 있다‘고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설득』 1부 11장] - P249

그녀 스스로 건축가가 되고자 한다면, 접근 가능한 건축 자재(마음대로 쓸 수 있는 언어, 장르, 인습, 전형)만이용할 수밖에 없다. 오스틴은 그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재창조한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스틴은 마리아헤키워스 래드클리프 부인, 샬럿 레너스, 메리 브런턴, 패니 버니 같은 동료 여성 작가의 작품을 찬양하고 즐겼다. 둘째, 우리가 살펴보았듯 그들의 작품들이 여성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에상관없이 오스틴 문화의 여자들은 로맨스 소설의 관습을 내면화해왔다. 그런 만큼 그 작품들은 성장하는 여성의 심리를 묘사한다. 셋째, 그들의 작품은 오스틴이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능이다. 작품의 여자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틴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잘 활용했다. 오스틴은 자신이 부적절하다고 폭로한 바로 그 인습을 이용해 가부장제의 권력뿐만 아니라 여성작가의 한계와 양면성을 보여준다. 또한 오스틴은 자신의 문화를 가혹하게 비판할 효과적인 속임수를 찾아낸다. 피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사회에서 자신의 소외 문제를 극화시킬 때조차대중소설의 인습을 전복시킨 것이다. 그것은 소녀들이 그토록강박적으로 읽었던 소설 속 인생과 마찬가지로, 훨씬 더 세속적하며, 그 건축물이 사실상 여성의 일 그들의 삶도 좌절과 외로움으로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 P256

오스틴 시대에 인기 있던 대중적 도덕론자들에 따르면,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적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스틴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여자들은 대부분 ‘내적 자원‘이 없다. 그들은 무능한 어머니와 살고 있거나 어머니가 없어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오스틴의 초기 작품들은 여자 주인공을 고아나 버려진 아이 방치된 의붓딸로 묘사한 소설을 조롱하지만, 후기의 성숙한작품에서도 여자 주인공에게 초기와 별다르지 않은 가정환경을제공한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모든 상황에서 편견의 노예인 [・・・] 여성은 현명하게 모성적 사랑을 행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소홀히 대하거나 부적절한 관대함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을 망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스틴은 특히 딸 양육에 실패한 어머니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울스턴크래프트에게 동의할 것이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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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출신인 그는 훔볼트대학 재학 당시 학과 규정에 따라 한국학전공자는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2년간 수강해야 한다 해서 어쩔수 없이 78~79년 양해에 걸쳐 평양에 머물렀는데, 정작 당시 평양에 간 동기는 자신과 다른 한 명뿐이었다. 당해에 총 여섯 명이 입학했는데, 두 명은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과 공부(그러니까 당시명칭은 ‘조선어‘)를 포기했고, 다른 두 명은 북한에 갈 즈음 전과를 해버려, 결국 홀머 선생과 동기 한 명만이 평양에 가게 되었다. - P277

체류 당시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어 버렸는데, 홀머 선생은 정말 공포에 떨었다고 했다. 북한 학생들이 "수령님께서 명령만 내려 주시면 남조선에 내려가 불쌍한 남한 동무들을 해방시켜 줘야 할 때입니다!"라며 모두 흥분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는 이렇게 ‘조선어‘를 배운 게 계기가 되어, 88년에서 89년까지 또 한 번김일성 정권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일하게 됐는데, 당시 그가맡은 일은 총 40여 권에 육박하는 김일성 선집 (연설문, 선언문, 주체사상 강의록 등 그 내용이 실로 다양함) 중 제36권과 37권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땐 어차피 동독도 사회주의 국가여서 그냥 일한다는 느낌으로 갔는데, 그는 평양의 몇 안 되는 외국인이라 차관급의 집을 제공받았다고 했다(그때 평양에 있던 외국인은 러시아인, 동독인, 중국인 정도였다). - P277

확실히 동독 출신 독일인은 세속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준다(한국 나이로 예순인 그는 유행이 지난 청바지를 매일 입고, 배낭을 직접 메고 다니며, 학교에서 독일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지낸다. 그러면서 그는 "연금 나올 때까지 계속 일해야 해" 하며, 내식사값까지 치르고 연구실로 갔다.

"아니, 이거 더치페이 하는 독일인한테 얻어먹어서 어쩌죠?"라고하니, 그는 갑자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듯 "나는 한국에 염색됐으니까"라고 했다. 내가 "오염 말씀입니까?"라고 하니, "아니!"라고하기에, "그럼, 감염?" 하니, "것도 말고"라고 했고, "그럼, 전염?"
하니까. "아니!"라며 웃기에 "그럼 물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하니, 마침내 "맞다! 물들었으니까!"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캠퍼스 한구석에 대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그는 잠시 멈추더니 "으음. 한국 냄새 " 하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대나무 향을 흠뻑 마셨다. - P281

천재 모차르트는 죽을 때까지 다작을 했다.

그의 최후 몇 시간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미완성한 레퀴엠 악보를 쥐고 있다. 제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의식을 잃기 몇 시간 전까지 레퀴엠의 악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천재도 노력해야 한다는 걸 모차르트를 통해 배운다.

단, 그에게는 미녀 부인이 있었다.

천재도 미녀 부인이 있어야 노력할 수 있다는 걸 역시 모차르트를통해 배운다.

모차르트가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급사해 버렸을 때, 미녀 부인이었던 ‘콘스탄체‘에게는 그가 남긴 두 명 - P325

의 아들과 빚밖에 없었다(총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네 명은 아주어릴 때 죽어 버렸다). 콘스탄체는 자신이 노래를 불러 가면서까지 모차르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그의 악보집을 출간하고, 전기 작가에게 부탁해 전기 출판 작업까지 했다. 남은 두 명의 아들 역시 미혼인 채로 죽어 버려 결국 후손이 없는 모차르트에게 이 부인이 없었다면, 그의 생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전기를 출판하는 데에는 한 덴마크 외교관이 큰 도움을 줬는데,
그는 18년이 지나 그녀와 코펜하겐에서 살림을 차려 버린다(이 외교 - P326

관이 그 전기 작가였다).

결국 죽으면 다 소용없다는 걸 모차르트를 통해 배운다.

그런데 마침 새 남편도 모차르트의 팬이었던지라. 이 부부는 계속모차르트의 공연을 올리며 그 수익을 착실히 거둬들인다.
결국 예술가가 일찍 죽으면 유족들 좋은 일만 시킨다는 사실을 또한 번 배운다(전처의 재혼남에게까지 유익하다. 참고로, 유사시 미래의나의 부인은 일찍 재혼해도 된다. 아쉽게도, 인세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고로, 무조건 오래 살기로 한다).

모차르트가 한때 주춤하긴 했지만 죽기 전에는 다시 상당한 수입을 올렸는데, 죽을 때 빚만 남겼던 건 사실 모두 그의 사치스러운 삶과 도박 때문이었다. - P327

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나저나 이탈리아는 많은 영감을 준다. 독일에 있던 괴테가 이탈리아로 가서 어떻게 영감을 받고 기행문을 썼는지 십분 이해된다.
그도 아마 길 위에 갇혀서, 경상도 사투리의 스무 배쯤 되는 강력한억양의 이탈리아어를 연속적으로 들으며 ‘아름다움과 편리함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란 걸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걸핏하면 이탈리아 기행을 떠났던 괴테만이 나의 심정을 이해할것이다.

늦은 밤에 도착한 피렌체의 두오모는 이때껏 살면서 본 모든 성당 중 가장 아름다웠다. 그 흥분이 채 사라지기 전에 펍에서 옆자리에 앉은 모로코 출신 남성이 내 목도리를 자기 것처럼 두르고 있는 걸 파비오가 발견했다. 피렌체는 눈깜짝할 사이에 목도리를 훔쳐 가니, 그래도 눈 깜짝할 사이에 코 베어 간다는 한양보다는 낫다고 여긴다. - P400

대기 인원이 135 명인 역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고, 사람이든 사회든 외질보다는 내실이라는 생각을 했다(그저께 피렌체의 바에서 옆자리 손님이 태연하게 내 목도리를 자기 목에 두르고 있던 것 역시 떠올랐다. "내 것인데요"라고 하니, "아, 그런가? 껄껄껄껄!" 하며 되돌려 주었던것이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 생각 끝에, 다섯번에 걸쳐 실패하며 썼던 14장의 에피소드는 잊기로 했다.

이곳에 오고 나서 어처구니없게도, 백림에서의 나날이 썩 나쁘지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물론, 물은 맥주보다 비싸고, 전철 노선은 복잡하고, 인터넷은 느리고, 먹을 건 소시지밖에 없지만, 완벽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한 공동체가 건강하게 돌아가려면 훌륭한 정치인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직한 시민과 지치지 않고 정치권을 견제하는 시민 - P413

사회와 합리적인 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끈질긴 관심과 왕성한 지적·정치적 호기심이 필요하다.

내가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왜 각종 변명을 붙여서 세금을 안 받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이곳에서 손해를 감수하며 새치기를 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친절을 베풀며, 고귀한 성품을 지키고 살아가는 선인들이 안쓰러워진다.

일흔여섯 번째 날이었다. - P414

역시나 공항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약 스무 명이 넘는 현지인들이내 앞에서 새치기를 했다. 그 덕에 현지인들 사이에서 활발한 고성빵가가 오갔고, 원치 않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이 나의 탑승 시간은 지나 버렸다.

그 덕에 나는 거의 15년 만에 공항에서 뛰어야 했다. 하지만 ‘어허, 여긴 이탈리아야!‘라는 듯이, 탑승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내뒤로도 약 스무 명의 승객들이 뛰어온 뒤, ‘아! 여긴 이탈리아였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행기 역시 ‘어허, 여긴 이탈리아라니까!‘라는듯한 투로 한 시간 뒤에 출발했다.

포르토는 실로 마음에 들었다. 베니스처럼 아름답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여유가 넘쳤으며, 적당한 자존심과 적당한 관용을 - P426

선보였다. 거리엔 따뜻한 햇살이 넘실거렸으며, 믿기 어렵게도 나는1월 1일에 노천카페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식사를 했다. 많은 시민들이 시 당국이 설치한 의자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었다. 아마 훗날 내가 불순한 예술적 반역 행위를 저질러, 모국의 정부로부터 추방을당한다면 그때 나는 포르투갈의 포르토를 자발적 유배지로 선택할것이다. 사람들과 풍경과, 바다와 강과, 건물의 적당한 낡음과 거리의 적당한 어지러움이 내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특히 거리 한구석에 잔뜩 버려진 쓰레기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이들이 얼마나 격정적인 축제를 벌였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은몹시도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반면, 새해의 첫날은 숙취에 시달려 꼼짝 않는 사람처럼 고요했다. 이런 양면적이고도 복합적인 역동성과 평온함이 나를 강하게 유혹했다.
시내에서 햇빛을 즐기며 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스페인 비고에도착하니 다닐로와 여자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하여 이날은 본의아니게 아침은 이탈리아에서, 점심은 포르투갈에서, 저녁은 스페인에서 먹게 되었다.

엄청난 빚에 쫓기어 도망 다니는 국제 채무자가 된 심정이다. - P427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비록 단신이지만, 영혼뿐 아니라 내장의 3할가량 역시 미국화되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미제 조식(American Breakfast)‘을 먹어 온 탓이다. 부친이 유사 식당 같은 걸운영했었는데, 거기서 미제 조식을 팔았다. 즉, 중국집 아들이 밥이없으면 자장면을 먹고, 치킨집 아들이 닭 다리를 뜯듯이, 홍콩 영화에 흠뻑 빠져 있던 중학생 시절, 뭔가 취향과는 조응되지 않게 베이컨과 식빵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어째서. 이게 아침이라는 거야?‘
라는 생각을 품어 왔는데, 몇 년을 먹다 보니 맛있었다. 그만 그 맛에 길들여져, 이제는 숙소에서 조식이 나올 때마다 ‘음. 가히 고향의맛이군‘ 하며 먹는다. 고로, 여행의 마지막 날인 오늘 역시 미제 조식을 먹었다. - P460

나는 파독 간호사로 온 이민 1세대인 육십 대 할머니의 집에서 그녀의 권유에 따라, 안락의자에 다리를 올려놓고 일기를 썼다. "아니…… 이거…… 이래도 됩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최 선생님"이라고 했다.
"최 선생님. 여름에 꼭 다시 오세요. 제일 안 좋을 때 오셔서, 제일 우울한 경험만 하시고 가시는 거예요."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나를 배웅하러 나온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암흑 같은 검은 하늘 가운데 줄곧 비가 내렸다. 나는 그녀가 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그녀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 안 좋을 때, 제일 우울할 때 오니, 볼 것이 없어,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내 문학의 상징인 빈정댐과투덜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잃어버려도 좋다. 그렇게 생각했다.
여든아홉 번째 날이었다. - P484

많은 사람을 만났고, 해일처럼 그 만남들이 모두 지나가니, 결국비수기의 해변처럼 쓸쓸하고 차가운 일상만이 남았다. 다시 할 일은없어졌고, 어쩌면 1년 내내 이런 날들이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인가‘ 하는 상대성이지만, 크게 보자면 지금 맞은 한 해가 여생과 별차이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어쩌면 다시 원고지를 펼치고 스스로 펜을잡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에게 고독은 실로 떨쳐 내고 싶은 지긋지긋한 존재이지만, 떨쳐 내 버리면 자기 자신이 생존 불가능해지는 필요악 같은 존재다. 어불성설같지만, 작가가 완전히 혼자가 아닌 것은 언제나 고독이 함께하기 때문이다(백림에 다녀온 후, 관념 철학에 오염된 것 같다. 아울러, 유머도 독일식에 감염된 것 같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 P491

결국 인생에서 필요한 건 상대에게 웃음을 짓는 것.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 실천인 것 같다.
어디에 있건, 남은 시간들은 소중히 쓰기로 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백림의 여운은 이제 모두 정리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서울에서의 날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날이었다. - P492

이후에 오월에 백림을 다시 방문했다. 하지만, 그때의 일기는 책에 싣지 않기로 했다. 한 며칠쯤의 일기는 순수하게 일기로 남겨 두고 싶었다. 사월의 화창한 어느 날 유학생 경보에게 전화가 와 "아! 형님. 어서 오셔야죠! 여기 날씨 완전 환상이에요. 지금 놓치면 후회해요. 어서오세요!"라고 해서 갔는데, 도착하니 줄곧 비만 내렸다.
백림의 화창한 날은 한동안 상상의 대상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작가적 상상력은 글을 쓰지 않아도 필요한 것이다.

베를린 일기 끝.

발렌시아 일기, 뉴욕 일기, SF(샌프란시스코) 일기 …… 부다페스트 마라케시, 베이루트, 사하라, 나이로비, 아마존, 남극, 교도소 일기도 기대해 주세요.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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