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출신인 그는 훔볼트대학 재학 당시 학과 규정에 따라 한국학전공자는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2년간 수강해야 한다 해서 어쩔수 없이 78~79년 양해에 걸쳐 평양에 머물렀는데, 정작 당시 평양에 간 동기는 자신과 다른 한 명뿐이었다. 당해에 총 여섯 명이 입학했는데, 두 명은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과 공부(그러니까 당시명칭은 ‘조선어‘)를 포기했고, 다른 두 명은 북한에 갈 즈음 전과를 해버려, 결국 홀머 선생과 동기 한 명만이 평양에 가게 되었다. - P277

체류 당시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어 버렸는데, 홀머 선생은 정말 공포에 떨었다고 했다. 북한 학생들이 "수령님께서 명령만 내려 주시면 남조선에 내려가 불쌍한 남한 동무들을 해방시켜 줘야 할 때입니다!"라며 모두 흥분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는 이렇게 ‘조선어‘를 배운 게 계기가 되어, 88년에서 89년까지 또 한 번김일성 정권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일하게 됐는데, 당시 그가맡은 일은 총 40여 권에 육박하는 김일성 선집 (연설문, 선언문, 주체사상 강의록 등 그 내용이 실로 다양함) 중 제36권과 37권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땐 어차피 동독도 사회주의 국가여서 그냥 일한다는 느낌으로 갔는데, 그는 평양의 몇 안 되는 외국인이라 차관급의 집을 제공받았다고 했다(그때 평양에 있던 외국인은 러시아인, 동독인, 중국인 정도였다). - P277

확실히 동독 출신 독일인은 세속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준다(한국 나이로 예순인 그는 유행이 지난 청바지를 매일 입고, 배낭을 직접 메고 다니며, 학교에서 독일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지낸다. 그러면서 그는 "연금 나올 때까지 계속 일해야 해" 하며, 내식사값까지 치르고 연구실로 갔다.

"아니, 이거 더치페이 하는 독일인한테 얻어먹어서 어쩌죠?"라고하니, 그는 갑자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듯 "나는 한국에 염색됐으니까"라고 했다. 내가 "오염 말씀입니까?"라고 하니, "아니!"라고하기에, "그럼, 감염?" 하니, "것도 말고"라고 했고, "그럼, 전염?"
하니까. "아니!"라며 웃기에 "그럼 물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하니, 마침내 "맞다! 물들었으니까!"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캠퍼스 한구석에 대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그는 잠시 멈추더니 "으음. 한국 냄새 " 하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대나무 향을 흠뻑 마셨다. - P281

천재 모차르트는 죽을 때까지 다작을 했다.

그의 최후 몇 시간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미완성한 레퀴엠 악보를 쥐고 있다. 제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의식을 잃기 몇 시간 전까지 레퀴엠의 악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천재도 노력해야 한다는 걸 모차르트를 통해 배운다.

단, 그에게는 미녀 부인이 있었다.

천재도 미녀 부인이 있어야 노력할 수 있다는 걸 역시 모차르트를통해 배운다.

모차르트가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급사해 버렸을 때, 미녀 부인이었던 ‘콘스탄체‘에게는 그가 남긴 두 명 - P325

의 아들과 빚밖에 없었다(총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네 명은 아주어릴 때 죽어 버렸다). 콘스탄체는 자신이 노래를 불러 가면서까지 모차르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그의 악보집을 출간하고, 전기 작가에게 부탁해 전기 출판 작업까지 했다. 남은 두 명의 아들 역시 미혼인 채로 죽어 버려 결국 후손이 없는 모차르트에게 이 부인이 없었다면, 그의 생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전기를 출판하는 데에는 한 덴마크 외교관이 큰 도움을 줬는데,
그는 18년이 지나 그녀와 코펜하겐에서 살림을 차려 버린다(이 외교 - P326

관이 그 전기 작가였다).

결국 죽으면 다 소용없다는 걸 모차르트를 통해 배운다.

그런데 마침 새 남편도 모차르트의 팬이었던지라. 이 부부는 계속모차르트의 공연을 올리며 그 수익을 착실히 거둬들인다.
결국 예술가가 일찍 죽으면 유족들 좋은 일만 시킨다는 사실을 또한 번 배운다(전처의 재혼남에게까지 유익하다. 참고로, 유사시 미래의나의 부인은 일찍 재혼해도 된다. 아쉽게도, 인세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고로, 무조건 오래 살기로 한다).

모차르트가 한때 주춤하긴 했지만 죽기 전에는 다시 상당한 수입을 올렸는데, 죽을 때 빚만 남겼던 건 사실 모두 그의 사치스러운 삶과 도박 때문이었다. - P327

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나저나 이탈리아는 많은 영감을 준다. 독일에 있던 괴테가 이탈리아로 가서 어떻게 영감을 받고 기행문을 썼는지 십분 이해된다.
그도 아마 길 위에 갇혀서, 경상도 사투리의 스무 배쯤 되는 강력한억양의 이탈리아어를 연속적으로 들으며 ‘아름다움과 편리함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란 걸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걸핏하면 이탈리아 기행을 떠났던 괴테만이 나의 심정을 이해할것이다.

늦은 밤에 도착한 피렌체의 두오모는 이때껏 살면서 본 모든 성당 중 가장 아름다웠다. 그 흥분이 채 사라지기 전에 펍에서 옆자리에 앉은 모로코 출신 남성이 내 목도리를 자기 것처럼 두르고 있는 걸 파비오가 발견했다. 피렌체는 눈깜짝할 사이에 목도리를 훔쳐 가니, 그래도 눈 깜짝할 사이에 코 베어 간다는 한양보다는 낫다고 여긴다. - P400

대기 인원이 135 명인 역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고, 사람이든 사회든 외질보다는 내실이라는 생각을 했다(그저께 피렌체의 바에서 옆자리 손님이 태연하게 내 목도리를 자기 목에 두르고 있던 것 역시 떠올랐다. "내 것인데요"라고 하니, "아, 그런가? 껄껄껄껄!" 하며 되돌려 주었던것이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 생각 끝에, 다섯번에 걸쳐 실패하며 썼던 14장의 에피소드는 잊기로 했다.

이곳에 오고 나서 어처구니없게도, 백림에서의 나날이 썩 나쁘지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물론, 물은 맥주보다 비싸고, 전철 노선은 복잡하고, 인터넷은 느리고, 먹을 건 소시지밖에 없지만, 완벽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한 공동체가 건강하게 돌아가려면 훌륭한 정치인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직한 시민과 지치지 않고 정치권을 견제하는 시민 - P413

사회와 합리적인 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끈질긴 관심과 왕성한 지적·정치적 호기심이 필요하다.

내가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왜 각종 변명을 붙여서 세금을 안 받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이곳에서 손해를 감수하며 새치기를 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친절을 베풀며, 고귀한 성품을 지키고 살아가는 선인들이 안쓰러워진다.

일흔여섯 번째 날이었다. - P414

역시나 공항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약 스무 명이 넘는 현지인들이내 앞에서 새치기를 했다. 그 덕에 현지인들 사이에서 활발한 고성빵가가 오갔고, 원치 않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이 나의 탑승 시간은 지나 버렸다.

그 덕에 나는 거의 15년 만에 공항에서 뛰어야 했다. 하지만 ‘어허, 여긴 이탈리아야!‘라는 듯이, 탑승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내뒤로도 약 스무 명의 승객들이 뛰어온 뒤, ‘아! 여긴 이탈리아였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행기 역시 ‘어허, 여긴 이탈리아라니까!‘라는듯한 투로 한 시간 뒤에 출발했다.

포르토는 실로 마음에 들었다. 베니스처럼 아름답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여유가 넘쳤으며, 적당한 자존심과 적당한 관용을 - P426

선보였다. 거리엔 따뜻한 햇살이 넘실거렸으며, 믿기 어렵게도 나는1월 1일에 노천카페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식사를 했다. 많은 시민들이 시 당국이 설치한 의자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었다. 아마 훗날 내가 불순한 예술적 반역 행위를 저질러, 모국의 정부로부터 추방을당한다면 그때 나는 포르투갈의 포르토를 자발적 유배지로 선택할것이다. 사람들과 풍경과, 바다와 강과, 건물의 적당한 낡음과 거리의 적당한 어지러움이 내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특히 거리 한구석에 잔뜩 버려진 쓰레기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이들이 얼마나 격정적인 축제를 벌였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은몹시도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반면, 새해의 첫날은 숙취에 시달려 꼼짝 않는 사람처럼 고요했다. 이런 양면적이고도 복합적인 역동성과 평온함이 나를 강하게 유혹했다.
시내에서 햇빛을 즐기며 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스페인 비고에도착하니 다닐로와 여자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하여 이날은 본의아니게 아침은 이탈리아에서, 점심은 포르투갈에서, 저녁은 스페인에서 먹게 되었다.

엄청난 빚에 쫓기어 도망 다니는 국제 채무자가 된 심정이다. - P427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비록 단신이지만, 영혼뿐 아니라 내장의 3할가량 역시 미국화되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미제 조식(American Breakfast)‘을 먹어 온 탓이다. 부친이 유사 식당 같은 걸운영했었는데, 거기서 미제 조식을 팔았다. 즉, 중국집 아들이 밥이없으면 자장면을 먹고, 치킨집 아들이 닭 다리를 뜯듯이, 홍콩 영화에 흠뻑 빠져 있던 중학생 시절, 뭔가 취향과는 조응되지 않게 베이컨과 식빵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어째서. 이게 아침이라는 거야?‘
라는 생각을 품어 왔는데, 몇 년을 먹다 보니 맛있었다. 그만 그 맛에 길들여져, 이제는 숙소에서 조식이 나올 때마다 ‘음. 가히 고향의맛이군‘ 하며 먹는다. 고로, 여행의 마지막 날인 오늘 역시 미제 조식을 먹었다. - P460

나는 파독 간호사로 온 이민 1세대인 육십 대 할머니의 집에서 그녀의 권유에 따라, 안락의자에 다리를 올려놓고 일기를 썼다. "아니…… 이거…… 이래도 됩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최 선생님"이라고 했다.
"최 선생님. 여름에 꼭 다시 오세요. 제일 안 좋을 때 오셔서, 제일 우울한 경험만 하시고 가시는 거예요."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나를 배웅하러 나온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암흑 같은 검은 하늘 가운데 줄곧 비가 내렸다. 나는 그녀가 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그녀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 안 좋을 때, 제일 우울할 때 오니, 볼 것이 없어,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내 문학의 상징인 빈정댐과투덜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잃어버려도 좋다. 그렇게 생각했다.
여든아홉 번째 날이었다. - P484

많은 사람을 만났고, 해일처럼 그 만남들이 모두 지나가니, 결국비수기의 해변처럼 쓸쓸하고 차가운 일상만이 남았다. 다시 할 일은없어졌고, 어쩌면 1년 내내 이런 날들이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인가‘ 하는 상대성이지만, 크게 보자면 지금 맞은 한 해가 여생과 별차이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어쩌면 다시 원고지를 펼치고 스스로 펜을잡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에게 고독은 실로 떨쳐 내고 싶은 지긋지긋한 존재이지만, 떨쳐 내 버리면 자기 자신이 생존 불가능해지는 필요악 같은 존재다. 어불성설같지만, 작가가 완전히 혼자가 아닌 것은 언제나 고독이 함께하기 때문이다(백림에 다녀온 후, 관념 철학에 오염된 것 같다. 아울러, 유머도 독일식에 감염된 것 같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 P491

결국 인생에서 필요한 건 상대에게 웃음을 짓는 것.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 실천인 것 같다.
어디에 있건, 남은 시간들은 소중히 쓰기로 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백림의 여운은 이제 모두 정리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서울에서의 날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날이었다. - P492

이후에 오월에 백림을 다시 방문했다. 하지만, 그때의 일기는 책에 싣지 않기로 했다. 한 며칠쯤의 일기는 순수하게 일기로 남겨 두고 싶었다. 사월의 화창한 어느 날 유학생 경보에게 전화가 와 "아! 형님. 어서 오셔야죠! 여기 날씨 완전 환상이에요. 지금 놓치면 후회해요. 어서오세요!"라고 해서 갔는데, 도착하니 줄곧 비만 내렸다.
백림의 화창한 날은 한동안 상상의 대상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작가적 상상력은 글을 쓰지 않아도 필요한 것이다.

베를린 일기 끝.

발렌시아 일기, 뉴욕 일기, SF(샌프란시스코) 일기 …… 부다페스트 마라케시, 베이루트, 사하라, 나이로비, 아마존, 남극, 교도소 일기도 기대해 주세요.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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