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푸레나무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구월입니다.

가을입니다.

가을이면 시인의 ‘가을 드들강’이 읽고 싶어지고

읽다보니 이 가을, 구월에 4주기가 되는 시인의 생애가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물푸레나무처럼 스며듭니다.

어느 시인은 가장 죄를 덜 지은 시인을 꼽는다면 ‘김태정’일 거라고 했지요.

녹록치 않은 신산한 삶에서도

아무런 죄 짓지 않고 쉰이 되기도 전에 달랑 시집 한 권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시인의

시편들이 잔잔하게, 찬찬히 가을 저녁 간장색 어둠으로 몸을 담가줍니다.

오래~ 먹먹합니다. 

달랑 시집 한 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의 집에 시인의 온 생애가 담겨있군요.

땅 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가고 싶은 구월의 저녁입니다.

혹 그곳에 가시거든 거기,

있는 듯 없는 듯 나무 곁에 있을 시인께 가볍게 목례를 해주세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궐 2015-09-11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태정 시인은 얘기만 듣고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사서 읽어야겠어요. 미황사 가본 지도 너무 오래 됐네요. 다시 가고픈 절집이에요.
 

 

손등
              고영민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으로 꽃은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빗소리

         시집 [사슴 공원에서(창비2012)]중에서


태풍 고니가 지나가는 중인가!
종일 비가 도란도란 내린다.
덕분에 봄에 몇 뿌리 심어 둔
도라지꽃을 요모조모 살펴 볼 시간을 얻었다.
예쁘다.
어여쁘다.
애쓴 일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들은 기특하다.
장하다.
척박한 땅에 여리디여린 가지로 저렇게 꽃을 피워내다니...
삶도 이와같다면.. 하는 씁쓸한 생각~

책에서나 보았던 도라지꽃을 처음 본 건
제천을 지나는 중앙선 기차 안에서였다.
산 옆으로 기차는 지나고 철로곁엔 색색의 아기별들이 흐드러져 있었다.
무슨 꽃인지도 모르고
홀린 표정의
무식한 내게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은 투로
˝도라지꽃˝
을 알려주시던 뚝뚝하고 다정한 그 분은
안녕하신지...?
오래,
아주 오래되었다.
제주올레를 같이 걷자던 헛된 약속만 남아있다.
꽃은
하나씩 일 때와
무리로 만났을 때
어찌나 다른 표정을 가졌는지 그날 그 창가에 매달려 알았다.
그 꽃을 위해 들이는 노고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꽃은 언제 어떻게든 제 몫을 다하는데
예쁘다, 예쁘다하는
이는 제 노릇을 못하고 사는 것이다.

비 오시는 날은 노릇노릇한 전이 맛있다.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은 감자전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깥
               문태준

장대비 속을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彈丸(탄환)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全速力(전속력)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中心(중심)으로?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2009)] 중에서


문태준시인의 시는 느릿느릿,
가만가만 읊조릴 때
눈으로 읽는 것보다 그 맛이 살아납니다.
화학조미료 없이 재료의 맛이 살아있는 담백한 요리처럼.
섣부른 기교를 모르는 시인의 품성을 닮아서겠지요.
시어들이 차곡차곡 마음의 곳간에 담깁니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도
‘全速力의 힘/ 그리움의 힘’도.

한편
당신의 바깥,
나의 바깥을 생각해봅니다.
당신,彈丸처럼 빠르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요?

中心으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08-13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보탑을 줍다 창비시선 240
유안진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보탑을 줍다

                        유안진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시집 [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중에서

 

10원짜리 빼알간 동전에 다보탑이 들어있군요.

잊고 있었습니다.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가 되어버린 거지요.

우리 모두에게 소중했던 순간을 동전도 가졌을 터인데.

순간은 소멸되고,

기억은 동전처럼 둥글둥글 마모되어 가는 것이지요.

다보탑까지도 말이지요.

이제는 애써 허리 숙여 줍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무궁화의 1원, 거북선의 5원은 사라졌습니다.

별 게 아닌 게, 결코 별 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속절없이 잊으며 살아갑니다.

애석하게도

다음에는 우리 차례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체념처럼…….

하여 우리는 지금,

바로 지금을 살아야합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당신이 바로 석존이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운사 풍천장어집

                            김사인

김씨는 촘촘히 잘도 묶은 싸리비와 부삽으로

오늘도 가게 안팎을 정갈하니 쓸고

손님을 기다린다

새 남방을 입고 가게 앞 의자에 앉은 김씨가

고요하고 환하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도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

우주의 한 귀퉁이를

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2015)]중에서

선운사에 가보셨는지요?

선연한 동백만큼이나 풍천장어집들이 즐비한 그곳의

어느 집 앞에 서 있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시입니다.

그 집의 장어도 먹는 사람을

‘고요하고 환’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음식은 만드는 이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서

먹는 이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나,

시의 행간과 자간사이가 이제 육 개월 남짓한 초보에겐 영 닿을 수 없이 멀고도 심오합니다.

‘우주의 한 귀퉁이를’ 지키는 일의 거룩함이

어떤 거창한 세속의 위대함에만 있는 것은 아닌

깨달음을 얻기까지

‘누가 알든 모르든’,‘누가 보거나 말거나’

얼마나 더 가야할지 아득한 것이지요.

그래도,

그.

래.

도.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두부]에 온 마음을 담아 그저 가보려 합니다.

묵묵히 쭈욱.

여기 콩콩두부家에 오신 그대, 오래 지켜보아주세요.

 
 
 

  유월이 시작되기 전 [선운사 풍천장어집]을 준비할 때 만에도 [콩콩두부家]의 유월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대 정도가 아니다. 지난해 구월이후부터 이 여름을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로 된 휴일도 없이, 열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 이상을 두부를 만들고, 쓸고, 닦고, 준비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바꾸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 여름을 제대로 넘기면 안정권이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오월을 지나면서부터는 전혀 터무니없어 보이는 희망은 아니었다. 그렇게 맞은 유월이고 [선운사 풍천장어집]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났으니 이름은 들어봤나? 증상은 또 뭐라나? 하여간에 ‘메르스’

  치명타다.

  초 긍정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도 이제는 슬슬 초조해진다. 이 무능한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희망을 앗아가게 하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을 다시 살고 있는 느낌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터. 이번엔 어느 부처를 없앨 것인가.

  "너나 가라 하와이!!"에서 시작한 중동 붐이 [중동 독감 @.@] 으로 온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놈의 '메르스'가 지나 가고 나면 우리는 슬그머니 유신헌법의 시대를 살게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해서 심란하고 의기소침해진다.

  이래가지고는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도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 부처님의 직무를" 도와드리기는 커녕 불목하니 노릇도 못 하겠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에 담긴 저 무수한 순수한 독자로도 국민으로도 살아가기 참 어려운 시절이다. 이렇게 작은 가게 하나 운영하는 일도 지구의 무게를 짊어진 듯 책무가 무겁고 철학이 없다면 흔들릴 일 투성이인데 한 나라를 경영하는 처신이 '아몰랑' 이어서야.

 
  '메르스'는 물러가는 모양이다.
  '유승민'도 물러갔다.
  '저 분분한 낙화'​ 태풍 '찬홈'의 빗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능소화를 눈에 담는다.
  초복인 오늘, 여름이 아직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인데 지친다. '광복 70년 기념 특사'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하나! 누굴 탓하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slmo 2015-07-14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셔요, 우리에겐 아직 중복과 말복이 남아 있습니닷~^^

2015-07-20 20:39   좋아요 0 | URL
중복과 말복이 남아있다니 절로 힘이 나네요^^
와~새벽에 일어나시는군요
저는 그 시간이면 거의 죽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