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주문했으니 황정은의 전작을 갖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는 전작하는 경향이 있는 나로선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그녀의 책을 처음 만난 건 [白의 그림자]로 였다.

독특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시적 운율이 살아있는 소설을 만나 신선하고 경쾌했다.

무엇보다 어리숙한 듯하면서 매력적인 은교 씨와

순정하고 따뜻한 무재 씨의 대화들이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책을 덮은 뒤의 여운이 더욱 강렬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어들처럼 한동안 머릿속을 떠다닌 것이다.

그렇게 빠져든 그녀의 신작을 기대하면서

 

˝.......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라면 가마란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틈에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어리둥절해진 채로 앉아 있었다. 은교 씨는요,

하고 무재 씨가 젓가락으로 계란을 자르며 말했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계란 먹을래요?

네.

무재 씨는 반으로 자른 계란을 집어서 내 그릇에 넣어 주고 나머지 반쪽을 입에 넣었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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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점 세계사 시인선 128
배한봉 지음 / 세계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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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을 듣다

                              배한봉

 

햇살이 산길을 넘어오는 아침

탈골하는 억새들, 음성이 청량하다

살과 피 다 버리고 뼈 속까지

텅 비운 한 생애의 여백

여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 담고 있는 것이냐

면도날 같은 잎으로 여름

베어 눕히며 언덕 점령하던 때 지나

흰 꽃 속에 허파에 든 바람 실어

허허허허거리던 시절,

간과 쓸개 빼놓던 굽이를 돌아

비로소 세상에 풀어놓는 넉넉한 정신

바람 찬 산을 넘어온 아침이

내 얼굴을 만진다, 이제 겨우 마흔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돌아오고 또 돌아와서 숨가쁜 나이

산에 올라 억새들 뼈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맑은 공명을 듣는다

내 심중에서도 조금씩 여백이 보이고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 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집 [악기점]중에서​

 

            

 

바람이 찹니다.

호박잎은 기침하며 돌아눕고 가을

깊어갑니다.

억새는 저 홀로 살과 뼈 버리고 있겠지요.

바람 찬 세상을 넘어 온 세월, 비우고 비우고.......

아름답게 꽉 채운 여백

억새는 흔들리고

공명을 듣습니다.

버리고 버리고........

마침내 채워지는 가을, 그리고 우포늪.

우포늪,

그립습니다.​

배한봉시인은 우포늪 시인이라고도 불립니다.

십년 전에 출간 된 시집이니 시인도,

저도 이제는 쉰 몇,

겨우 쉰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아직도

숨 가쁜 나이네요.

그래도 시월 안에서,

가을 속에서,

광교산 아래에서 당신과 함께합니다.

내내 안녕을. 

 

꽃 속의 음표

꽃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제 몸 속 암술 수술의 음표들이 가락
퉁기기 때문이리, 벌 나비 찾아드는 것 또한
그 가락 장단이 향기 뿜어 내기 때문이리
그대여, 사랑은 눈부신 그 음표들이
열매 맺고 향기롭게 익는 일과 같은 것이니,
우리는 어떤 가락 장단으로 세상을 걷고
어떤 열매 키우며 서로 바라보는 것이냐
나 오늘, 만개한 복사꽃 보며
내 몸 속에서는 어떤 음표들이 가락 퉁기는지
궁금하여 햇살 속에 마음 활짝 펼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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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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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들

                                    이병률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음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 중에서

 

      

    

 

    

 

    

    

 

시월입니다.

가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병률시인의 시로 골랐습니다.

시집으로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여행 산문집으로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가 있는데 어느 책이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겁니다.

한 권 읽어 보시지요^^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슬그머니 추억이 밀리고 아련함들도 밀리고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천천히, 천천히 음미하듯 느껴보세요.

마음에도 청명한 가을이 찾아 올 거예요. ^.^;;

광교산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다운 당신,

우리는 항상 응원합니다. 내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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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0-0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성이 풍부한 이병률 시인을 저도 좋아합니다.
지금 읽어야겠습니다^^

2014-10-16 14:26   좋아요 0 | URL
시를 읽기 좋은 요즘이예요^^
`끌림`을 들고 기차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이네요. 오늘은~
저는 요즘은 문정희 시인을 읽고있습니다.
 
험준한 사랑 창비시선 249
박철 지음 / 창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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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

                               

                                         박철

 

내가 큰길 놓아두고

샛길 접어듦은 석양에 물든 그대 때문이라

어둠이 오기 전 나는 마지막 태양의 흙냄새

작은 열기라도 잊지 않기 위함이라

내가 멀리 길 떠날 막차를 보내고

어둠을 틈타 한적한 곳 돌아서

샛길, 샛길, 하며 목마르게 걷고 또 걷는 것은

길의 어느 한군데쯤

그대 등 돌려 나를 맞이할까, 두려움이라

 

젊다지만 나는 이미 천상의 인간

그대 거기까지 나를 따라올까

내가 곧은 길 놓아주고

샛길 험한 길 들어섬은 생의 슬픔 때문이라

슬픔만이 우리를 한결로 엮어

어느 무리 멀리 떠난 뒤에도

샛길, 샛길, 하며 한몸으로

걸어갈 수 있음이라

                                시집 [험준한 사랑 -창비]중에서

 

 

 

“팔월, 잦은 빗속에 내내 끌어안고 다니던 시집을 내려놓습니다.

폭우로 쏟아지던 백양사, 그 길 위에서 함께 젖어든 시집.

시집을 펼칠 때마다 하늘 가득 채우던 애기단풍의 별꽃들이 촘촘히 얽혀들었지요.

뜨거운 이마에 서늘하게 얹히던 손의 감촉 같은 시어들,

그 사이로 제가 걸어가야 할 샛길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해야겠습니다.

너무 오래 놀았습니다.

구월이 문 밖에 와 있습니다.

이마, 서늘합니다.”

 

오래 전(2005년) 제 블로그에 올렸던 시와 글을 옮겨봅니다.

하아~! 구월,이어서요.

무조건 가을이니까.......

“샛길, 샛길, 하며 한 몸으로 걸어갈 수 있음이라”

다시 그렇게 샛길을 찾아 걸어가야 할 시간인 게지요.

가을은 산다는 것이 축복임을 알게 해 주는 계절,

생의 구불구불한 샛길,

여기에서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

**농원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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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시집 41
박남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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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중에서

 

 

     

 

 

새벽, 서늘한 기운이 가을을 만나게 해줍니다.

볕은 따가워도 가을,입니다. 살 만 해지는 가을.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자주 다치고 넘어집니다

가을 파씨를 심고 밭에서 내려오는 길,

부추꽃 몇 송이를 모셔왔지요.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어릴 적 텃밭의 솔이 저리 환한 무리의 흰 꽃이라니.......

지나간 세월, 떠난 이들은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요?

오늘도 다친 상처에 쓰라리지만 삶은 또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 가을도 환한 목숨, 환한 환생으로 열심히

무탈하게 살아내기를 광교산에서 응원합니다.

**농원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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