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공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여성의 공간은 삶의 기관들을 제한하고 그 공간이 무한하게 보일 때까지 축소시킨다. 사탄은 그 광대한 공간에서 전율했다!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제한적이지만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무한하다.
-윌리엄 블레이크

여자는 자신 안에 악마가 있는 것처럼 글을 쓴다. 그것이야말로 여성이 무엇이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쓰는 유일한 조건이다.
-패니 펀에 대한 너새니얼 호손의 글

나는 회수할 수 없는 것을 탐색했다.
나의 복사본을 ㅡ빌리려고ㅡ 초췌한 위안이 솟아오른다.

어딘가 움켜쥔 사고 안에ㅡ
천국의 사랑 같은 다른 창조물이 ㅡ잊힌 채 --
살고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우리를 분할하는 벽을 잡아 뜯었다.
서로 맞서고 있는 방 안에서ㅡ
자신과 ㅡ공포의 쌍둥이 ㅡ사이의
벽을 떼어내야 하듯이ㅡ

에밀리 디킨슨

울프가 밀턴의 악령이라고 요약했던 복잡한 문화의 신화가여성 작가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가부장적시‘에 둘러싸인 채 예술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울수 있었을까? 브론테, 울프, 울스턴크래프트 같은 작가들의 논평은 밀턴이 제기한 문제를 지적인 여자들이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문제들 탓에 여성들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실낙원』의 비밀스러운 메시지는 방에 가득 찬 일•그러진 거울처럼 여성 독자들을 에워쌌기 때문이다. 키츠가 의•아해하며 제시한 논평은 (‘혹시라도 뱀의 감옥 안에 있는 사탄을 생각한다면 누구의 머리인들 현기증을 느끼지 않겠는가?)여성 혐오적인 신화와 전통이 구축해놓은 뱀의 또아리 같은 이미지 속에 감금되어 있는 여성들에게 더 강력하게 적용되는 것같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많은 여성 작가들이 밀턴과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에 한결같이 유순하게 대응했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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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가 만들어 낸 근대 문명의 테두리 안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을 찾아보려는 이러한 연속적인 시도와는 좀 다른 시각에서 위기를 바라보고, 처방을 내리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것은 푸코나 들뢰즈, 료따르처럼 자신의 역사를 거리를 두고 서술하면서, 그전까지의 ‘근대 기획‘과는 좀더 급진적인단절을 이루어 냄으로 현재의 다양한 모순들을 극복해 가려는 움직임이다.
푸코 역시 근대가 지닌 양면성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자유와 해방의역사로 표방되어 온 근대는 실은 배제와 감시가 강화되는 관리 사회로의 이행 과정이기도 했음을 푸코는 군대, 감옥, 병원, 학교 등에서 관리가 제도화되는 과정을 통해 밝혀 낸다. ‘진보사관‘을 철저히 거부하는 푸코는 그 동안의 역사가 공식/비공식의 이분화, 비극/ 희극의 이분화, 유심론과 유물론의 이분화를 토대로 쓰여져 왔음을 밝혀 내고 그런 이분법을 넘어선 역사를 써내기 위해 추상화의 수준을 낮추고 아주 자세한 기술을 통해 역사를써내려 하였다. 그가 계보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그 동안 있어 온 절대적 진리 주장들을 발생시킨 은폐된 조건들을 추적해 간 <감시와 처벌> 그리고<성의 역사 1>는 서구 문명 안에 살면서 자신의 사회를 상대화시켜 본 착실 - P142

한 작업이며, 그 작업은 ‘서구적 주체‘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푸코에게 있어 근대는 표면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늘어나는 시대인 것 같지만 실은 행동의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감시하고 검열하는 장치를 발전시킨 시대이다. 이런 시대적 진전은 성욕과 감정적 친밀성까지를 일일이관여하고 조종하는 고도로 세련된 제도화로 이어진다. 권력은 집중되어 있지 않으며 그런 면에서 권력에 대해 저항한다는 것 역시 매우 복잡해져 버렸음을 푸코는 저작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 간의 관계를 어디까지나 구체성을 통해 보여주려 하였다는 면에서, 그리고 섣불리 처방을 내리기를 거부했다는 면에서 탈근대적 언어를 만들어간 문명 비평가들의 대열에 선다 - P143

급진적 근대론이건 탈근대론이건 이들 서구 지식인들이 벌이는 논의의다양함은 바로 그들이 현재의 위기 상황에 대해 매우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있다는 증거이다. 사실상 근대 기획을 제대로 이어 가자는 논의건 단절을이루자는 논의건, 내가 선 자리에서 볼 때는 매우 비슷한 문제 의식과 상황인식을 깔고 있다. 적어도 서울에 살고 있고, 남한의 지식인들에게 글을 쓰고 있는, ‘비서구인‘인 내가 보는 입장에서는 그 둘간의 차이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전자는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연속성‘을강조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단절성‘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면에서 차이가날 뿐 내게는 크게 대립된 입장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 P151

한편 파시즘이 득세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독일의 지성계는 근대성이 초쾌한 현재의 위기를 보는 시각에서도 좀 독특한 자세를 취한다. 파시즘의상처와 위협이 아직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일 지성계는 ‘합리‘와 ‘이성‘의 개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민중봉기로 근대 혁명을이루어 냈고 파시즘의 병을 가장 적게 앓은 편인 프랑스는 또다시 전혀 새로운 ‘감성‘으로 시대를 쓰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쩌면 프랑스 지성인들은 나름대로 ‘이성‘을 토대로 한 ‘근대사‘를 살아 보았고 이제 그 ‘이성‘을 가장한 질서에서 미련없이 벗어나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전통에매이지 않는 편인 미국 지식인들 역시 탈근대적 논의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어쨌든지 서구의 자기 성찰적인 지식인들은 각자가 선 자리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온 세계를 돌아보게 되었고, 포괄적인 삶의 영역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이제 자신들이 가져온 근대적 체험을 바탕으로 ‘근대‘의 방향을 크게 수정하고 싶어하고 있다. - P152

이들은 개별 국가 단위의 경제 체제가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선조들이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넘어설 때처럼 재빨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고자 한 것이다. 개별국가 단위를 넘어선 공동체로 삶의 터전을 넓히면서 동시에 보다 작은 지역단위, 내지 자치적 주민적 공동체를 활성화함으로써 융통성 있게 지역/문화재편을 시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으로, 또 주변에 있는 다양성을 찾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허약한 자기 문화를치유해 갈 거리를 찾으러 나선 것이다.
비단 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를 통해서도이들이 하고 있는 자기 성찰 작업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신들의 근대사를거리를 두고 그려 낸 것으로 <1900년>, <당통>, <리틀 도리>, <정복자 펠레>,
<시네마 천국>, <개 같은 내 인생>, <장미의 이름> 등이 있고,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인간상을 그린 영화로 <카프카>, <파리 텍사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내 고향 아이다호>, <버디>와 같은 - P154

영화가 있다. 파시즘의 대두를 개인의 삶과 연결시켜 본 <레들 대령>, <하누>과 같은 영화, 그리고 파시즘의 폭력을 어처구니 없이 당한 아이나 여자의 눈으로 반이성적 시대를 그린 <양철북>이나 <소피의 선택>과 같은 영화에서 그들이 가졌던 독특한 근대적 체험을 읽어 낼 수 있다. 악마적 분위기를 그린 <델리카트슨>, <요리사, 도둑, 아내와 연인> 역시 근대성의 어두움을 암시해 주는 훌륭한 영화이며, 고도 기술 관리 사회의 종말론적 절망을기독교적 메시지로 풀어 가려는 <터미네이터 1>, <다크맨>도 그들이 여전히기독교적 언어를 통해 의사 소통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끈다. 극히 반동적인 고도 기술 독재 체제가 기독교적 성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핸드 메이즈>나 <브라질> 등의 영화에서도서양이 보는 후기 산업 사회에 대한 인식과 상상력의 지평을 읽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역사의 깊이를 본다. 구체적인 문제와 고통을 보고, 그것을 풀어 가는 데 전념해 온 사람들을 만난다.
자생적 근대화를 하였다는 것은 사회 개혁을 해내는 ‘중심‘이 있었음을의미한다. 자신들의 허약한 상태를 있는 대로 드러내 놓는 것, 드러내 놓고토론하는 장이 열려 있는 것, 바로 그런 상태를 뜻한다.  - P155

내가 아닌 나를
나인 줄 알고 살다가
가끔 나를 만나면
낯설어 얼굴 돌린다.

아아
무아의 세계로
갈 수는 없는가

-조만철

이 시는 정신과 의사인 내 오빠가 쓴 것이다.
쉰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낯선 자기를 거울에서 보는 것은, 그리고 무아의 세계로 가버리고 싶어하는 것은그가 가진 불교적 색채 탓일까, 식민지 주민으로서의무의식 탓일까? - P157

어느 억압된 주체는 해방을 원할 때 거치게 되는 일반적 과정이있다. 먼저 자신들이 억압당하고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계기를갖는 단계를 거친다. 대부분의 억압 상태는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서 억압당한 주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식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자신이 세뇌당한 소수 집단, 곧 ‘타자화된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그러한 자의식이 생기면 그는 자신을 억압해 온 ‘중심‘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 온 전제들을 의심하게 되며, 지금까지 ‘중심‘에 있던 집단이 더 능력있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사회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등의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 P158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억압하는 지배 구조를 거리를두고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거리를 두지 못할 때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갖가지 투쟁은 지배 구조 속에 말려들어가 버리고만다. ‘보편성‘을 주장하는 지배적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첫 한풀이만 하는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중심‘을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는 일과 같이 가야하는데, 이것은 ‘중심‘을 더 이상 보편적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주체로 상대화시켜 보면서, 타자화되어 온 자신을 재발견하는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을 뜻한다. 억압당하고 짓밟히기만 해온 존재로서가 아니라, 타자화된 표면 아래서 꿈틀거려 왔던 존재를 찾아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억압을 당해 온 이들은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대항 담론의장이다. 그 새로운 담론의 장에서 자신들의 손상되지 않은 모습, 터져 나오지 못하게 눌려 있던 기억을 더듬어 억압 기재를 교란시키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써갈 거점을 마련해 가게 된다. 억압을 드러내고 고발하면서 지배 담론에 틈새를 내는 것, 그리고 기운을 차리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은 탈식민화 작업에서 필수적인 작업들이다. - P158

경험과 유리된 지식을 재생산해내는 데 길들여졌던 주변부가 자신들의 타자화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거점으로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 가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지배자의 눈치를 살피거나 그들의 발상 속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공간을 확장해 가는 것은 어떤 작업을 통해 가능할까?
그 동안 우리는 자기에 대해서도 모르고 그렇다고 세계에 대한 배려나 이해가 있지도 않는 상태에서 부유해 왔다. 지배 담론에서 규정한 단일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인지해 왔고, 그래서 주체성과 능동성을 잃은, 또 다양성이 무시된 존재로 살아 왔다. 일상적 생존의 장에서는 뛰어난 적응력으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조바심으로 순발력을 발휘하지만 그것은 이미 승산이 결정되어 있는 ‘장기판‘ 위에서의 놀음이었다. 이제 다시 정체성 논의를 끄집어내는것은 모든 입장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구도, 또는 ‘장기판‘ 위가 아니라 각자 만들어 가는 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우리가 장기판 자체를 바꾸고 싶어한다면, 기존의 판 위로 더 이상 올라가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한 자리를 스스로 정한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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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봄밤


부활절 날 밤
겸손히 무릎을 꿇고
사람의 발보다
개미의 발을 씻긴다

연탄재가 버려진
달빛 아래
저 골목길

개미가 걸어간 길이
사람이 걸어간 길보다
더 아름답다

봄눈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지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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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새에 대해 정말 잘 아네." 이나코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경건할 만큼 무력감이 드러난 목소리는 감정의 고양뒤에 따라오는 피로와 공복으로 인한 단순한 반응이자,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기도 했다. 이사나는 자신의 공복감을새삼 느끼며 이나코의 말을 깊이 새겼다. 둘은 잠든 진을 남겨두고 내려가, 자신들을 위한 식사를 만들어 용암 덩어리에 앉아 먹었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광욕을 했는데, 하루 사이 햇볕이 더 강해져 서로의 머리에 물을 끼얹어주었다. 진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말 한마디 없이, 이나코의 거무스름한 빛을 띤 건강한 피부가 햇빛의 영향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셸터에 틀어박혀 지내온 이사나의 피부는 순식간에 담홍색으로 타며 부어올랐다. 어제 탄부분에 다시 또 햇빛이 닿자 쑤시고 아프기까지 했는데, 불쾌하지는 않았다. - P111

다카키가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이사나는 오그라드는 남자가 찍은 그라비어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이라고 하는것의 근본적인 기묘함은 화면에 실재하지 않는 사람의 상상력이 화면의 ‘현재‘에 편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사진에서도 오그라드는 남자의 정열인지 악의인지, 여하튼 무척이나 생생하고 농밀한 감정이 전 자위대원 및 둥그렇게 진을치고 그를 감싸고 있는 청년들을 뒤덮고 있었다. 전 자위대원이 자동소총을 분해해서 용암 자갈에 깐 천 위에 각각의부품을 펼쳐놓은 상황이었다. 붉은 고기 빛깔을 띠는 총신의 번호는 사진 속에서도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게릴라는 육상자위대 장비인 64식 7.62밀리 소총을 손에 넣어 실전훈련에 사용하고 있다. 이 설명을 읽으면 설령 아주 관대한 - P157

국가권력이라도 그냥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정도로 치명적인 장면을 찍히면서, 전 자위대원과 청년들은 열정적이고 순진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렌즈 이쪽의 오그라드는 남자는 이렇게 아름답게 미소 짓는 자들의 사진을어찌 찍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침묵의 고함을 지르는듯했다.
"여기에서 농성하는 걸 당신이 반대하지 않으니 서둘러의논할 건 없겠지만." 다카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하자면 나는 자유항해단이무기를 분배받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에 찬성하지 않아. 꼬맹 씨가 말했던 것처럼 자유항해단은 이제 만들어져가고 있으니까. 아직 확실한 형태와 실질을 갖추지 못했어. - P158

아직 확실한 형태와 실질을 갖추지 못했어. 확실한건 모두 뭉쳐 있다는 것뿐이지.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버리면 자유항해단은 그대로 해산이야. 이나코가 말한 대로 보이의 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가 돼버려.
그럼 두 번째 길, 여기서 농성하며 싸우는 것만으로는 자유항해단 안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야. 그건수동적이니까. 수동적인 건 좋지 않아. 우리 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기동대나 다른 무언가가 오는 걸기다렸다가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반응하며 그제서야 행 - P158

동을 시작하는 거니까. 애초에 그러려고 자유항해단을 만든건 아니잖아? 불합리한 죽음을 타인에게 강요당하지 않고스스로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하며 살고 싶다고, 우리는자유항해단의 출발점에 그런 마음이었던 거 아니야?"
"여기 농성하고 있는 데로 기동대가 공격해오고 머지않아 자위대까지 공격해올 거라 치고, 거기에 대응해 반격하는 건 수동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얼마나 수동적이지않은지는 바로 보여주겠어." 다마키치가 말했다. - P159

"수동적으로 시작해서 난폭함만을 과장하는 걸로는 절대로 능동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없어.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어." 다카키가 매정하게 말했다. "나도 당신이 말하는 제삼의 길을 생각해봤는데 말야, 물론 그건 옳아. 서둘러 크루저를 손에 넣고 자유항해단의 원래 계획대로 공해로 자취를감추는 걸 생각해보라는 거지?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지금 무장한 채 이즈나 보소까지 이동해서 요트항으로숨어드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어떨지는 그야말로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이사나가 되물었다. "이럴 때야말로 원래의 구상에 따라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왜처음부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시도해보려 - P159

고도 안 하는 거야? 처음 구상이 원래 현실적으로 시도해볼수도 없는 것이었다면 그 구상은 애초부터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 구상을 품고 있었던 인간자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게 되겠지? 그러면 어떤변호로도 오그라드는 남자와 보이가 자유항해단의 구상을위해 자진해서 죽었다고 타인을 설득할 수 없어."
"그러면 당신은 현실적으로 무얼 해 보이겠다는 거지?"
"자유항해단에 관한 상세한 사실들을 경찰 측은 아직 다파악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 시간 여유가 있다면 난 내일 아내랑 교섭하고 올게. 크루저를 한 척 입수하는 일쯤은 불가능하진 않을 테니까. 할 수 있는 한 어떻게든 그 배 위에서원래 구상에 따라 시작해보지 않겠어? 실제로 해보면 네가 예상하는 대로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야 많겠지만. 뿔뿔이 흩어지거나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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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그들의 차는 해안선 등불이 먼 시가지의 큰 등불까지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곳의 끝부분에 이르렀다. 바로 아래아주 낮은 곳에 지금 그들이 넘어 온 곳을 가르며 작은 만이자리 잡고 있었다. 그 가장 안쪽 항구에 면한 작은 마을이계류 중인 어선의 투광기 불빛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바닷가에선 어선이 한척 불타고 있었다. 그 배들을 둘러싸고 있는 반짝이는 잔물결은 농익은 석류알 같았다. 멀리 큰 등불로부터 바닷가의 낮은 길이 이 항구로 이어지고 경사가 급한 비탈을 올라 그들의 차가 있는 도로와 만난다. 그 급사면이 자동차 전조등 여러 개가 엮여 함께 비추자 선명하게 드러났다.  - P84

차 운전자들은 바닷가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구경하며 느릿느릿 전진하기도 하고 완전히 멈춰 서기도 했다.
해안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자동차 행렬 저 뒤에서 순찰차가 전조등을 반짝이며 추월해 오고 있었다. 순찰차 여러대가 연달아 뛰어오르듯 다가왔다. 그 차들이 울리는 경보와 바닷가 마을을 지나며 소방차가 내는 사이렌 소리가 의 - P84

미를 알 수 없는 욕설과 함께 들려왔다. 다카키가 창문을 닫고 천천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교통이 두절된 전방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오토바이 라이더는 그들의 차를 확인하고는 산기슭 갓길에 오토바이를 대고 전조등을 끈 후 이쪽을 근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는데, 다름아닌 다마키치였다. 그 근심 가득한 얼굴은 그야말로 다카키가 방금 전 얘기한, 폭력을 봉인 해제한 인간의 적나라한참혹함을 드러내는 듯했다.  - P85

공터에 들어선 후 폭스바겐에서 혼자 내렸을 때, 이사나는 검은 나무숲 저편 어두운 하늘 끝에서 장밋빛으로 자라날 새싹을 감추고 있는 여명을, 바다 위 새벽녘의 기운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한순간의 일로, 금방이라도 장밋빛의 농담을 띤 하얀빛을 발하려는 동쪽 하늘을 그는 올려다보고 있을 기력이 없었다. 오히려 하늘의 검은 부분과 또 그것보다 더 검은 지상의 존재, 즉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교목들과 그 아래를 이끼처럼 집요하게 덮는 관목 수풀을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는 진을 지키는 이나코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이나코가잠들어 있다면 그녀의 잠을 방해하면서까지 군인의 자살을 알리는 건 아무래도 꺼려졌다. 혹시 이나코가 자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동안 준비한 힐문에 혼자서 맞서는것도 버겁고 부담스러웠다......
ננר - P88

유년 시절 이후 여러 시기에 입은 상처의 모양과 색과 함께정말 그때는 그 상처가 날 수밖에 없었다는 유일성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하나의 상처로부터 또 하나의 상처로, 차례차례 징검다리를 건너듯 옮겨가며 그는 그간의 삶을 조감했다. 그 실패한 인생의 끝부분에, 그는 지금 새로운 상처를손등에 입고, 수두로 발진한 지적장애 아들의 치다꺼리조차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채 식당 건물에 누워 잠을 청하고있는 것이다. 린치 살인을 저지른 자들과 한패가 되었을 뿐아니라 그 범죄 현장에 그대로 남겨진 것처럼...  - P91

저 생애초기에 입은 상처 하나하나가 상징하는 날들 중에 숨 막히는 궁지에 처해 새로운 상처까지 입고 만 중년 남자를 미래의 도달점으로 상정해본 날이 있을까? 아니,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어, 상처 입을 때마다 그 상처로 긴장하곤 했던 유년 그리고 소년 시절의 나는,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어 하고 이사나는 나무의 혼·고래의 혼에게 회고의 심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꿈을 꾸듯, 그것도 나무의 흔・고래의혼을 향해 자기 상처의 역사를 말하는 꿈을 꾸듯, 상처 하나하나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럼으로써 조금씩 흐르는 피가서서히 혈압을 떨어뜨릴 거라는 불안을 해소하려는 듯……그렇게 지쳐 잠이 들었다. - P91

그건 막 떨어진 아직 마르지 않은 산귀나무 잎사귀였다. 이사나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잎사귀를 끼고 허연 잎사귀 뒷면을 하늘에 비춰보았다. 노란색 샘점이 뚜렷했다. 그리고 잎맥이 짙은 초록색 잎사귀 아래쪽에서는 부드럽고 두꺼운 선을 그리고 측맥의 끝으로 갈수록 분명한 선을 그리는 것은, 잎맥 줄기 그 자체에 육질의 팽창이 일어나, 그 도톰한 부분이 잎사귀에 미미하게나마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이사나는 잎사귀에 대해서도 매일 관찰해왔다. 지금 그는 나뭇잎이 인간들에게 배 모양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힌트를 준 것이 분명하다는생각이 새로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미지에 있어서도, 소재에 있어서도, 나무를 매개로 고래와 만났던 거야하고 그는 나무의 혼·고래의 혼을 향해 말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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