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가 만들어 낸 근대 문명의 테두리 안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을 찾아보려는 이러한 연속적인 시도와는 좀 다른 시각에서 위기를 바라보고, 처방을 내리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것은 푸코나 들뢰즈, 료따르처럼 자신의 역사를 거리를 두고 서술하면서, 그전까지의 ‘근대 기획‘과는 좀더 급진적인단절을 이루어 냄으로 현재의 다양한 모순들을 극복해 가려는 움직임이다.
푸코 역시 근대가 지닌 양면성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자유와 해방의역사로 표방되어 온 근대는 실은 배제와 감시가 강화되는 관리 사회로의 이행 과정이기도 했음을 푸코는 군대, 감옥, 병원, 학교 등에서 관리가 제도화되는 과정을 통해 밝혀 낸다. ‘진보사관‘을 철저히 거부하는 푸코는 그 동안의 역사가 공식/비공식의 이분화, 비극/ 희극의 이분화, 유심론과 유물론의 이분화를 토대로 쓰여져 왔음을 밝혀 내고 그런 이분법을 넘어선 역사를 써내기 위해 추상화의 수준을 낮추고 아주 자세한 기술을 통해 역사를써내려 하였다. 그가 계보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그 동안 있어 온 절대적 진리 주장들을 발생시킨 은폐된 조건들을 추적해 간 <감시와 처벌> 그리고<성의 역사 1>는 서구 문명 안에 살면서 자신의 사회를 상대화시켜 본 착실 - P142

한 작업이며, 그 작업은 ‘서구적 주체‘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푸코에게 있어 근대는 표면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늘어나는 시대인 것 같지만 실은 행동의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감시하고 검열하는 장치를 발전시킨 시대이다. 이런 시대적 진전은 성욕과 감정적 친밀성까지를 일일이관여하고 조종하는 고도로 세련된 제도화로 이어진다. 권력은 집중되어 있지 않으며 그런 면에서 권력에 대해 저항한다는 것 역시 매우 복잡해져 버렸음을 푸코는 저작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 간의 관계를 어디까지나 구체성을 통해 보여주려 하였다는 면에서, 그리고 섣불리 처방을 내리기를 거부했다는 면에서 탈근대적 언어를 만들어간 문명 비평가들의 대열에 선다 - P143

급진적 근대론이건 탈근대론이건 이들 서구 지식인들이 벌이는 논의의다양함은 바로 그들이 현재의 위기 상황에 대해 매우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있다는 증거이다. 사실상 근대 기획을 제대로 이어 가자는 논의건 단절을이루자는 논의건, 내가 선 자리에서 볼 때는 매우 비슷한 문제 의식과 상황인식을 깔고 있다. 적어도 서울에 살고 있고, 남한의 지식인들에게 글을 쓰고 있는, ‘비서구인‘인 내가 보는 입장에서는 그 둘간의 차이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전자는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연속성‘을강조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단절성‘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면에서 차이가날 뿐 내게는 크게 대립된 입장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 P151

한편 파시즘이 득세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독일의 지성계는 근대성이 초쾌한 현재의 위기를 보는 시각에서도 좀 독특한 자세를 취한다. 파시즘의상처와 위협이 아직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일 지성계는 ‘합리‘와 ‘이성‘의 개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민중봉기로 근대 혁명을이루어 냈고 파시즘의 병을 가장 적게 앓은 편인 프랑스는 또다시 전혀 새로운 ‘감성‘으로 시대를 쓰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쩌면 프랑스 지성인들은 나름대로 ‘이성‘을 토대로 한 ‘근대사‘를 살아 보았고 이제 그 ‘이성‘을 가장한 질서에서 미련없이 벗어나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전통에매이지 않는 편인 미국 지식인들 역시 탈근대적 논의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어쨌든지 서구의 자기 성찰적인 지식인들은 각자가 선 자리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온 세계를 돌아보게 되었고, 포괄적인 삶의 영역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이제 자신들이 가져온 근대적 체험을 바탕으로 ‘근대‘의 방향을 크게 수정하고 싶어하고 있다. - P152

이들은 개별 국가 단위의 경제 체제가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선조들이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넘어설 때처럼 재빨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고자 한 것이다. 개별국가 단위를 넘어선 공동체로 삶의 터전을 넓히면서 동시에 보다 작은 지역단위, 내지 자치적 주민적 공동체를 활성화함으로써 융통성 있게 지역/문화재편을 시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으로, 또 주변에 있는 다양성을 찾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허약한 자기 문화를치유해 갈 거리를 찾으러 나선 것이다.
비단 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를 통해서도이들이 하고 있는 자기 성찰 작업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신들의 근대사를거리를 두고 그려 낸 것으로 <1900년>, <당통>, <리틀 도리>, <정복자 펠레>,
<시네마 천국>, <개 같은 내 인생>, <장미의 이름> 등이 있고,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인간상을 그린 영화로 <카프카>, <파리 텍사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내 고향 아이다호>, <버디>와 같은 - P154

영화가 있다. 파시즘의 대두를 개인의 삶과 연결시켜 본 <레들 대령>, <하누>과 같은 영화, 그리고 파시즘의 폭력을 어처구니 없이 당한 아이나 여자의 눈으로 반이성적 시대를 그린 <양철북>이나 <소피의 선택>과 같은 영화에서 그들이 가졌던 독특한 근대적 체험을 읽어 낼 수 있다. 악마적 분위기를 그린 <델리카트슨>, <요리사, 도둑, 아내와 연인> 역시 근대성의 어두움을 암시해 주는 훌륭한 영화이며, 고도 기술 관리 사회의 종말론적 절망을기독교적 메시지로 풀어 가려는 <터미네이터 1>, <다크맨>도 그들이 여전히기독교적 언어를 통해 의사 소통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끈다. 극히 반동적인 고도 기술 독재 체제가 기독교적 성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핸드 메이즈>나 <브라질> 등의 영화에서도서양이 보는 후기 산업 사회에 대한 인식과 상상력의 지평을 읽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역사의 깊이를 본다. 구체적인 문제와 고통을 보고, 그것을 풀어 가는 데 전념해 온 사람들을 만난다.
자생적 근대화를 하였다는 것은 사회 개혁을 해내는 ‘중심‘이 있었음을의미한다. 자신들의 허약한 상태를 있는 대로 드러내 놓는 것, 드러내 놓고토론하는 장이 열려 있는 것, 바로 그런 상태를 뜻한다.  - P155

내가 아닌 나를
나인 줄 알고 살다가
가끔 나를 만나면
낯설어 얼굴 돌린다.

아아
무아의 세계로
갈 수는 없는가

-조만철

이 시는 정신과 의사인 내 오빠가 쓴 것이다.
쉰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낯선 자기를 거울에서 보는 것은, 그리고 무아의 세계로 가버리고 싶어하는 것은그가 가진 불교적 색채 탓일까, 식민지 주민으로서의무의식 탓일까? - P157

어느 억압된 주체는 해방을 원할 때 거치게 되는 일반적 과정이있다. 먼저 자신들이 억압당하고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계기를갖는 단계를 거친다. 대부분의 억압 상태는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서 억압당한 주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식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자신이 세뇌당한 소수 집단, 곧 ‘타자화된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그러한 자의식이 생기면 그는 자신을 억압해 온 ‘중심‘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 온 전제들을 의심하게 되며, 지금까지 ‘중심‘에 있던 집단이 더 능력있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사회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등의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 P158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억압하는 지배 구조를 거리를두고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거리를 두지 못할 때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갖가지 투쟁은 지배 구조 속에 말려들어가 버리고만다. ‘보편성‘을 주장하는 지배적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첫 한풀이만 하는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중심‘을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는 일과 같이 가야하는데, 이것은 ‘중심‘을 더 이상 보편적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주체로 상대화시켜 보면서, 타자화되어 온 자신을 재발견하는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을 뜻한다. 억압당하고 짓밟히기만 해온 존재로서가 아니라, 타자화된 표면 아래서 꿈틀거려 왔던 존재를 찾아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억압을 당해 온 이들은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대항 담론의장이다. 그 새로운 담론의 장에서 자신들의 손상되지 않은 모습, 터져 나오지 못하게 눌려 있던 기억을 더듬어 억압 기재를 교란시키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써갈 거점을 마련해 가게 된다. 억압을 드러내고 고발하면서 지배 담론에 틈새를 내는 것, 그리고 기운을 차리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은 탈식민화 작업에서 필수적인 작업들이다. - P158

경험과 유리된 지식을 재생산해내는 데 길들여졌던 주변부가 자신들의 타자화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거점으로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 가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지배자의 눈치를 살피거나 그들의 발상 속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공간을 확장해 가는 것은 어떤 작업을 통해 가능할까?
그 동안 우리는 자기에 대해서도 모르고 그렇다고 세계에 대한 배려나 이해가 있지도 않는 상태에서 부유해 왔다. 지배 담론에서 규정한 단일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인지해 왔고, 그래서 주체성과 능동성을 잃은, 또 다양성이 무시된 존재로 살아 왔다. 일상적 생존의 장에서는 뛰어난 적응력으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조바심으로 순발력을 발휘하지만 그것은 이미 승산이 결정되어 있는 ‘장기판‘ 위에서의 놀음이었다. 이제 다시 정체성 논의를 끄집어내는것은 모든 입장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구도, 또는 ‘장기판‘ 위가 아니라 각자 만들어 가는 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우리가 장기판 자체를 바꾸고 싶어한다면, 기존의 판 위로 더 이상 올라가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한 자리를 스스로 정한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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