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 새에 대해 정말 잘 아네." 이나코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경건할 만큼 무력감이 드러난 목소리는 감정의 고양뒤에 따라오는 피로와 공복으로 인한 단순한 반응이자,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기도 했다. 이사나는 자신의 공복감을새삼 느끼며 이나코의 말을 깊이 새겼다. 둘은 잠든 진을 남겨두고 내려가, 자신들을 위한 식사를 만들어 용암 덩어리에 앉아 먹었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광욕을 했는데, 하루 사이 햇볕이 더 강해져 서로의 머리에 물을 끼얹어주었다. 진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말 한마디 없이, 이나코의 거무스름한 빛을 띤 건강한 피부가 햇빛의 영향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셸터에 틀어박혀 지내온 이사나의 피부는 순식간에 담홍색으로 타며 부어올랐다. 어제 탄부분에 다시 또 햇빛이 닿자 쑤시고 아프기까지 했는데, 불쾌하지는 않았다. - P111

다카키가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이사나는 오그라드는 남자가 찍은 그라비어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이라고 하는것의 근본적인 기묘함은 화면에 실재하지 않는 사람의 상상력이 화면의 ‘현재‘에 편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사진에서도 오그라드는 남자의 정열인지 악의인지, 여하튼 무척이나 생생하고 농밀한 감정이 전 자위대원 및 둥그렇게 진을치고 그를 감싸고 있는 청년들을 뒤덮고 있었다. 전 자위대원이 자동소총을 분해해서 용암 자갈에 깐 천 위에 각각의부품을 펼쳐놓은 상황이었다. 붉은 고기 빛깔을 띠는 총신의 번호는 사진 속에서도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게릴라는 육상자위대 장비인 64식 7.62밀리 소총을 손에 넣어 실전훈련에 사용하고 있다. 이 설명을 읽으면 설령 아주 관대한 - P157

국가권력이라도 그냥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정도로 치명적인 장면을 찍히면서, 전 자위대원과 청년들은 열정적이고 순진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렌즈 이쪽의 오그라드는 남자는 이렇게 아름답게 미소 짓는 자들의 사진을어찌 찍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침묵의 고함을 지르는듯했다.
"여기에서 농성하는 걸 당신이 반대하지 않으니 서둘러의논할 건 없겠지만." 다카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하자면 나는 자유항해단이무기를 분배받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에 찬성하지 않아. 꼬맹 씨가 말했던 것처럼 자유항해단은 이제 만들어져가고 있으니까. 아직 확실한 형태와 실질을 갖추지 못했어. - P158

아직 확실한 형태와 실질을 갖추지 못했어. 확실한건 모두 뭉쳐 있다는 것뿐이지.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버리면 자유항해단은 그대로 해산이야. 이나코가 말한 대로 보이의 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가 돼버려.
그럼 두 번째 길, 여기서 농성하며 싸우는 것만으로는 자유항해단 안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야. 그건수동적이니까. 수동적인 건 좋지 않아. 우리 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기동대나 다른 무언가가 오는 걸기다렸다가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반응하며 그제서야 행 - P158

동을 시작하는 거니까. 애초에 그러려고 자유항해단을 만든건 아니잖아? 불합리한 죽음을 타인에게 강요당하지 않고스스로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하며 살고 싶다고, 우리는자유항해단의 출발점에 그런 마음이었던 거 아니야?"
"여기 농성하고 있는 데로 기동대가 공격해오고 머지않아 자위대까지 공격해올 거라 치고, 거기에 대응해 반격하는 건 수동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얼마나 수동적이지않은지는 바로 보여주겠어." 다마키치가 말했다. - P159

"수동적으로 시작해서 난폭함만을 과장하는 걸로는 절대로 능동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없어.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어." 다카키가 매정하게 말했다. "나도 당신이 말하는 제삼의 길을 생각해봤는데 말야, 물론 그건 옳아. 서둘러 크루저를 손에 넣고 자유항해단의 원래 계획대로 공해로 자취를감추는 걸 생각해보라는 거지?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지금 무장한 채 이즈나 보소까지 이동해서 요트항으로숨어드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어떨지는 그야말로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이사나가 되물었다. "이럴 때야말로 원래의 구상에 따라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왜처음부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시도해보려 - P159

고도 안 하는 거야? 처음 구상이 원래 현실적으로 시도해볼수도 없는 것이었다면 그 구상은 애초부터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 구상을 품고 있었던 인간자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게 되겠지? 그러면 어떤변호로도 오그라드는 남자와 보이가 자유항해단의 구상을위해 자진해서 죽었다고 타인을 설득할 수 없어."
"그러면 당신은 현실적으로 무얼 해 보이겠다는 거지?"
"자유항해단에 관한 상세한 사실들을 경찰 측은 아직 다파악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 시간 여유가 있다면 난 내일 아내랑 교섭하고 올게. 크루저를 한 척 입수하는 일쯤은 불가능하진 않을 테니까. 할 수 있는 한 어떻게든 그 배 위에서원래 구상에 따라 시작해보지 않겠어? 실제로 해보면 네가 예상하는 대로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야 많겠지만. 뿔뿔이 흩어지거나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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