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이른 아침, 클로너걸에서의 첫 미사를 마친 다음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덥고 환한 날이다.
들판에 군데군데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길을 따라 푸릇한빛이 갑자기 일렁인다. 우리는 아빠가 포티파이브 카드 게임에서 빨간 쇼트혼 암소를 잃었던 실레일리 마을을 통과하고 그걸 딴 사람이 곧장소를 팔아치웠던 카뉴 시장을지난다. 아빠는 조수석에 모자를 내던지더니 차창을 내리 - P9

고 담배를 피운다. 나는 땋은 머리를 풀고 뒷좌석에 누워뒤창을 통해서 하늘을 바라본다. 군데군데 푸른 하늘이 드러나 있고 분필을 칠한 듯한 구름이 떠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얼기설기 지나는 전선에 긁힌 듯한 나무들과 하늘이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이따금 작은 갈색 새 떼가 전속력으로 날아가며 사라진다. - P10

나는 아빠가 왜 건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할까 생각한다.
아빠는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누가 사슬톱을 켜는지 크고 무서운말벌이 멀찍이서 웅웅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계속 난다. 나도 저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주전자가 부글부글 끓으며 김을 피워 올리자 철제 뚜껑이 달각거린다. 창틀에서 까만색과 흰색이 섞인 고양이가 얼핏 움직인다.  - P17

바람이 불자 키가 큰 풀들이 구부러지면서 은색으로 변한다. 한쪽 구획에서는 키 큰 홀스타인 젖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서서 풀을 뜯는다. 우리가 지나가자 몇 마리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만 도망가는 소는 한 마리도 없다. 젖통이 크고 젖꼭지가 길다. 젖소들이 뿌리만 남기고 풀을 뜯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 P28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머니가 나를 끌어당겨 풀밭에 다시 안전하게 올려놓은 다음 혼자 내려간다. 양동이가 옆으로 잠시 떴다가 가라앉아서 꿀꺽꿀꺽 반가운 소리를 내며 물을 삼키더니 수면 밖으로 나와 들어올려진다. - P30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 편안함이 끝나기를 ㅡ 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깨거나 무슨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ㅡ계속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우리는 해가 뜰 때 일찌감치 일어나서 아침으로 달걀 요리와 토스트, 마멀레이드를 먹는다. 식사가 끝나면 킨셀라 아저씨는 모자를 쓰고 밭으로 나간다. 킨셀라 아주머니와 나는 해야 할 일들을 큰 소리로 죽 은 다음 일을 한다. - P45

"자." 아저씨가 말한다. "구두 길들이러 가자."
"벌써 길든 거 아니야? 어딜 데려가려고?"
"바닷가까지만 갈 거야." 아저씨가 말한다.
"조심해, 존 킨셀라." 아주머니가 말한다. 램프도 없이갈 생각은 하지도 말고."
"오늘 같은 밤에 램프가 왜 필요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지만 아주머니가 램프를 건네자 순순히 받아 든다.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 P69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항상 거기에 있던 바다로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두려워하고, 아저씨가 바다에서 발견되는 말들에 대해서,
누구를 믿으면 안 되는지 알아내려고 사람을 믿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쩌면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계속 걷다가 절벽과 암벽이 튀어나와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도착한다. 이제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돌아가야한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은 돌아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납작하고 하얀 조개껍데기가 모래밭으로 밀려 올라와 여기저기서 반짝인다.  - P73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 P96

모퉁이를 돌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 곳에 도착하니 아저씨가 대문 죔쇠를 돌려놓고 다시 잠그고있다. 아저씨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자기 손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 발이 진입로 중앙에 풀이 지저분하게 자란 부분을 따라 달리며 울퉁불퉁한 자갈을 세차게 밟는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고, 내 발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아저씨는나를 보자마자 딱 멈추더니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그 앞에 도착하자대문이 활짝 열리고 아저씨의 품에 부딪친다.  - P97

아저씨가 팔로 나를 안아 든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꼭 끌어안는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숨이 헐떡거리더니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간이한참 지난 것만 같은데, 나무 사이로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 우리에게 크고 뚱뚱한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눈을 감으니 아저씨가 느껴진다. 차려입은 옷을 통해 전달되는 아저씨의 열기가 느껴진다. 내가 마침내 눈을 뜨고 아저씨의 어깨 너머를 보자 아빠가 보인다. 손에 지팡이를 들고 흔들림 - P97

없이 굳세게 다가온다.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뜬다. 킨셀라 아저씨의 어깨 너머 진입로를, 아저씨가 볼 수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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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졌던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볼 용기가 있다면, 나만의 진실, 세상의 진실, 끝없이 우리를 사로잡아 아픔을 주는 이 모든 것의 진실을 발견하고 말리라는 것을 어쨌든 알기에.
- 진 라이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 P9

내 머리와 가슴과 자궁은 온통 그 여자로 채워졌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나를 따라오며 내 감정을 좌우했다.
동시에 이 끊을 수 없는 존재로 인해 나는 강렬한 삶을살게 되었다. 그녀로 인해,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내면의 움직임을 알게 되었고,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온갖 것들을 꾸며낼 힘과 에너지를 발휘하게 되었고, 열에들떠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었다.
이중의 의미로, 난 사로잡힌 상태였다. - P12

이런 상태에 들어서자, 일상의 근심과 성가심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습관화된 일상의범용함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정치적 사건, 시사 문제가 불러일으키기 마련인 성찰들 역시 더이 - P12

상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애써도, 2000년 여름은 이륙 직후 고네스의 한 호텔에 추락한 콩코르드 비행기 사고 말고는 내게 아무런기억도 남겨놓지 않았다.
한편에 고통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이 고통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못하는 사고력이있었다. - P13

47 이라는 숫자는 야릇한 물질성을 띠게 되었다. 이 두자리 숫자가 도처에 거대하게 우뚝 솟아 있는 듯했다.
난 세월과 노화 순으로가 아니면 더이상 여자들을 자리매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세월과 노화의 징표를 나의 것과 비교하면서 그들을 평가하게 되었다. 사십대에서 오십대 사이로 보이며, 부유층 구역에사는 여성들을 모조리 똑같이 보이게 만드는 그 ‘우아한 단순미‘를 풍기는 복장을 한 여성들은 모두, 한 여자의 분신이었다. - P14

나는 감정과 감성이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고,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형태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느꼈다. 이러한 내면 상태에 견줄 만한 것들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날뛰는 바다, 깎아지른 절벽의 붕괴, 심연, 해조류의 증식.
난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닳고닳은 표현조차도 어느 날 그 누군가가 실제 겪었던 것이다. - P21

글쓰기를 통해 나의 강박증과 고통을 여기에 노출하.
고 있는 행위와 랍 대로에 가면 그들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출을 두려워하던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글쓰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 나의 얼굴, 나의 육체, 나의 목소리.
나라는 인간의 특징을 형성하는 이 모든 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는 내팽개쳐버릴 누군가의눈앞에 드러내는 것은 더없이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만큼이나 지금은 내 강박증을 드러내고 헤집어보는일이 전혀 거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반항심도 전혀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난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없다. 나는 나를 본거지로 삼았던 그 질투가 꾸며내는 온갖 상상과 행동들을 묘사하려고만 애쓰며, 개인적이며 내밀한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실체로 변모시키려고만애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형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것들을 제 것으로 삼을 것이 - P43

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이상 나의 욕망, 나의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질투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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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이란 관념은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라고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모순은 바로 생명체의 고통 속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헤겔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 퐁투아즈병원에서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에 들어간 지 두 해째였다. 간호사가 전화로 알려 왔다. 「모친께서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운명하셨습니다.」 10시쯤이었다.


어머니가 머물던 방의 문이 처음으로 닫혀 있었다. 이미 염을 마친 상태여서, 깨끗이 씻긴 뒤 흰색 염포가 턱 밑으로 지나가게 머리를 감아 놓았고, 그 바람에 피부가 전부 입과 눈 주위로 몰려 있었다. 어깨까지 시트로 덮여 있어서 두 손이 보이지 않았다.  - P7

내가 가장 힘들 때는밖에 시내에 있을 때였다. 차를 몰다가 퍼뜩 이런 생각을 하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이제 다시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아. 사람들의 습관적인 행동 방식이 더 이상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들이 정육점에서 자잘한 신경을 써가며 이런저런 부위를 고르는 모습을 보면 끔찍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상태가 차츰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인 이달 초에 그랬듯, 날이 춥고 비가 오면 여전히 만족스러움. 그리고, <이젠 더 이상그래 봐야 소용없구나> 혹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구나>(어머니를 위한 이런저런 일)를 확인할 때마다 밀려드는 공허한 순간들. 어머니가 보지 못할 첫 번째 봄이라는 생각이 자아내는 빈틈. (이제는 평범한 문장들, 심지어 진부한 표현들에 담긴 힘이 느껴짐.) - P17

편지가 아닌 책의 첫머리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를 쓸 수 있었다. 또한 어머니의 사진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센 강가에서 찍은 사진 하나에서는 어머니가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다. 흑백사진이지만 어머니의다갈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알파카로 지은 정장의 광채가 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어머니에 관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어머니는 내게 진정 중요했던 유일한 여자이고, 2년 전부터는치매 환자였다. 기억의 분석을 보다 쉽게 해줄 시간적거리를 확보하자면, 아버지의 죽음과 남편과의 헤어짐이 그랬듯 어머니의 병과 죽음이 내 삶의 지나간 흐름속으로 녹아들 때를 기다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다른 것은 할 수가 없다. - P18

이것은 쉽지 않은 시도이다. 내게 어머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니는 늘 거기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 - P18

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어머니는 난폭했다>, <어머니는 전부를 다 불사른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뒤죽박죽 떠올리는 것. 그렇게 해서 내가 되찾게 되는 것은내 상상이 만들어낸여자, 며칠전부터 내 꿈속에 나타나,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시한 번 삶을 사는 나이 불명의 여자와 동일한 그 여자일 뿐이다. 또 내가 붙들고 싶은 여자는 나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여자, 노르망디의 소도시 촌구석에서 태어나 파리 외곽 지역의 병원에서 운영하는노인병 전문 의료 센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실제의 그여자이기도 하다.  - P19

보다 정확히는,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들도, 나의 기억도, 가족들의 증언도 내게 진실을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길 바란다. - P19

이브토는 루앙과 르아브르 사이의 바람 부는 고원에 세워진 추운 도시이다. 그곳은 금세기 초만 해도, 대지주들이 장악한 순수 농업 지역에서 상업과 행정의중심지였다. 농가의 짐수레꾼이었던 외할아버지와 집에서 직물을 짜던 외할머니는 결혼하고나서 몇 년 뒤그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둘 다 3킬로미터 떨어진 옆마을 출신이었다. 그들은 역 근처 카페들이 드문드문해지는 곳과 유채 밭이 시작되는 곳 사이, 철길 건너편외곽의 경계가 불분명한 시골 지역에 안마당이 있는 작은 단층집을 빌렸다. 나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1906년여섯 아이 중 넷째로 태어났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지 않았단다.」 그 말을 할 때 내비치던 자부심.) - P20

그녀는 살림을 알뜰하게 살았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돈으로 가족들을 먹이고 입혔고, 미사를 보러 가면구멍도 나지 않고 더럽지도 않은 옷을 입힌 아이들을나란히 앉혀 놓았고, 그럼으로써 시골뜨기라는 느낌을 갖지 않고 살아가게 해주는 자존감을 추슬렀다.
그녀는 셔츠의 목과 소매 깃을 뒤집어서 한 번 더 사용했다.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유 위에 뜨는막과 굳은 빵으로는 케이크를 만들었고, 장작을 때고남은 재로는 빨래를 했고, 프라이팬에 남은 열로는 자두나 행주를 말렸고, 아침에 사용한 세숫물은 그날 손을 씻는 데 사용했다. 가난을 덜어 주는 그 모든 행위들을 앓, 여러 세기에 걸쳐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전해 오는 그 지식이 내게 와서 멈춘다. 나는 관련 문서정리자에 불과하다. - P22

열두 살 반에 학교를 떠나도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는 것이 일반적 관례." 마가린 공장에 입사한그녀는 그곳에서 추위와 습기로 고생했고, 젖은 손은겨울 내내 동상에 걸려 있었다. 그러고 나니 마가린쪽으로 다시는 <눈길을 돌리기도 싫었다. 따라서<꿈 많은 청소년기>와는 거리가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토요일 밤을 기대함, 모드 잡지인 ‘르 프티 데 - P26

코드 라 모드』*와 백분(白)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남기고 어머니에게 월급 전부를 갖다 바침, 정신없이 깔깔거림, 미워함. 어느 날 작업반장의 목도리가기계 벨트에 말려 들어갔다. 누구도 그를 도와주러 달려가지 않았고, 그는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만 했다.
내 어머니는 그 사람 옆에 있었다. 노동 소외에 버금가는 중압감을 겪었던 게 아니라면 그 사실을 어떻게받아들이겠는가? - P27

여자에게 결혼이란 삶 또는 죽음이었으니, 둘이 되어 보다 쉽게 궁지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일 수도 있고 결정적인 곤두박질로 끝날 수도 있다. 따라서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남자를 알아볼 수 있어야만 했다. 당연히,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당신을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촌구석에서 암소 젖이나 짜게만들 땅 파는 사내는 퇴짜, 나의 아버지는 밧줄 제조공장에서 일했고, 키가 크고 풍채가 근사했으며, 제법<멋쟁이였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가정을 꾸릴 생각으로 월급을 차곡차곡 모았다. - P32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서그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가 보다.


두 달 전, 종이 위에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라고 쓰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그 뒤로,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고, 심지어 만약 그문장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면 내가 그 문장을 읽으면서 느낄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을 품고서 읽어 낼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병원과 노인요양원이 위치한 구역으로 가는 것이나, 어머니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들이 잊고 있는 줄알 - P41

았는데 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처음에는 내가 글을 빨리 쓰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무슨 말을 어떤 순서로 해야할지, 마치 어머니에 관한진실 - 그 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모른다 - 을 유일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순서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단어들을 고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할지에 대해 궁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게는 그러한 순서의 발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 P42

예의범절들(예의범절에 어긋나-어머니는 배움는 것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 관례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 요즘 벌어지는 일들,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 최신상영작(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
공원의 꽃 이름들 ㅡ을 열망했다. 누군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면 호기심 때문에, 자신이 지식을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주의 깊게 들었다. 정신적으로 향상된다는 것, 그녀에게 그것은 우선 배우는 것이었고(그녀가 말하기를, <정신을 풍요롭게 해야 한단다>), 그 어떤 것도 지식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책이 그녀가 유일하게 조심스럽게 다루는 물건이었다. 책을 만지기 전에는 손을 씻었다. - P56

이 글을 쓰면서 때로는 <좋은〉 어머니를, 때로는<나쁜 어머니를 본다. 유년기의 가장 먼 곳에서부터올라오는 이 흔들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어떤 다른 어머니와 내가 아닌 어떤 다른 딸의 이야기인 것처럼 묘사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가장객관적인 방식으로 글을 써나가고 있지만, 내게 몇몇표현들은(〈그러다가 네게 불행한 일이 닥치면!〉) 추상적인 다른 표현들(예를 들자면 <육체와 성의 거부>)과는 다르게 객관적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열여섯 살 때 꼭 그랬듯이 여전히 의기소침한 기분을 느끼고,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미쳤던 그 여자와 할례 시술사가 클리토리스를 절제하는 동안 등 뒤로 어린 딸아이의 팔을 꼭 붙들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머니들을 순간적으로 혼동한다. - P62

사람들은 내가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어머니가 살아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이다. 가끔씩 집에서 어머니가 소유했던 물건들과 맞닥뜨리는 일이벌어진다. 그저께는, 밧줄 제조 공장에서 기계 때문에휘어 버린 손가락에 끼었던 골무였다. 곧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의식이 밀려들며, 나는 어머니가 결코 다시는 존재할 수 없는 진짜 시간 속에 놓인다. 그러한 상황에서 책을 낸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어머니의 - P69

죽음이라는 의미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소를 지으며 <다음 번 책은 언제쯤 나올 건가요?> 묻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은 욕구.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해도 내가 결혼하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속해 있었다. - P70

그녀는 늘 소통하고 싶은 욕구는 지니고 있었다. 언어 기능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귀가 맞는 문장들. 발음은 정확하나, 그저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상상의 세계에만 복종하는 단어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아닌 삶을 꾸며냈다. 파리에 가기도 했고, 금붕어 한 마리를 사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남편의 무덤으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씩 인식했다. 「내 상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봐 두렵구나 혹은 기억했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 - P102

그녀는 또 다른 겨울을 났다. 부활절 다음 일요일에개나리를 안고 그녀를 보러 갔다. 날이 우중충하고 추웠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식당에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내게 웃음을 보냈다. 방까지 휠체어를 밀고 갔다. 화병에 개나리를 가지런히 꽂았다. 곁에 앉아 초콜릿을 먹으라고 주었다. 병원 직원들이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갈색 털양말을 신기고, 삐쩍 마른 허벅지가 내보일 정도로 너무짧은 가운을 입혀 놨다. 손과 입을 씻겨 줬는데, 피부가 미지근했다. 어느 순간엔가 그녀가 개나리 가지들을 잡으려고 했다. 얼마 있다가 그녀를 식당에 데려다줬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자크 마르탱이 사회를 보는「팬들의 학교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는 다음 날 죽음을 맞았다. - P106

지금은 2월 말이고, 비가 잦고, 날씨가 제법 온화하다. 오늘 저녁 장을 보고 난 뒤 노인요양원에 가봤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건물은 보다 환하고, 거의 안락해보였다. 어머니가 있던 방의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가 있던 곳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구나.>처음으로 깜짝 놀라며 해본 생각이었다. 21세기의 언젠가, 내가 이곳이든 혹은 다른 곳에서든 냅킨을 폈다접었다 하면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들가운데 한 명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 P107

몇 주 전, 고모 한 분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사킬 때 공장 화장실에서 만남을 가졌다고 얘기해 줬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금, 그녀가 살아있을 때 그녀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 말고는 더 알고 싶은 것이 전혀 없다.
그녀의 이미지는 다시, 내가 유년기에 그녀에 대해서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그 이미지가 되어 가고 있다. 내 위로 드리워진 커다랗고 희뿌연 그림자.


그녀는 시몬 드 보부아르보다 일주일 앞서 죽었다. 그녀는 받기보다는 아무에게나 주기를 좋아했다. - P109

글쓰기도 남에게 주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역사가 되어야 했다. - P110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1986년 4월 20일 일요일~1987년 2월 26일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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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밀턴만이 울프에게 당혹감, 소외감, 열등감, 다소간의 죄의식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스어나 형이상학 같은 지적인 남성성의 다른 요새들처럼, 밀턴은 울프에게 엄청나게 복잡한 대수학 방정식, 자신이 풀어야 한다고 느끼는(그러나 풀 수는 없는 ) 문제다. (‘나는 많은 수수께끼를 풀지 않은 채 남겨두었다.‘) 동시에 밀턴의 대작은 사물에 대한 울프 특유의 여성적인 인식과는 거의 또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보인다. (어떤 위대한 시가 우리의 기쁨과 슬픔에 그토록 적은 빛을 들여보낸 적이 있었던가?) 더 나아가 울프는 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어로 밀턴의 시를 칭송한다. 그 모든 것은 얼마나 매끄럽고 강렬하며 정교한가!) 그리고 (울프가 애호하는 양성적인 셰익스피어 드라마가 아니라) 밀턴의 운문이 ‘정수이며, 대다수 다른 시는 그것을 희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울프의 느낌은 아마도 밀턴시의 깊은 곳에 ‘남자가 생각하는 우주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위 - P365

치, 신과 종교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요약되어 있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울프가 공손하게 결론을 내린 이유를 설명해줄것이다. 우리의 여기에서 울프가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를 빌려 말하자면 ‘그녀는 분명 여성으로서 말하고 있다. 울프의 의식적 무의식적 진술 또한 분명하다. 밀턴의 악령은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밀턴의 우주론이고, ‘남자가 생각했던 것‘에 대한 그의 시선이며, 대부분의 다른 여성 문인들처럼 울프가 서구의 문학적 가부장제의 핵심에서 감지했던 문화적 신화에 대한 밀턴자신의 강력한 표현인 것이다. - P366

여성적 오염에서 격리된 ‘옥스브리지‘의 전형적이고 가부장적 도서관의 심장부(말하자면 도서관들의 천국)에는 권력의 언어가 있는데, 그 언어는 밀턴의 것이다.
비록 《자기만의 방》이 그저 밀턴의 글과 그것의 여성 혐오적맥락이 지닌 비밀스럽지만 치명적인 힘을 암시한다 하더라도 울프는 문인으로서 생애 내내 밀턴을 비판적이기보다) 허구적으로 이용했을 때나 이용하지 않았을 때나 그를 무서운 ‘억압자‘로 분명하게 규정했다.  - P367

샬럿 브론테는 틀림없이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매우 수준 높은 문학비평가였던 울프는 밀턴의 문화적 신화를 의식적인 동시에 아주 불안해하며 상속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여성 작가들 가운데 밀턴의 위협적인 특징, 특히 그가 여성의 운명에 미친 영향이 해로운 (동음이의어를 사용하는 블룸의재치를 빌려 말하자면) 인플루엔자로 여길 만큼이었음을 가장 잘 인식했던 사람은 브론테였다. 『셜리』에서 브론테는 특히가부장적인 밀턴의 우주론을 공격했다. 브론테는 여성에게 해로운 이 우주론 안에서 자신의 여자 주인공들이 남성 지배적 사회 때문에 아프거나 고아가 되거나 굶어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밀턴은 위대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사람이었는가? (그이름이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셜리 킬다는 질문한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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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철은 전시장으로 가는 길에 폭죽을 샀다. 가게에 들어가서도 폭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잠시 멈칫했다. 폭죽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폭과 죽, 뭐 이렇게 이상한 단어가 다 있어. 용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번 폭죽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용철은 단어를 자주 잊어버렸다. 잃어버린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최근 들어 더욱 그랬다. 쉬운 단어부터 어려운 단어까지, 맥락도 공통점도 이유도 없었다. 폭죽처럼, 발코니라는 말도 잃어버렸다. 어떤 날은 배꼽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배꼽을 들여다보면서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강이라는 단어도 잊어버렸고, 뒤꿈치라는 말도 잃어버렸다. 단어를 떠올리려고 하면 수십만 개의 단어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몰려들었고, 용철은 단어들의 더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단어와 단어가 서로 얽히고는 알수 없는 형체로 변했다. 용철은 단어를 떠올리려던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멍한 얼굴로 단어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민희는 병원에 가보라고 조언했지만 용철은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무시했다. - P165

저도 자주 그래요.
그래요?
혼자 병명도 지었어요.
뭐요?
명사 분실중,
그러고보니..…
그렇죠?
명사만 잃어버리네요.
원래 그런 거래요.
뭐가 원래 그래요?
명사부터 잃어버리고 다음엔 형용사와 동사를 잊어버리고……정전될 때처럼 완전 깜깜해지죠?
맞아요.
하나씩, 결국 다 잃는 거래요?
안 그런 사람도 있겠죠.
그럼 저는 분실증 초기 환자인 거네요. 다행이다.
위로가 되죠?
무척.
언제부터 그랬어요?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 안 나요.
힘든 시기를 통과한 뒤에 그럴 수 있대요. - P171

이것은 아마도 마지막 기록이 될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기억의 상한선을 미리 정해놓아야 할 것 같다. 무작정 기억을거슬러올라갈 수는 없다. 기억은 시간의 순서대로 늘어서 있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관계없는 내용들이 링크된 것도 많으므로 기억을 골라낼 때는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내야 한다. 기억의 상한선을 넘지 않으려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집중해야한다.
상한선은 아마도 2개월 전이 될 것 같다.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2개월 전, 도시 가득 눈발이 흩날리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물론 그 이전의 기억들이 섬광처럼 번쩍일것이다. 지금은 10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지만, 때로는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들이 순간순간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오를 것이다.  - P201

릴케의 책 『말테의 수기 첫 문장이 어렵풋하게 떠오른다. 정확하게 떠올릴 수는 없다. 찾아볼 곳도 물어볼사람도 없다. 내 기억으로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오지만 실은 여기에서 죽어갈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오직 시작 부분만 떠올랐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정확히 그렇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카고를 떠나 살기위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여기에서 죽어갈 것이다. 죽어갈것이다. 라고 소리내어 발음하면 오히려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기도 한다. 죽어갈 것이다. 곧 죽어갈 것이다. 인간이란, 스스로 죽을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 동물인가.
이제 더이상 기억의 상한선을 넘지 않겠다.  - P204

비행물체를 이용해 땅에다 구멍을 만든 게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지능이 있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 존재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도 확실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오는 크리스마스이브를 공격 날짜로 정했을 리 없다. ‘인간적인‘ 지능이 있다는 근거는 그 외에도 많다. 땅바닥에 구멍을 내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간 것도 그렇고, 저녁이 되면 작은 불빛을 내어 사람들이 잘 걸어갈 수 있게 한 것도 그렇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구멍이 없는 쪽으로 계속 이동해야 했다. 인간들이 소나 양을 한쪽으로 몰아가듯, 비행물체는 인간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구멍에 빠지거나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 P206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내가 만들었던 4년 일기 애플리케이션 역시 사랑하려는 사람들, 꿈 꾸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만든 애플리케이션의 ‘편리‘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일 수도 있음을 이제는 알게 됐다. 그녀를 만난 다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기 시작했다. - P222

한 남자가 주먹으로 맞은 다음 뒤로 떠밀리며 검은 구멍 쪽으로비틀거렸다. 나는 남자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정화씨의 몸을 붙들었다. 정화씨는 손을 뻗어 남자를 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이 영원히 기억날 것이다. 철수세미로뇌를 박박 문질러도 그 장면만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정화씨의 오른손을 잡았고, 나는 정화씨의 몸을 붙들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아야겠다는 남자의 필사적인 힘이 정화씨를 붙들어야 한다는 나의 필사적인 힘보다 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책은 끝이 없지만, 죽음 앞에서의 자책은 가벼울 뿐이다. 자책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책뿐이다.  - P227

나는 그녀가 사라져간 검은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암흑 속에서 무언가 나타나나를 잡아챌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두려웠다. 누가 나를 검은 구멍 속으로 떠밀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이것은 진심이다. 나는 그녀를 따라 곧장 검은 구멍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검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며 그녀의 손을 잡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을, 그녀를 안아줄 것이다.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짧은 순간 그녀와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쿡쿡 쑤셔온다. 그녀는 검은 구멍 속으로 빠지면서 위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내 얼굴의 윤곽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내 얼굴을 몸에서 뜯어내버리고싶다. - P228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섬으로 헤엄쳐가다가 물에 빠져 죽거나 바닷속에서 얼어 죽거나 여기에 남아서 미친 사람들에게 맞아 죽거나 아니면 구멍 속으로 떨어져 죽을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죽기 전에 뭐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수첩과 볼펜이 긴요하게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중간에 버릴까도 생각했던 물건들이다.
이 기록은 내 생각과 달리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읽을 사람도 없을 것이고, 누군가 혹여 읽는다 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진실도 없고 역사도 없다. 한 개인의 변변찮은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기록은 그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녀가 했던 말들, 그녀의 생각들을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229

나는 관계를 부수는 사람이다. 고리를 끊는 사람이다. 폐허 위에서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차선재의 일기장 맨 앞에는 그말들이 적혀 있었다.
매일 새벽 3시, 모든 소음이 아래로 가라앉으면 차선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에다 뭔가적기도 하고 낙서를 하기도 했다. 의미 없는 말들을 주로 적었다.
연필이 하는 말을 따라다녔다. 의자, 창문, 형광등, 새벽의 자전거소리...... 들리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적었다. 의미 있는 말을 적는게 무서웠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새벽 3시부터의 시간이 차선재를 버티게 해주었다. 6시가 되면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면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학교에서는 무의미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 P265

차선재는 서랍에다 〈Station>을 넣어두었다. 지난 시간을 다시태어나게 할 마음은 없었다. 돌아갈 수 없었다. 책상을 정리하고스케치북을 펼쳤다. 만년필로 원을 그렸다. 원 속에 새로운 시간이흐르게 하고 싶었다. 다이얼과 문자판을 그려넣는 중에 제목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제목을 생각하지 않고 번호만 붙인 작품만 만들었는데, 갑자기 제목이 떠올랐다. 그래, 요요로 하자. 가까워지고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차선재는 만년필로 새로운 원을 그렸다. 스케치를 하고 또 새로운 원을 그렸다. 원에다 계속 또다른 시계를 그려넣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였다. 새벽 3시의 시계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방에서, 대학교 때의기숙사에서 그렇게 자주 만났던 시간인데, 한동안 그 시간을 잊고지냈다. 시침과 분침이 단정하게 90도의 각을 만들고 있었다. 시침과 분침 사이를 초침이 막 지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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