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펑의 개구쟁이 1
라트 지음, 김경화 옮김 / 오월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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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희들 만화책 좋아하지?

나도 정말 좋아해.

그래서 오늘은 재미있는 만화책을 한 권 보여줄게.

‘캄펑의 개구쟁이’.

 

말레이시아판 ‘짱뚱이’라고 하면 될까?

캄펑이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라 만화가가 된 라트 아저씨의 어릴 적 이야기야.

 

근데 너무 너무 신기한 게 우리 나라 시골 풍경과 하나도 다르지 않단다.

공기놀이며, 자치기, 연날리기 등 우리 어른들이 예전에 하고 놀았던 놀이들이 그대로 나온단다.

추수하기 전 참새들을 ?기 위해 깡통을 건 줄을 흔드는 모습은 어릴 적 고향 마을 풍경과 똑같아,

허수아비가 쓰고 있는 모자가 우리식 밀집모자가 아니라, 말레이시아나 베트남에서 볼 수 있는 꼭지가 뾰족한 고깔모자라는 정도가 다른 점이지.

 

더 많이 가지는 것, 더 빨리 움직이는 것이 결코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아름다운 만화책이야.

 

요즘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앞산을 뚫어 사람들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고 난리야.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파괴된 생태계만큼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정말 궁금하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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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달라요
김남선 지음, 정승각 그림 / 사계절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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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로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교육을 하고 싶은 어른들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성교육용 지침서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청소년 성교육용 책과는 다르게, 눈에 뜨이는 차이가 하나 있었다. 

  시중의 서점에서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을 위한 성교육을 한답시고 적어놓은 책들은 거개가 다 두 가지 편향이 있다.

  주로 어른들을 위한 것인 경우에는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성윤리나 도덕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정리해 이야기하는가를 적어 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어른들의 잣대로 청소년들의 성문화를 점잖게 타이르는 근엄한(?) 책들인 것이다. 거기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순결이란 말 하나만으로도 그것들이 얼마나 전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쓰여진 책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교육용 성지침서가 이런 형태들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성교육이란 것을, 청소년들 가운데 누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이해가 가고도 남을 일이다.

  또 하나, 청소년들을 위해 만든 성교육지침서라는 책들이다. 이런 책은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있다.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그 책들을 펼쳐 보면 온통 스포츠 신문 가쉽거리로 쓰일만한 내용들을 모아 놓은 듯하다. 한마디로 성이란 말을 상품화시켜 흥미거리를 만들어 놓은것이다. 이런 책들이 제대로 된 성을 가르쳐 줄 리 만무하다. 오히려 성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키득거리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책들은 아이들이 서로 다른 성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게끔 하지 못한다. 이성에 대해 야릇한 환상과 오해들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책들하고는 출발 지점과, 목적지가 다르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으면서 궁금해 하는 것과, 고 또래 집단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성에 대한 고민들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쓰여진 성교육 지침서이다. 그리고 그런 흥미를 같이 공감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성에 대해서 건강하고 밝은 사고를 할 수 있게끔 충분한 성가치관을 설명하고 있다.

   또 하나 이 책의 장점을 들라면 아이들에게 성을 가르쳐야 할 어른들이 어떤 가치관으로 성에 대해 접근해야 할 지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를 없애 놓았다고 하겠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났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 것들을 사춘기 때도 알았더라면 내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는 사춘기를 어떻게 보냈던가......

 가슴이 생기고, 음모가 생기고, 초경을 하게 되고...... 놀라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특히 초경을 했을 때 그 긴 기간과 찝찝한 기분 때문에 여자로 태어난 것이 너무도 싫었다. 이 힘든 걸 앞으로 계속 한 달에 한 번씩 해야 한다니. 딱 죽고 싶었었다. 어?거나 초경과 함께 찾아온 내 사춘기의 방황은 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 찍어 놓았다. 내게 성이란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얼마 뒤 그 감정에서 놓여나게 되자 이젠 정신적인 성 변화가 일어났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나자신을 부정하게 된 것이다. 이성교제,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리 건전한 교제는 괜찮다는 말을 갖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그 감정 자체로 왠지 껄끄럽고 부끄러운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얘기해 보지 못하고, 숨기고, 또 나름대로 합리화 하기 위해 하이틴 로맨스나 순정만화에서 보던 스토리를 떠 올리며 나름대로 감상에 젖기도 했다. 어찌 나 뿐이었을까, 이렇게 사춘기를 보낸 아이들이.

  우리가 지금 알게 된 것들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안타깝다.

  쓸데 없는 고민들로 힘들어 하던 시기, 더 생산적인 일에 내 삶들을 바쳤더라면 내 인생이 얼마나 풍요로워졌을까를 생각하니 적어도 내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나 같은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청소년들에게 사춘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변모하는가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습되어 얻어지지 않고 어느날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성은 학습되면 될 수록 더 올바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해 보자. 그러면 질문은 하나다.

 성.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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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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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자의 글은 믿지 않는다.'

20대 초반 작가지망생이었던 내 일기장에는 어느날 그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선언이지만, 과연 그 시절의 생각을 단순한 치기로만  넘길 수 있을까? 난 지금도 공지영보다는 공선옥의 작품이 수월하게 읽히고, 더 쉽게 공감이 되는 걸... 

그동안 공지영의 글은 빼놓지 않고 읽었지만 늘 뒤끝이 좀 개운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작가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해서 부채감만으로 글을 쓴다는 느낌, 자기 것이 아닌 세상을 굳이 선망하고, 자신의 삶을 부정한다는 느낌,

한 때 우리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만이 존재하던 시절, 계급만이 담론이던 시절을 나는 기억한다.  그 시대의 사랑은, 그 시대의 종교는, 그 시대의 예술은, 늘 삶의 이류로 취급당했다. 그러다 보니 내 속에서 일어나는 솔직한 고민과 번민은 늘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자기 검열을 받아야만 했고, 스스로 고민들에 붉은 줄을 그은 날은 소시민적이고 나약한 자아를 호되게 비판하곤 했다.          

물론 내 청춘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당시의 내 생각과 행동은 나로서는 시대의 물음에 최선을 다해 답했던 시간들이었으니. 그 때의 버거운 생각들을 싸그리 비난하기엔 시대가 지운 짐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아마 추측하건데, 공지영도 시대와 불화하는 자아를 고통스럽게 숨죽이며 살았던 젊은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글에서 그러한 조짐을 읽었다. 그래서 나와 맞지 않는 서걱거림이 있었지만 늘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안타깝고, 이 사람이 조금더 편안하게 글을 쓰길 바랬다. 

그러다가 '수도원 기행'에서 이 작가가 달라지는 게 보였다. 드디어 자기 검열 없이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구나 하는 느낌...  그가  시대의 아픔이나 타인의 아픔이 아닌,  자신의 아픔을 보기 시작했다는 생각... 

그 때 받은 느낌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이번 작품은 한층 더 깊어진 내면이 담겨있다.  그가 시대의 부채감을 떨치고, 자기의 내면에 솔직해지고, 더 깊이 자기 속으로 내려가서 끌어올린 한바가지 시원한 물 같다. 나도 모르게 작가의 치열한 글쓰기에 오래도록 박수를 보냈다. 

타인의 저울로 잴 수 있는 고통만이 진정한 고통으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깃털의 무게도 잴 줄 아는 사람, 그래서 그 깃털에 눌려 질식하는 삶도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주는 사람. 작가는 그런 사람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작품을 통해서 공지영은 진정한 작가가 되었다고 감히 말하련다.

사형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더 본질적으로 사람을,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일, 그게 인생이 아니던가. 한 묶음의 기도서같은 글, 한 편의 잠언같은 글, 한 권의 철학서...

오랜만에 아름다운 글을 만나서 실컷 울었다.

그가 이 글을 쓰는 시간이 행복했다고 했지, 그의 행복한 시간...

이 책을 읽는 내내, 눈물 흘리며 우는 내내 나도 행복했다.  나의 행복한 시간...

그래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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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 개정판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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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바람이 좋다.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다. 함양 상림의 숲을 걷고 싶다. 문경세재를 오르며 바람을 느끼고 싶다. 담양 대나무밭에 부는 바람소리를 듣고 싶다.

떠도는 것, 스쳐가는 것, 머무르지 않는 것, 소유할 수 없는 것... 바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러고 보니 바람의 이미지는 딱 바람답다.

한비야에게 바람의 딸이란 이름이 붙은 건 더할 나위없이 맞춤하다. 꿈을 찾아서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행복할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질 까닭이 없는 사람, 누군가에게 특별히 소유당하지도 않지만 그가 스쳐지나간 모든 사람들에게 향기를 떨구는 사람...  한비야는 정말 바람같은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한비야의 글을 좋아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머리를 짜내지 않은 글이라서 그럴까? 그네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냥 마냥 행복해진다. 그건 아마 그가 늘 행복한 삶을 찾아서 쉬지 않고 걷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나도 걷는 걸 좋아한다. 여행을 할 때 늘 걸어서 옮겨 다닌다. 기차 여행도 좋고, 자전거 여행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 두 발에만 의지하는 도보여행은 여행의 참묘미에  철학적 사색까지 보탠다. 

인생이란 그렇지 않나? 아무리 하고 싶은 게 많고, 욕심이 나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나 혼자 해 낼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적어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멀리 있는 것을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도보여행을 할 때도  가방 하나에 집어 넣을 수 있는 짐은 욕심을 부릴려고 해 봐도 부릴 수가 없다. 그 욕심을 온전히 내 두 발이 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또 인생은 멀리 있는 무지개 보다 가까이 있는 소소한 일상들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  길을 걸을 때도 무리하게 저 언덕 너머에 있을 새로운 길만  좇다간 길섶에 핀 쑥부쟁이도, 여뀌꽃도 놓쳐버린다. 걸을 땐 눈을 가까이 두어서 나와 함께 이 바람을 맞고 있는 것들을 즐겨야 한다. .

세상의 성공과 멀어보이는 사람들의 삶이 오히려 더 많은 아름다운 사연과 이웃들을 품고 있듯이, 목표한 만큼 길을 가지 못한 날이 오히려 본 것도, 들은 것도, 만난 이도 많은 행복한 날이 아닌가. 

이 책은 꿈을 갖게 한다. 한번쯤은 우리 땅을 걸어서 둘러보고 싶은 꿈, 행복을 찾아서 훌쩍 떠나고 싶은 꿈... 지금 당장 이루지 못할 꿈이면 어떠랴. 등산화만 하나 장만하고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꿈이면 어떠랴. 그 꿈이 나를 내내 행복하게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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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강명관 지음 / 길(도서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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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수월하게 술술 넘길 수 있었던 책이다. 다 읽고 나니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는 제목이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게 제목이 내용과 맞춤하다.


 인권, 전쟁, 계급...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문제들을 고전을 끌어와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니 결국 ‘고전’ 보다는 ‘현실’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저자의 따뜻한 눈이 세상의 곳곳을 스치면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지고 있다. 특별히 어렵지도, 힘들지도 않으니, 그냥 조근 조근 풀어내는 그 얘기를 가만히 듣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편안하게 읽어갈 수 있었던 이 책에서 딱 두 군데 언짢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굳이 짚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나 좋은 책이기에 더욱 걸리는 부분이었다. 저자에 대한 나의 오해일 수도 있으나 책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권리이므로 짚어보고 싶다.  



 ‘고문, 미국, 이라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벼슬 높은 양반이 패물을 잃어버려 종을 추달하였다. 종은 매를 이기지 못해 자기가 훔쳤노라고 자백을 했다. 그 종을 가두고 난 뒤 양반은 두 아들을 불러 잃어버렸다는 패물을 내어보였다. 놀라는 두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무개가 매를 못 이겨 자복한 것이라며, 억울한 백성이 많을 테니 너희도 벼슬길에 오르거든 매로 사람을 다스리지 말라고 한다. 두 아들은 나중에 아버지의 말을 새겨들어 훌륭한 목민관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저자는 고문의 문제를 짚고 있다. 근데 나는 훌륭한 목민관을 위해 가르침을 준 그 억울한 종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을 테니 저자가 굳이 그 종의 인권을 들먹이는 것은 좀 우스워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전체 맥락을 생각한다면 어째서 그 억울한 종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매우 불쾌하다.


 두 번째 불편함은 ‘칼날처럼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는 근본주의는 인간을 옥죈다’를 읽으면서 들었던 감정이다. 


 도덕주의자 조광조를 얘기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시대의 성매매에 나는 찬동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조광조의 그 금욕적 태도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바람직한 인간의 성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내내 무언가 묵직한 것이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다. 조광조의 금욕적 태도의 반대가 성매매라... 참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여성인 내게 금욕의 반대는 단순한 쾌락을 위한 자유로운 성관계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성매매를 통한 것은 아니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금욕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란 말인가? 저자의 본의를 일부러 비딱하게 해석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이 글은 너무도 위험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내가 고전을 즐겨 읽고 감동하는 것은 과거의 문장들이 남성의 것이기 이전에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을 읽고 전하는 사람이 남성의 눈만을 가지고 사회를 본다면 얼마나 위험한가?


 그러나 이 책은 재미있다. 저자의 솔직담백한 글 솜씨도 참으로 매력적이다. 부디, 이런 찜찜함이 나 하나에 그쳐서 이 책의 매력이 감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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