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마음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고결한 감정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고결한 감정조차도 때로는 세태를 따라서 변질되는 것 같아서 씁쓸할 때가 있다.
지난 주에 사전에 약속없이 일하는 동료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에게 집주인은 차 한 잔과 함께 사과를 깎아 내 놓았다. 그런데 사과 접시를 내려 놓으면서 하는 말이,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과일이 이런 것밖에 없네.”
순간, 사과에게 귀가 있다면 얼마나 속상했을까 싶어서 내가 되려 무안해진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머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느 교육장에 강의를 하러 갔더니, 미리 와서 강사를 기다리던 한 분이 내가 강사라고 소개하자 웃으면서 얘기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옷을 이렇게 대충 입고 와서……”
강의하러 다녀도 특별히 옷을 갖춰 입지 않는 나도 덩달아서 미안해해야만 하는 건가?
비단 이런 일 뿐만 아니더라도 무수하게 만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나는 늘 미안함이 오히려 오만함과 뻔뻔함의 다른 얼굴인 것 같아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그 사과는 농부의 손을 거쳐 대자연의 은혜를 입어서 우리 앞에 놓여졌다. 그런데 미안하다니. 그 옷 또한 숱한 노동자들의 손을 거쳐서 우리 몸을 감싸주는 고마운 존재인데, 그 옷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하다니.
미안해해서는 안 되는 일에, 굳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속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를 추켜 세워주어야 자신이 예의바른 사람으로 분류될 것이라고 믿는 데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계산 섞인 인사를 듣고 나면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다.
적어도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그렇게 뻔뻔스럽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인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있는가? 아무리 돈이 넘쳐나도 그 돈을 입고 걸칠 수는 없지 않는가? 누군가의 소중한 노동의 결과물들을 싸구려라고 얕잡아 보고 함부로 ‘미안함’을 남발하는 사람들의 그 사고방식이야말로 ‘싸구려’스럽다.
내 먹을 거리, 입을 거리들이 아무리 호사스러워도 그 속에 담겨 있는 내 인생은 혹시 ‘싸구려’가 아닌지 한 번 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