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처럼 혼자 살고 싶은데, 자신이 없어요.”
이십 대의 후배들이 나에게 곧잘 하는 소리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 궁금해진다. 뭐가 그렇게 자신이 없다는 건지. 그래서 되물어보면 비슷한 답변이 돌아온다.
“경제적으로 혼자서 꾸려나갈 자신도 없고, 주위 시선들을 견뎌낼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 외로운 걸 견딜 자신이 없어요.” 

 

그이들의 걱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88만원 세대로,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그들이 혼자서 삶을 꾸려간다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또, 한국 사회가 가진 가부장적 시선들과 전체주의적 요소들을 생각하면 혼자 사는 여자의 삶이 쉽게 용인되는 사회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일 터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 외로움을 견딜 자신이 없다는 말은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외로움은 견디어내고 이겨내야만 하는 건가? 나는 외로움보다는 오히려 너무도 친밀한 관계를 견디어내기가 힘들다. 가족들이 내게 가하는 사생활 침해와, 절친한 친구들의 감정적 폭력들이 견디기 힘들어서 ‘친밀함’이라는 책까지 사보며 문제해결을 위해 매달린 적도 있다. 외로워서 힘들어본 기억은 한번도 없지만, 주위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고, 이해해달라고 요구하고, 완전한 합일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바람에 잠적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과잉 상태의 친밀함이 넘쳐나는 사회 속에서 나는 가끔 질식할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외로운 것을 그토록 두려워할까? 외로움은 왜 극복해야할 무엇, 그대로 방치하면 큰일 날 병쯤으로 치부될까? 어찌 보면 생을 이어가는 뭇 생명들에게 외로움은 존재조건일 수도 있는데…….



모든 생명은 외로울 권리가 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며, 외로움에 겨워 온갖 사유를 할 권리가 있다. 혼자 살아가는 것은 외로울 권리를 온전히 누리는 것이다.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존재감을 오롯이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로움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여성들에게 이 사회는 은근히 협박한다. 외로움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그러니 애당초 혼자 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이야기한 지 팔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은 불가능한 꿈이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갖길 원한다. 관계 속에서 인식되어지는 나가 아니라, 온전한 나를 만나는 방. 사랑하는 이와 밤새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방, 멀리서 온 친구와 술잔을 기울일 수도 있는 방,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쌓아둘 수 있는 방, 삶이 지칠 때는 엎드려 펑펑 울 수 있고, 어떤 날은 즐거움에 겨워서 미친 듯이 웃을 수도 있고,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내 일기를 그냥 던져두어도 되는 방. 



아버지의 방을 벗어나 남편의 방으로 옮기지 않고, 내 방을 꾸며 살고 있는 나는 혼자 살기를 두려워하는 여성들에게 권하고 싶다.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라고.

“그 곳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외롭지 않아요. 아니, 외롭지만 결코 불행하진 않습니다. 그 방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외로움은 충만하기 그지없는 외로움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방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은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다. 우리가 자라면서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워서 일찌감치 내던져 버린 그 방의 열쇠, 그게 바로 외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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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09-19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움과, 고독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것도 어떤 프로그래밍 같단 생각이 들어요. 외로움 예찬, 외로움과 잘 지내기. 이런건 없는걸 보면. 산딸나무님의 글을 보다 나 역시 외로움을 물리쳐야할 어떤걸로 생각하고 있다는걸 느꼈어요. 그런데 대체 외로움이 어떤 상태일까요. 심심함? 허전함? 적적함? 외로움이란것 자체도 애매하네~

산딸나무 2008-09-19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자기랑 노는 시간, 아닐까요?

비로그인 2008-09-1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움을 즐기는 산딸나무님을 봅니다.
별로 할 말 없습니다, 하하.


산딸나무 2008-09-1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나는 요리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통통 칼질을 하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의 간을 맞추는 남자의 뒷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하루는 친구들과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의 남성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요리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럼 요리사랑 사귀면 되겠네.” 한다.

 “아니, 직업적으로 요리하는 사람 말고…….”

 “그럼 취미가 요리인 남자?”

 “웬 취미? 그냥 삼시 세끼 제 밥을 제 손으로 차려먹는 남자.”

 내 대답에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 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연인들끼리 음식을 해서 상대를 초대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자신이 한 요리를 연인에게 대접하는 자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꽤나 로맨틱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게 하나 있다. 여자들이 차린 밥상은 주로 밥과 된장찌개가 기본이 되는 일상적 요리들이다. 늦잠을 잔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서면 여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밥을 퍼고, 된장찌개 뚜껑을 연다. 그녀가 어떤 성격과, 직업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든 그녀는 일상을 요리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그러나 남자들이 하는 요리는 우리가 집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다. 특별한 날, 비싼 돈을 주고 먹는 음식들, 음식의 맛 보다는 분위기를 먹는 그런 음식들이 등장한다. 스파게티, 스테이크 따위에 와인, 촛불……. 거기에 꽃을 안겨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남자들의 요리는 일상이 없다. 그들의 요리에는 늘 이벤트의 냄새가 난다.




 여자들의 요리는 일상, 남자들의 요리는 이벤트……. 아마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이런 공식들이 자리 잡고 있나 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그의 요리에서 일상의 냄새가 나는 남자다. 적어도 자기 밥상은 자기가 차릴 줄 아는 남자, 일상적으로 먹는 하루 세 끼의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남자, 일터에서 자기가 직접 싼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들러서 장을 보고, 가끔 연인이나 친구를 초대한 날엔 ‘오늘은 동태찌개를 끓여볼까?’ 하는 생각을 할 줄 아는 남자. 나는 그런 남자를 사랑한다.

 

 제 밥, 제 손으로 챙겨먹을 줄 모르는 사람은 평생을 남의 노동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렇기에 요리하는 일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자립노동이 아닌가. 그런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그 즐거운 자립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소외라는 의식조차 하지 못 하고 자라왔다. 평생을 제 밥상 한 번 차려보지 못한 인생이 더 근사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남자들의 뇌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내 눈엔 그런 남자들은 제 아무리 돈 잘 벌어도, 제 아무리 근사한 몸을 가져도, 제 아무리 지적이어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가끔 우스개 소리로 ‘제 밥 제 손으로 차릴 줄 모르는 남자의 말과 글은 믿음이 안 간다.’고 한다. 제 입으로 들어가는 밥을 평생 남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주제에 인간을, 정의를, 평화를 얘기하는 남자들은 좀 우스워 보인다.  




 나는 요리를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요리하는 일이 참으로 소중한 노동이란 가치관을 지닌 남자를 좋아한다. 그 가치관을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도, 남성다움도, 몇 푼의 월급도 무시할 줄 아는 남자를 좋아한다.

 혹시 주위에 그런 비혼 남성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이왕이면 시금치 무침과 된장찌개, 고기 넣지 않은 잡채를 맛있게 잘하는 남자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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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08-2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안녕하세요~ 우리 처음 뵙죠? 페이퍼를 한꺼번에 올리시니까 너무 좋잖아요.^^ 저도 요리 잘하는 남자 좋아해요. 저도(또?) 이벤트성 짙은 것보단 이렇게 동태찌개 한번 끓여봐하는 분들이 더 좋구요. 그러고보니 좀 허기지는데요~

산딸나무 2008-08-2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니에님 반갑습니다.
게으름을 이기고 오랜만에 글 올리니까 이렇게 또 새로운 인연을 뵙네요.
님의 서재에 잠깐 가봤어요.
아, 초록의 대나무들... 너무 멋있었답니다.
눈과 귀가 시원해지네요.

비로그인 2008-08-2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이벤트성의 세가지 요리를 할줄 압니다.
김밥, 햄 볶음밥, 스테이크. 하하
아이들이 좋아하지요.

오랜만입니다. 산딸나무님.
저는 쉬는 중이랍니다. 반가워요..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8-08-2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휴가 때 강진 해남을 지나쳐왔는데
그때 한사님 생각이 잠깐 났어요.
 

 

  언제부터인가 나를 보고 애국자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역질이 나도록 싫어하는 나로서는 애국자라는 말이 오히려 모욕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 까닭을 듣고 보니 너무 어이가 없다. 

 그들은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니란다. 출산율이 바닥을 기고 있는 이 시대에 아이를 쑥쑥 낳아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는 게 국민 된 자의 도리인데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여자라서 그렇단다.




 비혼주의자로 살면서 온갖 편견들을 만나봤다. 살림이라곤 손도 까닥할 줄 모른다, 똑똑한 척하면서 제 잘난 맛에 산다, 남자한테 모질게 차인 기억이 있을지도…….

 그런데 이제는 결혼 안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애국자가 아니라니. (정말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보는군.) 처음엔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야길 진지하게 강론하는 사람들을 몇몇 만나고 나니 억울해서라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은 우리 어머니를 종종 할머니로 착각하기도 했다. 어머니로 봐서는 자식 여섯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내 또래 친구들은 70년대 태어난 세대이다 보니 자매, 형제들이 둘, 많아봤자 셋인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새 학년이 시작되면 늘 가정환경을 조사하는 시간이 있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던 그 무식한 인권유린에 마음을 다치지 않은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주 몇 회 섹스를 하는지 묻는 것 보다 더 낯 뜨거운 폭력이었음에도 당시는 선생님이 묻는 대로 순순히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모님이 두 분 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보신 것도, 집에 냉장고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바로 자매, 형제의 수를 묻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자매, 형제가 하나인 사람, 둘인 사람, 셋인 사람까지 묻고는 “손 안 든 사람?”하고 덧붙였다. 그러면 보통 서넛 정도 손을 드는데, 넷이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들은 모두 “우와!” 하며 놀란다. 그런데 내가 “여섯이요.” 하면 반 전체가 술렁인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학교 곳곳을 장식하던 시절이었으니, 아이들의 놀람이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되고, 하루 종일 부끄러워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 아이를 많이 낳는 여자는 무식하고, 교양 없는 여자였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국가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그런 반애국적인 여자가 바로 내 어머니였던 것이다.

   

 아이를 많이 낳았다는 까닭으로 내 어머니와 내가 당했던 정신적 수모가 아직도 생생한데, 그 국가가 이젠 아이를 낳지 않는 나를 보고 교양 없고 이기적인 여자 취급을 한다.

 국가는 늘 여성들의 삶을 그렇게 통제해왔다. 전쟁이 일어나서 남자가 모자라면 일터에서 일하는 씩씩한 어머니를 극찬하며 바깥으로 내몰고, 남자들의 일자리가 모자라면 조신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떠받들어 올려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게 마치 여성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란 듯 꾸미면서.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결혼, 모범적 가정, 성실한 직장인의 모습은 어쩌면 국가와 자본이 만들어낸 매트릭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들어진 행복에 내 삶을 끼워 맞추며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가슴으로 꿈꾸는 일이다. 모범 답안의 행복을 거부하고 내 오감으로 체험하는 행복을 찾아서 떠나는 길, 그 길에서 찾은 삶만이 진짜 삶이다. 그것이 결혼이든, 독신이든, 아이 열을 낳아 키우는 삶이든, 낳지 않고 사는 삶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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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지금보다 더 집중했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 삶에 간섭하거나 부러워하거나 질시하거나 하기에는..
시간이 너머 아깝지요.
시간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암만해도 개인주의자인 모양입니다. 하하



산딸나무 2008-08-2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주의자는 타인을 존중할 줄 알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사님은 개인주의자가 맞을 것 같은데요^^
 

  

 결혼해서 아이를 하나 낳고 무던히 살아가는 언니가 있다. 그이가 요즘 남편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한다. 남편이 일이 너무 많아서 늘 늦게 들어온단다. 그래서 책 한 권 읽을 시간도, 자신과 대화할 시간도, 아이랑 놀아줄 시간도 없이 찌들려 산단다. 술을 마시고 늦느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절대적으로 일이 많은 직업과 너무 성실한 근무태도가 늦은 퇴근의 원인이란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그게 뭐가 문제냐?,며 나만 마음을 다스리면 된대요. 대한민국 남자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근데요, 정옥씨. 나는 정말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돈을 많이 벌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줬으면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 사람과 손잡고 걸어보고 싶어요. 같은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남편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냐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란다.

 “남편도 행복하지 않다고 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일 그만 두면 뭐 먹고 살 거냐고, 그렇게 묻는데 정말 할 말이 없데요. 내가 잘못된 걸까요? 인생이란 다 이런 건데 내가 뭘 모르고 철없이 하는 생각일까요?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삶이 너무 싫어요. 이렇게는 하루도 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늘 씩씩하고 당차서 여린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 언니가 말을 쏟아내면서 결국은 눈물을 보인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는 그만의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똘똘하고 귀여운 후배 하나는 늘 웃으면서 ‘데리고 자지도 않을 남자랑 왜 만나냐?’고 한다. 어떤 선배는 ‘돈도 안 벌어다 주는 남자랑 왜 사냐?’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나름대로 만나는 남자의 기준이 있다. 나는 편지 쓸 때 맞춤법이 틀리는 남자, 내가 사용하는 단어를 부연 설명해 줘야 할 만큼 책을 읽지 않는 남자는 안 만난다. 맞춤법이 틀리는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원고 교정볼 때처럼 머리가 아프다. 내 사유를 신나게 얘기하고 있는데 못 알아듣는 눈치면 강의하는 기분이 들어서 딱 질색이다. ‘글과 말이 안 통하는 남자를 왜 사귀냐? 시간낭비다.’고 생각하는 내가 남자를 만나는 까닭은 내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생활공동체를 이룰 필요가 없는 나의 만남도 이렇게 합당한 까닭이 있는데, 부부가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면 적어도 같이 살아야 할 까닭은 충족시켜 줘야 하지 않을까?. 결혼은 ‘함께 손을 잡고 걸으며 대화하는 남자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와, 결혼은 ‘아이와 아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당장 헤어지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누구 말대로 결혼이 장난이냐?




 살다보면 이렇게 참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을 종종 만난다. 삶이 나를 속일 때…….

 그럴 땐 일단 엉엉 울고 보자. 삶이 나를 속이는 데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웃기는 소리. 삶이 배신 땡기는 날에는 죽도록 울어야 한다. 억울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한없이 분노하고, 절망하며 통곡하는 울음. 그런 울음을 울고 난 다음에야 문제를 해결할 기운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사니까 너만 마음 고쳐먹고 참으라고? 바보 같은 조언이다. 그렇게 삶이 저지르는 배신을 참고 살아가는 그들이 문제이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혹 그들이 그렇게 살아서 진짜 다 행복하다고 치자. 그러나 그 방식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이 세상의 보편적 삶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렇게 행복해질 기회를 무시하며 문제를 덮고, 덮고 하다 보면 어느새 좋은 인생은 다 가버린다.




 문제가 생기는 건 문제가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혹은 인식하면서도 덮어둘 때이다. 문제를, 그로 인해서 생기는 절망을 두려워하지 말자. 절망은 새로운 희망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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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과 손잡고 걸어보고 싶어요.'
자연스러운 소망입니다. 남편이거나 아빠라면 그렇게하지요.
의무감이아닌 순전히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서요.
일때문에 아내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거나, 아이와 놀지 못한다면
일할 필요가 없지요.
저는 일이라는 것이 놀기 위해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은 일, 집은 집..
일보다야 아이들과 노는 것이 백배쯤 재미있지요. 하하

'편지 쓸 때 맞춤법이 틀리는 사람'
저도 안 친합니다. 역시 대화가 힙들겠지요.
하하. 공감합니다.


산딸나무 2008-08-29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그 이야기를 하고 나니
친구들이 저한테 메일이나 편지를 잘 안 쓰는 후유증이 좀 있어요.
 

  

 나는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꽤 많은 편이다. 작게는 영화나 문학 작품을 선택하는 취향부터, 크게는 정치적 성향까지 다수파가 되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간다는 건 한없이 불편한 일이다. 남들 다 읽는 베스트셀러를 거의 읽지 않으니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얘기를 나눌 사람을 찾기 힘들고, 영화를 고르는 취향이 대중적이지 않으니 정말 좋아하는 영화를 스크린으로 보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가는 일을 불사해야 한다. 또, 대구처럼 정치색이 분명한 도시에서 다툼 없이 무난하게 관계를 맺기 위해서 정치적 성향을 숨겨야 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소수자의 정체성 가운데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가 ‘비혼주의자인 나’이고, 또 다른 하나가 ‘베지테리안인 나’이다.

 

 나는 육식을 전혀 하지 못한다. 어릴 때는 고기가 먹는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서, 10대 후반부터는 내 철학과 양심에 부대낌이 덜한 식습관이란 생각이 들어서 기꺼이 베지테리안이란 정체성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는 취향 하나가 나를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 모른다. 외식을 하는 일이 늘 불편하다. 고를 수 있는 메뉴가 한정되어 있다보니, 밥 먹을 식당을 찾는 일부터 힘들다. 그나마 식당을 찾았다 해도 확인 절차가 남아있다. 비빔밥 하나를 시킬 때도 “고기 고명 올라가나요?” 물어야 하고, 국수를 하나 시키려고 해도 “혹시 국물로 고기육수 쓰나요?”하며 물어보아야 한다.


 허나 그런 불편함은 내 선택에 따르는 부록 같은 것이라 여기기에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회식이나, 술자리 등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이다.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가장 흔하게 먹는 것이 각종 고기인데 그걸 못 먹으니, 식사모임 자리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사실, 나는 고깃집에 가서 밥과 깍두기, 상추. 당근, 오이로 밥 한 끼를 때워도 아무 문제가 없다. 다 좋아하는 야채들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고기도 안 먹고 무슨 재미로 사냐고 핀잔주는 사람, 일단 한 번 먹어보라고 계속 권하는 사람, 고기를 안 먹으면 단백질 섭취에 문제가 있다고 친절하게 충고하는 사람까지 모두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니…….

 

 비혼주의자인 나를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힘들지 않은데, 왜 그리 걱정들이 많은지. 뭐 그리 궁금한 게 많고, 충고하고 싶은 게 많은지……. 정말 어떨 때는 예상 질문을 추려서 'Q&A'를 작성해 다니며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소수자로서의 삶이 좀 불편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불행하진 않다. 나만 하더라도 외식을 잘 못하는 불편함이 오히려 직접 요리하는 즐거움을 알게 했고, 혼자 사는 불안함이 건강에 더 신경 쓰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수의 잣대로 소수의 불편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시선들은 너무도 폭력적이어서,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그 폭력을 반복적으로 맞닥뜨리다 보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기 안 먹으면 힘들겠다. 뭐가 제일 힘들어요?”

 “혼자 살면 힘들죠? 어떤 게 가장 힘들어요?”

 그때마다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한 마디를 삼키느라 도를 닦는다.

 “너! 너 같이 묻는 사람! 너 같은 사람한테 일일이 대답하는 것!”


 다수의 삶이 얼마나 편하고 행복한지 경험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소수자의 삶 또한 다수파인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힘들고 불행하지 않다. 충분히 행복하다. 당신이 입만 닫아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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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6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일이 대답하는 것.. 하하


산딸나무 2008-08-26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게 정말 제일 피곤한 일이에요.
사람들이 왜 그리 쓸데없는 일에 궁금한 게 많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