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여성들과 만나서 얘기를 하다보면 데자뷰를 종종 경험한다. 남편이 주말에 애들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붙어있는 꼴이 짜증난다는 얘기, 시어머니가 동서들과 비교하며 늘 인격적으로 모욕해서 화가 난다는 얘기, 아이들이 공부한답시고 엄마를 무슨 종 부리듯이 해서 서럽다는 얘기……. 그네들이 하는 얘기들은 듣다 보면 ‘어라, 지난번에도 똑같은 얘기를 들었는데…….’ 하는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시감 가운데 가장 익숙한 대사가 있으니, 온갖 문제 거리들을 다 털어 놓은 그네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다. 

  “아이구, 그래도 어떡해? 별 뾰족한 수 있나?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결혼한 여성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듣다보니 내게 결혼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한 아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결혼을 하면 왜 그렇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 왜 그렇게 분노하고 절망할 일들이 많은 걸까? 이해하기가 힘들다. 

 

 물론 혼자서 살아가는 나라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는 일이 왜 없겠나? 하지만 그네들처럼 똑같은 문제들이 그토록 장시간 반복된 경험은 거의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같은 문제에 대해서 그토록 오래 분노한 경험이 없다.

 살면서 나를 화나게 하는 상황은 늘 들이닥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개선안을 만들어 능동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키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내 힘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 이상 화 낼 필요가 없다. 그냥 수용하는 수밖에. 

 

 많은 여성들이 그 ‘어찌할 수 없는 일’에 그토록 오래 화를 내는 까닭은 아마 그 일이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닌 데 있는 게 아닐까? 

 반복되는 분노는 자신을 갉아먹는 병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분노 앞에서 “어쩔 수 없지.”라며 포기하는 건 옳지 않다. 정말 그 일이 어찌할 수 없다면 화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화가 난다면 그 일은 이미 어찌해야 하는 일이다. 그저 투덜대고만 있을 일이 아니란 거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반복해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라면 능동적으로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내 조언에 많은 이들이 코웃음을 친다. 
 “결혼해서 살아가는 게 다 그렇지? 그럼 주말에 애 안 본다고 이혼해?” 
 “저런 시어머니 만난 게 다 내 팔자려니, 해야지. 그럼 어떻게 해? 며느리 노릇 안 하고 살아?”

 

 

 그네들의 반응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신들은 결혼이란 계약을 했으므로 이미 계약서에 도장 찍은 마당에 어쩌겠냐는 말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가정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기로 하는 게 결혼 계약의 조건일 터이니,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계약에는 가정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는 조건밖에 없는가? 그 계약에는 구성원의 진정한 행복이란 조건은 없는 걸까? 그렇다면 그 계약은 너무도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평생을 그 계약에 얽매여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습관처럼 화내고 절망하며 살아야 하는 일이 정말 그네들이 말하는 ‘평범한 일상’인가? 천만에, 그건 노예의 일상이다.

 

 결혼은 노예계약이 아니다.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과, 남편의 아이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이해, 배려, 헌신해야 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 조항이 결혼계약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다. 결혼해서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어찌할 수 없다’고 착각하는 그 문제들이 정말 그런 것인지, 한번 상대에게 변화를 요구해 보면 어떨까? 단, 계약 파기를 각오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단언컨대 아마 90% 이상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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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분석하길 좋아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평가에 잘 휩쓸리지 않고, 보편의 늪으로 등 떠밀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보면 참 속편하게 산다는 소릴 종종 한다. 그러나 그거야 말로 속 모르는 소리. 나는 그 놈의 분석력과 합리성 때문에 늘 속 끓이며 살았다.




 어릴 때부터 가까운 친구들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종종 받았다. 특별히 모난 성격도 아니고, 말을 밉살스럽게 하는 것도 아니고, 배려나 이해를 잘 못하는 것도 아닌데 친구들은 뜬금없이 나를 비난하곤 했다. 그 비난의 내용은 주로 이런 것이다.

 “너 같이 잘난 인간한테는 말해봤자 소용없지.”

 “그래, 네가 어려운 일이 뭐가 있니? 그렇게 똑똑한데.”

 “어이구, 잘나셨어. 어련하시려고.”




 친구들의 반응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 틀린 말 한 적 없는데……. 그러나 그들의 화를 풀기 위해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한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빈다. 그렇게 빌고 또 빌어서 상대의 기분을 풀어놓은 다음에야 내 생각을 돌아볼 여유를 얻는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정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억울함마저 생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난 척 한 적도 없고,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왜 이런 소릴 들어야 하는지.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이 두렵고. 나도 모르게 상대의 반응에 주눅 들곤 했다. 이젠 나를 욕하는 상대가 미운 게 아니라, 저 친구가 왜 나를 욕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먼저 하게 됐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살다가 삼십대를 다 보낸 이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한 가지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내게 화를 내는 까닭이 내가 그들의 말을 공감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을.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먼저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 그리고 만들어진 문제는 정면 돌파해 나가는 것,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합리적인가? 지금까지 그 방식대로 문제없이 잘 살아왔다.




 그러니 친구들이 일상적으로 털어놓는 얘기들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한다. 해결책이 없는 연애문제며, 집안 문제며, 부부싸움 같은 이야길 듣고 있노라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 않고 문제를 즐기며 살아가는 그들의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그들이 털어놓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런저런 합리적 방법들을 조언한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뜻대로만 되는가? 아무리 조심해도 인생 앞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내 성향이란 것이 엎어져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네가 엎어진 원인이 뭘까?”라며 분석하는 꼴이니……. 내 친구들은 그걸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엎어진 일만으로도 부끄럽고 속상한데,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며 옷을 툭툭 털어줘도 모자랄 판에 빤히 들여다보며 돌멩이를 제대로 살피라는 둥, 다리 힘을 더 주었어야 한다는 둥의 얄미운 소릴 해대고 있으니 내가 어찌 욕 얻어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늘 정답만을 얘기하는 나, 내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이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운 것이다.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힘은 공감에 있지, 올바른 원인 분석에 있지 않다는 걸 어린 나는 몰랐다. 내 분석력과 합리성은 내 삶에서나 통하지, 타인에게는 무용지물이란 것을 몰랐다. 타인의 삶은 타인의 잣대로 이해해 주는 지혜, 그걸 우린 공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친구들이 내게 간절히 원했던 것, 그게 바로 공감이었다.




 더 늦기 전에 내게 모자랐던 게 무엇인지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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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21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하시군요..
역시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지향합니다.
차이점은 저는 그저 지켜보는 쪽이지요.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산딸나무님께서 훨씬 정이 많으시고 착하신 거지요. 하하


산딸나무 2008-11-21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여자 같은 건 정말 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나봐요.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죠.^^
 

 요 며칠 새 만나는 친구들이 모두 하나같이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속 시원하고 재미있더라고. 또 평일 조조 영화임에도 아줌마들이 얼마나 많은지 부녀회나 계모임 같은 데서 버스 대절해서 단체관람 온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란다. 왜 그리 여성관객들에게 인기가 많을까, 궁금해 했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또 결혼하고 싶은 아내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겠지?”

 

 그 말에 낄낄대며 웃다가 ‘아내’는 아니지만 혼자서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는 참 재미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력, 극적 긴장,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영화였다. 기분 좋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 혼자, 영화 평을 한 줄로 정리했다. 
  “아내는 결혼할 수 없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내 결론은 그것이다. 그러나 결론만 듣고 함부로 오해마시길. 어떻게 감히 여자가 두 남자를 거느리고 산다는 천벌 받을 상상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 아니니까. (지금껏 남자는 버젓이 두 여자를 거느리고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그 정도의 상상이 뭐 그리 대단한 사건이라고.) 내 말은 두 남자를 거느리고 살든, 세 남자를 모시고 살든 아무 상관없지만, ‘아내’라는 명함을 가진 여자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아내’라는 명함은 제도에 진입한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명함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함께 오래 살아도 제도가 내어준 허가증이 없는 여자는 기껏해야 ‘동거녀’라는 이름을 얻을 뿐이다.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 그것이 바로 ‘아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제도다.

 이 현실에서 선택은 늘 양자택일이다. 제도를 선택해서 아내라는 이름을 얻든가, 그 이름을 버리고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든가. 그러니, 아내라는 이름으로 일부일처제에 반하는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바람피우는 남자들을 싫어한다. 아니, 솔직히 경멸한다. 나 같은 비혼주의자에게 자유롭게 연애하자며 접근하는 유부남들이 가끔 있다. 그들의 논리는 한 사람에게 구속당하는 사랑 따위는 너무 구식이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랑, 자유로운 관계가 트렌드래나, 뭐래나…….

 그들에게 “저는 아무리 남자가 궁해도 유부남하고는 연애하지 않는데요.”라고 점잖게 일러주면 내가 말로만 자유를 얘기하는 ‘얼치기 자유주의자’라고 충고까지 한다. 이쯤 되면 속된 말로 머리에 스팀 들어온다. 

 “야! 그렇게 자유연애가 하고 싶으면 결혼은 왜 했냐? 자유를 얻기 위해 제도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내 삶이 니 눈엔 장난으로 보이냐? 결혼제도에 진입해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지 아내 등쳐먹고, 거기다가 나 같은 여자랑 자유연애까지 하겠다는 니 욕심에 장단맞춰줄 생각 없으니, 좀 꺼져 줄래?”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 어떤 자유도 대가없이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 폭력, 편견, 이념과의 처절한 싸움 끝에 얻어내는 것이 진정한 자유다. 일부일처제에 동의하지 않는 자유로운 성과 사랑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억압과 치열하게 투쟁할 때만 얻어낼 수 있는 것이지, 유부남들이 바람 피울 때 써 먹는 논리가 아니란 거다.  

 아내는 결혼할 수 없다. 그 말은 곧바로 남편도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연이어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에 동의한 사람들은 자유로운 성과 사랑을 얘기할 자격이 없다는 거다. 그러면 당신들은 또 묻겠지? 너무 늦게 찾아온 사랑은 어찌하냐고. 
 쳇, 그걸 왜 나한테 묻나? 그런 피곤한 상황 만들기 싫어서 결혼제도를 거부하고 사는 내가 왜 당신들의 그런 상황까지 고민해줘야 하나, 내 고민만으로도 머리 아픈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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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0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은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공개적 약속이지요..
그러므로 바람을 피우거나, 말씀처럼 결혼은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구식이랍니다. 산딸나무님 하하


Arch 2008-11-07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아내가 결혼하려면 능력 또한 출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니까 슈퍼우먼이 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되는걸로요. 손예진이야 매력 102%를 보여줬지만 그래서 이제야 정말 손예진다웠다고 할 수 있지만 대체 두집 살림에 시부모 봉양에 일과 육아까지. 전 까무라치는줄 알았는데. 산딸나무님의 말에는 일정부분 수긍이 되지만 그들의 '얼치기 자유주의자'에 너무 몰두하다보니 마지막 부분에 논할 자격까지 없다고 하는건 좀 문제적인 발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저, 삽질하는건가요. 흡!

Arch 2008-11-08 20:09   좋아요 0 | URL
(내 글에 댓글달고 앉았다.) 아마도 산딸나무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발언 자체를 원천봉쇄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적어도 결혼제도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비혼주의자의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완곡한 의미로 읽힙니다. 혼자 삽질, 미안해요.

진진 2008-11-08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적인 발언이라... 결혼제도에 동의한다는 것은 태초부터 인간의 피에 흐르는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을 억압하겠다고,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약속하는 것이지요. 결혼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혼할까요?

언니 이 글 참 좋아요. 완전 공감. '그런 피곤한 상황 만들기 싫어서...' 가슴에 확 들어오는 말이에요.^^

산딸나무 2008-11-1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시니에님, 글 읽고 너무 웃었어요.
오랜만에 즐겁게 웃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님의 말씀 그대롭니다. 딱 제 생각이 그겁니다.
 

 

 

 사람들은 나더러 왜 혼자 사느냐고 묻는다. 내가 그 질문이 내게는 너무도 폭력적이라고  하면 의아해한다. 별 뜻 없이 그냥 물어봤는데, 그걸 가지고 폭력적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면 바꾸어서 생각해 봐달라고 부탁한다. 누가 당신더러 볼 때마다 왜 결혼했냐고 물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상대에게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질문은 다수파가 소수파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생각해 보라. “왜 동성을 사랑하니?”, “왜 고기를 안 먹니?”, “왜 결혼을 하지 않니?”, “왜 남편이랑 이혼했니?”라는 질문은 성립되지만 “왜 이성을 사랑하니?”, “왜 고기를 먹니?”, “왜 결혼했니?”, “왜 남편이랑 같이 사니?” 따위의 질문이 성립되는지…….




 그래서 나는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질문이 가지는 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문화운동의 한 방법으로 역차별적 질문을 종종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왜 결혼했어요?”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남자들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세상에 이유가 있어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나?’ 하는 반응이다. 그런데 여자들의 반응은 남자들과는 달랐다. 모두가 각자 나름의 까닭을 답해줬다. 그런데 그 대답들이 참으로 재미있다.




 “집에서 나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독립할 자금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독립할 자금을 줄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결혼했죠. 결혼하면 아버지한테 얼마라도 얻을 수 있잖아요.”

 “남편이랑 연애할 때 쓰는 여관비가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이 비용 아끼면 집도 사겠다 싶어서 결혼했죠. 하하하.”

 “직장 생활이 지긋지긋했어요. 상사한테 욕을 죽어라고 얻어먹는데, 앞도 안 보이고. 그래서 차라리 이 노력으로 남편한테 잘 하면 좋은 아내 소리라도 듣겠다 싶어서 평생직장 구하는 셈치고 결혼했죠, 뭐.”

 “어차피 결혼 안 하고 살 용기는 없으니, 하긴 해야겠고. 그래서 조건 맞는 남자랑 연애하고 결혼했죠. 우리 사회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잖아요.”




 그녀들의 답이다.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여자는 백 명 중 딱 한 명 만나봤다. 근데 그것도 그녀의 진심인지는 솔직히 잘…….

 더 재미있었던 건 그녀들에게 우리 사회가 다른 대안이 있는 사회였다면, 여자 혼자서도 경제적 독립이 가능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으면 동거를 하면 되는 그런 사회였다면 그래도 결혼을 했을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미쳤어요? 그러면 뭣 하러 결혼해요?”




 함께 속엣 얘기를 나누며 깔깔 웃었지만, 그녀들에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있다. 당신들의 이 마음을 당신 남편들도 아느냐고.

 정말 궁금하다. 그녀의 남편은, 우리 사회의 남편들은 아내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까? 자신들이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까닭들이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여성들에게 열려있지 않은 억압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그녀들이 정말로 자유롭고 능력이 있었다면 당신들을 아무리 사랑해도 결혼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솔직하게 얘기하면, 우리 사회가 이혼율이 높은 게 놀라운 게 아니라, 혼인율이 지나치게 높은 게 오히려 놀랍다. 하나의 제도일 뿐인 결혼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방식으로 선택한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획일화된 삶의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한 마디로 그녀들의 말처럼 ‘대안이 없는 사회’다. 결혼이 장밋빛 미래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대안이 없기에 선택되는 사회.

 결혼 소식이 많아지는 가을, 좀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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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10-1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은 그래도 쌀쌀하잖아요. 봄바람에 전해지는 결혼소식이 더 뭣해요.^^ 결혼이 도피처가 아닌데 뭉개면 된다고 생각하는건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그랬고, 그럴 수 있고. 질문 안에 권력을 내포하고 있다는건 공감하지만 매번 '너는 왜 질문하느냐' 물어보긴 너무 피곤해져요. 그럴땐 위악이니 김훈이 잘 부리는 위약이니 혹은 그냥 웃지요 자세가 대안이 되지 않을지. 가끔은 날을 벼려놔야한단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비로그인 2008-10-13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은 오랜 관습이겠지요..
일종의 갑옷 같은 거라 생각한답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했답니다. 하하


산딸나무 2008-10-1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라디오를 듣다가 처음 듣는 노래가사에
하나뿐인 사랑 어쩌고 저쩌고 하더라구요.
늘 듣는 사랑타령인데 갑자기 질문이 솟았죠.
왜 하나뿐이어야 하지?
그 좋은 게 둘이면 더 좋고 셋이면 더 좋을 텐데...
단 하나, 영원, 변치 않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이 아름답다고 생각될까요?
갑자기 궁금해져요.

진진 2008-10-17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정말 맘에 들어요.^^
결혼이라는 제도에 많은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걸 버렸어요.
순수, 사랑, 영원이라는 탈을 쓰고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모순된 제도일지도 몰라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알면서도 그냥..그냥..하는지도.
내 마음에 방이 여러 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변치 않는 하나의 사랑에도 물음표를 찍었어요. 혹시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우리의 유전인자가 알기에 오로지 갈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ㅎㅎ
결국 자유와 사랑은 삶의 영원한 화두인가봐요.

산딸나무 2008-10-17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와 사랑이라...
그대에게 너무도 어울리는 단어에요.
 

 


  하던 일을 접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9월부터 환경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을 한다. 오랫동안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기존에 해오던 일도 물론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일은 아니었다. 마음을 가득 채우기엔 늘 2% 모자랐다. 그러나 그나마 그 일을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건 모자라는 2%를 돈이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쓰는 시간을 여유롭게 가지고 남는 시간만 일해도 꽤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일이었다.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책도 사고, 집도 사고, 차도 샀다. 그 뿐인가? 어머니께 생활비를 꼬박꼬박 드리는 착한 딸도 되었고, 이런저런 시민단체에 착실하게 후원하는 바람직한 시민도 될 수 있었다. 별다른 불만을 가질 까닭이 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지난 가을부터 그 일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건 바로 ‘일을 하면서 행복한 나’였다. 그 깨달음을 얻은 순간, 지금껏 돈이 채워주었던 2%를 일하는 행복함으로 가득 채워줄 일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일년을 헤맨 끝에 지금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내 선택이 너무도 멋진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지지와 축하를  기대하며 유쾌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새롭게 시작한 일에 대해서 모두 하나같은 반응을 보였다. 

 

  “수입이 너무 많이 줄어드는데 어떻게 해?” 
  “버는 만큼 쓰고 살면 되지, 뭐.” 
  “지금 당장은 그렇다 치고, 나이 들면 어쩌려고?” 
  “뭐가 걱정이야, 그 때도 좋아하는 일 하면서 밥 먹고 살면 되지.” 
  “넌 혼자 몸이라서 좋겠다. 그렇게 속 편한 소리 할 수도 있고.” 

 

 

  사람들은 일이 자아를 실현하는 장이라는 말 따위, 도덕교과서에나 나오는 문구라고 믿는다. 힘들고, 재미없고, 적성에 맞지 않아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일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일단 돈을 많이 번 다음 그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나는 내 주위에서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행복을 사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일은 아무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하기 싫은 일에 찌들린 사람은 가족들에게 돈벌어다주는 만큼의 행복을 강요한다. 그렇게 살다 어느 순간부터는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이미 너무 늦어버려서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찾아 나서기보다 돈 그 자체를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기 시작한다. 돈이 곧 행복이고, 돈이 곧 꿈인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짧지 않은 내 삶의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행복은 ‘돈’이 아니라 ‘행복한 일’과 함께 온다.  일을 배우면서 성장해가는 나,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일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전부이다. 

 

 

 나이가 적어서, 결혼하지 않아서 철딱서니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쉰을 훌쩍 넘긴 내 큰언니의 말을 덧붙인다. 

 “축하한다. 정말 잘 됐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좋아? 돈 좀 못 버는 거? 그게 무슨 문제야?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해. 살아보니, 사는 건 적당히 불안해야 늘 생기가 돌아. 돈도 늘 모자란 듯 벌어야 충만한 소비를 할 수 있고. 일하면서 즐거운 삶, 그게 최고의 인생이지. 그걸 마흔도 안 되어서 깨닫다니, 역시 내 동생은 똑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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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9-19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도 벌고 하면 좋지요.. 하하
산딸나무님, 새로운 일.. 하고 싶은 일 하게 된 것 축하합니다.
저도 지역환경단체일을 한 5년정도 했답니다.


산딸나무 2008-09-1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한사님의 축하가 정말 큰 힘이 되는 걸요.
앞으로 더 행복한 모습 보여드릴게요.

진진 2008-10-1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2%를 채운 행복이 보여요.
행복 바이러스를 전해 주는 언니 고마워요.

산딸나무 2008-10-1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랑씨?
영랑씨의 행복바이러스도 제게 잔뜩 퍼졌는 걸요.
나도 고마워요.
덕분에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