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운전을 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운전을 할 때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했지만 약간이 설레임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게 차를 권했던 영업사원은 ‘인생이 달라질 거다’고 얘기했었다. 근데 인생이 달라지긴 달라졌다. 퇴근하다 시내에서 버스를 내려 서점에 들르던 즐거움도 주차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버스에서 느긋하게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던 습관도 버려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차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수명이 10년은 줄어들 것 같기도 하다. 이웃간의 주차 전쟁으로 살인까지 일어나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얼마 전, 새로 이사한 빌라에 주차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밤 늦게 퇴근하는 나는 늘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해 동네를 몇 바퀴나 돌며 쩔쩔매야 했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가만 보니, 원인은 딴 데 있었다. 빌라 내 주차장은 안에서부터 순서대로 주차하게끔 되어있는데 먼저 온 차들이 안 쪽 자리를 비워두고 맨 바깥쪽에다 차들을 대는 게 아닌가?

 

  하루는 전화를 해서 차를 안 쪽부터 좀 대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다음날 일찍 나갈 거라서 그렇게 댔다고, 조금의 미안하나 기색도 없이 이야기한다. 새벽녘에 나가는 일이 있을 때는 바깥쪽에 차를 대는 사람들에게 너무 이른 시간에 빼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골목 바깥에다가 대 놓고 걸어 들어오던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화 내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날부터 바깥에 차를 대 놓는 차 유리창에다가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여럿이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입니다. 주차할 공간이 많이 부족하네요. 안에서부터 순서대로 주차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처음 몇 주는 다음날 나가보면 내가 써 둔 메모지가 바닥에 버려져 뒹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기를 한달. 어느 샌가 차들이 순서대로 주차되어 있기 시작했다.

 

  요즘은 아침에 출근하는 시간이 어긋나다 보니 서로 차를 빼주기 위해 조금 번거롭기도 하지만 덕분에 얼굴도 잘 몰랐던 옆집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너무 일찍 번거로우시죠?”라고 인사를 먼저 건네면, “아닙니다. 제가 조금 늦게 내려왔죠? 죄송합니다.”라고 웃으며 되받는다. 주차 난 덕에 오히려 좋은 이웃들을 알게 되었다.

 

  웃음은 모든 문에 들어맞는 열쇠이다. 나와 아무리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웃음으로 대하면 언젠가는 그의 마음이 열릴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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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트모양 이파리가 아래로 늘어지면서 자라는 러브체인이란 식물이 있다. 관상용으로 많이 키우는 식물이라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어서 나도 올 여름에 화분을 하나 구해서 키워봤다. 그런데 우리 집에 온 다음부터 영 시원찮은 모양새가 자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극정성으로 아침마다 물을 주고 볕을 쏘였다. 그런데 들인 공도 모르고 이 녀석들이 기어이 죽고 말았다. 잎사귀가 녹아 내리면서 뚝뚝 끊어져 버렸다. 이 화초가 의외로 키우기가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키워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 전, 친구 집에 집들이를 갔다가 풍성하게 늘어져 잘 자란 러브체인을 보게 되었다. 애 둘을 키우면서 어떻게 저리 손이 많이 가는 화초를 다 키울까 싶어서 대단하다고 한 마디 했더니, 친구가 웃으며 

  “저건 잊어버리고 내 버려 둬야 잘 커. 물도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주고. 괜히 자주 물 주면 다 녹아 버리지.”

하는 게 아닌가.

 

  화초를 키우면서 물만 자주 주면 그게 잘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는 기분이었다. 서울내기, 비만 오면 농사 풍년이라고 한다더니, 내가 꼭 그 짝이었다. 사랑 받는 식물들은 괴롭기 그지 없는데, 나 혼자서 정성을 들인다고 그 부지런을 떨었으니…….

 

   헌데, 주위에 내가 화초 키우듯이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많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학원이란 학원은 다 보내 줘. 게다가 바쁘다고 차로 일일이 다 태워다 줘. 친구도 좋은 애들로만 찾아 줘. 책도 명작으로만 골라 사다 줘.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이렇게 엇나가는 거야?”

 

  이런 부모들의 푸념을 듣노라면 죽어버린 내 러브체인이 생각난다. 과한 집착과 자기식의 사랑은 아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모자라서 엇나가는게 아니라, 바로 과하기 때문에 엇나가는 것이다. 때로는 잊어버리고, 내버려두는 지혜가 우리 아이들을 스스로 자라게끔 만든다는 사실을 부모들은 왜 잊어버릴까?

 

  겉으로 보기에 과한 사랑은 사실은 사랑의 본질을 왜곡한다. 사랑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득하게 두고 봐 주기엔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게 아닐까? 그 부족한 믿음을 감추기 위해서 더 과장된 사랑 과시를 내보이는 게 아닐까?

 

  끊어진 러브체인이야 새로 사면 된다지만, 부모의 과욕으로 끊어진 아이들의 희망은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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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가 밤 12시를 넘겼는데, 느닷없이 전화 벨이 울렸다. 누군가 하고 수화기를 들었더니 중학생인 조카녀석이었다.

“이모, 혹시 고양이 키울 생각 없어?”

다짜고짜 고양이 타령을 하는 그 녀석을 추궁한 결과, 듣게 된 경위는…….

 

  학교를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경비실 앞에서 손바닥만한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경비아저씨께 자초지정을 물었더니, 동네 아이들이 집 없는 고양이가 낳은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와서 놀다가 버려 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비실비실거리며 걸음도 제대로 못 떼는 고양이를 보다가 집으로 올라가서 언니에게 얘기를 했단다. 언니와 조카는 우유를 접시에 부어 담아 내려가서 고양이를 먹이고는 다시 올라왔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비가 오기 시작해서, 베란다로 내려다 보니 새끼고양이가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뛰어내려가서 일단 데리고 올라왔단다. 고양이를 씻겨서 박스에 담아 재워놓고 보니, 대책이 서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키울 사람이 없을까 하고 이 밤에 전화를 돌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대책도 없이 덜컥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뒷 일은 생각도 안 해 보고…….”

  전화를 바꿔 든 언니를 향해서 투덜거리고 말았다.

  “그럼 우째? 산 생명을 그냥 죽게 두냐? 똑똑하단 게 어째 하나마 알고 둘은 모르냐?”

  그만 할 말이 없었다.

 

  참 그렇다. 생명 앞에서 이성적이건 그렇지 않건 중요한 건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나는 아무래도 쓸데없는 이성주의 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때로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행동이 전혀 이성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

 

  생활고에 지쳐 자식을 먼저 죽이고 따라 죽은 어머니의 비정함을 탓하는 사람들, 카드빚에 시달려 목숨을 끊은 가장의 무능함을 비난하는 사람들, 굶어죽고 있는 북한어린이들을 보면서도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먼저 들먹이는 사람들…….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내내 죄책감이 들었다. 늘 덤벙대서 사고 잘 치는 언니와 조카 녀석이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란 걸 이제야 깨닫다니.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전화기를 들어 친구들을 깨웠다.

 “야, 너 고양이 한 마리 키울 생각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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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묻는 것 가운데, 가장 흔한 질문이 ‘너 커서 뭐 될래?’라고 하네요. 우리가 자랄 때도 숱하게 들어왔던 이 질문은 시대를 넘어서 변치 않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꿈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의사, 교수, 판사, 피아니스트 따위로 직업의 종류는 가지가지였지만 그에 따라붙는 말은 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을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다른 사람을 도와 주고,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꿈은 늘 ‘돈 많이 버는 사람’으로 끝이 납니다. ‘축구 선수가 될래요. 돈 많이 벌 수 있잖아요.’ , ‘변호사 될거에요. 돈 많이 벌 수 있대요.’, ‘의사 하면 돈 많이 번다면서요? 나도 성형외과 의사 할래요.’

 

  요즘 아이들의 꿈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는가 보다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것으로 변해 있습니다. 위인전에서 읽었던 슈바이처 박사의 숭고한 인류애를 보면서 그것이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이젠 찾아보기 힘듭니다. 마리퀴리의 이야기를 읽고 순수과학의 열정을 지피는 아이들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꿈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아마, 아이들에게 위인전 속의 세상은 멀지만, 현실은 가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어른들에게 과거 어린이였을 때 들었던 것처럼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아마 우리 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이들만 특별히 문제가 되는 세상이 아니란 겁니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와 사회가 가르쳐 주는 대로 행동하고,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더 넓은 평수에서 사는 친구에게 기죽고, 더 비싼 힐리스신발을 사는 친구가 부럽고, 더 돈을 잘 벌어 오는 아빠를 둔 친구가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이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기 위해서, 어른들부터 한번 돌아 봅시다. 내 꿈이 무언가. 더 넓은 아파트, 더 근사한 골프채가 대신 자리잡은 그 곳에 원래 있어야 할 꿈이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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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하는 중학생 남자아이들이 있다. 키도 덩치도 이미 나보다 훌쩍 커버린 녀석들이지만 하는 짓은 나이를 속일 수 없어서 얼마나 재롱둥이들인지 모른다. 공부하다 보면 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어제는 한 녀석이 가방에서 푸른 색 필통을 꺼내보이면서 ‘선생님, 제가 만든 거예요.’ 한다. 순간, 모양이 너무도 그럴 듯한 그 필통을 흘낏 보면서, ‘에이, 설마.’ 했다. 근데, 미심쩍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바느질 한 걸 보여 주고, 안을 뒤집어서 재단한 선을 보여주는데, 진짜 손으로 직접 만든 필통이었다. 학교 가사 수업시간에 만든 거라고 한다. 다른 한 녀석은 자기가 필통에다 아주 예쁜 인형까지 달아 놓았다.

 

  내 바느질 솜씨보다 훨씬 정갈해 보이는 바늘땀을 보면서, 다시 물었다.

  “엄마가 다 만들어 주셨지?”

  “아뇨! 학교에서 만든 거라구요. 에이, 왜 선생님은 우리말 왜 자꾸 안 믿어요?”

  펄쩍 뛰는 녀석들을 보니 정말 자기들 솜씨가 틀림없는 모양이다.

 

  아마 그 녀석들이 여자 아이들이었다면 내 반응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학교 다닐 적에는 여자 아이들은 ‘가사’, 남자 아이들은 ‘기술’이라는 성별분업, 더 정확하게는 성차별이 존재했었다. 그렇게 배워왔기에 나도, 여전히 바느질은 여자들의 역할이라는 성차별에 길들여져있었던 것일까? 여전히 남자아이들이 바느질 하는 모습을 어색하게 떠올릴 수 밖에 없는 나는, 몸도 마음도 차별 없는 사회를 살기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만든 그 필통을 너무도 자랑스러워하는 그 애들의 표정이었다. 아주 소중하고 엄청난 일을 해 낸 듯한 그 의기양양한 요정을 보면서 양성평등 사회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우리 사회의 앞날을 기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들의 관습과 편견에 짓눌리지 않고 십년 뒤, 이십년 뒤에도 여전하길 빌어 본다. 신문 읽는 아내 곁에서 설거지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는 남편이 되고, 아이들을 업고 장을 보러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 하는 아빠가 되고, 명절날 음식을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자랑스러워 하는 사위가 되길......

 

  이제는 학교가 아닌 일상에서도, 가사 노동의 능력이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갖추어야 할 기본노동임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좀 더 많이 노력해 보자. 우리 아이들에게 ‘구세대’라는 핀잔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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