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6월 10일. 내 생일이다.

창을 여니 아침부터 햇발이 장난이 아니다.

이 더운날 나 낳으시느라 고생하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잠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엄마, 낳아줘서 고마워요."

삼십대 후반의 나이, 독신으로 살기를 고집하면서 독립해서 살고 있는 나는 집에 자주 들르지 못한다. 몸도 바쁘고 마음도 바쁜 탓에.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내 생일날 아침은 꼭 어머니의 밥상을 받으러 어머니 집으로 간다.

내가 어릴 때부터 육식을 전혀 하지 못하는 탓에 내 생일상은 특별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그 생일상의 메뉴는 내가 기억하는 한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우선 팥밥과  참기름 들깨만 든 미역국. 도톰하게 구운 갈치 한 도막. 그리고 오뎅볶음.그리고 김치.

이 생일상을 어머니께 받으러 가는 날, 나는 늘 소화제를 준비한다. 원체 평소에 먹는 양이 적은데다가 어머니의 아침 식사시간은 내가 한잠이 들어있는 시간이라서 다른 날 보다 일찍 깨고 억지로 밀어넣는 밥이 뜻대로 먹히지 않는다. 게다가 밥상 옆에서 다 큰 딸의 숟가락질을 보면서 흐뭇해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한 술이라도 더 뜨려고 하다보니 소화제 없이는 생일을 지내 본 적이 없다.

밥을 다 먹어갈 즈음이면 물어보시는 말도 똑같다.

"저녁도 챙겨 먹어야 되는데, 생일날 거르면 안되는데.."

그러면 내 내답도 늘 한결같다.

"저녁에 친구들이 저녁 사준다고 해서 같이 밥 먹을 거에요."

어느 해는 진실이고, 어느 해는 거짓인 대답이다.

일이 바빠서 점심도 저녁도 건너 뛰는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내 대답에 어머닌 기뻐하시면서 숟가락을 놓는 내 손에 하얀 봉투를 쥐어 주신다.

"자, 이거 갖고 밥 사준 친구들 한테 커피라도 한 잔씩 사 줘라."

보통의 레스토랑 식사에 커피가 후식으로 따라 나오는 걸 모르시는 어머니의 작은 배려이다. 혼자 사는 딸이 심심하지 않게, 외롭지 않게, 불러내서 밥을 사주는 착한 내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어머니 식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자식들이 보내는 생활비로 사시는 어머니께 결코 적지 않은 그 돈을 나는 늘 두 말 없이 받는다.

"역시 우리 엄마가 최고야! 난 엄마 딸로 태어난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요."

평소엔 쑥스러워서 해 본 적도 없는 애교를 부려가면서.

그렇게 생일날 어머니와 만나고 나오는 날마다 나는 늘 목이 메인다.

늙어서 쇠약해가시는 어머니께 앞으로 몇해나 더 생일상을 받을 수 있을지, 이 불안한 행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곤 한다.

제발 어머니께서 오래오래 사셔서 내가 생일날마다 소화제를 먹는 이 연례행사를 한없이 이어갈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낳아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로 태어날 수 있게 착하게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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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 할 때, 혹은 하고 싶을 때 당신은 주로 어떤 것을 선물하는가? 꽃?  옷? 보석? 상품권? 아니면, 현금?

 그런데,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외로 책을 선물하는 사람이 꽤 있다. 값이 매겨주는 물질적 가치가 곧바로 정성의 가치로 연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만은 받는 사람에겐 지적 우월감을, 주는 사람에겐 고상한 품격을 덤으로 얹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꽤 괜찮은 이 선물이 안고 있는 치명적 딜레마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물 받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독서 취향이 분명하기 때문에 선물용으로 받은 책이 취향에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고, 취향에 맞는 책일 경우엔 이미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반대로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인 경우엔 공짜로 들어온 책이라고 억지로 읽을 만큼 인내심이 많지 않다.

 나 역시도 책 선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돈으로 도서상품권을 사주면 내가 직접 고를 수 있어서 괜찮지만. 그런데 웃긴 것이, 정작 나 자신은 다른 이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을 하고 싶을 때 늘 책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 선물은 경험상 상대가 이미 읽었을 가능성 0%, 선물 받고 읽지 않을 가능성 0%인 선물이다. 이 예측이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왜냐? 바로 그 책은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화책은 책이고, 어엿한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통상 ‘책’이라고 부르는 것들과는 천양지차의 대접을 받는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나중에 어떤 인물이 될지’ 기대가 크지만, 만화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는지’, 걱정이 크다.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고상한’ 사람으로 이해받지만, 만화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그 뿐인가. 책에 대한 이야기는 ‘토론’이지만 만화책에 대한 이야기는 ‘잡담’이다.

 나는 만화라는 예술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저급한 사회인식이 슬프고 때로는 화가 치민다. 사랑을 모르는 자,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을 그대로 빌려서 만화책을 두둔하자면, ‘만화 읽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자, 감히 예술을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나는 사형제의 모순에 대해서 스콧 터로의 ‘극단의 형벌’,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보다 고다 마모라의 ‘교도관 나오키’란 만화책에서 더 큰 깨달음과 감동을 얻었다. 성교육 강사로 일하면서도 몰랐던 에이즈에 대한 오해가 스위스의 젊은 만화가,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자전적 이야기인 ‘푸른 알약’이란 만화책을 보고 비로소 풀렸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하루 다섯 시간은 자면서 읽었다. 그러나 오세영 화백의 ‘토지’는 밤  새워 읽었다. ‘도토리의 집’은 또 어떤가? 장애인들의 삶을 비장애인 작가가 이만큼 밀도 있게 그려낸 책을 본 적이 있던가?  

 우리 사회에 깊게 박혀있는 만화책에 대한 오해는 그 뿌리가 참 깊다. 그리고 원인을 찾자면 끝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만화책을 일단 한 수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까닭이 무얼까 곰곰이 생각하다 우리 속에 자리 잡은 지식에 대한 노예 근성을 보았다. 

 고상한 지식은 결코 재미있게 습득할 수 없다는 생각, 지식은 고통스럽게 얻는 것이기에   지적 우월감은 돈이나 명예를 과시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란 생각. 그래서 사람들은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만화책을, 고상해보이지 않는 만화가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내가 만화책을 사랑하는 까닭 또한 바로 거기에 있다. 만화가들의 열린 사고와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들, 그리고 유치해지길 마다 않는 자세가 바로 진정한 예술가들의 자세가 아닌가 싶어서. 

 학문이 업인 사람과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 지적 사유의 숲을 헤매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지적 사유의 숲이 세상 어느 곳보다 오만과 자만, 아집과 독선의 늪이 많은 길이란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도 그 늪에 종종 발을 헛디뎌서 오만과 독선의 진흙탕에 허우적거린다.    

 그래서 그 늪을 피해가기 위해서라도 만화책을 더 열심히 읽는다. 만화책 속에서는 지적 사유의 숲을 자전거로 씽씽 달려도 늪에 빠질 일 따윈 없기 때문에

 혹시 이 글에 공감해서 내게 좋은 만화책을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좀 어렵겠다. 그게 어떤 탄압을 받아가며 얻은 지혜인데, 거저 달라니...

 술 한 잔 사겠다고? 그럼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술 한 잔 사겠다고 했을 때 내 대답은 아마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 다음 기회에...’일 가능성이 99.9%이다. 그리고 그 선약이 ‘집에서 만화책 읽기’일 가능성 역시 99.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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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한 친구가 필리핀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일 년이 될 지,  몇 년이 될 지 기약없이 떠난다기에 보내는 날 잠시지만 눈이 젖고 마음이 아렸다. 

  근데 며칠 뒤 네이트에서 만나 서로 잡담을 주고 받았다. 그 곳에서 있었던 서너날을 미주알 고주알 생중계를 하는데 이건 원, 이웃에 있을 때 보다 더 시시콜콜 잡담을 나눴다. 그러다 보니 보내던 날 내 마음이 괜한 사치와 허영인 양 느껴져 혼자 머쓱해졌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가까운 세상. 근데 그 안 에서 절절한 마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러고 보니 사소한 일에 감동 잘 받기로 지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나조차도 요즘은 지극한 마음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병이 될 지극함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참'이란 수식을 붙일 만한 마음도 그다지 없었던 듯 하다.

 두보가 노래했던 그 마음. '죽어서 헤어지면 슬픔에 목이 메이고, 살아서 헤어지면 가슴은 쓰라리다'는 그 쓰라림 조차 그리운 날이다. 삶이 이토록 무미건조해진것은 분명히 불행이다.

 갖가지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이제는 감정조차도 선택해서 관리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지독한 아픔 따위는 되도록 선택하지 않으려 하다보니 지극한 기쁨과 행복도 모르고 살아갈 밖에.

삶이 좀더 불편해도 좋으니, 구차해도 좋으니, 외로워도 좋으니

기쁨이든, 슬픔이든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든, 모두 다 벗인 양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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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 마지막 날, 같이 밴드를 하는 친구들과 술을 한잔 하는 자리가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나이 얘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설 쇠었고, 떡국 한 그릇 먹었으니 이제 몇 살이지?’ 하면서 서로 나이를 셈하고 있는데 가장 나이 어린 친구가 새해 들어 스물여덟이란다.

 삼십대 후반인 나와 사십대를 막 접어 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일제히

 “와, 좋은 나이네.”

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스물여덟. 정말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끔 만드는 아름다운 나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맹랑한 친구가 태연하게 받아치는 말이

 “서른일곱도 좋은 나이에요.”

 

 그래, 올해 내 나이 서른일곱이다. 근데 그 친구의 말은 나이 많은 선배에게 예의상 던지는 답일 테지만, 사실 나는 그 표현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내 나이를 그저 ‘좋은’이란 수식어로 꾸밀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더할 수 없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서른일곱을 사랑한다.

 내 판단에 스물여덟은 ‘좋은 나이’일 수 있지만 서른일곱은 ‘사랑해야 하는 나이’이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 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 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 황지우 ‘뼈아픈 후회’ 가운데

 

 황지우 시인이 몇 살에 이 시를 썼나,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삼십 대에 접어든 뒤부터 한 살씩 더 먹으면 늘 이 시가 떠오른다. 내가 떡국 한 그릇 먹으며 나이 한 살 더하는 것은 결국 나를 사랑했기에 그 가슴에 사막을 떠안아야 했던 사람들의 덕이다. 나로 인해 가슴 한 구석 무너져 내린 사람들, 내 에고로 인해 마른 바람에 신음해야 했던 사람들……. 그들 덕에 나는 오늘 또 이렇게 나이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빈말이라도 “그 나이만큼 안 보이세요.”하면 나는 뜨끔해진다. 어려보이는 껍데기에 열광하는 세상에서 칭찬이랍시고 건넨 그 말은 나를 아프게 한다. 혹시 나도 ‘나이 먹음’이 단순히 생물학적 노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부류였던가? 그게 기쁜 말일 수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 감히 그게 어떤 값을 치르고 얻은 나인데 그걸 깎아 먹는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감당해 준 찢기고 무너지는 아픔의 대가. 어떻게 감히 그 상흔들을  욕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게 속한 것이지만 내 몫이 아닌 것. 나이란 결국 그런 것 아닌가.


 이상하게도 진행 중인 사랑은 상처 입은 밤으로 기억되지만, 지나 간 사랑은 내가 입힌 상처들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상처 덕에 그 사랑은 지워지지 않고 내 삶의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십대의 방황을 가슴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내신 내 어머니, 이십대의 열정을 함께 울어준 친구들, 그리고 모진 내 에고로 인해 그 누구보다 뜨거운 사막을 견뎌냈을 내 첫사랑, 삼십대 접어들어서도 여전한 내 독단과 과욕으로 인해 피 흘렸을 동료들, 그 모두를 떠올리는 게 내가 더해가는 나이를 내게 새기는 방식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누군가의 나이 듦 역시, 내 가슴의 한 구석을 폐허로 만들면서 진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내 사랑이 그 가슴에 사막을 만들기도 했지만 또한 오아시스를 만들기도 했다는 것. 그런 위안마저 없다면 서른일곱 이 나이가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사랑스런 서른일곱 내 나이, 올해도 나이 값 잘 하며 살고 싶다.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번듯한 직장을 잡고……. 그런 나이 셈이 아니라 정말 다른 이의 상처를 볼 줄 아는 나이 값을 하고 싶다.

 내 나이의 값을 치른 것은 내가 아니니. 그 셈을 기꺼이 감당해 준 것은 나를 더 많이 사랑했던, 그래서 더 많이 상처받았던 바로 그들이란 걸 기억하면서.


 새해, 떡국 한 그릇 먹으면서 내 나이 듦을 위해 기꺼이 가슴 속에 사막을 내어 그 길을 가로질러 건너 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덕분에 또 이렇게 한살 잘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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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2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오늘아침 정말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열게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아침 좀 우울해서 이 나이 먹도록 왜 이러나 싶었거든요^^
나이값, 다른 이들의 가슴에 사막을 떠안기고 먹었네요, 저도요^^
덕분에 저도 한 살을 의미있게 먹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산딸나무 2007-02-2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올린 글에 이렇게 빨리 얘기를 덧붙여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혜경님의 올 해가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한 해 되시길 빌어요.
 

 

  어느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고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십대를 그렇게 보냈던 듯 하다. 이념보다는 그 이념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술 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퍽도 좋아했었던 것 같다. 삼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요즘, 나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소박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요 몇 년 사이, 나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싫어졌다.

 

  내가 사랑했던 술자리의 분위기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그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었을 게다. 술자리의 분위기란 게 막걸리집이든 호프집이든 아니면 대학 캠퍼스 잔디밭이든 다 좋았던 걸 보면 그게 술집의 분위기를 말하는 게 아닐 테니, 아마도 나는 그 술자리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더 많이 누리고 산다는 게 한없이 미안하고, 자기를 더 많이 희생하지 못하는 것이 더없이 부끄러웠던 그때,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그 말들... 그 말들의 유통기한이 술자리가 파할 때 까지 뿐일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진실했던 그 말들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젠 술자리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말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삼십대는 현실 속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이, 적당한 체념과 적절한 타협이 조화로운 관계와 순조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걸 알아가는 나이.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듯 하다. 현명한 사람은 그 속에서 행함의 어려움을 배우고,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자기만의 원칙을 세우며 삼십대를 난다. 도전 받아본 적 없는 이념과, 갈등해보지 않은 원칙이 얼마나 나약한지 깨닫는 건 삼십대 인생살이가 주는 별책부록이다.


  나는 그런 깨달음을 나를 만나는 시간에서 얻었다. 갈등하는 나를 다독거리면서, 비겁한 나를 위로하면서, 부끄러운 나를 격려하면서 나는 나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알몸 그대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고 타인의 추켜세움에 으쓱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반자인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험한 세상 살아나갈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누구도 부족한 자기를 보여주려 하지 않고, 나약한 상대를 보아주려 하지 않는다. 요즘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들. 술자리 내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면서 서로 동의를 구한다. (이 속엔 정치인들 욕도 포함되어 있다) 또, 자기를 인정해 달라는 말들로 채워진다. 자기의 부를, 자기의 지위를,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면서 부러움의 말과 존경의 눈빛을 요구한다.

 

  그런데, 모두가 똑똑한 자기, 잘난 자기를 보여주기 바쁘다 보니, 정작 상대의 말이 내 귀에, 내 가슴에 들어올 겨를이 없다. 술자리를 파할 때쯤이면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한 말들과 헛웃음들이 탁자 위에 담배꽁초처럼 수북이 쌓여있다. 술자리 내내 허공에서 맴돌다가 그냥 맥없이 떨어져 쌓이는 위선과 가식과 허위, 자괴감과 욕망이 뒤엉켜 있는 오물더미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은 맥주 한 잔에도 속이 역겹다.  

 

  헌데, 이런 술자리임에도 유독 술자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무척이나 사교적인 사람들? 아니, 그들은 자기와 오롯이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 겁나고, 혼자서 만나야 하는 자기마음이 두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해 줄 수 없음을. 그 누구의 사랑도 그들의 외로움을 씻어 줄 수 없음을. 그래서 그들의 습관적인 술자리를 함께 하는 날은 마음이 슬프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까칠한 성격 탓에 그나마 별로 남지 않은 인간관계가 새해 들어 더 얄팍해질까봐 군말 하나 덧붙인다.)


  내가 모든 술자리를 꺼리는 건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평소에 잘 돌봐 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라도 즐겁다. 자신에게 사랑받는 사람 특유의 여유와 안정감이 있어 그 사람과 있으면 내 몸에도 먹 향기가 스민다. 그런 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도시 한가운데서도 밤하늘의 별빛을 찾는다.


  새해엔 모두 그 동안 홀대했던 자기를 많이 사랑하는 해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다른 이들의 상흔도 어루만져 주면 좋을 테고.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전화하시라. 술 한 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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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고 타인의 추켜세움에 으쓱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반자인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말씀이 마음에 듭니다.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7-01-0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외로움과 친구가 되는 방법을 이제 겨우 깨달았을 뿐인데 글이 너무 과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합니다.
한사님께서도 새해엔 더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