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만나는 사람마다 덕담을 건넨다. 그런데 그 덕담들이 내게는 전혀 ‘덕담’이 아닌 때가 더 많다. 나를 황당하게 만드는 ‘덕담’ 가운데 1위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새해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세요.’이다.




 비혼주의자인 내게 ‘결혼’을 권하다니……. 일부일처제를 선택해서 결혼한 사람들에게 ‘새해에는 바람 피세요.’, ‘이제 살만큼 사셨으니 이혼하세요.’라는 게 덕담이 될 수 없다면 내게도 그런 인사가 모욕이란 것쯤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언제쯤이면 이런 욕 안 먹고 살 수 있을까?




 새해엔 평소보다 더 많은 모욕을 당하고 살아야하는 내 삶이 너무도 꿀꿀해서 친구와 술  한 잔 하면서 툴툴댔더니, 오래된 내 친구가 하는 말이

 “차 선생, 새해엔 제발 그 성격 좀 죽이고 사세요. (나를 비꼴 때면 늘 ‘차 선생’이란 호칭과 경어체를 사용하는 버릇이 있다). 결혼을 하라는 게 본질이 아니고, 댁이 나이 서른여덟 되도록 혼자 사는 게 외로워 보이니 누군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거라고 좀 좋게 해석하세요. 이제 낼 모레면 마흔 줄에 접어드는데 그 놈의 성격은 어찌 그래 수세미보다 더 까칠하신지…….”




 아, 그렇구나. 그 말은 내 외로움을 염려해주는 살가운 말이구나. 그런데 그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결혼하면 외롭지 않나?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결혼해서 사니 정말 외롭지 않니?




 솔직히 나는 혼자 사는 지금, 연인이 없는 지금 조금도 외롭지 않다. 오히려 연애를 할 때가 더 외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외로움을 덜어줄 거란 기대가 있으니까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공허함과 외로움이 더 짙어지는 걸 경험했다. 연애의 유용성은 심심함을 덜어주는 정도로 밖에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인이 없는 요즘은 가끔 아주 가끔 심심할 때는 있지만 결코 외롭지는 않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배타적인 성적 사랑, 결혼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안착시키는 방법을 선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구태의연한 방법에 나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결혼제도가 주는 안정감(반면 권태로움과 지루함은 한 세트로 배달된다.)이야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외로움을 해결하는데 뭐 그리 도움이 될까 싶다.




 내 경우는 연인보다, 가족보다 사유를 함께 나누는 친구야 말로 내 삶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존재였다.




 어느 글에서 ‘성적 사랑은 인류의 재생산에 기여하지만 정작 인류 공동체를 유지 존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성적 사랑이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성적 사랑도 비성적 사랑도 자연의 어머니가 우리 인간에게 선사한 매력적인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이 두 종류의 사랑은 그 모습이 너무도 다르다. 성적 끌림이 마치 자석과 같아서 그야말로 끌어당기고 끌려가는 불같은 것이라면 친구와의 만남은 낚시 바늘로 인연을 걸어 올리는 섬세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내 마음의 철을 가늘게 다듬고, 상대의 감성에 맞추어 적절히 구부리고, 거기에다 상대와의 대화 속에서 소통의 지점을 오래 오래 참고 기다렸다가 순식간에 낚아채는 것. 그 작업이 조금이라도 불성실하면 여지없이 빈 망태로 터덜터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친구와 나누는 지적교류가 아닐까?




 내 마음을 통제할 수 없이 끌어당기는 배타적사랑도 좋고, 거부할 수 없는 구속과 배려를 동시에 안고 있는 가족도 좋고, 소소한 일상의 한없는 남루함을 자글자글 풀어내는 술친구도 좋지만, 철학적 사유와 지적 감성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삶은 충만함으로 가득할 텐데…….




 연애가 천국과 지옥을 하루에도 수차례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삶의 마약이라면, 지적사유를 공유하는 친구란 천국의 정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음미하는 짙은 국화차 한 잔 같다.

 지적 사유를 함께 하는 친구를 만나면 내 언어가 빛나고, 내 사유가 춤추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지금 사랑에 빠져 세상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사랑의 유효기간은 그대의 생각보다, 그대의 바람보다 짧으니, 그 연애가 지루해질 즈음엔 이런 친구 하나 찾는 작업 해 보는 게 어떨지…….




 자,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드리는 새해 덕담.

 부디 새해엔 그대의 언어를 빛나게 하고 사유를 춤추게 만드는 멋진 벗 하나 만나시기를 …….


* 지난 해 지나가는 단상을 페이퍼에 옮겨놓았다가 다시 갈무리 해서 글을 썼답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8-01-0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 사유를 함께 하는 친구를 만나면 내 언어가 빛나고,
내 사유가 춤추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오.. 하하하.
새해에 즐거운 덕담을 듣습니다. 산딸나무님.

책 좋아하는 지인과 술한잔 하며, 밤새워 책이야기.. 하하
40대 초반의 특별한 즐거움이었지요.


산딸나무 2008-01-0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께서도 새해엔
좋은 벗 만나시길 빕니다.

시골사람 2008-01-0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 나이 들수록 그 의미가 더 커집니다. 술친구도 좋고, 수다친구도 좋고, 생각을 나누는 친구도 좋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도 좋고~~ 친구... 친구...^^

산딸나무 2008-01-04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나중에 다시 연애를 하게 된다면
이 글을 보고 '어느 미친 인간이 저딴 소릴...'해댈지도 모르지만
분명 연인이 가져다줄 수 없는 충만함이 친구에게 있는 것 같아요.
꼬박님도 새해에 좋은 친구들 많이 만드시길...

비로그인 2008-01-12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책소개 없으니,
심심하다. 하하


산딸나무 2008-0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새해 되니 좀 바빠서요^^

가이아 2008-01-1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구란 자유를 의미하지요, 괜한 규칙으로의 자유,저도 소실적 좋아했던 아가씨들 열정적으로 집착하다 다 떠나보냈는데, 차라리 친구가 연인 보다 더욱 가치있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던데여.산딸나무님 성격이 좋으신것 같은데 좋은친구 많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산딸나무 2008-01-1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가이아 님.
근데 비성적 사랑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구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성적 사랑의 가치만 추앙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좋은 덕담 고맙습니다^^
 

 책상 위 달력이 달랑 12월 한 장만을 남기기가 무섭게, 초등학교 여자동창들 모임 송년회에 끌려 나갔다. 달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졌는데, 그 핑계들도 열한 가지는 떠오르더니만 열두 번째 핑계는 끝끝내 떠오르지 않아 눈 딱 감고 3시간만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시내 밥집으로 나갔다.

 

 내가 기껏해야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일 뿐인 일에 왜 이리 심각한 표현을 써 대느냐 하면 그 자리가 초등학교 시절의 숙제나 시험보다 백배는 끔찍하기 때문이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과, 71년생 돼지띠란 것, 여자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공통점이 없는 이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세 시간이나 유지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자리를 가도 얘기할 거리가 없어서 입 닫고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이 모임에만 가면 정말 입 한 번 달싹거리지 못 하고 돌아온다.

 

 그날도 결혼해서 아이 낳고 고만고만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30대 후반의 친구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까칠하고 잘난 척 하는 독신녀’라는 소리 안 듣고 무사히 이 시간을 마칠 수 있나 싶어 열심히 웃음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일찍 일어날 궁리를 짜내면서... 나도 웃음연기 말고 대사 있는 연기도 하고 싶은데 아이들 얘기, 남편 얘기, 재테크 얘기, 드라마 얘기... 도대체 하나라도 내가 입을 뗄 수 있는 거리들이 없으니. 게다가 그날은 연말이라고 거하게 대낮부터 고깃집이었다. (육식을 못하는 까닭에, 그렇지만 입맛까지 까칠하단 소리 들을까봐 따로 시키지도 못하고) 세 시간을 상추와 당근만 씹으며, 그저 조신하게 웃고만 있으려니 참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내 웃음연기가 완벽해서 마음에 들었는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덕담이랍시고 한 마디씩 던져준다.

 “넌 혼자 살아도 참 행복해 보여.” 
 “넌 남편 없어도 별로 외로워 보이지 않아서 좋다, 얘.” 
 “독신이라도 성격 좋잖아. 애 없어도 생속인 것 별로 표 나지 않고.”

 

 그 애길 들으면서 속없는 년처럼 허허실실 웃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입이 근질근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억지로 웃느라 뭉친 안면근육을 풀면서 아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난 혼자 살아서 행복하고, 남편 없어서 외롭지 않고, 아이가 없어서 성격이 좋다. 이것들아, 도대체 뭘 알고 지껄이는 건지...”

 하루 종일 투덜투덜 대봐도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 대놓고 얘기하지, 왜 뒤늦게 이 짓이람. 그렇지만 낼모레면 마흔인 이 나이에 이십 대처럼 굴 순 없지 않나. 20대 후반에 ‘니는 아직도 결혼 안했나? 그 나이까지 뭐했노? 연애 안 하고.’ 하는 선배에게 ‘어, 아직도 이혼 안 하고 살고 있어요? 뭐했어요? 그 나이까지 바람도 안 피고?’ 했다가 성격 더럽다고 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욕먹는다. 나의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농담을 이해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정말 더 이상 대꾸할 기력이 없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장애인인데도 참 즐거워 보여.’, ‘애가 아빠 없이 자랐어도 얼마나 반듯한지 몰라.’, ‘저 집은 가난해도 참 행복해 보여.’, ‘저 친구는 대학을 안 나왔어도 참 똑똑해.’ 따위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경악스럽다.

 

 어느 누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순 없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겠나? 결혼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서 행복할 수 있겠나? 사지육신 멀쩡한 게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장애를 가져도 행복할 수 있겠나? 두 부모가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한 부모로도 행복할 수 있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렇기에’ 행복하다. 행복한 독신녀는 남편 따위 없기에 행복한 것이고, 행복한 가난뱅이들은 바로 돈 따위 없기에 행복한 것이다. 행복한 장애인은 바로 그 장애가 있기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행복한 한부모가정은 아빠, 혹은 엄마 따위 없어서 행복할 수 있다.

 

 자기의 잣대로 남의 인생을 재단하지 말자. 제발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12-06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한 세번 암송했습니다. 산딸나무님.

조금씩 나이 들어가며 내 아이들에게 또는 주위사람들에게
은연중 내 가치관을 들이대는 것 같습니다.
반성합니다. 하하
각인될 때까지 당분간 좌우명으로 삼아야겠어요.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산딸나무님 고마워요.


산딸나무 2007-12-06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십대 후반의 후배가 자기 인생의 좌우명이
'늙더라도 꼰대가 되지는 말자!'래요.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어찌나 뜨끔했는지...
 

  

 가을이 막 시작되는 어느 날, 그 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모처럼 느긋하게 책 읽을 수 있는 하루를 통째로 얻은 날이라 기분 좋게 사 둔 책을 들고 서재 소파에 앉았다. 한데, 기분이 묘하게 어지러워서 책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그 어지러움의 정체가 무언지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한 채 열댓 장을 넘겼는데, 꾸역꾸역 읽어내려 가는 글들이 손에 든 모래알처럼 뇌에서 흘러나가는 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지금 이 책이 재미가 없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분야, 좋아하는 저자의 책인 데다 전개 방식도 꽤나 매력적인 책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즐겁지가 않았다.

 

 책갈피도 끼우지 않은 채 그냥 책을 덮었다. 뭘까? 뭐가 문제인 걸까? 특별히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미뤄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골치 아픈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책에 빨려들지 못하는 걸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별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책장에서 다른 책을 골라 읽기로 했다. 그래서 읽지 않은 책들을 주욱 훑는데, 당혹스럽게도 아무 것도 읽고 싶은 게 없었다. 그 책들을 골라서 살 때만 하더라도 빨리 읽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는데... 

 

 순간, 어지러움의 정체가 나를 확 덮쳤다. 이럴 수가... 지금 나는 ‘책’이 재미없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책 읽기’가 재미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책 읽기가 재미가 없다. 도대체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는 거지? 서재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그동안 내가 읽었던 잡다한 책들을 쳐다보면서 내가 저걸 도대체 왜 읽었던 걸까, 갑자기 막막해졌다.

 

 글자를 깨친 그 순간부터 책 읽는 것이 늘 행복하고 즐거웠다. 책 읽기는 그 자체가 행복한 삶과 동일한 목표였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 그 생각거리들을 가지고 사유하는 즐거움은 정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지도 않고, 알아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다만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를 늘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고, 읽으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책 읽는 일이 재미가 없다니... 몇날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까닭을 찾았다. 그러기를 사나흘.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소통하지 못하는 책읽기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처음 며칠은 그 ‘소통 부재’가 ‘내가 읽은 책을 함께 이야기 나누어줄 사람이 없음’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책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소통은 세상과, 현실과, 삶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이십 대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일하는 것을 꽤나 즐겼다.

 그런데 삼십대 초반 즈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끔찍하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감성보다 논리가 앞서고, 삶의 이해보다 판단이 앞서고, 주의와 주장에 현실을 끼워 맞추고, 내뱉는 말을 회의하지 않고, 자기 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내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주장하고 움직여야 하는 일이 나를 너무도 고통스럽게 했다. 나도 확신하지 못하는 말을 내뱉고, 그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시 또 다른 말들을 내뱉고...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때 내게 필요한 것은 사유였다.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의심할 수 있는 여유가, 회의를 뒷받침해줄 철학이 간절히 필요했다. 나는 내 삶을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오랫동안 해왔던 일들을 다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접었다.

 

 그렇게 세상과 한 발짝 떨어져 살면서 솔직히 나는 오랫동안 행복했다. 책과 만나는 시간들이 즐거웠고,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찾아가는 사유의 여정들이 늘 충만한 기쁨으로 나를 채워주었다.

 

 그러나 지금에야 알겠다. 그 시간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세상과 소통하던 시간들이 남겨준 결과물이었다는 걸. 책 속에는 길이 없다. 그 길은 늘 세상 속에 있다. 소통할 세상을 뒤로 한 채 얻는 지식이 얼마나 큰 짐이고 고통인지 절절히 깨닫는다.

 

 어느 시인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 내려갈수록 나무들은 생채기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너무도 멀쩡하다고 가슴 아파했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 역시 너무도 멀쩡한 수피를 입고 있다. 그렇구나. 내 생채기들이 이렇듯 다 나았구나. 그걸 모르고 있었구나.  생채기가 없는 마음에 책과 사유가 어떻게 스며들겠는가.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

 나는 이제 책을 덮어야겠다. 다시 내 수피에 생채기를 내러, 세상과 소통하러 가야겠다. 마음 단단히 먹고...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10-2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래요. 산딸나무님.


비로그인 2007-10-25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친듯이 책을 읽다가 멈추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는 30대 초반까지 줄기차게 책을 읽다가 한 10년 책과 다소 멀어졌던 시기가
있었답니다.
40대 초반부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지요. 전보다 훨씬 느긋하게 읽고 있습니다.
책읽기와 멀어졌던 이유는 간명합니다. 사노라 바빠서였지요..


산딸나무 2007-10-25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살다보면 또다시 책읽을 시간이 아쉬워지는 날이 오겠지요?
그래도 그렇게 짬짬이 읽는 책이 더 행복한 것 같습니다.
사는 게 너무 느긋해서 책만 읽었던 삶에 대한 반성이에요^^
 

 추석날 저녁, 바람이 좋아 옥상에 앉아 어머니께서 가꾸신 고추며 호박이며 들여다 보고 있는데 가족들이 하나 둘, 갑갑한 방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왔다. 오빠들과 새언니와 딱히 궁금하지도 않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어머닌 평상에 앉아 빨래를 개키며 친척들의 시시콜콜한 생활들을 들려주시고, 조카녀석들은 대여점에서 빌려온 '나루토'를 한 권씩 들고 복습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옛날 어렸을 적에 명절이나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내게 얘기 한 자락을 청하시던 아지매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용돈 받는 재미로, 칭찬 받는 재미로 책에서 읽은 전래동화를 어른들 앞에서 풀어내곤 했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선 '말'이나 '대화'가 아닌 '이야기'를 가족들 앞에서 풀어내 본 적이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순간, 가족들 앞에서 의무방어전이 아닌 진짜 내 흥으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단 욕구가 들면서(사실, 이 흥도 조금은 의무감이기도 했다.) 조카 녀석들에게 만화책을 덮고 얘기 한 번 들어보라고 졸랐다. 고등학생이 된 큰 조카는 좀 귀찮다는 듯이, 중학생인 작은 녀석들은 손가락으로 여전히 읽던 페이지를 끼워들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내가 한 이야기가 바로 양영순의 천일야화, 마지막 이야기였다.

 사실, 가족에 대한 넘치는 애정 따윈 애당초 허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내가 지극한 형제애를 다룬 그 장면을 선택한 것은 가족들 앞이어서가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읽는 내내 울고 또 울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그 이야기에 흠뻑 젖어들어야 하는데 요 근래 읽은 이야기 가운데 나를 가장 매료시킨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얘기를 들려줄 때,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울었던 그 장면에서 내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기 때문에, 자칫하단 아이들 앞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도대체 내 속에 있는 어떤 무의식을 건드렸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나를 흔드는 것일까? 나도 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겨우 겨우 마치고 조카들에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모두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다시 읽던 만화책에 집중을 했다.

 그런데 언니와, 오빠의 표정들은 달랐다. 모두 내 이야기에 공감하며 나와 같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나와 내 형제들의 성장기의 정서에 맞닿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시여! 저희에게 또다른 하루를 열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이라는 이 귀한 선물의 가치를 잊지 않도록 늘 일깨워주옵소서. 저희가 누리는 이 하루가 저희를 기억하는사람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하소서..."

 신에게 고백하지 않더라도 찬찬히 생각에 머물다보면 내 삶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루도 내 걱정과 의지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사랑하는 이의 염려와 지지와 바람과 기도로 내 하루의 삶이 온전히 이루어져 있음을... 내 의지와 노력은 그것들을 장작으로 해서 타오르는 불꽃임을...

 '오늘'이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구나. 그러고 보니 달이 참 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은 꿈이 있어 살아갈 수 있다 한다.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살아보니, 그 꿈꾸기가 행복함 보다 괴로움을 가져다 줄 때가 더 많다.

꿈을 위해 잃어야 했던 것들, 꿈을 위해 가지 못한 길...

새삼 내 꿈이 버거워진다.

그 꿈이 나를 지금껏 버티게 해 주었는데,

그것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 갈 수 없는 길들에 미련이 생기는 건,..

약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그 꿈을 얼마나 힘들게 부여잡아 왔던가 잊어버렸기 때문일까?

오늘 다시 내 꿈을 생각한다.

내 꿈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

아무리 숨 막히는 삶에서도, 적어도 네가 있어 숨 쉴 수 있게 해 주었던 날들.

아무리 아픈 사랑의 상처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날들.

아무리 구차한 삶도 씩씩하게 살아낼 수 있게 해 주었던 날들.

잊어서는 안 되겠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7-2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풍진 세상에, 꿈이 없다면 재미가 없을 테지요.

꿈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소중합니다. 그렇고 말고요.




산딸나무 2007-07-2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도 지금 꿈꾸고 계시겠죠?
그 꿈 덕에 날마다 좋은 날 되시길...

스위트피 2007-08-0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제 언니 서재로 초대를 받아 무척 기뻤어요.
잠이 안와서 잠깐 들렀는데 별천지가 따로 없네요.^^
음~이 행복한 사람의 냄새~
이대로 책속에 파묻혀서 영원히 꿈만 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온 우주가 그대에게 힘찬 응원을 보냅니다. 홧팅!

산딸나무 2007-08-02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 우주와 교신하는 분이시군요^^
들러줘서 고마워요.
그대도 날마다 좋은 꿈꾸며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