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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배경은 체코의 프라하, 러시아군 점령 이후 러시아의 군용기들은 밤마다 프라하 상공을 날았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에 군용기의 침략은 별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 2년전 겨울 유럽 배낭여행 때 난 그 도시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었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동화속 세상에 와있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마치 내가 알고 있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공간과 그 느낌을 떠올렸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공산주의니, 자유주의니, 체코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에게 소설 속 상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역사적인 상황과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 이 소설은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인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프라하의 봄'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어야 했으며 많은 청년들은 이데로올기라는 대명제 앞에 좌절감과 비극을 맞봐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저자 쿤데라가 청년 시절에 아무런 예행 연습도 없이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가 좌절한 채 ‘생은 다른 곳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체험의 산물이다. 그는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서야 하는 인생의 무의미와 무용한 열정을 괴롭게 곱씹는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기획하고 준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수를 교정할 수 없고, 인간은 전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책임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가 아닌가? ' 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런 물음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토마스, 프란츠, 사비나, 테레사 이 네명의 주인공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네 주인공 모두 가벼움을 추구했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라기 보다는 저자 쿤데라가 의도, 인간은 모두 참을 수 없을만큼 가벼운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으리라.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토마스는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둥이 었으며 테레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과 정사를 나눴다. 그는 사랑과 육체적인 관계는 별개라고 주장했으며 그런 그의 모습이 테레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반복' 그것은 반복이었다. 그 반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조금 의문스럽지만 난 그의 반복은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되는 많은 책임들을 회피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테레사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는 강했고, 테레사는 약했다. 그들은 애초부터 맞지 않았으면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테레사는 무거움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절과 그를 향한 사랑과 질투심은 토마스에게는 삶의 무게였으며 책임이었으며 억압이었다. 토마스는 끊임없이 그 무거움에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결국은 그녀에게 죽음마저도 강요한다.
테레사는 토마스의 가벼움을 이해할 수 없으며 토마스의 성적 가치관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육체를 허락하는 것을 시도해보았지만 그런 행위는 결국 그녀에게 더 큰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 그녀는 토마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깨부수고 싶어했다. 토마스가 그녀에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시도했던 것 만큼 그녀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그녀도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책임과 무게를 혼자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벼움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토마스에게 테레사가 무거움이었다면 사비나는 가벼움이었다. 그녀의 삶의 자세는 토마스와 비슷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된 많은 것들로부터의 배반을 시도하며 살아왔다. 양친을, 남편을, 사랑도, 고향도.. 모든것을 배반했다. 그녀의 그 모든 배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자신의 주위가 텅 빈 것을 느껴야 했다. 그녀의 배반의 목적은 그 '텅빈' 가벼움 이었다. 우리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것은 언제나 전혀 미지의 것이다.사바나 또한 어떤 목적이 배반에 대한 그녀의 욕구 뒤에 숨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추구한 것은 결국 가벼움이었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하찮은 것이며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해 주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영화 <나비효과> 에서 옆볼 수 있었다.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그것은 시간의 다층성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A라는 시점에서 a,b,c,d,e... 등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이며 그 선택에 따라 다른 시간의 길로 들어선다. 그것은 미리 앞서 연습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그것을 쿤데라는 최초의 시연(詩演)이라고 표현했다. 우리에게는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삶이 있고, 이것을 이전의 삶과 비교 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의 삶에서 교정 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가볍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존재다.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에 철학을 담았다. 내가 그 철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그의 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복잡한 심정과 고민과 맞아 떨어져서 일 수도 있으며 내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존재의 가벼움' 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통쾌함이며 위안감 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믿는다. 가벼움이 인간의 본질이라고해도 실존은 본질을 우선할 수 있다는 것을. 또 소망한다. 나의 실존은 결코 가벼움이 아닌 실제적이고 참된 것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