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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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의 글을 참 오랜만에 읽는다. 그의 첫 단편집인 『달려라 아비』를 난 정말 좋아했다. 지금 보아도 비슷한 느낌일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밝지 않은 소재를 발랄하게 풀어가는 (일종의) 깨방정(!?) 같은 느낌을 준 책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바깥은 여름』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이상하고 어색했다. 『달려라 아비』 만큼이나 산뜻한 표지와는 달리, 문제도 무거웠고 등장인물들도 우울했으며 사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전체를 휩싸고 도는 어떤 어두운 분위기가 있다. 앞의 두 세 편을 읽을 때까지는 난 그것을 “질척거림”이라고 이해했다. 질척거린다는 말의 어감보다 내 느낌의 강도는 조금 더 무겁지만, 적당한 말을 고르자면 그렇게 될 것 같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에 붙잡혀서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인다. 지내온 시간, 머무른 공간, 사건에 대한 기억, 타인의 흔적, 세상의 고루함과 편견, 자책 같은 것들이 이야기 전체를 짓누른다. 책을 읽던 어느 시점에선,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가 이 소설에서 풀어낸 모든 무게가 나 또한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단편은 「건너편」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적어내려갈 순 없으나, 누군가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그토록 한심하고 비루할 것만 같아서 그랬다. 그 너덜너덜해진 과거를 기어이 붙잡고 싶어했으나, 그 방식마저도 이상하게 어긋났던(더 정확히는 이수가 비난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관계에서 나를 보았다. 그런 관계는 언젠가 어그러지고, 그 어그러짐은 오히려 더 어그러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선사한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정말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이 책 안에 등장한 단편 중 몇몇이 죽음을 중요한 소재로 다룬다는 점은(「입동」, 「노찬성과 에반」,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침묵의 미래」), 진흙탕같은 답답함을 자아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인 것 같다. 더군다나, 물론 어떤 죽음이 그럴까 싶지만, 이 책 속 그 모든 죽음들 중에 유쾌하고 축복받으며 그 과정을 맞이하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다. “액체같이” ‘질척’거리거나, 사고로 죽거나, 이유가 없거나, 그러하다. 그래서 내 생각은, “질척거림”에서 조금 더 무거운 것보다 훨씬 더 침잠된, 하지만 내가 언어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이 단편들 전체를 통해 작가가 전하려던 말이 아닐까 싶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이런 태도는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겐 그 사건이 충격이겠지만, “징후”를 읽어내는 문학가로서 더욱 그 무게가 더했던 모양이다. 김애란 작가 스스로도 이 단편집 속에서 그런 점을 감추지 않는다. 누가 봐도 세월호가 테마일 것 같은 작품이 두 개(「입동」,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나 있다(각각 2014년과 2015년에 발표되었다). 죽음을 둘러싼 돈과 현실의 문제를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노찬성과 에반」 같은 은유도 있다. 그 충격과 그것을 소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여러 행태들은, 그의 시선을 거쳐서 이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다.


그래서 독자로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을 거치며 변한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이 반드시 깊이를 담보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가 깊이가 없는 작가도 아니었으니 내가 그의 작품의 수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다만,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로 한숨을 짓게 만드는, 그 정말 많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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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종속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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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둘러싼 가장 큰 아이러니는, “여성의 종속”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다룬 책이 1세계-백인-귀족-남성이라는 가부장제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 아이러니가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아마 이 책이 써졌던 당시에는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 이 책에 더욱 설득력을 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편으로는 밀이 대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씁쓸하다.


이 책에 부정적인 형태로 등장하는 몇 가지 담론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씁쓸함을 넘어서 서늘함을 느끼게 만든다. 성의 역할이 나눠진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느니, 관습이 좋든 나쁘든 어찌되었든 현재 상태로 보았을 때 성역할을 엄격히 나누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느니, 법적으로 평등이 보장된 지 한 몇 년 정도 지났는데 이런 상태인 것을 보면 원래 여성 일반이 남성 일반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 아니냐느니 하는 말들 말이다. 이러한 여성혐오의 논리는 (능력도 안되면서 혜택을 받아간다는) 무임승차에 대한 비판으로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야기들은, 19세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참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었나보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란 본성이 아니라 관습이라는 것, 현재의 합리적 선택이 미래의 도덕적 비전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것, 법은 한 순간에 바뀌지만 그 법이 지탱하는 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 그리고 너무나도 오랜 기간동안 여성차별을 감행해온 사회이기에 그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여성들이 등장하는 세대까지 우리는 기다려보아야 한다는 것, 그 전까지 우리는 법과 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차별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결코 무임승차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만드는 아주 윤리적인 정책이라는 것, 그리고 이렇게 하면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에 포함되리라는 것. 이 정도가 밀의 반박이자 주장이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고 온건하고, 또 다르게 보면 비현실적이고 급진적이다.


밀이 비판한 사회와 우리 사회는 얼마만큼 닮았을까? 법적 가족의 중심으로 남자만을 인정하는 호주제가 폐지된 지 이제 겨우 한 세대가 지났다. 면접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 지원자에게 결혼과 출산 계획을 물어본다. 계획이 있다고 하면 떨어뜨린다. 없다고 하면 고용한 뒤에 회식 자리에서 “요새 여자들이 돈버느라 결혼을 안하려고 그래. 그래서 뫄뫄 씨는 결혼 언제 할 거야?”라고 물어본다. 그렇게 마련된 소개팅이 잘 되어서 결혼을 하면, 떨어뜨린다. 그래놓고 취집이니 맘충이니 떠들며 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느냐고 책임을 따져묻는다. 온 사회가 여성을 결혼과 가족의 안으로 몰아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모두가 힘들다 말하지만, 이렇게 여성은 여성이라 더 힘들다.


결혼과 직업이라는 문제는, 이렇게 밀의 시대에도 우리 시대에도 여성에게 매우 중요하고 직접적이며 차별의 최전선에서 언급되는 주제다. 이것이야말로, 역사 속의 고전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사리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서 우리가 『여성의 종속』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PS. 글쓰기 클래스 여성 수강생 두 분과 각각 같이 읽어보고, 감상문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한 분은 "저자 약력보고 깜짝 놀랐어요. 요즘 사람인줄"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다른 한 분은 "한국인이 현대어로 쓴 다른 좋은 책이 많은데 왜 이 책을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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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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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에서는 옛글에서만 느껴지는 고유한 향기가 있다. 대체로 오래된 책에서 나는 묵은 종이의 흔적이라, 친숙하진 않다. 다른 옛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산뜻한 이덕무의 글 중에서도 알듯말듯 미묘해서 더 현대적인 메모만 가려 모아놓았기에, 이 책에 담긴 글은 옛내음과 새 향취 중간 어디쯤에 있다. 세상살이보단 주변의 소소한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썼고, (어디까지나 과거 또는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만) 억지로 교훈을 끌어내거나 하지 않으려는 담백한 태도도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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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 - 자서전
스티븐 윌리엄 호킹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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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세상 가신지 얼마 안 된 분이 쓴 책에, 그것도 자신의 일생을 다룬 책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고인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내가 읽기에 그다지 좋은 책은 못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할 때 그 이유는, 첫째는 이 책의 성격 때문이다. 이 책은 자서전 중에서도 탐구의 여정이 강조된, 이른바 지적인 자서전에 속한다. 그래서 200페이지도 안되는 얇은 분량 안에서 자신의 연구에 관한 이야기가 절반도 더 넘는 분량을 차지한다. 문제는, 호킹의 연구를 읽고서 이해하며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인지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턴도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몇 년을 배워야 할 만큼 어렵다는데, 아인슈타인은 아무리 교양으로 책을 보고 강좌를 들어도 공부하자마자 까먹는다는데, 호킹은 이 둘보다도 더 뒤다. 발상은 그만큼 더 상식과 멀어지며, 실험에 대한 이해 난이도는 훨씬 더 올라가있다. 내용이 이해가 되질 않으니, 그의 평생의 연구주제였던 “우주의 시작과 끝”이라는 흥미로운 주제와 그의 연구가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되는지는 그야말로 어렴풋하게 감만 잡힐 뿐이다. 평균의 한국어 독자가(내 생각엔 영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이 책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몇몇 과학용어 빼면 없을 것 같다.

두번째 이유는, 그의 삶이 외형적으로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그렇다. 물론 신체적인 이상이 엄청난 핸디캡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의 인생이 드라마틱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자서전의 독자인 내가 호킹을 나무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의 지적 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라면, 그의 삶이 엄청나게 흥미진진할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지성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고할만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엔, 캠브리지 대학의 개혁적 분위기 속에서 학생과 교수 사이의 중재자로서 뜬금없이 중국과학사 연구자인 조셉 니덤의 이름이 나와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이런 우호적인 고려가 없다면, 그의 인생은 아주 가차없이 요약할 수 있다.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 빠르게 교수사회에 자리잡았다. 심지어 학생을 가르칠 필요가 없는 석좌교수직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계속 연구했다. 가끔은 강연도 했고, 여행도 다녔고, 결혼은 두 번 했다. 끝.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탄식이 나올 대목이다.

호킹의 인생에 관한 그 짧은 글에서 내가 읽어내지 못한 행간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 책임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독자에게 친절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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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
장동선 지음, 염정용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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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공부했던 나로선, 인간의 생물학적 구성이 행위에 미치는 영향은 항상 관심사의 영역 안쪽에 있었다. 특히나 그 영역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고와 감정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뇌라는 기관은, 인체의 여러 부분 중에서도 특히 이목을 끈다. 그래서 이 분야를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책이 나오면 반갑게 맞이하곤 하는데, 장동선의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 또한 마찬가지다.


뇌과학을 다루는 다른 책에서도 논의되는 부분이긴 하나, 이 책이 특히 강조하는 점은 뇌의 구성의 외부성이다. 우리의 뇌는 항상 뇌 바깥의 어떤 것들과 상호작용하며 구성, 조직된다. 한 편으로는 자연과학자로서 가지게 되는 당연한 입장이겠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뇌에 대한 연구로 현재 존재하는 인간 개개인을 낱낱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또는 뇌과학이 그런 역할을 담당해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 같은 것을 약간은 완화시켜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공기저항과 중력이 없다면 물체는 관성에 의지해 자신의 운동상태를 유지하겠지만 지구에선 일반적으로 그런 상태를 구경하기 힘든 것처럼, 우리의 뇌 또한 일반적인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나 그것을 구현하는 일은 실험실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쓴 저자도, 이 독후감을 쓰는 나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모든 서로 다른 타자들과(인간에만 국한할 수 없기에 “타자”라는 용어가 더 적당할 것 같다)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 것처럼 보인다. 앞부분은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에 인간이 대응하는 이야기가 주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즉, 나와 나 아닌 것들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가, 더 정확히는 나는 ‘나’로 태어나며 다른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설명이 주로 등장하는 것 같다. 반면 후반부는 서로 이미 확립된 인간들과 그들의 구성물 사이의 관계를 주로 보여주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 협력과 사회적 압력, 도덕적 행위와 그 해석, 문화적 차이 같은 테마들이 그렇다. 전반부의 내용이 단수로서의 ‘나’에 관한 설명이라면, 후반부의 내용은 복수로서의 ‘나’들, 이미 충분한 구성의 결과를 가진 뇌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에 뇌과학과 관련된 또 다른 책(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을 읽어서 그런지, 소개된 실험들 가운데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철학의 영역에서 “퀄리아(qualia, 감각질)” 문제라고 불리던, 같은 주파수의 빛을 볼 때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범주”의 문제로 정리되었다는 연구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가상현실 프로이트 실험의 경우, 나도 실험군으로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흥미를 끌었다.


사실 책의 내용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험의 함의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충격을 준 내용이 두 가지 있었다. 첫번째는 카우클리커 게임에 관한 것이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언급된 팜빌은 해보지 않았지만, 스머프 마을 만들기나 심시티같은 ‘(농장)키우기’ 장르의 게임을 엄청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쓸데없다고 매도하는 사람들은 내게 모욕감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 두번째는 다수 경향성을 뒤집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내가 진실을 알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이것은, 대체로, (다른 영역에서는 잘 모르겠으나, 대체로 음모론을 즐겨 사용하는 정치가들이 많이들 그러는 것 같긴 한데) 철학자들이 대체로 자신의 주장을 억지로 정당화하기 위해 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과학으로 근거를 찾을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신기했다.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다지 새로운 정보는 많이 없는 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험들이 배치된 방향, 즉 우리의 뇌(를 포함한 사실상 인격 전체)는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변화한다는 테마만큼은 내 뇌에 확실히 전달된 것 같다. 이것을 읽으면서, 지적인 노동을 한 만큼 내 뇌의 구성도 조금은 더 촘촘해졌으면 하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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