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 - 되찾은 시간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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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시간 1⌟에 해당하는 12권은 잃시찾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마음이 가장 편안했다. 그동안은 문장들을 붙잡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 무기력했던 내게 그나마도 내용의 재미(!)도 알려준 권이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독일의 통일은 19세기 말에 비로소 이루어졌고 프랑스는 비록 궁정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1세기 이전 시민 혁명을 경험한 국가였다. ‘귀족’이라는 특권 계층이 내려오고 ‘개인’, 다시 말해 ‘시민’이란 존재가 부각되고 그런 구성원들’의 국가’라는 개념이 부상한 것은 ‘근대’라는 개념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주로 책에서는 프랑스 대 독일이라는 대립적 관계로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1차 대전은 자칭 민족국가 삼국 vs 연합군들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사회적 가치들이 충돌한다.  


동물의 몸이나 인간의 몸, 다시 말해 그 각각이 단 하나의 세포에 비해 몽블랑처럼 거대한 세포의 집합체가 존재하듯이, 개인으로 조직된 거대한 집합체인 국가가 존재한다. 국가의 삶도 개인으로 조직된 집합체를 확대하면서 그 구성 요소인 세포들의 삶을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포의 신비와 반응과 법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국가 간의 갈등을 얘기할 때에도 의미 없는 말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인 심리의 대가라면 그의 눈에는 서로 대립하는 개인들의 응집된 거대한 덩어리가 단지 두 성격의 갈등에서 비롯된 분쟁보다 훨씬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비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거대한 덩어리를 키 큰 남자의 몸이 적충류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비율로, 다시 말해 1밀리미터의 입방체를 채우는 데 1만 마리 이상을 요구하는 비율로 볼 것이다. 이처럼 얼마 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작은 다각형들로 그 주변까지 채워진 프랑스라는 거대한 형상과, 최근에 통합되어 예전보다 더 많은 다각형들로 채워진 독일이라는 형상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 P160


화자는 공쿠르의 미발표 일기를 읽으며 글쓰기에 대한 생각, 자신의 작가로서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 돌아본다. 


어떻게 기록 문학이 가치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관찰하는 작은 사물들 아래 그 실재가(멀리서 들리는 비행기 소리나 생틸레르 성당 종탑이 그리는 선 안에 담긴 위대함, 마들렌의 맛에 담긴 과거 등) 들어 있으며, 또 사물들로부터 실재를 끌어내기 전까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

삶처럼 단순하며 어떤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예술은 우리 눈이 보고 우리 지성이 확인한 것의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중 사용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그런 예술에 전념하는 자가 어디서 자신의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인 기쁨의 불꽃을 발견하는지 자문하게 된다. - P73


나는 기록 문학이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록 문학, 일명 르포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분명 있다. 문학이 반드시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오히려 기록 문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상황 자체가 개인과 관련 없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일까. 프루스트가 생각하는 기록 문학과 내가 생각하는 기록 문학의 차이가 크구나 생각했다.


12권은 전쟁이 발생하면서 생기는 개인과 사회적 변화가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프루스트다운 그림 같은 묘사의 기법이 들어가 있을 뿐이지 사실적 상황에 기반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게으름 때문에 할 일을 매일 다음 날로 미루는 습관이 있는데 어쩌면 죽음도 같을 거라고 상상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날 내가 맞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대포를 어떻게 무서워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따로 형성된 폭탄 투하와 가능한 죽음의 관념은 독일 비행체의 횡단에 대해 내가 그려보던 이미지에, 흔들리는 하늘의 안개 물결로 내 시선에 조각난 모양으로 대롱거리는 그 비행체 중 하나에서, 비록 그것이 살상 무기임을 알았지만 별과 같은 천상의 존재로만 상상하던 비행기에서 어느 날 저녁 우리를 향해 폭탄이 떨어지는 움직임을 목격할 때까지는 어떤 비극적인 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 P218


전쟁은 개인에게는 벼락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갑작스런 전쟁에 개인들은 당황하기 마련이고 내 앞에서 폭탄이 날아올 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1950년에 살아 있었다면 전쟁을 겪었을테지만 지금은 기록으로 알 수 있을 뿐이지 당시의 나였다면 전쟁은 불행한 벼락 같은,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의 이미지(또는 기록으로 그리던 이미지)가 실제가 되는 일은 그렇게 찰나일지 모른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명철한 의식은 우리 시대에만 존재하지 않고 시대마다 존재했네. 베수비오 화산 근처 도시들의 운명을 우리도 내일 겪게 되리라고 생각하네만, 그 도시의 주민들은 성경에 나오는 저주받은 도시와 같은 운명의 위협을 받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네. 누군가가 폼페이의 집 벽에서 ‘소도마, 고모라’라고 쓰인 계시적인 비문을 발견했으니까.” - P226~227


전쟁은 개인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킨다. 애국심과 충성을 불러일으키기도, 공포를 조장하기도 하며 나아가 광기로 발현되기도 한다. 샤를뤼스 씨가 보여준 병적인 공포는 마치 어떤 죽음의 선고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두려움의 기준이 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의 기준에 상응한다고 믿는 것은 부정확하다. (…)

몇 명의 고객들은 정신적 자유를 되찾는 것 이상으로 갑자기 어둠이 덮친 거리에서 뭔가를 하고 싶은 유혹에 이끌렸다. 하늘의 불길이 쏟아지는 이들 폼페이 주민들 중 이미 몇몇은 지하 묘지처럼 컴컴한 지하철 복도 속으로 내려갔다. 사실 거기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원소처럼 모든 것을 적시는 어둠이 그 효과로서 몇몇 사람들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을 자아내어 평소에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르게 되는 그런 애무의 영역으로, 쾌락의 처음 단계를 생략하고 곧바로 들어가게 한다. - P274


100여 년 전 배경의 전쟁을 떠올리며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떠올랐다. 누가 그런 고통을 마주하고 싶겠는가.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일상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고 평범한 일상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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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2-10 2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프루스트 완독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이 경험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그래야만 함! 흐흑)

거리의화가 2023-12-11 09:0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미미님 마지막 문장 저도 동감합니다. 13권을 읽는데 걸린 시간만 해도 얼마인데 남는 게 뭐라도 있겠지 하는 마음을 갖게 하죠^^ 프루스트가 관념론자라 저는 특히 읽는데 고단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값진 경험이었어요.

자목련 2023-12-11 0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진 화가 님.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3-12-11 09:27   좋아요 1 | URL
자목련님의 축하 인사가 어느 때보다 기쁩니다^^ 감사드려요!ㅎㅎ

희선 2023-12-11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앞에 열한권을 읽어서 이번 12권이 재미있게 느껴진 거겠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거의 다 와서 좋았을 듯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그것 때문에 죽고 힘든 사람이 많군요 전쟁이 끝나도 사는 게 쉽지 않겠지만, 전쟁이 없는 게 더 낫겠지요 세계가 평화로워지면 좋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2-11 12:51   좋아요 0 | URL
막판으로 올수록 드문드문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래 지나지 않고 읽어서 인물이나 사건 등이 기억이 나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12권은 역사적 배경에 따른 인물과 상황 묘사들이어서 그나마 읽기가 편했어요. 앞 권들에서도 드레퓌스 사건처럼 역사적 배경이 있기는 하지만 19세기이기도 하고 사교회 장면들이 넘쳐나서 힘들었거든요ㅎㅎㅎ
말씀하신대로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어봅니다. 희망이라도 가져야겠죠^^
 

戴溪의 ≪通鑑義≫에 말하였다.
"王氏가 漢나라를 대신한 것이 杜게서 이루어지고 劉에게서 끝났다. 이 몇 사람들은 모두 儒學者라고 일컬어져 賢良과 直諫으로써 이름이 나고, 經書에 통달하고 옛것을 배운 것으로써 어질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이 촉망하는 바이고 天子가 소중히 여긴 바였으나 서로 더불어 나라를 그르침이 이와 같았다. 經學에 가탁하고 옛날의理를 수식하여 간사한 꾀를 쓰고 아첨함을 이루었다. 杜欽·谷永·劉歆 세사람은 은총과 녹봉에 의지하여 구차히 를 취하였고, 張禹와 孔光은 나약하고 자립하지 못하여 분을 면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일찍이 비루한 지아비와 小人만도 못할 뿐이다.
시작되어 張禹와 孔光에谷永에게서이 처음에 用事하여 국가의 권력을 도둑질할 때에는 그래도 감히 버젓이 함이 없지 못하고, 반드시 小人이 은밀히 돕고 묵묵히 가르쳐 줌이있어서 그 형세를 도와주어 이루게 한다. 저權臣들은 또한 스스로 자신들이公論에 용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반드시 명망과 재주와 지혜가 있는선비에게 가탁해서 자신들의 엄폐하니, 書生들은 대부분 욕심이 많고 剛한(굳세고 강하여 굽히지 않는)자가 적어서 이익으로 동요하기가 쉽고 禍로 위협하기가 쉽다. 그리하여 지조를 가볍게 바꾸고 깊이 스스로 결탁해서 그 말에 이르기를 ‘차라리 天子를 저버릴지언정 감히 權臣을 거스르지 못하고, 차라리 국가를 저버릴지언정 감히 권문세가를 저버리지 못한다.
하니, 아! 天子가 된 자들은 權臣으로 하여금 이러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해 - P140

야 할 것이다.
權勢가 이미 이루어져서 기염이 두려울 만하면 忠臣과 孝 중에 자신의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을 자가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黨與(도당)가뿌리를 잡아 신하들이 마음을 함께 함에 天子가 위에서 고립되어 온 조정에한 사람도 믿을 만한 자가 없게 되니, 크게 슬퍼할 만하지 않겠는가."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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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더미는 매우 풍성해 보이리라 기대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을 던져 주었다.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썩어 버린 것들을 적게는 열 개에서 많게는 20~30개까지 골라내야 했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존경의 마음 대신 신중한 눈길이 필요했다. 그 살구 더미는 이제는 더이상 어머니가 살지 않는 그 집에 있던 어머니의 나무에서, 새로운 소란이 한바탕 시작되려던 여름에 따온 것이었다. - P16


어제는 퇴근하고 나서 생각지도 않았던 전화를 받았다. 'xxx 여사'. 어머니였다. 

(저 이름은 누가 보면 그저 어떤 아는 어른을 존칭하여 적은 건가보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란 사람은 원래 그렇게 멋대가리가 없다. 주소록에 애칭이나 별칭으로 저장한 이름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뭔 일이지?' 하며 역시나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다. 

(늘 생각은 전화를 자주 하자 생각하지만 거의 잘 되지 않으며 전화를 받을 때 제발 상냥하게 대하자 생각하면서도 또 그게 잘 안 된다.)


어머니는 김치를 담갔다고 하셨다. 그제서야 "아..." 이 무렵이 김장 시즌임을 인식했다. 그리고는 불현듯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어머니께서 김치를 담갔다며 가져가라고 하셨던 일이 떠올랐다. 


"저희 김치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두 사람이라 김치를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이번엔 조금 담갔다며 극구 가져가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꼭 가져갔으면 한다고 덧붙이셨다. 그러면서 여동생은 벌써 김장을 일부 가져갔다고 한다. 


"네. 알았어요." 일부러 담아 놓으시고 전화까지 하셨는데 안 가져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답했다.


오늘 옆지기가 퇴근하면서 김치를 친정집에 들렀다 가지고 왔다. 조금 담았다고 하더니 비닐 봉지에 한 가득이다. 문자로 답신을 했다. "잘 먹을게요."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그렇게 올라타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채찍질을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면,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따른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 P15


1장 '살구' 편을 읽으며 아무래도 어머니를 생각했고 김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는 20 여년 전 뇌졸중이 와 몇 년을 고생하셨다. 투병 생활 이후 곱고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서글펐다. 그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경험을 한 번 경험하고 나서 몇 년 뒤 아버지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조금 더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 내 머리가 더 자란 탓도 있지만 한 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알츠하이머와 치매가 이제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게 생각만 해도 무서워 저만치 뒤에 떼어 놓으며 살고 있다. 


동화의 상황은 극단적인 것이 많아 어릴 때 잘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왜 계속 사람들에게 구전되고 읽힐까 궁금했다. 

동화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 문제에 휘말렸다가 그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문제 상황은 무언가 되어 가는 여정에서 꼭 거쳐야만 하는 단계인 듯하다. 온갖 마법과 유리로 만든 산, 집채만 한 진주, 한낮처럼 아름다운 미녀, 말하는 새, 잠시 뱀이 되어 버린 왕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대부분의 이야기에 담긴 핵심은 역경에서 살아 남는 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어려움은 늘 필수 사항이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는 건 선택 사항이다. - P27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니 동화가 다르게 보인다. 

같은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그 안에서 배울 수도, 배우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하겠다.


불안한 상태의 그 살구 더미는 내게 떨어진 임무인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어머니가 남긴 나의 상속권, 동화 속의 유산처럼 보였다. 그건 가족 나무에서 따낸 과일 더미이자 마지막 수확이었고, 동화에 등장하는 마법의 씨앗, 알 수 없는 방의 문을 여는 열쇠, 귀신을 불러내는 주문처럼 수수께끼 같은 선물이었다. 살구를 병이나 깡통에 담거나, 퇴비로 만들거나, 얼리거나, 그냥 먹어 버리거나, 술을 담그는 일은 동화에서 요구하는 임무와 거리가 멀긴 했다. 살구는 내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 거의 모든 일이 잘못 풀려나가던 이후의 열두 달 동안 내가 그 의미를 찾아야 할 이야기였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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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12-10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던 시기가 저희 엄마가 많이 아프셨던 때라 갑자기 생생하네요. ㅜㅜ 엄마 김치 너무 소중한데... 화가님은 바보얏!!! 시큰둥하지 말고 호들갑 떨어야 합니다. 왜냐면 정말 너무 소중하고 맛있음.. (아.. 그런데 만약 맛이 없다면....?.. 그것은.... 저는 맛없는 엄마의 요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거리의화가 2023-12-10 17:0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 바보 맞습니다. 감정 바보^^;;; 어머니께 김치를 받을 수 있는 때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생각하면 소중히 받아야하는데 말이죠. 사실 그것보다는 저는 어머니의 건강 때문에 김치를 안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커서 그게 잔소리로ㅎㅎㅎ 어머니가 좋으셔서 하시는 건데 제 기준에서 생각하지 말자 다시 한번 다짐해봅니다. 저희 어머니 음식도 제 기준에서 맛있어요. 특히 콩나물무국 정말 좋아합니다. 친정집 갈때마다 끓여주시거든요. 남편이 끓여주는데 그 맛이 결코 안 나더라구요^^;
이 책 챕터 1부터 눈물 훔치며 읽었습니다. 뒷 챕터들도 소중하게 읽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3부. 최후의 유목제국들

쿠빌라이의 휘하에 있던 투르크인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의 무대로 삼았고, 킵착 칸국 아래의 투르크인들은 비엔나 성문까지 치달았으며, 훌레구 휘하의 투르크인들도 이집트의 강가에 다다랐다. 오직 차가다이의영지인 투르키스탄의 ‘중원왕국‘에 있던 투르크·몽골인들만이 칭기스칸 일족의 세 울루스에 둘러싸여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그런데 이제 그들을 둘러싸던 담이 갑자기 허물어진 것이다. 서쪽으로트란스옥시아나를 두르고 있던 페르시아의 국가가 사라졌고, 킵착칸국이지배하던 서북방도 쇠퇴하여 길을 막을 능력이 없어졌다. 고비사막 방향으로도 ‘모굴리스탄‘이 폐허화되면서 길이 열렸고, 델리의 술탄국도 일시적으로 붕괴되어 과거 차가다이 칸국 때처럼 인더스 강을 방어할 만한 상황이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강요되었던 휴식을 보상할 기회가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외곽에 있던 투르크-몽골 울루스들만이 정복의 재미를 맛보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람들은 몽골식 전투의 영광과 보상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이제 마침내 그들의 시대가 찾아왔다.
티무르의 서사시 - 계속된 배반과 살육을 우리가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면 -는 비록 종족으로는 투르크였지만, 그리고 비록 늦기는 했어도 몽골의 서사사의 일부였던 것이다. - P590

샤 루흐는 티무르조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였다. 무시무시한 티무르의 이 아들은 비록 평화로운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훌륭한 지도자였고 용맹한 전사였다. 그는 인간적이고 온화했으며 페르시아 문학을 애호하였고뛰어난 건설자였다. 또한 시인과 예술가의 후원자였으며 아시아가 그때까지 배출할 수 있었던 가장 탁월한 군주였다. 그 과정은 칭기스칸에서 쿠빌라이로 진행된 동일한 패턴을 밟아 나갔다. 1407년부터 1477년까지의 그의 긴 치세는 문화적 방면에서 페르시아 문학과 예술의 황금기를 맞아 ‘티 - P642

무르조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가 수도로 삼았던헤라트와 그의 아들인 울룩 벡 -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 - 의 거처가있던 사마르칸드는 이 르네상스의 가장 화려한 중심지였다. 역사에서흔히 일어나는 패러독스처럼 이스파한과 시라즈를 파괴한 도살자의 아들들이 이란문화의 가장 적극적인 보호자가 된 것이다. - P643

모스크바 국가의짜르였던 ‘공포왕‘ 이반 4세 (1533-1584)는 카잔의 독립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하고, 1552년 6월 강력한 포병을 이끌고 와서 도시를 포위하였다. 10월 2일 그는 공세를 취하여 도시를 함락하고 남자주민들의 대부분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으며 모스크들을 부수었다.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에 편입되어버렸다. - P662

서투르키스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후라산의 주인이 된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우즈벡 제국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지난 4세기 반 동안(1055-1502) 수많은 투르크 및 몽골 군주들에게 복속했다가 이제 막 독립을 회복한 페르시아와 충돌하였다. 백양부의투르크멘 유목민들을 넘어뜨리고 권좌에 오른 민족왕조 사파비 (1502-1736)는 이제 우즈벡으로부터 후라산을 빼앗아옴으로써 이란의 재통합을 완성시키려고 하였다. - P671

이 우즈벡 군주는 사파비조의 뿌리(시어파 셰이흐의 가문)를 빗댈 양으로 페르시아의 샤에게 수도자가 구걸할 때 사용하는 그릇을 보내면서세속의 권력은 칭기스칸의 자손들에게 맡겨두고 그는 자기 조상들의 직분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모욕에 대하여 샤 이스마일은 자신이수도자이기 때문에 후라산의 심장부에 있는 마쉬하드의 이맘 레자ImamReza의 성묘에 참배하러 군대를 이끌고 가겠다고 응답하였다.
페르시아의 샤는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그 당시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후방에서는 카자흐가 공격해와 그의 아들 무함마드 티무르MuhammadTimur를 파멸시켜버렸다. 샤 이스마일은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후라산을 침공하였고 자신의 약속대로 마쉬하드에 입성하였다. 메르브에서 그를 기다리던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전투에서 패배해 그 도시 근처에서 - P671

1510년 12월 2일 살해되고 말았다. 주방 올라왔고이 승리는 동방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란 독립의 회복자가 투르크·몽골세력의 부흥자를 죽였다는 사실 - 즉 위대한 사산조 제왕들의 후손이 칭기스칸의 자손을 패배시키고 죽였다는 사실은 이제 시대가 변했고 오랜 세기에 걸친 침입을 끈질기게 참아왔던 정주민이 유목민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시작했으며 농경지가 초원보다 우위를 점하기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 P672

바부르가 통치하던 이란사마르칸드와 현재의 중국령 투르키스탄 지역과의 관계는 단절됨이 없이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트란스옥시아나 사람인 바부르가차가다이 투르크어로 책을 썼지만, 모굴리스탄의 아미르인 하이다르 미르자는 페르시아어로도 저술한 것이다. 하이다르 미르자의 주군인 차가다이가문의 사이드 칸은 투르크어만큼이나 페르시아어로 훌륭하게 말할 줄 알았다. 항공기따라서 16세기 차가다이계 마지막 칸들의 제국을 마치 쇠퇴하는 나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유누스 칸이나 하이다르 미르자와 같이 고도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존재는 도리어 그 반대였음을 입증한다. 중국인들이 그 민족적 특징과 성격을 압살시키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와의관계를 차단하려고 했던 이 지방은 그 당시에는 이란· 투르크 이슬람으로부터 불어오는 각종 문화적인 훈기를 받아 새로워지고 생기가 넘쳤다. 유누스 칸의 일생이 이를 입증한다. - P691

13-14세기 중국을 지배했던 칭기스칸 일족의 황제들은 천자가 된 뒤에도 언제나 몽골의 대칸으로 남아 있었고, 지나간 19개의 왕조들의 유산을 받아들였으면서도 그들은 차가다이와 훌레구와 조치의 가문이 지배하고 있던 투르키스탄과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다른 칸국들의 주군이면서 동시에 칭기스칸의 후예로 남아 있었다.
반면에 만주인들은, 당시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두 삼림이거나 약간의 화전만이 있었던 자기들의 고향 만주를 제외한다면, 중원 제국이 유일한 관심거리였다. 그들이 쿠빌라이 가문에 비해 정신적인 고유성을 훨씬덜 가졌고 보다 철저하게 중국화된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쿠빌라이 가문처럼 결코 중국에서 쫓겨나지 않고 동화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종족적인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칙령을 내렸지만 1912년 그 왕조가 무너졌을 때 이미 과거 만주인 정복자들은 다수의 중국인 속에 빠져흡수된 지 오래였다. 이는 중국 본토에서뿐만 아니라 만주에서도 그러했으며, 하북이나 산서에서 온 이주자들에 의해 퉁구스적인 요소들은 철저하게동화되고 제거되어, 민족분포를 나타내는 지도는 그곳이 완전히 중국인의땅임을 나타내게 되었다. - P719

17세기 초 그들은 거대한 팽창의 격랑에 휩싸였다. 토르구트는 바투와 금장 칸국의 자취를 따라 남러시아의 아스트라 근처 볼가 강 하류로 이주하였다. 호쇼트는 쿠쿠노르 지역에 정착해 멀리 티베트의 라사까지 지배하였다. 초로스, 즉 준가르 본부는 한쪽으로는 모스크바 국가 지배 하의 시베리아에서부터 부하라 - P745

칸국, 그리고 중국의 변경에 이르는 지역을, 다른쪽으로는 홉도에서 타쉬켄트와 홉도에서 케룰렌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들의 ‘수도’인 홉도와 쿨자는 카라코룸을 대신할 듯 보였다.
더구나 그 시대를 표상하듯이 그들은 이미 칭기스칸 일족의 성소들을약탈하였다. 처음에는 갈단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뒤에는 체왕 랍탄과 체돈돕의 군사적 작전에 의해 그들은 라사의 군주가 되었고, 라마교회의영적인 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카쉬가르와 야르칸드에 있던 무슬림 ‘성직자‘인 호자들 역시 비슷한도구였다. 100년 이상 그들은 내륙아시아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그들의 지도자인 홍타이지들, 즉 바아투르, 갈단, 체왕랍탄, 갈단 체렝은 자신들이탁월한 정치가였고 대담하며 먼 안목을 지닌 강인한 전사였으며 칭기스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기마전사들의 놀라운 기동성 유목민의 보편적특징 을 완벽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 역시 거의 성공에 이르른 것이다. 19---라도어떻게 했으면 그들이 실패를 피할 수 있었을까? 만주인들의 지배가늙은 중국에 새로운 활기와 군사적 체제를 가져다 주기 몇 해 전에 출현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명말의 중국은 너무도 피폐해 있어 어느 누구몽골이든, 일본이든, 만주든 - 그것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 왕조가 천자의 권좌에 확고하게 자리잡자마자 중국은150년 동안의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지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며그러면서도 케케묵은 편견에서 자유로웠던 최초의 만주 황제들은 나라를근대화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는데, 이는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만들어준화포들이 입증해준다. - P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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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년체의 역사에는 속수(涑水, 사마광)보다 훌륭한 것이 없으며 이를 뒤 이은 것으로는 설(薛, 薛應?, 1500~1574)·왕(王, 王宗沐, 1523~ 1592)·서(徐, 徐乾學, 1631~1694)같은 세 분이 있는데, 서씨의 것은 비록 설씨와 왕씨의 것보다는 우수하지만 그러나 서적을 보는 바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남쪽의 역사를 자세히 쓰고 북쪽의 역사를 소략히 하는 병통이 없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여러 책을 널리 쌓아 놓고 정사(正史)를 고증하며 손수 스스로 재정(裁定)하여 송(宋)에서 시작하여 원(元)에서 마치고 《속자치통감》 220권을 만들고 별도로 《고이(考異)》를 만들어 본문의 아래에 붙였으니 무릇 4번 원고를 바꾸어서 완성한 것이다.

요·금의 정사는 본기를 보는 데 그쳤고, 중간에 한두 명의 열전에만 미치었으니 여러 <전기(傳記)>와 <지(志)>와 <표(表)>는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송(宋)의 가정(嘉定, 1208~1224)이후로 원의 지순(至順, 1330~1332)이전까지는 거칠고 생략된 것이 아주 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두 남겨진 일사(逸事)가 아직 나오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하게 본 바를 근거하기에 이르러서 말을 달려 그 번거롭고 풍부하기가 예컨대 서하(西夏)에서 인척(姻戚)의 세계(世系)를 갖추어 서술한 것과 원말(元末)의 쇄사(?事, 자질구레한 일)는 자료를 철애악부(鐵崖樂府)에서 뽑은 것 같았으니, 편년체의 책은 홀연히 흡사 보첩(譜牒)같고 홀연히 흡사 시화(詩話)같아서 특히 체제(體制)에서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수집한 재료가 비교적 풍부하였고, 핵심을 상고한 것이 비교적 자세하여 이미 진·왕·설씨를 몇 배나 넘어 섰으니 후에 일으킨 공로는 착수하기에 쉽게 하였으니 역시 그것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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