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앤이 태어나고 성장하다. 독일의 1차 대전 참전 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었고 유대인에 대한 압박에 독일을 떠나기로 한 앤의 가족.

When times were good, this feeling would often retreat into the shadows, but in bad times, it boldly stepped forward into the light.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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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백학연환이란 무엇인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기초교양(Liberal Arts)의 항목과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평생공부』을 여러 차례 읽으며 기억해둔 것이고 그 공부 방법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전공을 공부하기 전 기초 학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시간이 지날 수록 깨닫고 있다. 지금의 학제 간 구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고 무엇보다 대학 교육 내용 자체는 곱씹어봐도 잘못되었다. 지금처럼 취업을 위한 일변도의 교육을 하는 한 대학 교육은 점점 무너져갈 것이고 경쟁력은 떨어지기만 할 것이다.



번역어를 읽을 때 ‘내가 만약 이 말을 번역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도 언어 사용 훈련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사전을 펼치면 encyclopedia 항목에는 ‘백과사전‘이라든가 ‘전문사전‘이라는 번역어가 나옵니다. 그러나 누군가 애써서 만들어 놓은 번역어를 그저 빌려 쓰지만 말고, 내 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를 번역한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는 겁니다. - P48

현재 Encyclopedia(엔사이클로피디아)라고 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백과사전‘이나 ‘백과전서‘라고 번역됩니다. 오늘날의 용법으로서는 문제가 없지만 이 번역어 그대로 중세나 고대에 대입하면 문제가생깁니다. ‘백과사전‘이라는 의미는 좀 더 현대에 가까운 용법이기 때문입니다.
마루는 EyKUKAIOS TALSEL의 EyKUKANOG라는 말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둥근 고리를 이룬다‘라기보다 ‘보통‘ ‘일상의‘라는 의미였다고 지적합니다. 즉, Evkukios Talla 기본적인 교육과정‘을 의미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반교양‘이랄까요. 이것이 로마 교육에 편입되고 중세를 거쳐 ‘자유학예 (artes liberales)‘라고 불립니다. 영어에서 말하는 Liberal arts 입니다. 자유학예란 의학, 법학, 신학등 한층 고도의 학문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초를 쌓는 공부였습니다. - P59

학술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는 시대와 문화의 세계관, 학술관이 반영됩니다. 자유학예에는 대략 절반가량이 말을 배우고, 말을 더 잘 사용하기 위한 학술에 할당되어 있으므로 그 비중이 크다는 사실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이처럼 ‘기본적인 교육과정‘을 의미하는Eykuk入Los maidela의 이념이 ‘자유학예‘에 계승되고, 이윽고 오늘날 대학의 ‘일반교양‘에까지 이어집니다. - P60

여기서 니시 아마네와 동시대 사람이기도 한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교양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대학 교육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학생이 대학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은 지식의 체계화다. 즉, 각각 독립된 부분적인 지식 간의 관계와 이들과 전체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고, 그때까지 다양한 곳에서 얻은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적인 견해를 연결하여 이른바 지식의 모든 영역의 지도를 만든다. (J. S. 밀, 『대학 교육에 대하여 Inaugural address delivered to the University of St.Andrews, Feb. 1st 1867』, 다케우치 잇세이竹內 옮김, 이와나미문고, 2011,p.15/원서 p.8) - P79

이미 그어져 있는 경계선을 당연시하지 말고 그렇게 된 내력과 현 상황을 확인할 것. 나아가 그러한 경계선이 타당한가를 검토해볼것. 필요하다면 다시 선을 그을 것. 지금 「백학연환」을 다시 읽는 데는 여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수많은 학문을 보면서 학역간의 차이, 현재와 과거의 차이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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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격


‘보통학’과 ‘수별학’은 어떨까요? 요즘은 ‘일반학’ 또는 ‘보편학’과 ‘특수학’으로 분류하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학술 전체를 크게 분류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 현재의 다양한 학술을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분류해보라고 하면, 어떤 학술을 어느 쪽으로 분류할까요? 저는 구체적인 사상이나 사안을 다루는 학술은 수별학, 추상화된 이론에 가까운 영역이 보통학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역사는 수별학이고 수학은 보통학입니다. [41~42]
-> 끼워 맞추었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역사학을 과연 특수학으로만 볼 수 있을지. 용어도 애매한데. 도입으로 뒷부분에 다룬다고 하니 기다려보기로.

학술의 분류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생기거나 사라지면서변화해왔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러한 분류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즉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부터 당연한 것으로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당연한 것‘이 있으면 ‘왜 그렇게되었는가‘라는 내력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내력을 알지 못하면 그필연성도 잃게 됩니다. - P21

이렇게 상상해보면 될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말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보면 사전을 찾습니다. 또 용도에 따른 다양한 사전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만약 사전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예를 들어 영일사전이 한 권도 없었다면 영어 문장을 읽다가 모르는 - P30

단어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처음 보는 영단어의 의미를 영영사전 등을 통해 조사한 뒤, 그에 대응할 만한 일본어를 찾거나 경우에 따라 말을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니시 아마네가 바로 그런 일을 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 덕분에 오늘날 쓰는 용어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해도과언이 아닙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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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43호 - 2023.여름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역사비평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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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의 핵심 주제는 ‘인권’이다. 배경은 지난 3월 6일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대한 대응으로 국내 재단을 통한 배상인 ’제3자 변제‘ 방안의 발표다. 윤석열 정부의 용단(!)에 미일은 환영했지만, 국내 사정은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시민사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계는 반대 성명을 쏟아냈지만 정부의 태도는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이슈 뿐 아니라 한미일 동맹의 움직임은 이미 강화되고 있고 중국이나 북한, 소련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중이다. 그 배경에는 물론 미국의 중국 견제가 가장 크지만 그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외교 분위기를 보면 마치 냉전의 회귀 같은 분위기다(실제로 신냉전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지금의 한미일 관계는 1965년 한일협정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굴욕 외교라는 오명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체결이었고 그 역사는 지금도 재현중이라는 게 뼈아프다.

<특집> 코너에서는 과거 인권의 역사를 다시 확인한다. 과거 연합국의 전범재판을 통해 바라본 인권과 냉전기 재일조선인들의 인권, 196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의 인권, 국제엠네스티 인권운동과 한국의 초국가적 민주화 과정에서의 인권을 다루었다. 특히 나는 한국에서 1960년대 경제성장을 우선시하여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사실, 국제적 노동 표준과 현실간의 괴리 탓으로 국제엠네스티를 통한 인권운동이 제대로 된 동력을 얻지 못한 사실이 인상깊었다.

경영관리 기술원조를 제공하고 인력개발을 강조하는 동시에, 노동자 인권 표준을 함께 설파하겠다는 ILO의 통합 개발모델 전략은 1960년대 한국의 여러 주체들이 ILO를 각기 달리 전유하고 상상할 수 있는 지반을 제공하였다. 정부는 경제성장과 근대화 전략을 성취하기 위해 경영기술과 인력양성을 위한 제정지원을 제공받았지만 국제적 노동 표준에 대해서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소극적으로 대처하거나 저지해 나갔다. 생산성본부를 비롯하여 자본 측은 기술 원조를 통해 경영관리 기법을 도입하고 기술인력 양성에 주력하였을 뿐이다.- P98

이어서 볼 수 있는 주제는 <기획> 코너로 한국 근현대 능력주의의 역사와 신화다. 인권은 예전과 비에 달라졌는가. 객관적인 지표는 그럴지 몰라도 결코 그렇게만은 볼 수 없는 사각지대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능력주의의 외부와 틈새‘ 칼럼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능력주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테크네‘와 ’메티스‘라는 개념을 들고 온다.

테크네와 메티스의 개념구분은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이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체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테크네라고 한다면 일종의 암묵지처럼 도제적으로 숙련되는 능력을 메티스라고 할 수 있다. 테크네는 보편적이고 기술적인 지식, 측정가능한 지식을 의미하고, 메티스는 맥락적이고 유동적이며 실질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테크네가 측정되고 양화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메티스는 도제식 교육 등을 통해 숙련되어가는 맥락적 능력이다. - P273

간단하게 말하면 테크네는 양으로 측정가능한 지식을 의미하고 메티스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유동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에서 비정상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은 능력주의의 경쟁 영역에 진입조차 하지 못한다. 능력주의의 외부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와 시장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에서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 결국 틈새다. 그 예로 시각장애인들의 점복업 공동체를 든다. 이들은 조합의 방식으로 능력을 훈련하고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경제적 활동을 이어간다고 한다. 시각 장애인들이 글을 단순히 읽기 어렵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들의 구술 능력으로 얼마든지 직업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메티스에 기반한 능력을 부정하는 문제는 비단 장애인과 비정상인 집단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도제식 관계에서 다양한 숙련성을 기르는 집단적 역량과 배움의 가치를 부정하고, 시험과 공식 자격 중심적인 방식으로만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 P287

지금의 잘못된 역사의 반복은 역사를 통한 반성은 없고 정치와 경제에 모든 이슈를 밀어두는 탓이 크다고 본다. 어제 보고 들은 광복절 기념사를 보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식민지배와 전쟁 수행에 직결되어 기업이 개인에게 가한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그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배상은 냉전 시기에 체제 경쟁을 빌미로 봉인되었으며, 그 도장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탈냉전과 민주화의 시대가 되었다고 바로 봉인이 풀린건 아니었다. 냉전 시기에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피해 당사자들이 지난 30여년간 뼈와 피를 갈아넣어 소송을 진행한 결과 겨우 봉인이 뜯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정부와 이번 한국 정부는 다시 봉인하여 피해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탈냉전대 신냉전, 인권 대 지역안보의 충돌이다. - P15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 첫째, 식민지배와 전쟁의 피해 당사자들과 지원모임이 생을 바쳐 얻어낸 한국 대법원의 판결, 인권회복의 권리를 이제 시민이 연대로써 지켜내야 한다. 이는 피해 당사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 미래 인권과 평화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권리를 공유한 시민들이 힘을 합쳐 그 실현을 요구하면 효과적일 것 같다. 물론 피해자 당사자, 그대리인과 협의하여 동의하에 적절한 연대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 법적 권리가소멸되었다고 진실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법적 틀에 얽매이지 않는 광범위한 연대도 모색해야 한다. 약자의 최고무기는 연대이다.
둘째, 식민지배와 전쟁의 폭력, 반인권 범죄를 한국과 아시아, 세계에 널리 알리자, 강제동원 피해 문제의 해결은 다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 가해자의 사실인정과 사죄, 둘, 사죄의 증거로서 배상, 셋, 다음 세대에 반복되지 않도록 교육. 앞의 두가지는 이번 정권 아래에서는 바라기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교육 그리고 선전을 강화하여 장기적으로 사죄와 배상을 끌어내야 한다. 매년 3월 1일, 또는 8월 15일에 탈식민 탈냉전 포럼을 개최하고 한국, 세계 여러 나라의 식민지배와 전쟁 피해자를 초청하여 그 경험담을 듣고 이를 전 세계에 중계하자. 아시아, 나아가 세계 청년들이 모여 전 세계로 ‘차별 철폐, 폭력 근절, 인권 존중’을 발신하자.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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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6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사회만큼 능력주의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환호하는 나라도 드문 것 같아요. 능력이 다르면 당연히 다르게 대우받아야 하고 불평등한 것이 오히려 평등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심지어 그 능력이라는 것이 결국 대부분은 시험성적(수능, 취직시험, 승진시험 등등)을 말하는 것이니 사실은 능력주의라는 것인 시험을 잘 치르는 능력이라는 단 한가지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지극히 불평등한 잣대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시킬 수 있을지 참 암담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8-16 16:33   좋아요 1 | URL
한국사회가 능력주의에 대한 신봉에 가까운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차별당하고 배제되는 사람은 계속 발생할 것이란 절망감이 들어요. 말씀하신대로 평가에 대한 기준이 그저 수치로, 시험으로 재단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모두 제각각이고 다른데 하나의 잣대와 기준으로 그것이 어찌 평가될 수 있겠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 소돔과 고모라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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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뤼스 씨와 쥐피앵의 시선은, 적어도 일시적이긴 했지만 뭔가에 이르고자 하는 목적이 없다는 점에서 아름다웠다. 이런 아름다움의 발현을 나는 남작과 쥐피앵을 통해 처음 목격했다. 이들 두 사람의 눈에 떠오른 것은 취리히의 하늘이 아니라, 내가 아직 그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 어느 동방 도시의 하늘이었다. 샤를뤼스 씨와 조끼 재봉사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요소가 무엇이었든 그들 사이에는 협정이 체결된 듯 보였고, 그 불필요한 시선은 이미 정해진 결혼에 앞서 베풀어지는 축제처럼 의례적인 서곡에 불과했다. 보다 자연에 가까워진 두사람은 그리고 이런 다양한 비교는, 우리가 몇 분 동안 살펴보면 동일한 인간이 연이어 인간, 인간-새, 인간-곤충 등으로 보여 그 자체로도 더욱 자연스러웠다. ―마치 한 쌍의 새처럼 보였는데, 수컷이 먼저 다가가려고 하면 암컷인 쥐피앵은 이런 술책에 어떤 신호로도 응답하지 않고 놀라지도 않은채 자신의 새로운 친구를 무심히 응시했으며, 수컷이 먼저 수작을 부린 이상 자기는 깃털을 쓰다듬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보다 자극적이며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한 듯보였다. - P2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8권은 '소돔과 고모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죄악의 도시로 등장하며 레반트 지역에 실재했던 곳으로 여겨 지는 곳이다. 물론 샤를뤼스 같은 부류의 남자들은 삶의 가능성과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다른 부류의 남성, 즉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또 그 결과 그를 사랑할 수 없는 남성)의 사랑을 추구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난초꽃이 벌에게 수작을 부리듯, 쥐피앵이 샤를뤼스 씨의 주위를 맴도는 모습을 목격한 화자처럼 '소돔과 고모라'는 특히 동성애로 의인화되고 하느님은 이들을 벌하라 지시하여 두 도시가 망했다고 한다(구체적으로는 ⌜창세기⌟ 18~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려는 하느님께 롯이 간청하자 하느님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롯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하느님은 도시를 파괴하려 한다. 그러자 천사들이 롯과 가족들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명하나,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으로 변한다).
샤를뤼스와 쥐피앵의 만남을 보며 화자는 남성이 남성을 열망하고 쫓는 행위에 대해서 자기만의 생각을 정리한다. 알베르틴과 앙드레는 그 반대편에 서 있지만 같은 결에 있다. 화자는 이렇게 동성애에 대해서 특이함, 기이함으로 바라보는 쪽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나라면 물론 내 딸들을 이런 곳에 오지 못하도록 할 걸세. 어쨌든 여자아이들이 예쁘기는 한가? 나는 저 아이들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겠네. 저런, 저걸 보게나." 하고 그는 서로를 껴안고 천천히 왈츠를 추는 앙드레와 알베르틴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코안경을 잊어버리고 와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아이들은 틀림없이 쾌락의 절절에 있을 걸세. 여자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젖가슴을 통해 쾌락을 맛본다는 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네. 저 아이들의 젖가슴이 완전히 붙어 있는 걸 보게나." 실제로 앙드레와 알베르틴 사이에서 젖가슴의 접촉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앙드레가 알베르틴에게 한마디 했고, 그러자 알베르틴은 조금 전 내가 들었던 그 날카롭고도 뜻깊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베르틴은 그 웃음소리를 통해 은밀하고도 관능적인 전율을 앙드레에게 가리키고 확인하려 하는 듯했다. 그것은 미지의 축제에서 처음이나 마지막에 울리는 화음과도 같았다. - P345

악덕은(언어의 편의상 이렇게들 말하는), 마치 정령의 존재를 모르는 인간에게서 그 인간이 모르는 정령이 눈에 띄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각자의 악덕은 우리를 동반하고 있다. 선함이나 교활함, 명성과 사교적 친분 관계는 그 자체로서는 드러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감춘 채 지니고 있다. 오디세우스도 처음 순간에는 아테나 여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 P35~36

스완은 병색이 완연해진 모습을 보인다. 그런 스완의 모습을 보고 화자는 충격을 받았다. 아픔과 고통을 마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를 감내하기엔 아직 그의 연륜이 깊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화자는 발베크로 두 번째 방문했다. 그 방문은 첫 번째 방문 이후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고 고통이 찾아든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얼마 전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화자의 감정에 연민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할머니를 뵈었을 때 모습이 스쳤지만 그 때는 이미 눈을 뜨시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슬픔이 밀려들었다. 우리를 보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후회가 덜할까 싶기도 했지만 인생사는 알 수가 없지 않나. 결국 이런 고통은 추억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의 부재는 화자에게 앞으로도 순간 순간 아픔처럼 다가올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올 지 알기 어려우며 그 감정을 제어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게다가 화자는 할머니의 부재에 대한 기억에서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의 감정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낀다. 부재는 상실이며 그리움이기도 하다. 죽고 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고 그저 기억으로 대체되어 자리할 뿐이다.

스완은 예언자의 나이에 도달했다. 물론 병의 영향 때문이긴 했지만 마치 얼음덩어리가 녹으면 모서리 전체가 떨어져 나가듯 얼굴 윤곽 전체가 사라진, 상당히 변한 모습이었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그가 얼마나 변했는지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P169

적어도 어머니에 대한 감정과 알베르틴에 대한 감정이라는 이 두 요소는, 그날 저녁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날 전화에서 들은 마지막 말로부터 나는 알베르틴의 삶이 내게서 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물론 물리적 거리는 아니지만) 내가 그 삶을 손안에 넣으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힘든 탐색을 해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삶은 야전 요새처럼, 또 보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우리가 나중에 관습적으로 ‘위장된 요새‘라고 부르게 된 그런 종류의 것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 P240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까 두려워 망자의 실제 모습만을 찬미하며, 당시 이미 우리의 모습이었으나 다른 것에 섞여 있던 모습을 배제하고, 오로지 망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물려받으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우리가 보통 듣는 그렇게 모호하고 거짓 의미에서가 아니라) 죽음은 헛되지 않으며, 망자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망자는 산자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이유는 진정한 실재란 정신작용의 대상이기 때문에 정신을 통해서만 표출되며, 우리는 나날의 삶이 감추는 것을 사유에 의해 재창조할 때에야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망자에 대한 이런 그리움의 의식에서, 우리는 망자가 생전에 좋아했던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싶어 한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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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8-16 0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7권 보셨군요 7권을 보기 전에 시할머님이 돌아가셔서 책을 볼 때는 시할머님 생각이 더 났겠습니다 자신이든 상대든 살았을 때 잘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해도 잘 안 되기도 하는 거네요


희선

2023-08-16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3-08-16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 연휴에 진짜 책 많이 읽으신 듯^^

거리의화가 2023-08-16 16:34   좋아요 0 | URL
책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바람도 종종 쏘이고 그랬답니다.

그레이스 2023-08-18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권까지 이르니 이 책을 내가 왜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정말 잘 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정말 아이러니 하죠.
이왕 늦은김에 나중에 1권부터 몰아서 쓰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3-08-18 09:55   좋아요 1 | URL
저도 생각은 비슷한데(글 잘쓴다는 부분은 특히!) 그레이스님은 프루스트가 심어놓은 곳곳의 은유들을 찾아내실 정도로 제반 지식이 있으셔서 더 잘 읽어내시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몰아서 쓰는 리뷰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ㅎㅎㅎ 저도 어서 줄거리 안 까먹으려면 8권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