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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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독자가 읽기에 더 매끄럽고 수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설명에 살을 붙여서 문장의 이해를 돕는다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을 제게 말씀하옵소서˝ <- ˝들려주소서˝ 이전 숲 출판사 내용과 비교했을 때 이렇게 다르다. 좀 더 현대적인 번역으로 느껴졌다. 이제 오뒷세이아의 귀향길로 떠나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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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의례와 사회변화: 자바의 예
제7장 현대 발리에서의 “내적 개종”

문화와 사회체계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그들 각각의 특징적이고 대조적인 통합의 형태를 생각해보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는 소로킨이 "논리-의미적 통합(logico-meaningful integration)"이라고 부른 것과 "인과기능적 통합(causal-functional integration)"이라고 부른 것 사이의 대조이다." 문화의 특징인 논리-의미적 통합은 바흐의 푸가, 천주교의 교리 혹은일반 상대성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통합을 뜻한다. 즉양식의 통일, 논리적 함의의 통일, 의미와 가치의 통일이다. 사회체계에 특징적인 인과기능적 통합은 모든 부분들이 단일한 원인 및 결과의 그물에결합되어 있는 유기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통합을 뜻한다. - P178

1910년 이후 비교적 큰 도시에 거주하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세련된 상인계급들 간에 나타난 이슬람식 근대화(또한 이에 대한 맹렬한 보수주의적 반동)와 종교적 민족주의의 출현은 전통적 종교관이 강한 일반 대중들사이에 이슬람교는 배타적이며 반혼합적이라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마찬가지로, 공무원과 도시지역에서 증가하던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나타난 세속적 민족주의와 마르크스 주의는 종교혼합의 전(前) 이슬람적(즉 힌두-애니미즘적) 요소를 강화했다. 그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이슬람 순수주의에 대한평형추로 찬양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중에는 자신들의 보다 특수한 정치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일반 종교적 준거틀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었다. - P182

자바 장례식의 분위기는 흥분상태의 이별이나 자제되지 않은 흐느낌, 또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형식적인 통곡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조용하고,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며, 담담하게 진행되는 것이며, 돌이킬 수없는 관계를 간결히 의례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눈물은 용납되지 않으며장려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일을 잘 마치려는 노력이지, 비탄에 잠겨서 질질 끄는 것이 아니다. 장례식의 세밀한 바쁜 작업, 모든 곳에서 오는이웃들과의 정중하고 의례적인 교제, 약 3년 동안 몇 차례나 개최되는 죽은사람을 위한 슬라메탄 ㅡㅡ 이 모든 자바의 의례체계의 전체적 동력(動力)은사람들로 하여금 심한 감정적 혼란 없이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유족들에게 장례식과 그 이후의 의식은 이클라스(iklas)의 감정, 즉 일종의 의도적 무감정, 초연하고 안정된 "무관심"의 상태를 만들어준다고 한다. 이웃 집단에게는 루쿤(rukun), 즉 "지역 공동체의 조화"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 P187

말리노프스키는 "종교의 모든 근원 중에서 인생 최대의 그리고 최후의위기- 죽음ㅡ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라고 썼다." 그는 죽음은 유족들에게 사랑과 미움이라는 이중의 반응, 즉 인간 존재의 심리적, 사회적 기초 모두를 위협하는 매혹과 공포라고 하는 상반된 양면적 심층심리를 유발시킨다고 주장했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에 대한 그들의 애정에 의해서 그를 향하여 끌려들어가는 동시에 죽음이 가져오는 무서운 육체적 변형에 의해서 죽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진다. - P197

급격한 사회변동은 자바 사회를 분열시켰으며, 이는문화의 해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즉 전통적 촌락사회가 잘 통합되어 있을때는 그 통합성이 슬라메탄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마찬가지로 캄퐁 사회의 붕괴는 우리가 방금 살펴본 장례식의 실례에서처럼 슬라메탄의 붕괴라는형태로 반영된다. 바꾸어 말한다면, 문화의 쇠퇴가 사회의 분열을 유도했으며, 활력 있는 민속 전통의 상실은 사람들간의 도덕적 유대를 약화시켰다.
두 방식 중 어느 방식으로 진술되느냐에 상관없이 이러한 논의에는 두 가지 잘못된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사회적(또는 문화적) 갈등과 사 - P198

회적(또는 문화적) 해체를 동일시하는 점이며, 다른 한 가지는 둘 중에 하나를 단순히 다른 것의 종속현상으로 봄으로써 문화의 구조와 사회구조의 독립된 역할을 부정하는 점이다. - P199

의례는 단지 의미의 패턴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형태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덜 분화된 농촌의 배경에서 도시적 맥락으로 종교적 패턴을 옮기려는 시도는 문화적 모호성을 생성시킬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도 야기시킨다. 그것은 그 종교적 유형에 의해서 표현되는 사회 통합의 종류와 사회 일반에서의 주된 통합의 유형이 일치하지않기 때문이다. - P203

사회변화의 동인(動因)은 자신이20Moron무엇인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세상, 그 본질적 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고 느끼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는 인간의 욕구와 기능하는 사회유기체를유지시키려는 욕구가 일치하지 않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이 고려되는, 보다역동적인 형태의 기능주의 이론에 의해서만 분명하게 도식화될 수 있다.
"학습된 행위"라는 산만한 문화 개념은 균형잡힌 상호 작용의 패턴으로 사회구조를 보는 정태론적 견해이며, 또한 문화의 구조와 사회구조는 "해체"
상태를 제외하고) 결국 서로의 단순한 투사상에 불과하다는 공언된, 혹은무언의 가정은 파이잔의 불행하지만 교훈적인 장례에 의해서 제기된 것과같은 문제들을 다루기에는 너무도 유치한 개념장치이다. - P205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종교학에 관한 유명한 저서에서 세계종교를 "전통적인(traditional)" 종교와 "합리적인(rationalized)" 종교라는 두이념형으로 구분했다. 비록 이 두 이념형은 극도로 일반화되고 덜 체계적인개념이기는 하지만 종교의 변동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여전히 유용한 개념이다."
이 두 이념형은 종교와 사회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전통적 종교(베버는 "주술적"이라는 용어도 사용했다)는 기존의 사회적관행들을 엄격하게 전형화시킨다. 전통적 종교는 거의 하나하나가 연결되는방식으로 세속적 관습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모든 인간 활동을………상징적 주술의 범주로" 끌어들이고, 그렇게 해서 일상적 삶이 끊임없이 고정되고 확고하게 계획된 과정을 거치도록 해준다." 그러나 합리적 종교는 일상생활의 구체적 실상과 그렇게 전적으로 얽혀 있지 않다. 합리적 종교는 일상생활과 "떨어져서", "그 위에" 또는 "그 외부에" 존재한다. - P207

인간과 신성함 사이의 이러한 엄청난 "거리"의 증가로, 훨씬 더 정교하고비판적인 방식으로 그것들 사이를 유지시켜주는 끈이 필요해진다.
베버는 이것이 성취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한 가지 방식은 예언자, 경전, 기적 등을 통하여 신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윤리적 명령으로 구성된,
의식적으로 체계화되고 형식적인 법적-윤리적 코드를 만듦에 의해서이다.
또 다른 방식은 신비주의, 통찰력, 미적 직관 등에 의해서 요가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고도로 조직화된 영적, 지적 수련의 도움을 받아 신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접하는 방식이다. - P210

이른바 원시종교라고 불리는 많은 종교들도 자의식이 강한비판을 보여주고 있으며, 종교적 사고가 고도의 철학적 정교함에 도달한 사회에서도 전통적인 종류의 민간신앙이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세계종교가 씨족, 부족, 촌락의 종교나 민간신앙에 비해서보다 뛰어난 개념적 일반화, 보다 단단한 형식적 통합, 보다 명쾌한 교리를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P211

오늘날 발리에서는 세계사의근본적 종교변동에서 야기되었던 것과 동일한 사회적, 지적 과정의 일부가최소한 상당히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변화나 최종적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그 과정은 교훈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독특하고 작은 섬에서다음 수십 년 동안 무엇이 일어나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면, 이미 발생했던역사가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종교변동의 역학이 지닌 구체성과 직접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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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 34 ] The Rise of Julius Caesar


Caesar Is Kidnapped

로마는 점점 더 부강해지고 강한 제국이 되어 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왕가와 관련되어 있어 그야말로 정통 귀족이었다(로물루스의 후손이었으며 아버지는 로마법을 만드는 데 일조를 하는 등). 카이사르는 읽기, 쓰기, 수학, 웅변 등을 교육받았는데 웅변술을 더 배우고 싶어 유명한 선생들이 있다는 지중해 중간의 섬으로 가기로 한다. 그런데 지중해는 해적들이 날뛰던 곳, 아니나 다를까 배를 타고 가는데 부유한 옷차림의 그를 알아본 해적들이 카이사르를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한다. 카이사르는 돈을 주고 자신을 풀어주면 너희들을 죽일 것이라 경고한다. 그는 결국 로마로 돌아가 로마 해군을 동원하여 해적을 뒤쫓아 몰살시킨다. 이 일은 카이사르를 유명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The Consuls of Rome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고 싶어했다. 그런데 이미 로마에는 2명의 현행 집정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스페인을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된다. 스페인에서 카이사르는 인정을 받고 유명해진다. 하지만 그는 로마로 돌아가 영향력을 떨치기를 내내 소망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앉아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삶에 대한 기록을 읽다가 문득 창문을 봤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그림이 자신의 앞에 있었고 그림에는 부케팔루스를 타고 전투에 나가 전사들을 호령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그림을 보고는 눈물을 흘린 덕분(?)이었는지 로마로 귀환을 허락받게 된다. 이로써 로마에는 3명의 집정관 체제가 들어섰으나 그는 더 많은 권력을 바랐다.


Caesar and the Senate

로마의 원로원들은 집정관을 돕는 존재로 집정관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집정관은 카이사르가 자신들의 말을 잘 듣지 않자 불만에 쌓인다. 

킨키나투스라는 이상적인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아주 옛날 킨키나투스가 로마 집정관 시절일 때다. 그는 고위직에서 은퇴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로마에 이민족들이 침입하여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다. 로마인들은 출정한 군대가 승리하여 돌아오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고작 5명만이 피투성이가 된 채 귀환한다. “그들이 너무 강했어요.” 원로원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 때 킨키나투스를 생각한 이들은 그로 하여금 군사훈련을 맡겼고 양성된 군대를 내보내 마침내 로마는 승리할 수 있었다. “우리의 왕이 되주시오. 킨키나투스.” 그러나 그는 “아니오.” 하더니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간다. 



[ Ch 35 ] Caesar the Hero


Caesar Fights the Celts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의 신임을 얻기 위해 군사들이 자신에게 완전히 충성하도록 만든다. 그는 영국을 정복하려 한다. 이를 위해 배를 건조하고 병사를 해안에 배치했는데 영국 땅이 춥고 축축한데다 피로까지 겹쳐 병사들이 병에 걸리고 만다. 병사들은 마른 땅을 찾다가 켈트라 불리는 영국인들이 사는 섬 해안에 닿는다. 그들은 키가 크고 근육질이었으며 호전적이었다. 로마병들은 3주간을 그곳에 있었는데 배들이 태풍으로 난파되어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패배는 카이사르에게 치욕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승리한 기록만 쓰고 패배한 기록은 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갈리아 전기를 쓰면서 자신이 잘한 일만 적었다. 이로써 백성들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만 알 수 밖에 없었다. 갈리아 전기를 볼 때 이를 참고해서 봐야할 것 같다. 


Caesar Crosses the Rubicon

카이사르가 로마를 장악해가자 원로원들은 Pompey라고 하는 집정관을 하나 더 두기로 결정한다. Pompey는 카이사르의 딸과 결혼을 하였으나 카이사르에게 질투심이 컸다. 카이사르는 Pompey가 자신을 반역자로 몰아 재판정에 세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들은 자신을 싫어하지만 로마인들은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한다며 살 길이 있을거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루비콘 강을 마침내 건넌다.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가 로마에 모습을 나타내자 Pompey 군대는 도망을 친다. 카이사르가 육지에 발을 닿기도 전에 Pompey 또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당당히 로마 땅에 개선할 수 있었다. “Today, when someone has to make an important decision, people still say. “You’re about to cross the Rubicon.” Crossing the Rubicon means that you’re about to do something that you can’t undo. We get this expression from the story of Julius Caesar’s return to Rome. 


Caesar and Cleopatra

카이사르는 사라진 Pompey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가 이집트로 갔음을 알고 있었다. 이집트에는 두명의 파라오가 있었다(클레오 파트라와 그녀의 남동생). 그러나 그들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출발했을 때도 다투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은 Pompey를 체포하여 카이사르에게 넘기면 그와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 한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폼페이의 머리를 베어 카이사르에게 넘기자 말했고 그녀의 계획대로 되었다. 정작 카이사르는 Pompey에게 겁만 주려는 것이었을 뿐 그를 죽일 의도는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것을 도와달라 한다 했고 카이사르는 그렇게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정치력이 고단수임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원로원들과 로마군은 이집트로 진군하여 그를 공격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싸우는 법을 잊지 않았고 전투에서 승리한다. “I came, I saw, I conquered!”


The Death of Caesar

카이사르는 로마를 모두 수중에 넣었고 마침내 로마로 돌아간다. 그는 독재자였기에 원로원의 기능을 무력화시켰다. 카이사르가 모든 정치를 행하게 되었다. 원로원은 로마의 차기 지도자로 카이사르에게서 나오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카이사르는 자신의 조카인 Octavian(옥타비아)에게 임기를 맡기려 하면서 충돌이 벌어진다. 결국 원로원 Brutus(브루투스)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3월 15일) 차 간 카이사르를 칼로 찔러 사망하게 만든다. 참고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친구이기도 했다. Suetonius라고 하는 로마의 작가가 책에 쓰기를 예고된 사망이었다라고 이야기에 적고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좋아하는 말들을 보러 갔는데 말들이 먹지를 않았고 점쟁이가 3월 15일을 조심하라고 한 것이다. 거기에 아내가 악몽을 꾼 뒤에 불길하다며 회의에 불참하라고 권했으나 카이사르는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He gasped. “You, too, Brutus?” 



[ Ch 36 ] The First Roman Prince


Augustus Caesar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Octavian(옥타비아)는 19세에 불과했지만 그는 카이사르의 양자여서 부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부를 로마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도 사랑을 받게 된다. 옥타비아는 원로원에 가서 집정관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원로원들은 그가 너무 어리고 카이사르의 양자인 것도 마음에 걸렸으나 로마인들도 그를 인정하는 것을 보고 그를 집정관으로 수용하게 된다. 옥타비아는 카이사르의 제왕 정치 대신 킨키나투스의 방식을 따랐다. 

어느 날 옥타비아는 원로원들을 불러놓고 로마는 평화로워 더 이상 집정관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으니 일을 그만두겠다 말한다. "당신이 로마에 평화를 가져왔는데 원로원을 그만둔다면 로마는 또 다시 분열될 것이오!"라고 원로원들이 말한다. "로마는 왕이 필요 없소. 난 그저 로마의 시민일 뿐이오." 원로원들은 그에게 "우리는 당신을 'First Citizen'으로 부르겠소." 답한다. "first citizen"는 라틴어이며 영어로는 "prince"이다. 또 그는 기존에 사용하던 "Octavian Caesar"에서 "Augustus Caesar"라는 호칭을 부여받게 되었다. Augustus에서 달력의 8월(August)이 유래되었고, Julius Caesar에서 7월(July)가 유래되었다.



[ Ch 37 ] The Beginning of Christianity


The Birth of Jesus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로마는 팍스 로마나(The Roman Peace) 시대였다. 이 무렵 유대 땅(옛 가나안. 현재는 로마에 복속됨)에서 한 아기가 태어난다. 이 아이가 자라서 새로운 종교의 시작이 되는데 성경에서는 이 이야기를 4권의 책에서 "the Gospels."(복음서)에 담고 있다.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Mary)라는 유대인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요셉과 결혼을 약속했으나 결혼식은 아직 몇 달 담은 상태였다. 어느 날 신이 마리아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신이 네게 아이를 보낼 텐데 이름을 예수로 지어라!" 마리아가 요셉에게 천사가 자신을 만나러 왔었다고 이야기한다. 마리아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인구를 조사하겠다고 말한다. 요셉은 베들레헴에서 왔기 때문에 둘은 베들레헴으로 간다. 도착해보니 잠잘 데가 없어서 동물들이 자는 곳으로 들어가 예수를 낳는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천사들이 모습을 비추고 섬광이 나타나 양치기들이 두려워했다고 한다. 오늘날 예수는 성인이 되었으며 Christian의 기원이 되었다. "Glory to God in the highest! Peace on earth, good will to men!" 


Jejus Crucified and Resurrected

예수가 유대 땅에서 살며 30년 쯤 지났을 무렵 그는 땅을 돌아다니며 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법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이를 "Sermon on the Mount"라고 부른다. 오늘날 신약성서 복음서에 그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러니 유대땅을 다스리던 지도자들이 로마에 반하여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로마 당국도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고 결국 유대인 지도자들 중 일부를 매수하여 예수를 체포하여 반역죄 명목으로 예루살렘에서 처형한다.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예수 사후 3일이 지나서 그를 따르던 여성 신도들이 그의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입구에 있던 돌을 치우고 무덤을 확인했더니 무덤은 비어 있었다. 반짝이는 옷을 입은 두 명의 천사가 나타나 "예수를 왜 찾는 거지?" 묻는다. "그는 여기에 없어. 부활했지." 여성들은 다른 예수 신도들에게 이야기를 전했으나 아무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예수가 그들 앞에 모습을 보이자 그제서야 그들은 사실을 믿게 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으며 예수를 신의 아들로 여기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Christi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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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27 0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이사르가 한 말 브루투스 너마저가 나오는군요 불길하다고 하면 가지 말지, 그럴 때 꼭 자신은 괜찮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벌써 일어난 일이니 바뀔 일은 없겠지만... 여기엔 예수가 태어나는 것도 나오는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27 09:12   좋아요 2 | URL
맞아요. ˝브루투스 너마저!˝ 친구한테 배신당했다고 느낄 법하죠. 그렇지만 그러기 전 자신의 행위를 돌아봤어야... 킨키나투스나 아우구스투스 같이 권력에 욕심을 두지 않았다면 원로원들에게 불안감을 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성서를 제대로 읽은 적은 없는 저 같은 무신자들도 예수의 탄생과정은 익숙하네요.

책읽는나무 2023-10-27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1등 화가 님^^

2023-10-27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27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려거란전쟁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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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으로 재미나게 읽었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고려사는 대부분 내부의 입장에서 쓰여져서 읽다 보면 비슷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 책은 요사, 송사, 일본사 등 주변 국가의 기록을 참고하여 거란과 송의 당시 상황과 관련 인물들을 설명해주어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지도와 그림으로 인물의 이미지, 도시의 위치와 경로의 이동 상황 등을 표현해주어 이해를 돕는다. 이미지가 정직한 2D 이미지여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이 귀엽게 느껴졌다. 


5대10국 시대를 정리하고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조광윤)은 북벌을 단행하는데 연운16주를 회복하여 거란을 북으로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연운16주는 거란에게 뺏길 수 없는 땅이었다는 것이다. 이 무렵 거란은 송나라 뿐 아니라 동쪽에서는 발해부흥세력과 여진족, 서쪽에서는 몽골 등이 압박을 하는 중이였다. 경종은 몸이 병약했다고 하며 승천황태후가 경종을 대신해 거란을 통치하여 970년대부터 1009년까지 사실상 거란을 지배한다(p45). 새로운 인물을 알아가는 것은 역시 재미있다. 승천황태후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는 그녀의 승하 기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기에 요사를 봐야만 알 수 있는 인물이다. 승천황태후가 거란을 사실상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젊은 인재들인 한덕양, 야율휴가, 야율사진, 소배압, 소손녕 등을 발탁했기 때문이다(p46). 


고려와 거란 사이에 만부교 사건이 발생한 후에 공식 외교는 단절된 상태였다. 대신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고려의 유학생들을 송나라의 국자감에 입학시키는데 이 중 강전(~1006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강전은 송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 사망했기 때문에 고려 역사에는 기록이 없고 송사에만 기록이 남아 있다(이런 인물이 많을 것 같다). 강전은 송나라 유학 전 발해부흥세력을 돕기 위해 거란으로 가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또 일단의 고려군과 함께 천 오백리 이상을 행군하여 거란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그 길은 거란의 영토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대장정이었다. 


거란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받은 고려는 "전국에 군사들을 소집하라!" 하고 박양유, 서희, 최량을 보내 거란군을 막게 한다. 이때 성종도 친정을 단행했다. "지금 인근의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적을 물리치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p71). 당시 거란군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군대였는데 친정을 감행한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졌다. 고려군 리더 서희는 거란군 리더 소손녕에게 화친을 제의하는데 소손녕은 먼저 항복해야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에서는 대책회의를 벌이고 대신들 간에 항복론과 할지론으로 두 파로 나뉘게 된다. 성종은 항복이 불가하다 생각했고 영토를 떼어주는 할지론에 따르기로 한다. 그러나 서희는 이 결정에 불복하며 "전투의 승부는 국력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의 빈틈을 보아 기동하는 데 있습니다!"(p80)하며 영토를 언제까지나 내어줄 수는 없으며 승부를 본 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과 강화협상을 끝마친다. 


송 태조는 거란에 친정을 단행했다 패배한 후에도 거란에 연이어 대패하여 수세에 몰려 있었다. 고려 성종은 994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거란이 이 사실을 눈치챈다. 고려와 거란 간에 강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전쟁이 휴전된 것일 뿐 종전은 아니었다. 양국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데 이 때 강동6주를 고려가 여진으로부터 뺏어 장악하고 성을 쌓아 방비하게 된다. 

성종이 승천황태후의 사위를 요청하자 거란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성종은 소손녕과의 딸과 혼인을 맺게 된다. 이후 거란은 고려 성종을 거란 황가의 일원으로 대우했고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는 아예 끊고 거란과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럼 이후 거란과의 싸움이 없었어야 하지만 성종이 사망하는 바람에 양국은 다시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공교롭게도 성종이 사망한 다음 해 서희도 사망했다). 성종과 서희의 관계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만 둘은 굳건한 믿음 아래 서로를 믿어주는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신하였고 훌륭한 왕이었다. 

  

강조의 변으로 왕위에 오른 현종은 내부를 다스릴 새도 없이 거란의 침입에 맞닥뜨리게 된다.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공신으로 최고위직에 올라 있었으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거란군을 여러 차례 물리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거란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란군이 강조의 막사를 들이닥치자 그는 사로잡히게 된다. 

고려군 본진은 패배했으나 고려군에는 뒷배가 있었다. 통주와 곽주 사이에 완항령이라는 큰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에 일단의 군사들이 곽주 쪽으로 후퇴하다가 완항령에 매복한 것이다. 좌우기군들은 거란군들이 완항령에 접어들자 창과 칼 같은 단병기를 빼어들고 거란군에 돌격했다(p150). 그럼에도 거란군은 계속 진격하여 곽주, 안주, 숙주가 그들 수중에 들어가고, 거란군은 서경까지 들이닥친다. 결국 동북면에 있던 고려군 병사들이 서경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서경 방어를 책임진 여러 장수가 전사하거나 도망가자, 성안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진다(p164). 이 때 조원은 "서경이 없으면 고려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조원은 비록 중하급 관료였을 뿐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았던 사람이었다. 이후 조원을 비롯하여 성안의 군민들은 합심하여 밀려드는 거란군을 막아낸다. 

거란군에 의해 점령당해있던 곽주에 포로들이 남아 있었다. 이 때 양규는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서, 거란병사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성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구하여 통주로 옮겼다. 그는 단 7백명의 결사대로 6천명의 군사를 막아내었는데 방어하는 성을 공격하여 군민들을 빼내고 승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곽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거란군 황제 야율융서는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돌아가지 않고 개경으로 남하한다. 야율융서도 정말 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허를 찔린 공격에 고려군은 대책을 세우는데 이 때 강감찬이 현종을 이렇게 설득한다.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때 굳이 몽진을 해야 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무턱대고 그들을 맞아들여서 피해를 당하기보다는 시간을 버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현종은 강감찬의 말에 따랐는데 몽진길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고려 군민들의 태도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속사정을 알 수 없는 군민들이 보기에 현종의 나주행은 피난이었고 도망길이었을 것이다. 그걸 감수하고 현종은 울분을 삼키며 고스란히 감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때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식으로 벌을 주었다면 그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왕위를 순탄히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몽진길에 공주에서 김은부를 만난 것도 그에게는 운명이었다. 김은부는 현종을 극진히 대접했기에 현종은 감읍할 수 밖에 없었고 김은부의 딸들을 현종이 비로 맞아들이면서 이후 이 사이 낳은 혈통이 고려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야율융서는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를 잃고 물자의 손실을 감당했기에 고려 왕이 친조하기를 원했고 현종이 오지 않는다면 강동6주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는 강동6주를 포기할 수 없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강감찬은 1012년 동북면병마사로 군대를 지휘 중이었다. 감찰어사 이인택이 그를 탄핵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현종은 감찰어사를 파직하면서 강감찬을 지켰다. 만약 이 때 강감찬을 파직시켜버렸다면 이후 거란과의 싸움은 힘들었을 것이다. 1013년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넌다. 이때 거란군을 리드하는 이는 소배압이었다. 그는 북쪽에 있는 모든 성을 무시하고 개경을 향해 직진했다. 어느 정도 병력의 희생을 감수하고 평지인 개경에서의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자가 아닐 수 없다. 개경은 청야작전으로 들판이 모두 비워져 있었고 고려의 백성들은 궁궐 안에 피신한 상태였다. 소배압은 궁궐 안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야율호덕을 개경 통덕문에 파견해 철군하겠다고 통보한 뒤, 몰래 기병 300기를 금교역으로 진입시켰다. 김종현과 동북면병마사의 지원군은 아직 개경에 도착하지 않았다. 개경 안의 병력은 절대 부족했다. 거란군 선봉대가 금교역 쪽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현종은 결단했다. "출격하라!"(p296). 동북면병마사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현종은 현재의 군민으로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다행히 고려는 앞선 거란과의 전투들을 치르면서 거란군과 맞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깃발들이 순간 북쪽으로 나부끼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갑자기 남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비구름이 남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름 아래, 하나의 깃발이 있었다. 구름은 마치 그 깃발 끝에 걸려서 오고 있는 듯 보였다. 깃발을 필두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군사들. 개경을 호위하러 갔던 김종현과 1만 정예군이 도착한 것이다(p306). 


건조한 역사서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장면이라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이다. 


아무튼 이 순간 개경군은 얼마나 큰 안심이 되었을까. 고려는 전군을 좌우로 좁혀가며 거란군을 압박하여 승기를 잡았다. 거란군 진영이 무너지며 북쪽으로 내달리자 고려군은 그들을 공격한다. 거란군 10만은 전투에서 대부분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살아서 돌아간 인원은 수천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 고려군의 피해는 겨우 173명이 전사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후에도 거란과 소소한 전투는 이어졌지만 더 이상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고려 군민의 힘이 있었지만 현종의 역할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공격한 이를 용서할 줄 아는 관대함을 지녔고 거란군에 맞서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고려를 지켜냈다. 고려 후기 대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현종을 논평했다. "현종은 무엇 하나 흠을 잡을 수 없는 분이라 할 것이다."(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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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게 2023-10-25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11월부터 최수종 씨 주연으로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한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3-10-26 13:00   좋아요 1 | URL
그 드라마 보려고 미리 고려의 역사를 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사극 정극 드라마라 기대가 커요. 특히 최수종 사극은 믿고 보니까ㅎㅎㅎ

희선 2023-10-26 0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가 소설도 썼더군요 고려와 거란 싸움... 그게 오랫동안 이어진 거였군요 고려가 이겨서 다행이기는 한데, 그렇게 싸우는 동안 백성은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힘든 건 백성이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26 13:0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희선님. 저는 어떤 전쟁이든 피해는 고스란히 피지배층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기 때문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하루 빨리 종식되어야겠죠.

자목련 2023-10-26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거리의 화가 님의 정리된 리뷰 좋습니다. 덕분에 한 번 더 책을 읽은 듯해요. 곧 드라마가 시작되니 기대하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3-10-26 17: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덕분에 저도 고려와 거란의 전쟁만 다룬 책을 읽게 되었어요.
드라마가 곧 방영이라 더 두근합니다!ㅎㅎㅎ
 

제5장 에토스, 세계관, 그리고 성스러운 상징의 분석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대립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강화한다. 에토스는 세계관이기술하는 실제의 상황이 의미하는 생활양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계관은 그러한 생활양식이 진정한 표현이 되는 실제의 상황에 관한 이미지로 제시됨으로써 감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존재의 일반적 질서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제시하는것은 그러한 가치나 질서가 어떻게 생각되든 간에 모든 종교에서 본질적인요소이다.

성스러운 상징은 존재론과 우주론을 미학과 도덕에 연결시킨다. 그것들의 독특한 힘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사실을 가치에 결합시킨다고 생각되는 능력, 즉 단지 실제의 것에 불과한 포괄적인 규범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서 유래하고 있다. - P155

한 민족이 찬양하는 것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의 세계관에 묘사되고 그 종교에 상징화되며 나아가 그 생활 전반의 질로 표현된다. 그들의 에토스는 단지 그들이 찬양하는 고상함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비난하는 비천함에서도 현저히드러난다. 즉 악덕은 미덕과 더불어 양식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지지하는 종교의 힘은 그러한 가치가 그것의 실현에 대립하는 힘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구성요소가 되어 있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종교적 상징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것은, 막스 베버를인용하면, "사건들이 그저 존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의미를지니며 그 의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상상력을 나타내고 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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