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d brought a very brief time of peace by uniting different citiesand nations into one country. But that time of peace was over.
Alexander‘s three generals and their descendents would spend the next hundred years fighting over control of different partsof Alexander‘s old kingdom.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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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벽지>

갇혀있는 여자들

저들도 나처럼 다들 벽지에서 나왔을까?
하지만 꽁꽁 숨겨놓은 노끈으로 나를 단단히 묶었으니, 절대 저 바깥 길가로 날 내보내지는 못할걸!
밤이 오면 다시 무늬 안쪽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건 정말 힘들어!
이 커다란 방에서 맘껏 기어다니니 정말 기분이 좋은데 말이지!
밖으로 나가지는 않을 거야. 제니가 부탁한다 해도 절대 안 한다고.
밖으로 나가면 땅바닥에서 기어다녀야 하는데다 모든 게 여기처럼누런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잖아.
그런데 여기서는 반질반질한 방바닥에서 기어다닐 수 있고, 벽을 빙둘러 있는 저 긴 얼룩에 어깨가 딱 맞으니까 길을 잃을 걱정도 없다고.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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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 - 한국 사회 마지막 비전향 장기수를 기록하다
민병래 지음 / 원더박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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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은 오늘, 공교롭게도 북한에서 동해상으로 일본을 넘어 미사일을 쏘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전히 남북은 지리상으로 붙어 있음에도 먼 존재가 되어 있다. 마음으로는 오가고 싶다 해도 내 발로 휴전선 너머를 향해 갈 수 없다. 월북, 탈북 이런 단어는 이따금 듣지만 나와는 어느새 먼 단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는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사회안전법(보안관찰법) 등으로 구속되어, 수십 년간 징역을 살면서 잔혹한 고문과 협박 등으로 사상전향 공작에 맞서 투쟁한 분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실상이 드러났다. 1988년 12월 21일 양심수 대사면으로 시국 사범이 사면 석방될 때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관련자가 나오면서 알려졌다. 또, 1989년 5월 29일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다. 사회안전법은 좌익수가 사상전향을 하지 않고 출소하면 '보호소'라는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외부로 나온다 해도 거주와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골자다.

이들은 대부분 고향과 가족이, 살았던 동네가 북쪽인데다 자유의사로 귀향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시대도 변하고 국제사회에도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그들을 가두어두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1999년 12월 31일까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이들 모두가 석방되었고 자연스레 송환 운동까지 이어졌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 두 정상은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을 합의했고 1차 송환으로 63명이 북을 향해 갈 수 있었다. 다만 비전향장기수 102명 가운데 일부는 송환에서 제외되었는데 북쪽에 가족의 생사 여부와 거주지를 알 수 없는 경우나 교도소에서 강제전향한 경우였다. 말은 강제전향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갖은 고문과 협박으로 사상 전향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굶주림에, 회유에, 협박에, 고문을 받다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강제전향이 될 수 있는가?

총 11분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구순이 넘은 분들이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분은 두 분인데 지리산 빨치산 여전사인 박순자 선생님과 강담 선생님이다.

지리산 빨치산 활동은 태백산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는데 생생한 묘사 덕분인지 지리산 안에서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백선엽을 비롯한 대한민국 온갖 부대들이 총출동했으니 이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마치 제주 4.3의 토벌처럼, 그 한참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일제 의병의 대토벌처럼 잔혹하게 느껴졌다.

박순자, 박수분, 설봉이라는 세 개의 이름을 지닌 박순자. 그에게 두 가지 소원이 있다. 첫 번째는 뇌성마비 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고 눈을 감는 것이다. 서른여덟 살에 품은 첫딸인데 노산인 데다 산고가 심해 출산 과정에서 다소 뇌에 손상이 있었다. 아이가 한참 예민한 다섯 살 때 경찰의 가택침입과 계속된 불법 수색에 경기를 앓았고 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꾸준히 재활치료가 필요한 상태였건만 남편의 재판과 면회를 챙기느라 딸아이를 제대로 돌 볼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 북쪽이 고향이 아니고 연고도 없지만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동지들과 손을 잡고 북녘 길에 올라 남북이 평화롭게 걸어가는 길을 열겠다는 뜻이다. - P145~146

강담 선생님은 북쪽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상태였으나 출소 후 57세의 나이에 교회 권사의 주선으로 새 장가를 들었다. 아내 분은 초혼에 실패하고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그렇다 해도 북에서 내려온 전과자를 받아준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친지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으나 선생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었나보다. 하지만 자신을 받아준 남쪽의 아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뇌경색 을 앓은 후 폐암까지 생긴 후로 아내 분께서 혼자 돌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결국 요양원에 가게 된다.
이 사연에서 너무 슬퍼서 눈물이 많이 났다. 남은 이도, 떠나갈 이도, 북쪽에 있는 가족도 모두 다 가련한 것이다.

"나는 괜찮으니 당신 북으로 가라, 고향 아니냐? 당신 맘 다 안다. 그랬더니 이 양반이 내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 고맙다 하는 거야. 60년간 기다렸을 북쪽 아내에게 '여보, 나 돌아왔어. 고생 많았지' 그 말 한마디만은 하고 싶다는데 그 모습이 짠했어요. 사실 난 속으로 서운했지. '당신 두고 내가 어딜 가냐' 그런 소리 듣고 싶었는데 오만 정이 다 떨어지더라구. 그때는 이 양반이 나를 두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내가 이 양반을 여기 두고 떠나는 셈이 되었네."
"여보, 나 이제 올라갈게. 당신은 이제 여기서 여생을 마쳐야 하고 나는 집에서 죽어야 해"
코로나로 모든 요양원에 면회금지 명령까지 내려진 상황이라 이날 올라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인 셈이다.
"그동안 고마웠어 사랑해." - P191~193

20, 30대에 감옥에 들어가 20년, 30년 이상을 지나고 나와보니(심지어 초반에 정해진 복역 기간에 간첩 사건을 조작하여 복역 기간이 늘어난 경우도 많다) 어느덧 50, 60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사회에 나오니 먹고 살 길은 막막하고 할 줄 아는 것은 없고 교도소에서 알게 된 사람이라고 믿었다가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도 모았던 돈을 날려먹고 길거리를 떠돌다 이제 더는 살 수 없다 생각한 분들도 있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라면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지... 그저 고향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마음이 너무 아픈 책이다. 하지만 내가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서 미처 몰랐을 테고 이분들의 삶을 알 기회가 있었을까.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비전향 장기수 분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북이 대결 구도로 치닫고 북미 관계는 물론 대만을 두고 미중 관계도 좋지 않은 지금 긍정적인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책을 내려놓고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이분들의 한은 어떻게 풀어드릴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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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4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00년에 비전향장기수분들이 북으로 가셨을 때 이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남은 분들이 있었군요.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부분들을 살아내신 분들의 삶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10-05 09:09   좋아요 1 | URL
네. 2000년 북으로 간 게 끝이 아니더라구요ㅠㅠ 그 이후 송환 과정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보수단체들의 항의와 반대 등과 정부가 제대로 처리를 못해서 지금까지 왔더군요. 결국 연세가 구순이 훌쩍 넘으셔서 이 책 인터뷰하시는 도중에도 4분인가가 돌아가셨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그렇고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왜 이리 힘들까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페넬로페 2022-10-04 2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확히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비전향장기수가 나이 들어 감옥에서 밖으로 나오면 적응하기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몇 십년을 좁은 곳에 있다가 뻥 뚫린 곳에 적응을 잘 못한다고요.
도대체 그 주의라는 것이 뭐길래 이렇게 인간을 고문하고 오랫동안 가둬놓는지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10-05 10:50   좋아요 2 | URL
그분들이 북에서 살다 내려오신 분들이라 남한의 체제 자체에 적응을 못했을것 같구요. 철저한 자본주의 경제에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것 같습니다. 북에서 인권이 문제가 되지만 이분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대한민국이 과연 말할 자격이 있나 싶습니다. 누가 누굴 나무라는지 모르겠어요ㅠㅠ 이념이 참 지긋지긋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말이죠.

희선 2022-10-05 0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과 북으로 나뉜 게 슬픈 일이군요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면 하나가 되리라 여겼을 텐데 생각이 다르고 나라가 둘로 나뉘고 말았네요 아니 그건 소련과 미국 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죠 언젠가 통일할 날이 올지... 지금은 통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기도 해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0-05 09:13   좋아요 2 | URL
20대 이하는 통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할 것 같습니다. 북한이 당연히 다른 나라라고 생각할테니까요. 통일은 둘째치고 사람은 살리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비전향 장기수분들이 워낙 고령이라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말이죠ㅠㅠ

mini74 2022-10-05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전향 장기수분들 모두 북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ㅠㅠ 체제나 이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라도 보수층의 반대라는게 참 잔인하다는 생각듭니다 ㅠ

거리의화가 2022-10-05 13:09   좋아요 2 | URL
어제 리뷰 쓰면서도 자꾸만 분노가 치밀어오르는겁니다. 너무 화가 나요. 그분들 삶을 보면 어느 하나 쉽지 않더라구요. 그런 인생을 살다 가면 세상에 대한 회의만 있다 가지 않을까 싶고... 무엇보다 죽기 전 소원이라는데 그걸 못들어주는지~ 참 씁쓸해요 미니님ㅜㅜ

얄라알라 2022-10-07 04: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순자님께서 구순 넘으신 어르신이라면 38 출산은 그 시절, 더욱 늦은 출산이었을텐데 아기돌봄을 할 수도 없이 휘둘려진 삶을 사셨나봐요....말씀하신 것 처럼, 그 ˝한˝을 감히 상상도 못하겠네요. 이를 갈아도 이가 갈리지 한은 갈리지 않을 것 같은....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리의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2-10-07 08:57   좋아요 1 | URL
˝한˝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해 보였어요. 어떻게 해도 응어리가 풀릴까 싶습니다ㅠㅠ 청춘이 감옥에서 한 세월을 보내고 나와서도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삶을 사신 분들이니... 박순자 선생님 노산이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아이에게 미안함도 있는 걸 고백하실 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게 선생님 잘못은 아니고 사회가 그리 몰아간 것을요. 저도 이 책에서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알라님께도 울림을 주는 책이길^^
 

Greece, across the Aegean Sea, was a completely different kind of country. Ahtens and Sparta were the largest Greek cities, but the people of these two cities lived in very different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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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350~1750 - 세계 제국과 대양 하버드-C.H.베크 세계사
볼프강 라인하르트 지음, 이진모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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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룰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세계'는 아직 아무런 교류 없이 서로 분리된 채였다. 심지어 '대서양 세계'는 이 시기에야 비로소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대서양의 동쪽 세계와 서쪽 세계는 서로 역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상호작용은 계속 증가해 점차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다루려는 다섯 세계의 역사는 전 지구적인 오늘날 세계의 전사(前史)다. 그리고 이 다섯 세계의 역사에 관한 서술은 모든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 각각 그 지역들의 현재적(정치적·경제적) 관심사의 영향을 받게 된다. - P14

이 책의 목차를 먼저 살펴보자. 유라시아 대륙부터 시작해 이슬람 세계, 남아시아와 인도양, 동남아시아와 대양, 가장 마지막이 유럽과 대서양 세계를 다룬다. 유라시아 대륙부터 시작하는 것이 낯설 수 있지만 시기를 주목하면 이해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18세기는 몽골이 지나간 자리에 이슬람 세계가 확장되고(유럽까지) 서양이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찾으면서 대서양까지 확산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순서가 이렇게 배치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섯 세계의 역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키워드는 상호성과 교류, 소통이다. 세계는 이어지고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때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만 주목하지 않고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거나 도태된 많은 부족과 국가를 다룬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피해가 있었던 점을 보여주어 균형 있게 다루려고 노력한 점이 좋았다.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친 어떤 과정들로 인해 이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 과정에는 공통의 기후 조건, 서로 연결된 지리와 농업 및 상업 생산방식, 공통의 사회적 상호작용 및 가족생활 관행이 포함된다. 가장 두드러지고 일반적인 두 경향은 제국들의 확장과 독립국가들의 강화였으며,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항하거나 도피한 사람들이 살던 국경 지대가 없어졌다. 또한 이에 수반해 핵심 지역과 변경 지역 모두를 향해 상업망이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이 지역 전체는 신대륙에서 유래해 유입되는 은에 의해 추동되는 전 세계 교역망으로 연결되었다. - P77~78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이 지역을 하나의 전체로 논의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19세기 및 20세기 민족국가의 국경에 의해 규정된 단위들에 집중해 왔다. 우리는 이 기간의 중국, 러시아, 일본의 수많은 개별 역사(역사 서술)와 한국과 베트남의 몇몇 개별 역사를 알지만,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개별 역사(역사 서술)들 중 이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연구는 이 더 큰 규모(이 지역 전체)의 변화를 묘사하는 중요한 개념적인 도구들을 실제로 제시했다. - P78

지금의 중앙유라시아 및 동유라시아라고 부르는 광대한 지역은 시베리아 삼림지대에서 아열대 농경 지대까지 뻗어 있고 세계 인구의 30퍼센트에서 40퍼센트가 살았다. 중국의 명과 청 두 제국은 중앙집권화 관료 체제로 주도적 위치를 점유했다.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모스크바 공국(후에 모스크바 국가가 됨)이 형성된 후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 동방과 서유럽으로의 팽창을 이어간다. 중앙유라시아는 중국의 정책과 이슬람 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사회를 일구었다. 일본은 16세기 이후 유럽의 해양 세력 및 육상 세력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발전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조공 체제를 받아들여 관료제적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안정을 꾀했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제 정부는 전 지역에 걸쳐 가차 없이 진보해, 행정 절차의 표준화를 심화하고 엘리트 문화와 대중 문화를 불러왔으며 광범위한 상업적 교환을 지지했다. 광대한 제국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더 작은 국가인 한국과 일본, 베트남은 더욱 효율적으로 사회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영토 면적을 넓히고 대체로 인구 증가와 문화적 역동성을 경험했다. 그 나라들 중 그 어떤 나라도 정체해 있지 않았고, 그들의 많은 제도는 탄력적이고 적응성이 있었으며, 신민들은 대부분 번성했다. 그러나 이는 군사적·환경적·문화적 상호작용 등 수많은 다양한 요인이 조건부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으며, 뒤이은 시기의 반전에 취약했다. - P262

터키의 역사 서술에서는 (프랑스의 관례와 비슷하게) '근대'로 표현되는 시기가 1453년에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1453년이 바로 그 시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기반이 되는 시대구분인 1350년에서 1750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들에게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일반적인 시대 구분에 따라, 아직 '중세적' 성격을 갖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초기 역사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이 제국은 대략 1300년 무렵에 북서아나톨리아 지방의 지역 군후국으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언제 끝나는가? 1768년에서 1774년까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우리는 별 무리 없이 이 사건을 하나의 역사적인 분수령으로 바라볼 수 있다. 퀴취크 카이나르자 평화조약(1774)에서 오스만 제국은 이전까지는 금지했던 외국 선박의 흑해 운항을 허용해야 했다. 그 외에도 이 조약을 통해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이와 관련된 일련의 정치적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몇 년 후 1783년에 러시아가 크림을 합병하며 종식되었다. - P265~266

이제는 오스만 제국 역사에 수백 년에 걸친 '지속적인 위기'가 있었다고 더는 전제하지 않는다. (...) 오늘날에는 다양한 지방 세력들이 18세기에 비교적 순탄하게 오스만 제국의 국가조직 안에 통합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18세기 후반의 위기 동안에 제국이 생존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0년대에조차 일상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방의 명망가들과 세력가들이 지배하던 지역을 근대 국민국가의 초기 형태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상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과 유럽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터키의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도 중앙집권화된 국민국가가 정치사에서 가장 발전된 통치 유형이라는 주장이 더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 P268

아나톨리아 지역에 티무르 제국이 무너진 이후 등장한 후계 제국들 중 오스만(수니파 이슬람)과 사파비(시아파 이슬람) 왕조는 군주가 왕권 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방지하고,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체제를 개발함으로써 안정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사파비 군주인 샤는 캅카스 출신 굴람들을 동원해 키질바시 에미르들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하게 하여 17세기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여 지배를 안정화하는 중요 토대를 만들었다.
오스만은 술탄이 나머지 형제들을 '예방 차원'에서 살해함으로써 후계 전쟁을 줄였고 15세기 후반 이후 베지르와 총독들을 배출했던 준노예들도 이란의 굴람에 해당하는 체제 안정 요소였다.
또 사파비와 오스만 군주는 아들들을 궁전 안에 가두고 성장하게 하면서 반란을 애초에 방지하여 왕위를 안정시켰다.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1400년을 전후해 유럽의 지위는 오히려 대단히 어둡게 나타난다. 세계무역을 지배했던 것은 무슬림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조직은 이 당시 유럽에서는 아직 그 형체가 조금도 파악되지 않은 정치적·문화적 통일체였던 중국이었다. 하지만 1480년에서 1620년까지의 시기에 유럽적 시각에서 팽창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유럽의 이러한 팽창은 지구사의 관점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 유럽의 도약은 이 시점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된 무력이라는 현상 외에 별로 새로운 것을 세계에 가져다주지 않았다. 후추 무역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된 이후에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인도양에서 낯선 이방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역할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에 무제한적인 통행권을 보장해주는 이른바 보호장을 받음으로써 생겨난 역할이었다. - P460

근대 초기의 세계화 단계에서 인도양은 대서양을 거쳐 매우 광범위한 교환 체계에 연결되기는 했지만, 이 네트워크는 일차적으로 간접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런데도 이 단계는 일련의 방향 제시적인 변화를 수반했다. 기독교의 확산, 교역 언어로서 포르투갈어의 확산, 인도-포르투갈 공동체의 형성, 유럽인이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를 띤 항구도시(예를 들어 고아, 마닐라, 바타비아, 퐁디셰리)의 대두, 희망봉을 거치는 유럽 교역의 증가가 이 변화에 속한다. 이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귀금속, 특히 은의 수입을 통해 유럽이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공간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유럽인들은 인도양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상품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 P465

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역사는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유럽에 관련된 아래에서 서술되엇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이래로 이루어진 세계의 발견과 정복, 지속적인 점유가 역사의 주요 골격이었다. 1494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이 시기 획기적인 경제 발전과 함께 유럽이 가진 무한 권력의 환상과 오만의 상징과도 같았다.
유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만큼 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역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다르게 보였다. 남아시아가 북아프리카로 상품을 수출하고 여러 항구들이 개설되면서 인도양을 오갔다. 유럽은 당시까지만 해도 중심이 아니었고 이제 막 그 흐름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남아시아가 직물, 후추, 설탕 같은 상품을 레반트와 북아프리카로 수출한 것이 양 지역 사이의 교역에서 기본적인 구조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초지역적인 연결들이 이루어지는 심장부로서 기능했다. 인도양에서 이루어진 원거리 무역은 소규모의 해양 공간 내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던 무역로를 기반으로 했다. 이러한 무역 관계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던 항구도시들 사이의 해상무역로가 계속 엮인 것과 같았다. 근대 초의 세계 체제가 근대의 세계 체제와 달랐던 점은 근대 초에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핵심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비슷한 상업적 가치를 지닌 생산지가 도처에 많이 있었으며, 중심 역할을 하는 교역 중심도 여럿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위계적으로 조직된 생산 절차나 그 절차의 중심지도 없었다. 모든 지역은 각자의 규칙에 따라 스스로 알아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 P632

자연 공간적인 측면뿐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볼 때 동남아시아와 대양들을 규정하는 특징은 언뜻 보면 다양성과 복합성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 지역을 하나씩 소개하며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서술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지역들을 서로 연결하는 요소들은 매우 뚜렷하기 때문에 지역 간의 차이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유사성을 강조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일련의 공통성을 가지는 공간으로서, 내적으로는 서로를 결속시키면서 외적으로는 경계를 설정하는 공간으로서 남아시아와 대양들이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 P637

동남 아시아의 역사는 탈식민화 이후에도 지역에 있던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의 역사에 머물렀다. 동남아시아라는 개념은 20세기 초에 독일의 민족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로베르트 폰 하이네겔데른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이네겔데른은 1923년에 이 지역이 갖고 있는 민족적·언어적·문화적 공통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했다. 19세기에는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정복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로 명명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그의 일행들이 신대륙과 아시아 사이를 항해했을 때 바다가 너무 고요해 죽을 뻔 했던 것에서 '고요한 바다' 혹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을 가진 태평양의 명칭은 이것에서 나온 것이다. '오세아니'아라는 명칭도 바다의 엄청난 넓이와 규모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 최근의 연구 경향은 동남아시아를 점차 발전하던 세계 체제 안에 존재한 하나의 중요한 독자적인 지역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 P695

동인도,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태평양, 오세아니아라는 명칭 자체가 유럽인들의 인식과 용어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동남아시아에 있던 국가들은 인도양, 태평양을 아우르는 지역에 위치하면서 유럽과 아프리카 등의 나라와 수많은 교류를 이어갔다. 특히 1570년에서 1630년까지 동남아시아 경제는 호황기를 맞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유입된 은이 유럽 경제를 활성화하고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 상품을 구매하는 순환 고리를 만든 것이다. 과연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한가. 같은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서술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생각이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유럽 역사학의 패러다임에서 분리하려는 시도에까지 이르는 여러 혁신적인 연구와 노력에도 그 지역들의 역사학은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앞선 위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역사학의 초석을 놓은 선구적 학자들조차 유럽에서 교육받은 학자이거나 주로 유럽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연구를 주도해 가는 핵심 연구소나 중요한 연구 서적 대부분의 출판지는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있으며, 아프리카 연구의 중심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인 상황이다. '대서양의 역사'라는 연구 주제도 미국과 유럽 사이의 학술 교류에서 대두했다.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와 무엇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는 연구를 위한 제도적 연속성과 재정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 - P840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유럽 출신이 대부분이고 사료들도 남아 있지 않거나 유럽이나 미국에 존재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유럽/북아메리카 시각의 서술에 입각해 있다.
이 시기 대서양 연안 아프리카의 역사는 인구 밀도가 증가하고 교역이 증가하면서 많은 제국이 건설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이 오기 훨씬 이전에 지중해까지 이르는 교역망을 구축하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당시에 남동 유럽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서 아직 인근 다른 세계와의 접촉 지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의 서술은 '라틴 유럽'으로 제한할 것이다. 오직 라틴 유럽만이 대서양의 공통점을 건설하는 데 참여했기 때문인데, 우선은 서쪽의 식민 세력인 포르투갈, 카스티야, 네덜란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해당하며, 이들보다 좀 더 간접적으로는 그 밖의 남부, 중부, 북부의 유럽 국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17세기와 18세기에 형성된 유럽의 세계무역 체제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국가가 한편으로는 쿠를란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트리에스테에 있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 P874

서술하듯 여기서 말하는 라틴 아메리카는 남동 유럽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은 대서양을 누비며 교역을 이어갔다. 대서양을 통한 교류는 원거리를 거치는 접촉을 빈번하게 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영토를 점령하고 수많은 원주민 집단의 맥이 끊기게 함으로써 언어적·인종적·문화적 차이를 잃게 했다는 것이다. 식민 지배는 주민들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재조직하고, 새로운 부족들을 탄생시켰다.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고 부족의 고유성을 빼앗아가는 것은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5장은 아무래도 남아 있는 자료나 책이 유럽 중심이라 아무래도 제한이 있다.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

뒤에 주석을 빼고도 내용이 1058페이지에 달하여 거칠게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책은 직접 읽어봐야 내용 파악은 물론 자체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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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3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인 교류에 의해 세계사가 형성되는 시기를 다루고 있는것 같은데 이 시기와 분야의 역사는 사실상 너무나도 방대하여 그걸 제대로 연결짓고 전체를 조망하는게 개인 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진짜 어려울듯해요. 우리나라에서 세계사와 한국사를 통합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진짜 안되는게 일단 그런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ㅠ.ㅠ
요즘 공부사기 싫어하는 저는 보관함에 이 책을 넣어두지만 언제 읽을지는 솔직히..... ㅠ.ㅠ
화가님의 열공을 항상 응원합니다. ^^ 저는 음..... 반성만 하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2-10-04 09:33   좋아요 0 | URL
시기의 범위도 넓은데다 세계 전체를 다루다 보니 역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챕터마다 저자가 다른 이유가 되는 것일테구요.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한국사와 세계사의 분리가 너무 심각하여 이를 조금씩이라도 통합하는 과정이 있어야할텐데 역시 사람이 없는 거군요^^;;; 하긴 통합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모두 공부해야 가능한 일일테니ㅎㅎ 저는 근대 이후 역사를 주로 읽어와서 이 시기에 대한 역사는 덜 주목한 측면이 있었는데요. 이 시기의 역사를 읽으니 근대의 시작과 자연스레 이어져서 공부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보관함에 담아둔 책 저도 너무 많아서 사실 죽을 때까지 읽고 갈까 싶어요. 그러니 읽고 싶어질 때 읽으시면 되죠. 그리고 그런 계기가 올 때가 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