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350~1750 - 세계 제국과 대양 하버드-C.H.베크 세계사
볼프강 라인하르트 지음, 이진모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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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룰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세계'는 아직 아무런 교류 없이 서로 분리된 채였다. 심지어 '대서양 세계'는 이 시기에야 비로소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대서양의 동쪽 세계와 서쪽 세계는 서로 역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상호작용은 계속 증가해 점차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다루려는 다섯 세계의 역사는 전 지구적인 오늘날 세계의 전사(前史)다. 그리고 이 다섯 세계의 역사에 관한 서술은 모든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 각각 그 지역들의 현재적(정치적·경제적) 관심사의 영향을 받게 된다. - P14

이 책의 목차를 먼저 살펴보자. 유라시아 대륙부터 시작해 이슬람 세계, 남아시아와 인도양, 동남아시아와 대양, 가장 마지막이 유럽과 대서양 세계를 다룬다. 유라시아 대륙부터 시작하는 것이 낯설 수 있지만 시기를 주목하면 이해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18세기는 몽골이 지나간 자리에 이슬람 세계가 확장되고(유럽까지) 서양이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찾으면서 대서양까지 확산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순서가 이렇게 배치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섯 세계의 역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키워드는 상호성과 교류, 소통이다. 세계는 이어지고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때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만 주목하지 않고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거나 도태된 많은 부족과 국가를 다룬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피해가 있었던 점을 보여주어 균형 있게 다루려고 노력한 점이 좋았다.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친 어떤 과정들로 인해 이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 과정에는 공통의 기후 조건, 서로 연결된 지리와 농업 및 상업 생산방식, 공통의 사회적 상호작용 및 가족생활 관행이 포함된다. 가장 두드러지고 일반적인 두 경향은 제국들의 확장과 독립국가들의 강화였으며,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항하거나 도피한 사람들이 살던 국경 지대가 없어졌다. 또한 이에 수반해 핵심 지역과 변경 지역 모두를 향해 상업망이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이 지역 전체는 신대륙에서 유래해 유입되는 은에 의해 추동되는 전 세계 교역망으로 연결되었다. - P77~78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이 지역을 하나의 전체로 논의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19세기 및 20세기 민족국가의 국경에 의해 규정된 단위들에 집중해 왔다. 우리는 이 기간의 중국, 러시아, 일본의 수많은 개별 역사(역사 서술)와 한국과 베트남의 몇몇 개별 역사를 알지만,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개별 역사(역사 서술)들 중 이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연구는 이 더 큰 규모(이 지역 전체)의 변화를 묘사하는 중요한 개념적인 도구들을 실제로 제시했다. - P78

지금의 중앙유라시아 및 동유라시아라고 부르는 광대한 지역은 시베리아 삼림지대에서 아열대 농경 지대까지 뻗어 있고 세계 인구의 30퍼센트에서 40퍼센트가 살았다. 중국의 명과 청 두 제국은 중앙집권화 관료 체제로 주도적 위치를 점유했다.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모스크바 공국(후에 모스크바 국가가 됨)이 형성된 후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 동방과 서유럽으로의 팽창을 이어간다. 중앙유라시아는 중국의 정책과 이슬람 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사회를 일구었다. 일본은 16세기 이후 유럽의 해양 세력 및 육상 세력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발전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조공 체제를 받아들여 관료제적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안정을 꾀했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제 정부는 전 지역에 걸쳐 가차 없이 진보해, 행정 절차의 표준화를 심화하고 엘리트 문화와 대중 문화를 불러왔으며 광범위한 상업적 교환을 지지했다. 광대한 제국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더 작은 국가인 한국과 일본, 베트남은 더욱 효율적으로 사회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영토 면적을 넓히고 대체로 인구 증가와 문화적 역동성을 경험했다. 그 나라들 중 그 어떤 나라도 정체해 있지 않았고, 그들의 많은 제도는 탄력적이고 적응성이 있었으며, 신민들은 대부분 번성했다. 그러나 이는 군사적·환경적·문화적 상호작용 등 수많은 다양한 요인이 조건부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으며, 뒤이은 시기의 반전에 취약했다. - P262

터키의 역사 서술에서는 (프랑스의 관례와 비슷하게) '근대'로 표현되는 시기가 1453년에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1453년이 바로 그 시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기반이 되는 시대구분인 1350년에서 1750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들에게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일반적인 시대 구분에 따라, 아직 '중세적' 성격을 갖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초기 역사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이 제국은 대략 1300년 무렵에 북서아나톨리아 지방의 지역 군후국으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언제 끝나는가? 1768년에서 1774년까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우리는 별 무리 없이 이 사건을 하나의 역사적인 분수령으로 바라볼 수 있다. 퀴취크 카이나르자 평화조약(1774)에서 오스만 제국은 이전까지는 금지했던 외국 선박의 흑해 운항을 허용해야 했다. 그 외에도 이 조약을 통해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이와 관련된 일련의 정치적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몇 년 후 1783년에 러시아가 크림을 합병하며 종식되었다. - P265~266

이제는 오스만 제국 역사에 수백 년에 걸친 '지속적인 위기'가 있었다고 더는 전제하지 않는다. (...) 오늘날에는 다양한 지방 세력들이 18세기에 비교적 순탄하게 오스만 제국의 국가조직 안에 통합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18세기 후반의 위기 동안에 제국이 생존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0년대에조차 일상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방의 명망가들과 세력가들이 지배하던 지역을 근대 국민국가의 초기 형태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상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과 유럽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터키의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도 중앙집권화된 국민국가가 정치사에서 가장 발전된 통치 유형이라는 주장이 더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 P268

아나톨리아 지역에 티무르 제국이 무너진 이후 등장한 후계 제국들 중 오스만(수니파 이슬람)과 사파비(시아파 이슬람) 왕조는 군주가 왕권 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방지하고,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체제를 개발함으로써 안정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사파비 군주인 샤는 캅카스 출신 굴람들을 동원해 키질바시 에미르들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하게 하여 17세기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여 지배를 안정화하는 중요 토대를 만들었다.
오스만은 술탄이 나머지 형제들을 '예방 차원'에서 살해함으로써 후계 전쟁을 줄였고 15세기 후반 이후 베지르와 총독들을 배출했던 준노예들도 이란의 굴람에 해당하는 체제 안정 요소였다.
또 사파비와 오스만 군주는 아들들을 궁전 안에 가두고 성장하게 하면서 반란을 애초에 방지하여 왕위를 안정시켰다.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1400년을 전후해 유럽의 지위는 오히려 대단히 어둡게 나타난다. 세계무역을 지배했던 것은 무슬림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조직은 이 당시 유럽에서는 아직 그 형체가 조금도 파악되지 않은 정치적·문화적 통일체였던 중국이었다. 하지만 1480년에서 1620년까지의 시기에 유럽적 시각에서 팽창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유럽의 이러한 팽창은 지구사의 관점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 유럽의 도약은 이 시점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된 무력이라는 현상 외에 별로 새로운 것을 세계에 가져다주지 않았다. 후추 무역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된 이후에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인도양에서 낯선 이방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역할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에 무제한적인 통행권을 보장해주는 이른바 보호장을 받음으로써 생겨난 역할이었다. - P460

근대 초기의 세계화 단계에서 인도양은 대서양을 거쳐 매우 광범위한 교환 체계에 연결되기는 했지만, 이 네트워크는 일차적으로 간접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런데도 이 단계는 일련의 방향 제시적인 변화를 수반했다. 기독교의 확산, 교역 언어로서 포르투갈어의 확산, 인도-포르투갈 공동체의 형성, 유럽인이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를 띤 항구도시(예를 들어 고아, 마닐라, 바타비아, 퐁디셰리)의 대두, 희망봉을 거치는 유럽 교역의 증가가 이 변화에 속한다. 이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귀금속, 특히 은의 수입을 통해 유럽이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공간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유럽인들은 인도양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상품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 P465

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역사는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유럽에 관련된 아래에서 서술되엇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이래로 이루어진 세계의 발견과 정복, 지속적인 점유가 역사의 주요 골격이었다. 1494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이 시기 획기적인 경제 발전과 함께 유럽이 가진 무한 권력의 환상과 오만의 상징과도 같았다.
유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만큼 남아시아와 인도양의 역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다르게 보였다. 남아시아가 북아프리카로 상품을 수출하고 여러 항구들이 개설되면서 인도양을 오갔다. 유럽은 당시까지만 해도 중심이 아니었고 이제 막 그 흐름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남아시아가 직물, 후추, 설탕 같은 상품을 레반트와 북아프리카로 수출한 것이 양 지역 사이의 교역에서 기본적인 구조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초지역적인 연결들이 이루어지는 심장부로서 기능했다. 인도양에서 이루어진 원거리 무역은 소규모의 해양 공간 내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던 무역로를 기반으로 했다. 이러한 무역 관계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던 항구도시들 사이의 해상무역로가 계속 엮인 것과 같았다. 근대 초의 세계 체제가 근대의 세계 체제와 달랐던 점은 근대 초에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핵심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비슷한 상업적 가치를 지닌 생산지가 도처에 많이 있었으며, 중심 역할을 하는 교역 중심도 여럿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위계적으로 조직된 생산 절차나 그 절차의 중심지도 없었다. 모든 지역은 각자의 규칙에 따라 스스로 알아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 P632

자연 공간적인 측면뿐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볼 때 동남아시아와 대양들을 규정하는 특징은 언뜻 보면 다양성과 복합성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 지역을 하나씩 소개하며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서술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지역들을 서로 연결하는 요소들은 매우 뚜렷하기 때문에 지역 간의 차이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유사성을 강조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일련의 공통성을 가지는 공간으로서, 내적으로는 서로를 결속시키면서 외적으로는 경계를 설정하는 공간으로서 남아시아와 대양들이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 P637

동남 아시아의 역사는 탈식민화 이후에도 지역에 있던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의 역사에 머물렀다. 동남아시아라는 개념은 20세기 초에 독일의 민족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로베르트 폰 하이네겔데른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이네겔데른은 1923년에 이 지역이 갖고 있는 민족적·언어적·문화적 공통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했다. 19세기에는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정복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로 명명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그의 일행들이 신대륙과 아시아 사이를 항해했을 때 바다가 너무 고요해 죽을 뻔 했던 것에서 '고요한 바다' 혹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을 가진 태평양의 명칭은 이것에서 나온 것이다. '오세아니'아라는 명칭도 바다의 엄청난 넓이와 규모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 최근의 연구 경향은 동남아시아를 점차 발전하던 세계 체제 안에 존재한 하나의 중요한 독자적인 지역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 P695

동인도,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태평양, 오세아니아라는 명칭 자체가 유럽인들의 인식과 용어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동남아시아에 있던 국가들은 인도양, 태평양을 아우르는 지역에 위치하면서 유럽과 아프리카 등의 나라와 수많은 교류를 이어갔다. 특히 1570년에서 1630년까지 동남아시아 경제는 호황기를 맞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유입된 은이 유럽 경제를 활성화하고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 상품을 구매하는 순환 고리를 만든 것이다. 과연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한가. 같은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서술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생각이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유럽 역사학의 패러다임에서 분리하려는 시도에까지 이르는 여러 혁신적인 연구와 노력에도 그 지역들의 역사학은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앞선 위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역사학의 초석을 놓은 선구적 학자들조차 유럽에서 교육받은 학자이거나 주로 유럽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연구를 주도해 가는 핵심 연구소나 중요한 연구 서적 대부분의 출판지는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있으며, 아프리카 연구의 중심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인 상황이다. '대서양의 역사'라는 연구 주제도 미국과 유럽 사이의 학술 교류에서 대두했다.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와 무엇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는 연구를 위한 제도적 연속성과 재정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 - P840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유럽 출신이 대부분이고 사료들도 남아 있지 않거나 유럽이나 미국에 존재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유럽/북아메리카 시각의 서술에 입각해 있다.
이 시기 대서양 연안 아프리카의 역사는 인구 밀도가 증가하고 교역이 증가하면서 많은 제국이 건설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이 오기 훨씬 이전에 지중해까지 이르는 교역망을 구축하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당시에 남동 유럽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서 아직 인근 다른 세계와의 접촉 지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의 서술은 '라틴 유럽'으로 제한할 것이다. 오직 라틴 유럽만이 대서양의 공통점을 건설하는 데 참여했기 때문인데, 우선은 서쪽의 식민 세력인 포르투갈, 카스티야, 네덜란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해당하며, 이들보다 좀 더 간접적으로는 그 밖의 남부, 중부, 북부의 유럽 국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17세기와 18세기에 형성된 유럽의 세계무역 체제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국가가 한편으로는 쿠를란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트리에스테에 있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 P874

서술하듯 여기서 말하는 라틴 아메리카는 남동 유럽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은 대서양을 누비며 교역을 이어갔다. 대서양을 통한 교류는 원거리를 거치는 접촉을 빈번하게 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영토를 점령하고 수많은 원주민 집단의 맥이 끊기게 함으로써 언어적·인종적·문화적 차이를 잃게 했다는 것이다. 식민 지배는 주민들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재조직하고, 새로운 부족들을 탄생시켰다.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고 부족의 고유성을 빼앗아가는 것은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5장은 아무래도 남아 있는 자료나 책이 유럽 중심이라 아무래도 제한이 있다.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

뒤에 주석을 빼고도 내용이 1058페이지에 달하여 거칠게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책은 직접 읽어봐야 내용 파악은 물론 자체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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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3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인 교류에 의해 세계사가 형성되는 시기를 다루고 있는것 같은데 이 시기와 분야의 역사는 사실상 너무나도 방대하여 그걸 제대로 연결짓고 전체를 조망하는게 개인 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진짜 어려울듯해요. 우리나라에서 세계사와 한국사를 통합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진짜 안되는게 일단 그런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ㅠ.ㅠ
요즘 공부사기 싫어하는 저는 보관함에 이 책을 넣어두지만 언제 읽을지는 솔직히..... ㅠ.ㅠ
화가님의 열공을 항상 응원합니다. ^^ 저는 음..... 반성만 하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2-10-04 09:33   좋아요 0 | URL
시기의 범위도 넓은데다 세계 전체를 다루다 보니 역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챕터마다 저자가 다른 이유가 되는 것일테구요.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한국사와 세계사의 분리가 너무 심각하여 이를 조금씩이라도 통합하는 과정이 있어야할텐데 역시 사람이 없는 거군요^^;;; 하긴 통합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모두 공부해야 가능한 일일테니ㅎㅎ 저는 근대 이후 역사를 주로 읽어와서 이 시기에 대한 역사는 덜 주목한 측면이 있었는데요. 이 시기의 역사를 읽으니 근대의 시작과 자연스레 이어져서 공부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보관함에 담아둔 책 저도 너무 많아서 사실 죽을 때까지 읽고 갈까 싶어요. 그러니 읽고 싶어질 때 읽으시면 되죠. 그리고 그런 계기가 올 때가 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