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철학사 2 - 아시아세계의 철학 세계철학사 2
이정우 지음 / 길(도서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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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 이면에서 어떤 본질을 읽어내려 했고, 이 본질은 ‘실재‘였다. 반면 동북아의 ‘무‘ 등은 자연 현상에서 인간적인,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읽어내려 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 자연 현상 저편으로 넘어가 실재를 찾았고, 후자의 경우 자연 현상의 편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려 했다. - P33


서양 철학이 시작된 지중해 세계를 다룬 세계철학사 1권에 이어, 2권은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세계의 철학을 다룬다. 동양 철학이 아닌, 아시아 세계의 철학이라는 말이 어색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를 동양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중국과 인도의 철학이 결이 같다고 볼 수 있는가). 동양은 서양이 부여한 용어가 아니냐 등…


세계 철학의 주요 흐름은 서구 세계의 인물과 사상을 배경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는 고중세 시기 동안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발전해왔던 서양과 동양의 세계관이 근대 세계에 와서 서양의 세계관이 힘을 압도하며 역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구 세계 철학은 그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세계의 철학은 자연 현상을 해석하는 역학이 시작점이 되었다.


이처럼 아시아 철학의 기본은 ‘역’의 개념이다. ‘역’이란 무엇인가. 

성인이 ‘괘‘를 긋고 ‘상‘을 관찰해 ‘사‘를 걺으로써 길함과 흉함을 밝히려 했다. 강함과 유함이 서로 밀어 (剛柔相推) 변화가 생겨나니, 그로써 길함과 흉함은 얻고 잃음의 상이요, 후회와 부끄러움(悔)은 안타까움과 짓눌림 (憂)의 상이요, 변함과 화함은 나아감과 물러남의 상이요, 강함과 유함은 낮과 밤의 상이다. 6효의 변화가 하늘·땅· 사람의 길(三極之道)을 세운다. 하여 군자는 ‘역‘의 배열에 입각해 편안히 안거할 수 있으며, 효사를 읽음으로써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군자가 거할 때는 ‘상‘을 보고 ‘사‘를 즐기지만 동할 때에는 ‘변‘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그를 도우니 이롭지 않음이 있겠는가"라 한 것이다.(「사전 상」, 2장) - P128


중국 철학은 분열을 거듭하던 난세의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묵가 철학, 노자-장자를 바탕으로 한 도교 철학, 법가 철학 등이 난립을 거듭했다. 

그러다 동북아 세계에서 ‘공자’가 나타나며 상황은 달라졌다. 중국의 사상 철학 체계에서 ‘공자’의 위상은 특별하다. 공자는 인간에게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를 넘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형이상학을 펼쳤다. 그의 가르침은 수많은 제자들이 후대에 전수하며 유교적 윤리 세계를 동아시아에 구축하며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동아시아에 공자가 있었다면 서양 세계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둘은 사는 곳도, 사상적으로도 달랐지만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전수했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았다. 물론 서구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넘어 유대-기독교적 흐름을 받아들이며 다른 형태로 진화했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여전히 동아시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도 철학은 종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대표적으로 힌두교와 불교가 있다. 이는 우파니샤드와 붓다의 가르침에서 확인이 가능한데 구체적으로는 ’욕망’과 ‘업’을 을 극복하고 ‘고(고통)’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힌두교는 브라만적 우주관을 다시 세우고 ‘범아일여‘의 사유를 다시 다듬었다. 세계는 주기적 해체와 재창조를 계속한다. 해체는 브라흐만이 세 현현을 거두어들이는 과정이고, 재창조는 다시 세 현현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 P524


붓다의 가르침은 ‘사제(四)‘라 불린다. 처음에 붓다 사유의 출발점은 모든 것이 ‘고‘라는 ‘고제(苦諦)‘였다 일체개고. 그리고 삶의 고뇌가 어떤 이치로부터 생겨나는가를 12연기설을 통해 통찰하는 것은 ‘집제(集諦)‘이다 제행무상. 그리고 고뇌로부터의 벗어남을 12연기를 거꾸로 생각해봄으로써 이해하는 것은 ‘멸제(滅)‘이다-제법무아. 마지막으로 멸제를 이룰 수 있는 길로서 제시된 8정도가 열반적정 (涅槃寂靜)으로 ‘도제(道)‘를 이룬다. - P541


기원후 3~6세기가 되면 북방의 여러 세력들이 사분오열되어 중국을 포함한 남방으로 밀려들고, 기존의 중원 문화를 이어간 남방으로 나뉘며 다원화된 질서가 이어진다.  
유교 지식인들의 정체성은 후한 정부에서 형성된 청류, 명사, 일민 등에뿌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은 혼란의 시대인 위촉오 시대에 오히려 꽃을 피웠으며, 예전보다는 퇴락된 형태이긴 했지만 서진·동진 시대에까지도 이어지고 6조 내내 강남의 귀족제 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단지 유교 지식인들 내면의 정체성 유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은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준 구품중정제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던 데에 있다. 이렇게 ‘기득권‘과 지식인들 자신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노력‘이 선순환을 이루면서 6조의귀족사회는 유지되었다. 그리고 ‘무에 대한 문의 우위‘도 계속 유지되었다. 무관들도 이 귀족사회에 끼지 못하고서는 출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P622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방식은 북조의 경우와 남조의 경우가 달랐다. 북조의 경우 핵심적인 것은 왕들과 승려들의 관계였다. 왕들은 사분오열된 군사봉건제의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불교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호의적이었고, 승려들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안전하게 또광범위하게 포교하기 위해 왕들의 후원이 필요했다. - P652

왕권이 약한 귀족제 사회인 6조에서 승려들은, 남조 귀족들의 문화와 어떻게 어울릴까를 고민했다. 남조의 도가적 유교 지식인들과 서역에서 건너온 또는 중국에서 불교로 개종한 인물들을 이어주는 끈은 ‘청담‘이었다. - P654


남방 지역은 이처럼 ‘문’을 우선시하는 문사-관료들이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인도에서 흘러든 불교를 받아들이며 문명과 문화를 이끈다. 


만약 아시아 세계에 서구처럼 격렬한 종교 전쟁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교와 불교, 도교의 삼교가 각자의 역할을 지킨 채 적정선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교는 정치 철학으로, 도교와 불교는 아시아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중국은 남송 시대에 가서 유학을 집대성한 주희에 의해 성리학으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성리학은 이후 중국 내 원-명-청 왕조에서 뿐 아니라 한반도의 고려-조선, 일본에까지 넓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한반도는 조선 시기 들어오면 리(理)/기(氣)의 이론을 해석을 현실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면서 주자학 이론의 실전 세계가 된다. 


주자학이 새로운 왕조가 건설될 때 특히 큰 매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우주와 인간을 잇는 웅혼한 규모의 사유, 지식인들의 영혼에 정체성을 불어넣는 인성론, 그리고 봉건사회를 정초해준 위계적 정치철학으로 구성된 높은 경지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측면이 새로운 왕조의 구축자들에게는 최상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던 것이다. 명을 세운 주원장의 경우 외관상 농민반란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 주도 세력은 지주 계층이었고 주원장 자신이 건국 이후 철저히 유교적 이념에 따라 신왕조를 구축했다. 조선의 경우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왕조를 세운 주축 세력이 정도전을 비롯해 모두 신진 사대부 계층이었다. 에도 막부의 경우에도 역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정권을 정비했다. 이처럼 주자학은 사대부(사무라이) 계층의 정신세계와 정치철학을 확고하게 지배한 철학 체계로서 동북아 전체에 걸쳐 일반 문법을 형성했다. 주자학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 자체의 철학적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또한 사대부 지식인들의 권력의지 또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 P741


양명학과 성리학 간의 사상 대결도 무척 흥미로웠다. 


1권에서도 느꼈지만 2권에 와서 더욱 느낀 점은 서구 세계 사상가의 철학과 아시아 세계의 철학을 비교하며 사상의 이해를 쉽게 돕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매 페이지, 어려운 개념이나 문장에 대한 각주는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만든다. 3권의 내용은 근대 세계의 사상 철학을 다루고 있다. 


동북아의 세계는 ‘작(作)‘의 세계가 아니라 ‘생(生)‘의 세계이다. 따라서 조물주 개념은 탈각된다. 역학에도 기학에도 조물주의 개념은 없다. 동북아에도 ‘신‘들은 있지만, 이들은 세계에 내재적이다. 또, 이 ‘생‘의 사유에서 설계도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서만이 인정된다. 이 때문에 기에 구현되는 선험적 질서로서의 이데아 개념 또한 없다. 다만 기 안에 잠재해 있고 기가 특정한 물(物)로서 개별화될 때 비로소 확인되는 내재적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기의 세계는 코라의 세계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경우 코라의 의미는 현저하게 바뀐다. 그것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물질성, 생명성, 정신성을 내함(含)하고 있는 유일의 실체이다. - 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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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9-02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이 페이퍼 하나 읽는 것 만으로도 똑똑해지는 너낌적인 너낌 ☺️

거리의화가 2024-09-03 07:58   좋아요 1 | URL
쟝 님 철학은 어렵습니다ㅎㅎ 그런데도 철학서를 계속 열심히 읽고 스스로의 언어로 정리하고자 하시는 쟝 님의 시도에 저는 늘 탄복하네요^^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4-09-03 10:05   좋아요 1 | URL
아이 쑥스러워라… 그냥 기운이 남아서요… 🥲
 

8월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이번 달은 휴가도 껴 있었고 여러 모로 즐기다 끝이 난 느낌이다^^ 


지난주만 해도 아직 덥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 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다. 아침 저녁으로 꽤나 선선해져서 다닐만해졌다. 게다가 낮에 걷는데도 볕은 뜨거워도 습도가 줄어드니 걷기가 괜찮았다. 이제 얼마 후면 이런 초록초록함이 알록달록함으로 바뀔 때가 오겠지.



지난 주말도, 이번 주말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집 근처에서 운동을 하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노을빛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은 동트기 전 새벽의 하늘이 훨씬 좋다. 아무래도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활력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랜만에 책을 샀다. 



<청명상하도>는 제목과 부제로 설명이 끝이다. 북송 시기 청명절 하루의 풍경을 담은 그림인 청명상하도를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책이다. 읽고 리뷰까지 다 썼는데 예상대로 좋았다. 이 책을 다 읽으니 집에 있는 수호전을 읽고, 도서관에 가서 송사를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 시인 이청조의 사(詞)도 궁금하다.


<교만의 요새>는 다음 달 여성주의 책 읽기 모임 책이라 구비했다. 마사 누스바움 책은 언젠간 읽어야지 하면서도 계속 미루고… 이렇게 결국 읽게 되는구나.


<계급 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은 보관함에 진작 담아두고 있었는데 읽기 어려울까 싶지만 과감하게 읽어보려고 한다(하나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은 이미 많은 분들이 언급을 한 책이라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내년도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된 사항이 축소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그 뿐 아니라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이 대폭 강화되었다고. 이럴수록 정신차려야지.


<체공녀 연대기>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주제로 꽤나 긴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모쪼록 잘 정리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보겠다. 




계속해서 원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중국어 원서는 微信读书로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한글 번역본을 병행해서 보는 중이다.

허삼관 매혈기는 생각보다 문장 구조가 길지가 않아서 어렵지는 않다. 장상사는 아무래도 인물 이름이나 지명 등이 많고 문장이 길어서 쉽지 않기 때문에 듣는데 의의를 두는 중이고^^; 아무튼 장상사는 다 듣고 마지막 6권만 남겨 두었다. 


영어 원서 the Story of the World 3는 늦게 시작한 만큼 진도를 열심히 빼고 있다. 9월에 열심히 읽어야 겨우 완주할 것 같은!


얼마 전 Audible로 the Women이라는 소설을 받아 듣고 있는데 이야기가 꽤나 흥미롭다. 베트남 전쟁 중 간호 인력으로 지원을 나가게 된 여성의 이야기이다. 전쟁 중에도 비정함과 냉정함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주인공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현지에서의 불안함과 공포, 고국을 떠난 외로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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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31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이 좋아 도서관에 ‘체공녀 연대기‘ 희망도서로 신청했는데 읽기 힘들 것 같아요.
부당함과 차별에 화가 치밀듯요.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아무래도 책도 더 많이 읽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ㅎㅎ
9월도 화이팅해요^^

거리의화가 2024-09-01 13:34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읽기 힘든 책이겠지요? 그래도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읽으면서 열이야 나겠지만^^;
페넬로페 님도 무덥고 긴 여름 지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날씨 핑계대기에는 민망하겠지요?ㅋㅋ 9월에도 즐거운 독서 생활 이어가시길!

공쟝쟝 2024-09-02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벽운동 하시는 화가님은 정말인지 바른생활 학인이시다. 저는 올빼미.. 여덜시애 눈꼽떼는 겔름뱅이입니다. 지적임이 폴폴 책탑 눈구경 잘하고 갑니다 😀

거리의화가 2024-09-03 08:02   좋아요 0 | URL
ㅋㅋ 바른생활이라니... 전날 12시 넘어서 자서 새벽 운동을 나간지라 하루종일 몽롱했다는 것은 안비밀입니다!ㅎㅎ
이제 날이 좀 선선해졌으니 새벽 운동이 아닌 시간대를 뒤로 미루어 아침 운동 또는 저녁 운동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책탑의 책들 섭렵하려면 부지런히 읽고 써야겠지요. 쟝 님의 독서 생활도 계속 응원합니다^^

희선 2024-09-07 0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월 첫째주가 가려고 하는군요 어느새 주말이라니... 낮엔 좀 더워도 아침 밤에는 시원하고 풀벌레 소리도 들리는군요 갈수록 낮에도 좀 시원해지겠지요 여름엔 새벽에 운동을 하시다니 대단합니다 새벽 하늘이나 공기를 만나서 좋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9-07 16:42   좋아요 1 | URL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걷고 왔습니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오늘 새벽까지 비가 내렸는지 노면이 젖어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직은 낮에 운동하기에는 많이 더우니까 이른 시간을 많이 이용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도 제법 아침 저녁으로는 초가을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희선 님 남은 9월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청명상하도 - 송나라의 하루
톈위빈 지음, 김주희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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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상하도는 청명절 북송의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이 그림은 수도 전체를 그리지 않고 성 밖부터 성 안까지를 일부분 조망하여 담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지배층이 주로 그리는 가상의 산수화가 아닌, 실제 북송의 거리와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청명상하도는 비단 북송 뿐 아니라 중국 역사 전체 왕조를 통틀어도 이름이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나도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세세히 뜯어볼 기회가 없었다. 청명상하도는 가로로 긴 형태로 죽편이나 목편을 돌돌 말아 보관하기에 편리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중국의 당조 이후 서화의 기본 형식). 가로는 길지만 세로는 짧기 때문에 800여 명이 하는 다양한 활동 모습이 압축적으로 그려져 확인하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청명상하도는 북송의 장택단이라는 화가가 그렸다. 그는 부모의 명에 따라 과거 시험을 준비했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그림으로 전향해 궁정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청명상하도는 금나라의 장저라는 사람의 발문을 ‘별성가수(새로운 유파을 이루었다)’로 적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의 발문이 더해졌다(청대에 이르면 일반인들도 발문을 더함).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부의가 청명상하도를 갖고 출궁했다가 창춘의 황궁에 있었는데, 1945년 그가 급하게 도주하면서 민간에 흘러나왔다고. 1950년 둥베이 박물관에서 1953년부터 지금까지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안장되고 있다. 국보인 청명상하도가 2015년에서야 대중에 공개되었다고 하니 생각보다 아주 최근 일이다. 아직 베이징에 가보지를 못했는데 언젠가 가서 직접 눈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청명상하도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느낀 점은 장택단의 깨알 같은 묘사력과 철저한 계산에 의한 그림 배치 능력이다. 어느 하나도 허투루 그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보는 내내 놀라움을 느끼게 했다. 



1.


여행자로 보이는 무리가 나무 아래를 지나가는데 줄기가 끊어진 버드나무가 버젓이 그려져 있다. 왜 하필 줄기가 끊어져 있었는지 궁금증을 낳게 한다.

저자는 끊어진 버드나무가 여행자로 하여금 경계의 끈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2.


그림 속에서 중요 역할을 하는 북송의 ‘변하’(황하의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인 강)는 양식 조달 및 물자 공급에 쓰였기 때문에 실제로도 무척 중요했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곳이어서 토사가 쌓이지 않게 하기 위해 준설을 해야 했고,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수해에 대비해야 했다. 


3.

청명상하도가 그려진 시기는 북송 말기로 소빙하기가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림 속 인물들 중 힘든 노동을 하는 이들은 얇은 옷을 입고 있으나 귀족이나 여행자는 두꺼운 옷을 장착하고 추위에 움츠린 모습을 하고 있다. 


4.


‘개당고’라고 바지의 뒤쪽이 트여 있는 형태의 의복을 입고 있는 남성들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다. 남성들은 엉덩이 등이 노출되어 있으나 여성들은 그렇지는 않지만 빨래를 널어 말리는 모습을 통해서 개당고를 입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육체 노동을 하는데 개당고가 걸리적거리지 않는 편안함을 주었나보다.


5.


‘홍교’는 그림에서 중요 포인트가 되는 지물이다. 최소 8미터에 달하는 목재 다리인데 그림 속 홍교 위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는 모습이다. 말과 마차 간의 충돌, 당나귀와 사람 간의 충돌, 게다가 다리 아래에는 배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이 다리가 교각이나 교대가 없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어선처럼 배가 낮으면 모르겠는데 승객이 있는 높은 화객선의 경우는 충돌할 위험이 얼마든지 있는 상황임을 짐작하게 한다. 홍교 근처에는 네 모퉁이에 장대 위에 장식을 한 조형물인 표목이 세워져 있다. 원래 제왕이 백성의 의견을 듣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으나 이 무렵은 의미를 상실하여 그저 길을 표시하는 용도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그림을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다리 목에서 장사를 하는 여인을 통해서 상행위에 뛰어든 여성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음식 배달원들의 모습을 통해서는 이 때도 배달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점집을 통해 이때도 사람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많았구나 느낄 수 있다.  

술집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정점은 술 빚는 것까지 가능한 술집인 반면, 각점은 술 빚는 것은 안 되고 파는 것만 되는 술집이다. 술집의 방은 어느 정도의 분리는 되면서도 방음은 안 되어서 서로의 말이 다 들린다는 것도… 따뜻하게 술을 데워 마시는 주호, 온완 세트(온완 안에 주호를 넣는 것)가 있다는 것도.

사탕수수의 존재를 통해 북송 때도 사탕수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향음자라는 한약 냉차를 즐겼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총 4단으로 구성된 청명상하도를 각 단을 여러 개의 부분 그림으로 쪼개어 확대해 싣고, 그림의 설명(+배경)과 저자의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 그림은 해석자의 시선에 따라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저자의 해석은 참고한 채 독자의 상상력으로 다양한 해석을 해본다면 더욱 책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줄곧 옛 그림을 이해하려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해왔다. 첫 단계는 자세히 살피고 분명하게 보는 것으로, 이는 옛 그림을 이해하는 기초라 할 수 있다. 둘째 단계는 당대 사람들과 오늘날의 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옛 그림이 새롭게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 P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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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8-31 1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샀어요^^
틈틈히 감상중입니다
강산무진, 촉잔도권, 몽유도원도 이런 그림들 보면서 횡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거든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4-08-31 17:18   좋아요 2 | URL
감상중이라는 말이 딱입니다^^ 저도 이 책은 틈틈이 부분으로 봐도 재밌겠다는 생각 들더라구요^^
같은 시기 한반도에서 유행했던 그림들은 무엇이었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희선 2024-09-07 0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시간 많이 걸렸을 것 같네요 사람이 아주 많으니... 대단합니다 이런 건 다는 아니어도 그때 사람 생활을 알게 해주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9-07 16:40   좋아요 1 | URL
네^^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인물의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는데도 동작이 다 다르고 상황이 다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세밀한 묘사 덕분에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는 그림이 된 것 같습니다.
 
[eBook] 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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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구별 짓기로 형성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감소했고, 선택의 기회가 많아진 만큼 성숙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포퓰리즘 등이 활개치기 좋아진 상황이다. 중립성이 최선이겠지만 현실 사회에서 실현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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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이후 근대는 사회의 세속화를 의미했다. 세속화는 진보의 방향이었다. 따라서 사회는 더 근대화될수록 더 세속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의 변화는 이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종교의 귀환을 확인해야 했다.(비록 실제로 종교가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종교적 정체성은 오늘날 더는 완전한 정체성 유형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가장 확신에 찬 신앙인도 오늘날 자신의 종교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은 채, 불완전하게 소속된다. 불완전이란 자신의 확신과 결합이 언제나 여러 개 중 하나의 가능성임을 잘 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이 상황을 부분적 세속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오늘날 단지 부분적으로 세속화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이 또한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부분적 세속화는 본질적으로 그 이상의 요소에 의해, 바로 다양한 종교들의 새로운 가시성을 통해, 즉 다원화와 함께 다양한 종교들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촉진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선택한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신앙을 개수와 상관없이 선택하는데, 핵심은 선택이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오늘날 종교 세계 옆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종교의 심장으로도 진입했다. 전승 안에서 배치되는 대신 자기 전통 혹은 외부 전통을 스스로 습득한다. 어떤 자리에 배치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선택된 전통은(이 무슨 모순인가!) 과거 종교성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 세대라는 사슬에 배치되어 탈주체화되는 대신, 선택한 자아가 강화된다.

결정이 반드시 성숙을 위한 결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의 무대가 된 종교는 결정을 통해 바로 근본주의로 가는 관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다양한 종교들의 새로운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되는 것은 다원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일단 볼 수 있게 되면서 여러 종교로부터 다원성이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이 눈에 보이는 다원성 때문에 오늘날 모든 종교적 믿음은 다른 신앙과 나란히 존재해야 하며, 부분적으로 세속화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국가의 중립성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중립성은 컨테이너가 아니다. 중립성은 개인에게, 특히 국가의 대리인에게 자기가 양분된다는 사실을 지식과 의식 차원에 각인시킬 때만 존재한다. 모든 판사들은 자신들에게 사인과 공인이라는 두 개의 인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공적 인격은 바로 사적 인격과의 거리로 인해 존재한다. 사적인 성향 및 확신과 거리를 둘 때에만 국가의 중립성은 실현된다.

국가 시민적 의식은 시민의 완전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고, 완전함에서 뭔가 빠진, 감소된 자아로 이해된다.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립성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양성이 큰 사회에서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로만 형성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경계 짓기를 통해서도 형성된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다원화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따라서 다원주의에 대한 종교적 저항이다. 이런 저항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문화는 오늘날 중심 무대이며,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다룬다. 문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만나고 충돌하는 영역이 곧 문화다. 그러나 문화는 레크비치의 서술처럼 "가치와 담화의 영역"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는 또한 기호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문화 영역에서 물건, 자산, 단어들이 의미가 있는 기호 또는 상징으로 변환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정체성에 상징을 부여하는 기본 틀이다. 문화 영역에서 개인과 상징 사이의 관계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고정된다. 이 관계에서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온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 문화는 개인을 잘 조직된 상징세계에 (대중으로) 끼워 넣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통해 개인은 각자의 특별함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상징 질서 안에 있는 주체로서 자신을 재발견한다. 즉 여기에서는 완전한 주체와 완전한 상징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이 질서정연한 관계가 휘청거린다. 여기에서는 해체라는 주제가 널리 퍼졌다. 예를 들면 여성이 대표적이다. 정해진 역할, 장소, 상징 관계의 해체.

3세대 개인주의는 정체성의 불안정화를 통해 규정된다. 이는 사회의 다원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외면적으로 보장하는 일이 개별 주체들에게 맡겨졌음을 의미한다. 자기 정체성의 불안정화, 유연화는 상징의 불안정화를 동반한다. 민족적, 종교적, 성적 상징 등 모든 상징이 자신의 분명함을 잃어버린다.

오래전부터 우리가 우리의 사회상을 다루는 지점인 즉 문화 영역에서 동성애가 찬성과 반대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면, 콘치타와 함께 트랜스젠더 유형이 이 민감한 지점에 불쑥 들어왔다.

다원화된 개인주의 시대에서 문화는 결코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문화 재화들과 완전한 상징의 집합이 아니다. 문화는 오히려 불안정해진 상징과의 관계를 획득하려는 시도다. 다원화된 개인은 소수의 엘리트와는 달리,전 지구 안에서 획득 가능한 완전한 상징들의 단순한 주인이 아니다. 다원화된 주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한 자율성과 권한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문화 본질주의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종교, 민족, 인종적 관습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다.

참여는 권리와 권한의 부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참여는 참여적인 주체를 생성하고 힘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고 말하면 안 되는 배제된 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데 인종적 게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쾌락주의는 주도 담론이 되었다. 성공한 삶이란 즐거움과 쾌락의 실현이자 향유다. 이 쾌락주의가 사회의 중심 개념이 되는 과정에서 자체의 의미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거의 뒤집었다는 것 또한 비밀이 아니다. 원래 쾌락주의는 욕망에 적대적인 도덕을 향한 저항의 징표이자 해방의 울림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래전에 쾌락주의는 그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실현과 성공을 통해 쾌락주의는 저항의 정신에서 빠져나와 참여와 소비의 도구이자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기능하는 노동력뿐 아니라 즐기는 소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쾌락주의는 변화 없이, 수직적인 계층 없이, 충동의 지연됨 없이 개인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때 실현된다.

헌신적 사회 참여 속에서 다원화된 개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쾌락주의를 실현한다.

집단을 통한 대의는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와 맞지 않는다. 사회 문제가 더 이상 없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건드리며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 즉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적 국면이란 포퓰리즘이 뻗어 갈 수 있는 상황으로, 특정한 사회 분열이 시작되는 역사적 국면을 말한다. 정치, 경제, 문화의 균형이 흔들릴 때, 사람들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통합이 더 이상 굳건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국면이다. 이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된다.

포퓰리즘은 정확히 이 나눌 수 없는 것에 집중한다. 잃어버린 나눌 수 없는 것, 오늘날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자리 잡은 바로 그 나눌 수 없는 것, 곧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전략은 왜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정체성들이 더 이상 옛 안전 체계를 통해 보장받지 못하는 포퓰리즘적 국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며, 자기 정체성의 당연함에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몰락을 두려워하는 중간 계급 이하의 사람들은 정체성에 관해 이중의 위협을 받고 있다. 나눌 수 있는 것에 정착한 사회 민주주의로부터 아무런 정체성도 제공받지 못하면서, 동시에 다원화가 불러온 사회 변화를 통해 위협받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추상 범주다. 이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말이 아니다. 추상화는 필수적인 허구이기 때문이다.

우파 포퓰리즘은 바로 이 추상화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포퓰리즘은 추상적인 국민에게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려고 한다.

파시즘과는 달리 우파 포퓰리즘은 세속 종교가 아니다. 파시즘은 정치의 신성화를 통해 자기 숭배 의례와 성스러운 의무로 기능했다. 그러나 우파 포퓰리즘은 파시즘에서 기꺼이 여러 가지를 모방하지만, 파시즘의 세속 종교성은 모방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포퓰리즘은 더 이상 종교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움직인다. 포퓰리즘은 전체가 순전히 세속적인 사회에서 움직이며, 이 세속적 세계에서 여전히 초월적 대용품처럼 기능하는 것을 이용한다. 바로 ‘타자’의 배제다. 실제로 타자가 우리를 주어진 세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타자의 배제가 우리 내면의 위협처럼 보이는 것을 방어한다고 둘러댈 뿐이다. 지금 이 가상의 위협에 대항하며 포퓰리즘이 가져오는 것은 파시즘의 경우와는 다르다. 초월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다. 포퓰리즘의 모든 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작동한다.

민족은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나 복수감을 뜻하며,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을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강자에 대한 반감의 배후에 작용하는 심리다.)과 연결되고, 동시에 정체성도 제공해 주는 환상이다.

미셸 푸코 덕분에 우리는 주피터 역사와 반주피터 역사를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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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권력을 상징하는 신" 주피터가 수행하는 역사다. 승자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며, 권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 주피터 역사는 승리를 중심으로 사회를 일치시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모범적인 영광의 역사다. 이 때묻지 않은 영웅담인 주피터 역사는 "권력 강화"를 위한 의례다.
이와 반대로 반주피터 역사는 억압받는 자, 굴복된 자, 희생자의 역사다. 이 관점은 저항의 역사에 경청하게 해 준다. 영광은 오직 승자만을 비춘다. 그러나 반주피터 역사에서는 희생자가 그늘에서 나와 영광이란 단어를 움켜잡는다. 이 관점에서 타인의 승리는 자신의 패배다. 권력에 반항하는 저항의 역사는 주권과의 동일시를 흔들어 놓으며, 권력이란 결합할 뿐 아니라 억누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반주피터 역사는 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이고, 사회의 약속된 단일체를 방해하는 응답이다.

사회적 기준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정체성, 그런 의미로 부정적인 정체성, 그래서 피해자로 규정되는 정체성을 보호하는 일이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란 정치적 올바름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에 적대적인 세력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이것은 동시에 등장하는 실제 문제 그리고 편견의 관계와 같다. 실제 발생하는 문제가 편견의 원인이 아니듯이,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하는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과잉은 거부를 크게 촉진한다.

좌파가 잊은 것은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연결되어 있었고 물질적 차원이 가져온 그 정체성이다. 망각에 빠져 있는 건 바로 정체성이다. 계급 투쟁의 귀환을 요구하는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 비판에서 바로 이 점을 간과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포퓰리즘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억압된 좌파의 정체성을! 바로 좌파가 억압하는 정체성이 왜곡된 형태로 포퓰리즘 속에서 귀환하고 있다. 우파 포퓰리즘의 성공은 사회 문제의 귀환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에 대한 저항도 단순히 사회 문제를 재인식하는 데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우파 포퓰리즘은 경제적 착취가 아니라 잃어버린 정체성의 국면을 최우선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나눌 수 없는 것의 이 억압받던 국면은 여기에서 왜곡된 형태로, 백인 남성의 굴욕감으로 귀환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백인 남성들에게는 사회적 서열의 전복으로 느껴진다. 경제적 상실과 나란히 문화적 헤게모니와 자존감을 앗아가고, 담론적 권위도 빼앗는다. 백인 남성들은 더 이상 여성, 흑인, 외국인, 동성애자에 대해 지배적이지 않고,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사회적 관심이 앞으로 피해자 지위를 통해 정해진다면, 경제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에서도 백인 남성들은 가장 아래 위치한다. 왜냐하면 백인 남성들은 이런 질서에서 피해자 지위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종속되었다고 백인 남성들 스스로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각각의 특수한 정체성 규정들과 특별한 정체성들의 추상화는 민족이라는 특수하지 않은 수준에서 유사한 존재를 재생산하려는 시도다.(모든 긍정적 효과뿐 아니라 단점과 어두운 면도 함께 재생산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오늘날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감소는 더 이상 유사성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다. 감소는 릴라의 단자들처럼 차이의 축제도 아니고, 즉 특수한 정체성과 본질적으로 오해된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으며, 유사한 것들의 결합도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존재들의 결합이자 만남이다.

"다원성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목소리들이 등장하고, 다종다양한 의견과 위치가 표현되는 그런 공간이 될 것이다.

우파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하는 전장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그림은 정확히 반대다. 이는 사회를 유사한 존재들을 위한 무대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다. 이 유사한 존재는 릴라가 생각하는 추상적 유사성, 시투아앵이 아니라 실체가 유사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해야 한다. 유사성은 다원화의 가장 극에 있는 반대 개념이다.

문화는 관계이며, ‘자기 자신’의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문화를 사는 방식이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정체성을 사는 방식이다. 우리가 우리 종교를 사는 방식이 우리를 분열시킨다. 그러므로 진짜 경계선은 다원주의와 반다원주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지도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단지 권위주의적 지배에 겉치레를 제공할 뿐이라는 허깨비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때 권위주의는 단순히 독재가 아니다. 비록 동의를 만들기 위해 강제가 동원될 수도 있지만, 강제를 통한 지배가 아니며, 동의를 통한 지배다. 예를 들어 국민 투표를 앞두고 기자들을 감금해 ‘반대’가 전혀 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이런 방식이 민주주의와 다른 지도자 민주주의 방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동의를 받는 일이며, ‘진정한 국민’과 그들의 지도자 사이에 직접 동맹을 만드는 일 또한 중요하다. 제도를 통한 우회로 없이 직접 동맹을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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