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이후 근대는 사회의 세속화를 의미했다. 세속화는 진보의 방향이었다. 따라서 사회는 더 근대화될수록 더 세속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의 변화는 이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종교의 귀환을 확인해야 했다.(비록 실제로 종교가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종교적 정체성은 오늘날 더는 완전한 정체성 유형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가장 확신에 찬 신앙인도 오늘날 자신의 종교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은 채, 불완전하게 소속된다. 불완전이란 자신의 확신과 결합이 언제나 여러 개 중 하나의 가능성임을 잘 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이 상황을 부분적 세속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오늘날 단지 부분적으로 세속화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이 또한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부분적 세속화는 본질적으로 그 이상의 요소에 의해, 바로 다양한 종교들의 새로운 가시성을 통해, 즉 다원화와 함께 다양한 종교들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촉진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선택한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신앙을 개수와 상관없이 선택하는데, 핵심은 선택이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오늘날 종교 세계 옆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종교의 심장으로도 진입했다. 전승 안에서 배치되는 대신 자기 전통 혹은 외부 전통을 스스로 습득한다. 어떤 자리에 배치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선택된 전통은(이 무슨 모순인가!) 과거 종교성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 세대라는 사슬에 배치되어 탈주체화되는 대신, 선택한 자아가 강화된다.

결정이 반드시 성숙을 위한 결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의 무대가 된 종교는 결정을 통해 바로 근본주의로 가는 관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다양한 종교들의 새로운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되는 것은 다원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일단 볼 수 있게 되면서 여러 종교로부터 다원성이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이 눈에 보이는 다원성 때문에 오늘날 모든 종교적 믿음은 다른 신앙과 나란히 존재해야 하며, 부분적으로 세속화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국가의 중립성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중립성은 컨테이너가 아니다. 중립성은 개인에게, 특히 국가의 대리인에게 자기가 양분된다는 사실을 지식과 의식 차원에 각인시킬 때만 존재한다. 모든 판사들은 자신들에게 사인과 공인이라는 두 개의 인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공적 인격은 바로 사적 인격과의 거리로 인해 존재한다. 사적인 성향 및 확신과 거리를 둘 때에만 국가의 중립성은 실현된다.

국가 시민적 의식은 시민의 완전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고, 완전함에서 뭔가 빠진, 감소된 자아로 이해된다.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립성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양성이 큰 사회에서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로만 형성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경계 짓기를 통해서도 형성된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다원화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따라서 다원주의에 대한 종교적 저항이다. 이런 저항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문화는 오늘날 중심 무대이며,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다룬다. 문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만나고 충돌하는 영역이 곧 문화다. 그러나 문화는 레크비치의 서술처럼 "가치와 담화의 영역"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는 또한 기호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문화 영역에서 물건, 자산, 단어들이 의미가 있는 기호 또는 상징으로 변환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정체성에 상징을 부여하는 기본 틀이다. 문화 영역에서 개인과 상징 사이의 관계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고정된다. 이 관계에서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온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 문화는 개인을 잘 조직된 상징세계에 (대중으로) 끼워 넣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통해 개인은 각자의 특별함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상징 질서 안에 있는 주체로서 자신을 재발견한다. 즉 여기에서는 완전한 주체와 완전한 상징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이 질서정연한 관계가 휘청거린다. 여기에서는 해체라는 주제가 널리 퍼졌다. 예를 들면 여성이 대표적이다. 정해진 역할, 장소, 상징 관계의 해체.

3세대 개인주의는 정체성의 불안정화를 통해 규정된다. 이는 사회의 다원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외면적으로 보장하는 일이 개별 주체들에게 맡겨졌음을 의미한다. 자기 정체성의 불안정화, 유연화는 상징의 불안정화를 동반한다. 민족적, 종교적, 성적 상징 등 모든 상징이 자신의 분명함을 잃어버린다.

오래전부터 우리가 우리의 사회상을 다루는 지점인 즉 문화 영역에서 동성애가 찬성과 반대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면, 콘치타와 함께 트랜스젠더 유형이 이 민감한 지점에 불쑥 들어왔다.

다원화된 개인주의 시대에서 문화는 결코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문화 재화들과 완전한 상징의 집합이 아니다. 문화는 오히려 불안정해진 상징과의 관계를 획득하려는 시도다. 다원화된 개인은 소수의 엘리트와는 달리,전 지구 안에서 획득 가능한 완전한 상징들의 단순한 주인이 아니다. 다원화된 주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한 자율성과 권한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문화 본질주의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종교, 민족, 인종적 관습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다.

참여는 권리와 권한의 부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참여는 참여적인 주체를 생성하고 힘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고 말하면 안 되는 배제된 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데 인종적 게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쾌락주의는 주도 담론이 되었다. 성공한 삶이란 즐거움과 쾌락의 실현이자 향유다. 이 쾌락주의가 사회의 중심 개념이 되는 과정에서 자체의 의미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거의 뒤집었다는 것 또한 비밀이 아니다. 원래 쾌락주의는 욕망에 적대적인 도덕을 향한 저항의 징표이자 해방의 울림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래전에 쾌락주의는 그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실현과 성공을 통해 쾌락주의는 저항의 정신에서 빠져나와 참여와 소비의 도구이자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기능하는 노동력뿐 아니라 즐기는 소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쾌락주의는 변화 없이, 수직적인 계층 없이, 충동의 지연됨 없이 개인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때 실현된다.

헌신적 사회 참여 속에서 다원화된 개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쾌락주의를 실현한다.

집단을 통한 대의는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와 맞지 않는다. 사회 문제가 더 이상 없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건드리며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 즉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적 국면이란 포퓰리즘이 뻗어 갈 수 있는 상황으로, 특정한 사회 분열이 시작되는 역사적 국면을 말한다. 정치, 경제, 문화의 균형이 흔들릴 때, 사람들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통합이 더 이상 굳건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국면이다. 이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된다.

포퓰리즘은 정확히 이 나눌 수 없는 것에 집중한다. 잃어버린 나눌 수 없는 것, 오늘날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자리 잡은 바로 그 나눌 수 없는 것, 곧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전략은 왜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정체성들이 더 이상 옛 안전 체계를 통해 보장받지 못하는 포퓰리즘적 국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며, 자기 정체성의 당연함에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몰락을 두려워하는 중간 계급 이하의 사람들은 정체성에 관해 이중의 위협을 받고 있다. 나눌 수 있는 것에 정착한 사회 민주주의로부터 아무런 정체성도 제공받지 못하면서, 동시에 다원화가 불러온 사회 변화를 통해 위협받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추상 범주다. 이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말이 아니다. 추상화는 필수적인 허구이기 때문이다.

우파 포퓰리즘은 바로 이 추상화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포퓰리즘은 추상적인 국민에게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려고 한다.

파시즘과는 달리 우파 포퓰리즘은 세속 종교가 아니다. 파시즘은 정치의 신성화를 통해 자기 숭배 의례와 성스러운 의무로 기능했다. 그러나 우파 포퓰리즘은 파시즘에서 기꺼이 여러 가지를 모방하지만, 파시즘의 세속 종교성은 모방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포퓰리즘은 더 이상 종교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움직인다. 포퓰리즘은 전체가 순전히 세속적인 사회에서 움직이며, 이 세속적 세계에서 여전히 초월적 대용품처럼 기능하는 것을 이용한다. 바로 ‘타자’의 배제다. 실제로 타자가 우리를 주어진 세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타자의 배제가 우리 내면의 위협처럼 보이는 것을 방어한다고 둘러댈 뿐이다. 지금 이 가상의 위협에 대항하며 포퓰리즘이 가져오는 것은 파시즘의 경우와는 다르다. 초월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다. 포퓰리즘의 모든 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작동한다.

민족은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나 복수감을 뜻하며,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을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강자에 대한 반감의 배후에 작용하는 심리다.)과 연결되고, 동시에 정체성도 제공해 주는 환상이다.

미셸 푸코 덕분에 우리는 주피터 역사와 반주피터 역사를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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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권력을 상징하는 신" 주피터가 수행하는 역사다. 승자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며, 권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 주피터 역사는 승리를 중심으로 사회를 일치시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모범적인 영광의 역사다. 이 때묻지 않은 영웅담인 주피터 역사는 "권력 강화"를 위한 의례다.
이와 반대로 반주피터 역사는 억압받는 자, 굴복된 자, 희생자의 역사다. 이 관점은 저항의 역사에 경청하게 해 준다. 영광은 오직 승자만을 비춘다. 그러나 반주피터 역사에서는 희생자가 그늘에서 나와 영광이란 단어를 움켜잡는다. 이 관점에서 타인의 승리는 자신의 패배다. 권력에 반항하는 저항의 역사는 주권과의 동일시를 흔들어 놓으며, 권력이란 결합할 뿐 아니라 억누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반주피터 역사는 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이고, 사회의 약속된 단일체를 방해하는 응답이다.

사회적 기준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정체성, 그런 의미로 부정적인 정체성, 그래서 피해자로 규정되는 정체성을 보호하는 일이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란 정치적 올바름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에 적대적인 세력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이것은 동시에 등장하는 실제 문제 그리고 편견의 관계와 같다. 실제 발생하는 문제가 편견의 원인이 아니듯이,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하는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과잉은 거부를 크게 촉진한다.

좌파가 잊은 것은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연결되어 있었고 물질적 차원이 가져온 그 정체성이다. 망각에 빠져 있는 건 바로 정체성이다. 계급 투쟁의 귀환을 요구하는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 비판에서 바로 이 점을 간과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포퓰리즘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억압된 좌파의 정체성을! 바로 좌파가 억압하는 정체성이 왜곡된 형태로 포퓰리즘 속에서 귀환하고 있다. 우파 포퓰리즘의 성공은 사회 문제의 귀환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에 대한 저항도 단순히 사회 문제를 재인식하는 데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우파 포퓰리즘은 경제적 착취가 아니라 잃어버린 정체성의 국면을 최우선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나눌 수 없는 것의 이 억압받던 국면은 여기에서 왜곡된 형태로, 백인 남성의 굴욕감으로 귀환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백인 남성들에게는 사회적 서열의 전복으로 느껴진다. 경제적 상실과 나란히 문화적 헤게모니와 자존감을 앗아가고, 담론적 권위도 빼앗는다. 백인 남성들은 더 이상 여성, 흑인, 외국인, 동성애자에 대해 지배적이지 않고,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사회적 관심이 앞으로 피해자 지위를 통해 정해진다면, 경제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에서도 백인 남성들은 가장 아래 위치한다. 왜냐하면 백인 남성들은 이런 질서에서 피해자 지위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종속되었다고 백인 남성들 스스로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각각의 특수한 정체성 규정들과 특별한 정체성들의 추상화는 민족이라는 특수하지 않은 수준에서 유사한 존재를 재생산하려는 시도다.(모든 긍정적 효과뿐 아니라 단점과 어두운 면도 함께 재생산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오늘날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감소는 더 이상 유사성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다. 감소는 릴라의 단자들처럼 차이의 축제도 아니고, 즉 특수한 정체성과 본질적으로 오해된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으며, 유사한 것들의 결합도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존재들의 결합이자 만남이다.

"다원성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목소리들이 등장하고, 다종다양한 의견과 위치가 표현되는 그런 공간이 될 것이다.

우파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하는 전장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그림은 정확히 반대다. 이는 사회를 유사한 존재들을 위한 무대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다. 이 유사한 존재는 릴라가 생각하는 추상적 유사성, 시투아앵이 아니라 실체가 유사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해야 한다. 유사성은 다원화의 가장 극에 있는 반대 개념이다.

문화는 관계이며, ‘자기 자신’의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문화를 사는 방식이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정체성을 사는 방식이다. 우리가 우리 종교를 사는 방식이 우리를 분열시킨다. 그러므로 진짜 경계선은 다원주의와 반다원주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지도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단지 권위주의적 지배에 겉치레를 제공할 뿐이라는 허깨비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때 권위주의는 단순히 독재가 아니다. 비록 동의를 만들기 위해 강제가 동원될 수도 있지만, 강제를 통한 지배가 아니며, 동의를 통한 지배다. 예를 들어 국민 투표를 앞두고 기자들을 감금해 ‘반대’가 전혀 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이런 방식이 민주주의와 다른 지도자 민주주의 방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동의를 받는 일이며, ‘진정한 국민’과 그들의 지도자 사이에 직접 동맹을 만드는 일 또한 중요하다. 제도를 통한 우회로 없이 직접 동맹을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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