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은 “여기서 신의 실존 및 영혼과 신체의 구분이 증명되다”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제로만 본다면 이전의 형이상학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성찰》이 이전의 철학들과 크게 다른 점은 오히려 책의 구성, 문체, 기술 방식 및 철학적 방법론 등에 있다. 이것들을 통해 이전의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거듭났으며, 그 이후로는 누구도 그 이전의 철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참되다 믿었던 것들 가운데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내가 생각 없이 경솔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성찰을 거친 타당한 근거들에 따라 하는 말이다. 그러니 무언가 확실한 것을 발견하길 원한다면, 앞으로는 이런 논증에 대해서는 명백히 잘못된 논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동의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식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자.

이제 내가 보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가정하자. 위조된 기억이 재현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결코 실존한 적이 없다고 믿자. 나는 아무런 감관도 지니고 있지 않으니, 몸이니 모양이니, 펼쳐있음, 운동, 장소는 키메라[같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것일까? 아마도 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누구인지는 몰라도 의도적으로 항상 나를 속이는, 대단히 능력 있고 아주 교활한 사기꾼이 있다. 이제는 그가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나는 무엇이다, 하고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을 대단히 충분히 숙고한 뒤 마침내 이러한 공리를 확립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는 내가 소리 내어 말하든 정신으로 파악하든 언제든지 피할 수 없이necessario 참이다.

나는 발견한다. 생각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나와 나누어지지 않는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얼마 동안? 물론 내가 생각하는 동안. 다시 말해 [이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모든 생각을 그만둔다면, 그와 동시에 내가 있다는 것도 완전히 멈추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나는 오로지 피할 수 없이 참된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엄밀히 말해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말뜻을 몰랐던, 정신이나 영혼이나 지성이나 이성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참된 것, 참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것인가? 말했다시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보다 더 쉽게 혹은 더 명백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다시피 물체들 역시 엄밀하게 말하자면 감각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오직 지성으로써 지각되며, 만져지거나 보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식되는 까닭에 지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실체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실체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한 실체의 관념은 아닐 것이다. 무한 실체의 관념은 정말이지 무한한 실체로부터만 비롯될 것이다. 또한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한한 것을 부정함으로써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내가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 어둠을 빛의 부정으로 지각하듯이 말이다. 그렇기는커녕 나는 무한 실체가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담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무한한 것, 즉 신에 대한 지각이 유한한 것, 즉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면에서는 먼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만일 내게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없어서, 내 결함을 이것과 비교함으로써 깨닫지 못했다면, 내가 의심하고 욕구한다는 사실, 즉 내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내가 전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가 과연 어떻게 알았겠는가?

삶의 모든 시간은 무수히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 낱낱의 부분들은 어떤 식으로도 서로 기대어 있지 않으며, 어떤 원인이 나를 이를테면 다시 이 순간에 창조하지 않는다면, 즉 나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내가 방금 전에 실존했다는 것으로부터 지금 실존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사실 시간의 본성에 주목하는 사람에게는 명백한바, 무엇이든 낱낱의 순간을 지속하는 어떤 것을 보존하는 데에 드는 힘과 작용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에 드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보존과 창조는 자연의 빛에 따라 밝혀지는 것 가운데 하나지만, [실재적으로는 구분되지 않고] 단지 이성적으로만 구분될 뿐이다

많은 부분적 원인들이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참여했다. 이 원인에서는 신에게 귀속되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받았고, 저 원인에서는 다른 완전성의 관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모든 완전성은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소에 모두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단일성, 단순성 곧 나뉘지 않음이야말로 내가 신 안에 들어 있다고 파악하는 주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완전성 가운데 단일성의 관념은 내가 다른 완전성들의 관념들을 얻게 된 어떤 원인이 없었다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원인이 나로 하여금 이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할 수 없었더라면, 이것들이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뉠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바대로 신한테서 얻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이 올바로 인식하며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르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나의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물론 이 한 가지에서, 즉 의지가 오성보다 더 넓게 열려 있는데도 내가 의지를 지성의 한계 안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인식하지 않은 것들에까지 확장시키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들에 대해 의지는 차이 없다는 투로 있기 때문에 참되고 좋은 것에서 쉽사리 벗어나며, 그리하여 나는 속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판단을 내릴 때 지성이 맑고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까지만 의지가 확장되도록 묶어둔다면, 우리가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맑고 또렷한 지각은 의심할 바 없이 어떤 것이고, 따라서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는 비롯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의 작자는 반드시 신이다.

상상하는 데에는 내가 인식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마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마음의 노력이야말로 상상력과 순수 지성의 차이를 훤히 밝혀주는 것이다

물체는 본성상 언제나 나뉠 수 있음에 반해, 정신은 전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신, 곧 오직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나는 내 안에서 어떤 부분들을 구분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완전히 하나이자 통합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로는, 신체 전체와 정신 전체가 통일된 듯 보이긴 하지만, 발이나 팔이나 무엇이든 다른 신체 부분이 잘려 나간다 하더라도 정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없다. 나아가 의지 기능, 감각 기능, 이해 기능 등이 정신의 ‘부분’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하나의 동일한 정신이 의지하고, 감각하고,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뇌로부터, 혹은 아마 뇌의 어떤 작은 부분, 이른바 ‘공통’ 감각이라는 것이 들어 있는 부분으로부터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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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우리는 사물들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아니다. 단지 뇌에 주어진 정보에 대한 뇌의 ‘해석‘이 바로 우리의 관념들인것이다. ‘정신‘이란 이 관념들의 총체에 다름 아니다. ‘표상주의‘란 이 과정전체를 표상의 과정으로 보고, 그것을 (분자생물학의 용어를 쓴다면) ‘센트럴도그마‘로 채택한 이론을 가리킨다.
베르그송은 우주와 (뇌를 포함한) 우리의 신체는 연속적이며 그 전체가 물질(‘이미지들의 총체‘)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객체/객관과 주체/주관을 맞세우는 근대 인식론의 구도와 다르다. - P497

어포던스란 환경이 동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환경이 동물들의 행동.
과 관련해 드러내는, 어떤 면에서는 동물들에게 강제하는 특성이 어포던스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깁슨에게 의미와 가치란 (인간을 포함해) 동물들이 환경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와 가치는 환경 자체에 내재해있고, 오히려 환경이 그것들을 동물들에게 현시한다. "환경은 동물이 행할수 있는 것을 제약한다. 생태학에서 말하는 적소(‘니치)가 이러한 사실을반영한다." (EA, 135) 어포던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절벽은 동물들로 하여금 죽지 않기 위해 그 앞에서 멈추게 만든다. 물은 동물들을 빠지게 만들지만, 소금쟁이 같은 동물은 그 위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준다.33) 불은인간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지만, 다른 동물들은 두려워 피하게 만든다. 이렇게 어포던스란 환경의 어떤 성격이 동물들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P521

유물론적 환원주의에 따르면 우리 마음의 상태는 곧 뇌 상태와 별개의것이 아니며, 양자는 동일한 것일 뿐이다. 열역학에서의 ‘열‘은 통계역학에서의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일 뿐이다. 어떤 물질이 ‘불에 탐‘은 그것의 ‘산소와 결합함‘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상태 C는 뇌의 상태 b의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환원주의의 실제 내용은 C와 b가 상응한다는 것 - P527

일 뿐이다. 우리는 C 과 b, 이, C2와 b2가, ... 상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전자의 차원을 후자의 차원으로 환원할 수 있을지, 다시 말해 후자로부터 전자를 연역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정신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은 전혀 다른 언어/존재론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 P528

무지개는 물리적으로는 파동방정식으로 설명되고, 그것의 지각에 대해서는 뇌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지개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경험들과 담론들에서의 차이는 접어둔다 해도, 그것에 대한 각 사람의 경험들은 모두 다르다. 이 경험들(심리적 내용들)은 어떤 일반적 법칙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뇌에 대한 일반성은, 나아가 다른여러 과학이 동원된 어떤 일반성도 이런 독특성들을 포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환원적 유물론은 마음을 하나의 실체로서 인정하지는 않지만,
마음이라는 차원, 속성은 별개의 속성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심리철학은
‘속성 이원론‘이라고도 불린다. - P529

기능주의적 사유는 존재자들을 모두 지표화하고 그 지표들을 계산해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지표들은 지표들일 뿐이다. 앞에서(1장, 1절, 82) 예를 들었듯이,
연결망 이론에서 노드 A가 노드 B와 링크되어 있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환자의 고통은 수치화될 수 있는 것일까? 빅 데이터를 분석하면 과연 해당사태가 구체적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기능주의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정신이라는 데카르트 이원론의 그림자 안에 들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때 아이스만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데이터 분석만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군데를 발로 뛰면서 말하자면 현상학적 관찰을세심하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미나레트 구축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 - P534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도제들은 이론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밑바닥 작업부터 철저하게 몸으로(관찰과 흉내 내기만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인식‘이란 지표들의추상적인 연산을 통해서만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세계 - 내에서 몸을 통해이루어지는 경험이 뒷받침되어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체화된(embodied)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 P535

체화된 인지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체화된 마음의 심리철학은 용어가 시사하듯이 마음을 몸에서 추상된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몸에 구현되어 있는, 따라서 세계와 맞물려 있는 존재로서 사유하고자 한다. 이 입장을 취할경우 뇌 안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뇌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은 어떤 실체나 부수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성으로서, 그러나 몸에 구현되어 활동하는 주체성으로서 이해된다. 억지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음은 몸과 세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주체적 활동들에 내재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능주의에서 벗어난)퍼트넘은 "의미는 머릿속에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 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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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구조주의 기능주의와 달리 토템 현상을 어떤 실질적인 기능, 유용성, 필요에 입각해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어떤 상징적인 것으로서,
문화를 떠받치는 틀, 구조, 객관적 선험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토템은 해당 부족과 사실상 어떤 실질적인 연관성도 가지지 않는다. 기존의 모든 해석이 토템과 해당 부족의 실질적 연관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는 점에서, 이런 시각은 획기적이다. 토템이란 그 부족을 상징하는 특정한 기의를가지지 않는 순수가표일 뿐이다. 이 기표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 기표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가 다른 기표에 대해 가지는 차이, 달리말해 특정한 기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이는 곧하나의 토템은 그 자체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토템들과 맺는 관계, 토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다른 것들에 대해 가지는차이. 그 체계에서 점하는 위치에 따라 의미를 가짐을 뜻한다. - P444

구조주의는 의식적 주체의 바깥으로 나아가 사유했지만, 이제 그 바깥의 바깥에 주목함으로써 후기 구조주의 사유들이 도래하게 된다.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구조 내에 용해되어버리지만, 구조의 바깥은 주체에게 구조로부터 탈주하고 나아가 그것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제공한다. 그러나 주체가 탈주해서 나아갈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 아니다. 그 바깥은 구조로서의 바깥과 마치 웜홀에서처럼 통해 있는 구조 내의 바깥, 바깥의바깥이다. 그러나 바깥의 바깥은 바깥 너머로 뻗어가기보다 구부러져 안으로 이어진다. 주체가 찾아내야 할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지만, 그 바깥은 오히려 그 자신과 닿아 있는 가능성이다. 주체는 이 가능성의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사건을 자신의 주름으로 바꾸면서 주체화해간다. - P448

칸트가 실재를 현상의 뒤편으로 물린 데 반해, 현상학은 그 뒤편을 접어두고 현상 자체의 실재성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을 관념들로써 먹어치우고자 한다면 주체는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에서의 이 실재성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객관이며, 의식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드러날 차원이다. 반면 구조주의에서 의식과 대상은 공히 그 근저의 추상공간구조에 입각해 바로 그런 관계를는 것으로 이해된다.
때문에 양자에게서 ‘의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현상학에서의미노에마는 주체와 객체가 겹쳐진 곳에서 생성되어 나온다. 이겹쳐진 곳, 주름은 신체의 차원인 동시에 지각된 것의 차원이다. 신체는 이양자가 겹쳐진 생생한 경험의 장에서 성립한다. 현상학이 이룩한 큰 개념적 혁신은 근대적 신체 개념의 한계를 타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신체론을정립한 점에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사유에서 신체는 다시 증발되어버린다.
합리주의적 사유인 구조주의에서 신체는 언어에 자리를 내준다. 신체의 차원은 ‘이미지‘이며 ‘기표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추상공간의 요소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성립한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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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의 끝에서 사유하는 자아("ego cogito"), 사유활동(cogitatio)을 발견했다면, 후설은 판단 중지를 통해서 "현상학적 잔여로서의순수의식" (선험적 의식, 순수 자아, 선험적 주체)을 발견했다. 바로 지향적 체험을 실행하는 의식/주체이다. - P360

메를로-퐁티 (1908~1961)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합리주의)는 공히 이현상학적 세계를 만족스럽게 파악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경험주의 예컨대행동주의는 행동에서의 주체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오로지 기계적인자극-반응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행동을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하고 그것들을 연합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넓게는 유기체의) 행동은 대상의 속성과 주체의 의도가 섞여 있는 곳, 즉 세계와 주체가 겹쳐져 주름을 형성하는 곳인 신체-주체에서 성립한다.2) 주지주의는 이 현상학적 장을 어떤 순 - P367

수한 개념들로 환원하고자 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런 주지주의의사유는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육화된(incarné) 것임을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추상적인 개념들의 이런 환원은 인식과 실존 사이에 깊은 골을드리운다. 물론 인간은 상징 수준의 의미작용을 살아간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일반적인 언어의 의미작용은 어디까지나 육화된 차원에서의 의미작용으로부터 몸의 파롤로부터 변형되어 나온 것임을 역설한다. 신체의지각은 언어로 추상화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인 것이다 - P368

현존재는 존재의 목동이며 무의 자리지기이다. 존재의 ‘말 건넴‘은 그 열려있음 안에 들어서있는 현존재에게만 들린다. 그러나 일상성에서의 현존재는 이 말건넴에 등을 돌리고 세상에 빠져있다. 불안은 이 현존재를 그의 세계내존재자임으로 끌어당긴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의 존재가능도 분명해진다. 현존재의 존재가능은 곧 ‘자기를 앞질러 -감‘, 다시 말해 (허공을 향해 앞질러가는 것은 아니므로) 언제나 이미 세계-내에 존재하면서-자기를 앞질러-감이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를 하이데거는 ‘심려(心)‘로 파악한다. 현존재 특유의 모든 행위는 결국 이 심려에 근거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 P397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불안을 가리려 할 때, 즉 자기가 자기를 결정된 존재로서 스스로를 설득하려 할 때 ‘자기기만(자기 속이기)‘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 경우 자기가 자기의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기의 불안을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자기 속이기는 타인 속이기와 다르다. 타인 속이기(‘거짓말‘)는 스스로는 진실을 알면서 타인에게는 거짓을 말해야만 성립한 - P418

다. 그러나 자기 속이기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하나의 통일된 의식 안에서혼효한다. 자기기만은 의식의 ‘반투명성‘에서만 나타난다. - P419

도달한 곳은 상반된 지점들이었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공히 현상학자들로서 ‘현존재‘를, ‘인간존재‘를 사유했지만, 하이데거 사유가 존재에 닻을 내린다면 대조적으로 사르트르는 의식/주체성에 닻을 내린다. 하이데거의 사유가 존재와 현존재의 사유라면, 사르트르의 그것은 의식= 대자와 즉자의 사유이다. 하이데거에게 현세계는 존재가 드러나고 숨는 장으로서, 인간은 이 장에서 철학과 시를 통해 존재를 향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현세계는 대자적 주체가 무로부터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나가야 할 장이며, 인간은 이 장에의 앙가주망을 통해 그것을 바꾸어나갈 수 있다. 하이데거가존재에로 경사된 그의 사유를 통해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때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존재의 빛을 특정한 민족에 결부시켰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위험이다. 이런 경사를 품지 않았던 사르트르의 정치철학은 보다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주체철학에서는 존재에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끊겨버린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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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 쇠락하는 산업도시와 한국 경제에 켜진 경고등
양승훈 지음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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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제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나라로 지금도 여전히 제조업 강국으로 통한다. 울산은 대표적인 제조업 도시인데 그런 울산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울산의 현재를 진단하고 과거는 어떠했으며 미래는 어떨 것인지 예측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사회 문제에 멀어지지 않기 위해 매일 신문을 챙겨 보고 주간지를 구독한다. 덕분에 한국 산업의 문제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균형성, 나아가 원청과 하청 근로자 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다. 


만약 이 책이 울산의 현재를 바라보고 문제점만을 진단했다면 다른 책들과 별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이 가진 차별점은 울산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기까지의 역사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 나름의 분석을 통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전개부터 흥미를 끌어들인다. 2030년 울산의 모습을 통해 미래를 그려보고 이후 울산의 역사를 훓은 뒤 울산의 현재를 여러 장에 걸쳐 진단하는 방식이다. 


2030년 울산의 미래는 암담하다. 정년 퇴직을 한 노동자들로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정규 일자리가 없어서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여성 구직자의 문은 애시당초 좁은 문이라 말할 것도 없다. 


철강, 자동차, 조선 3대 산업을 대표하는 울산의 시작은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당연하게도 1960년대 국가의 주도 하에 공공 프로젝트로 공단이 들어서면서 시작되어 현대 정주영 이하 인력에 의한 개발 노력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일제강점기가 시작이고 그것도 일본인의 주도 하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최근에는 지역사 연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연구자를 제외하고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지역사는 잘 알기가 어렵다. 나조차도 그렇다. 아무튼 잡설이 길었는데 울산은 이케다라는 일본인에 의해 태평양전쟁을 위한 공업도시이자 석유 비축기지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는 공업도시 울산을 이해하려면 그 시작이 어떠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공감하는 바였다.


울산은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됐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이 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이케다의 구상 아래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전투기의 급유지로 울산을 선택했다. 급유를 한 후 다시 전투기를 띄워 중국 또는 러시아와 교전 지역인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바로 출격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 물자는 배를 통해, 인력은 기차를 통해, 전투기는 바다를 통해 움직일 수 있는 울산. 모든 것을 병참기지로서의 기능에 최적화해 설계했다고 말할수 있다. - P50~51


울산이 왜 하필 선택되었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설들이 존재한다. 앞서 보았던 입지적으로 유리했기에 선택되었다는 설 이외에 정유 공장을 준공하고 (멀리 가지 않고 가까이에 공급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석유화학단지 건설로 출발했다는 설, 그 외에 정주영을 비롯한 기업가들이 사업성을 보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정치적인 동맹을 맺어 진행했다는 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결국 이 설들이 복합적으로 엮이면서 공업 센터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가 주도적으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부터 울산에서는 '공부 못하면 공장 가면 되지.'가 가능했다. 게다가 울산의 산업 노동자들은 IMF 이후 여러 번의 노조 투쟁을 거쳐 정규직 노동자들의 급여 수준은 많이 올라갔다(일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이들을 '황금 노조'라 부르며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짐작하겠지만 정규직 노동자에 한해서 그런 것이다. 그보다 훨씬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 노동자들의 급여 수준은 정규직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전쟁을 비롯한 국제적 요인, 국내 불경기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원자재값이 상승하고 투자나 소비 심리가 위축된 지금 제조업은 무사할까. 기업이 현재에 안주해 투자하지 않고 정규직도 신입이 아닌 경력직으로만 채운다면 과거 혁신을 주도해 성장할 수 있었던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울산은 연구개발과 설계 조직이 수도권 등으로 다 옮겨 가고 생산 단지마저도 떠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거 생산 현장과 연구 개발이 한곳에 있어 실시간 협업이 가능했던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다(실제로 한국조선해양은 판교에 연구소를 세움). 물론 요즘 세상에 단지가 따로 존재해도 협업은 가능하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산업이라면 몰라도 제조업은 실제 장비들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테스트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원격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울산에 필요한 전문 산업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세워진 울산과학기술대(UNIST)는 시민의 기대도, 산업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으면서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기업은 신규 인력은 꺼려 하는 동안 일자리가 없는 우수한 엔지니어들은 수도권에 눈길을 돌리는 악순환이 펼쳐지고 있는 형국이다. 

남편을 따라 온 여성들도 일할 곳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생산직 일자리에서 배제된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밀려나있거나 생산직이 아닌 서비스업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한다. 


저자는 울산의 미래를 제시하며 스마트 주력 산업을 고도화시키거나 데이터 센터를 포괄하는 4차 산업 혁명을 이끄는 신산업의 육성을 꺼내든다. 이를 위해서 예시를 든 것이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의 두 산업도시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두 도시는 대표적인 미국의 산업 도시로 쇠퇴를 겪었으나 한쪽은 살아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은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과 신산업을 통해 도시의 재구조화를 이루어냈다.

그렇다면 울산은 후자의 모델을 따라가야 하는가. 저자는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제조업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응책은 있어야 하지만 후기 산업 모델을 따르면서도 중산층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확보가 되어야 도시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좀 뻔한 책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가 읽을수록 꽤 잘 정리된 책이라 여겼다. 개인적으로 읽으려고 했다면 후순위에 밀릴 확률이 큰 책인데 함께 읽는 책이라 읽을 수 있었다. 올 초에 나온 책인데 이런 책은 시기가 지나면 시의성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덕분에 적절한 때에 읽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필 책 나눔 토론이 있는 날 외근이 잡혀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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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1-27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강, 자동차, 조선에서 두 가지 자동차, 조선은 제가 사는 곳에서도 했어요 그런 일 잘 모르지만 지금은 거의 떠났다는 말 들은 듯합니다 지금 여기는 사람 숫자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느낌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시내라 할 수 있는 곳 가게는 거의 장사를 안 하고 비어 있어요 자동차나 조선 그런 게 사라져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드는군요 중심 지역이 예전과 바뀌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울산과 다르지 않네요 여기는 일제 강점기 때 농산물을 빼앗아가는 곳이기도 했군요 울산과 멀지만 비슷한 까닭으로 여러 가지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전히 아파트는 많이 짓기도 해요 그런 곳에 사람이 살지, 빈 곳이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11-28 07:57   좋아요 0 | URL
‘지방소멸‘이라는 개념이 나온지도 꽤 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이 책에서도 동남권메가시티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거든요.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 지방 도시들끼리 연합하여 자구책을 여러 모로 마련하는 중인 것 같지만 정책 하나만으로 바뀔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 지자체, 기업, 중앙 정부 등이 톱니바퀴처럼 이해 관계를 맞춰나아가야하는 일이 아닐. 수도권은 수도권대로 임대료가 높아서 가게들이 텅텅 빈 곳이 많아요. 저는 이렇게 해서 과연 한국 제조업의 미래가 있을까 회의적이었거든요. 이 책 덕분에 그래도 조금은 희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