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고 추위는 심한데 폐하께서는 어찌해서 나오셨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한 개의 탑(榻, 평상) 이외에는 모두가 다른 사람의 집이니 그러므로 와서 경을 보는 것이요."41

조보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천하를 적다고 하십니까? 남북으로 정벌을 하시려면 지금이 그때입니다. 원컨대 향하고자 계산하신 곳을 들려주십시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을 빼앗고 싶다."

조보가 잠자코 오래 있다가 말하였다.

"신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제가 그 연고를 물었다.

조보가 말하였다.

"태원은 서북 두 쪽에 해당하니 한 번에 떨어뜨리게 하려면 변경의 걱정거리는 우리가 홀로 감당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잠시 보류하지 않으십니까?42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없앤다면 저 탄환만한 작은 검은 점43은 장차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황제는 일찍이 북한의 경계에 있는 첩자(諜者)를 통하여 북한의 주군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집안과 주씨(周氏, 후주)는 대대로 원수이어서 의당 굽혀서는 안 되었소. 지금 나와 그대는 틈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쪽 한쪽을 곤란하게 한다는 말이요? 만약에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에 뜻을 가지고 있다면 의당 태행으로 내려와서 승부를 결정지읍시다."

북한의 주군이 첩자를 파견하여 복명(復命)하여 말하였다.

"하동지역의 토지와 갑병은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의 10분의 1도 감당하기 어렵지만 구구하게 이곳을 지키는 것은 대개 한(漢)나라 황실이 혈식을 받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애달프게 생각하고 첩자에게 말하였다.

"나를 위하여 유균(劉鈞, 926~968, 북한의 睿宗)에게 말하여 너에게 한 길을 열어주어 살게 하겠다고 하시오."

그러므로 그의 세대에는 대군(大軍)을 가지고 북벌하지 아니하였다.

북한의 유계업·풍진가(馮進珂)가 단백곡에 주둔하고, 위대(衛隊)지휘사 진정산(陳廷山)을 파견하여 수백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와서 정탐하며 순찰하였다. 마침 이계훈 등의 전군(前軍)이 도착하였는데, 진정산은 즉각 부하를 가지고 항복하였다. 유계업·풍진가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인 것을 알고 역시 달아나서 진양(晉陽)으로 갔는데, 북한의 주군이 화가 나서 그들의 병권을 빼앗았다. 이계훈 등은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잠깐 사이에 쌓아 놓은 풀이 성 안에서부터 바람에 날려 나와서 곧바로 수구(水口)를 막고 그치니 송나라 군사들의 노(弩)에서 발사하는 화살은 뚫을 수가 없었고, 북한 사람들은 이어서 일을 할 수가 있어서 수구는 드디어 막혔다.

곽무위는 다시 북한의 주군에게 나가서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북한의 주군은 듣지 않았다. 엄인(?人, 환관)인 위덕귀(衛德貴)는 곽무위가 배반한 현상이 분명하니 사면할 수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하여 북한의 주군이 그를 죽여 조리를 돌리자 성 안은 조금 안정되었다.

북한 사람들이 조금 있다가 서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성에서부터 몰래 나와서 공격용 전투도구를 곧 불 지르려 하자 송의 군사들은 그들을 쳐서 달아나게 하고 목을 벤 것이 1만여 급이었다. 밤중에 홀연히 군영 벽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전해졌다.

"북한의 주군이 항복하였다."

태원성이 오래되어도 떨어지지 않으니 동서반도지휘사인 이회충이 무리를 거느리고 이를 공격하였으나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고 나는 화살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

전전지휘사도우후인 조정한이 제반의 위사를 인솔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먼저 올라가서 급히 공격하여 죽을힘을 다하기를 원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훈련된 바여서 한 사람이 백 명을 감당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으니, 그러므로 주액(?腋)으로 대비하면서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있다. 내가 차라리 태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여도 어찌 차마 너희들을 몰아서 칼끝을 무릅쓰게 할 것이며 반드시 죽을 땅을 밟게 하겠는가!"

무리들이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사류(射柳)란 일종의 활쏘기 기교를 연습하는 놀이인데, 청명절에 시행되는 풍속이다. 이 놀이는 조롱박 속에 비둘기를 넣어서 버드나무에 높이 매달아 놓고 활로 조롱박을 맞추어 조롱박 속에 있는 비둘기가 날게 하는 것으로 비둘기를 높이 날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그런데 거란족은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祈雨)를 위하여 사류활동을 한다. 이때에 먼저 장막을 치고 먼저 돌아가신 황제에게 전(奠)을 드리고 황제, 친왕, 재상이 차례로 사류를 하고 패한 사람이 승리한 사람에게 술을 올린다. 둘째 날에는 천막의 동남쪽에 버드나무를 꽂고 자제들이 사류활동을 하며 자제들이 3일간 사류활동을 하는데 비가 오면 상을 내린다.

이달 기사일(22일)에 회주(懷州, 黑龍江省 鶴崗市)에서 봄 사냥을 하였다. 요주(遼主)는 곰을 쏘아 맞추었는데 시중(侍中)인 소사온(蕭思溫, ? ~970)이 이륵희파(伊勒希巴, 夷?畢)인 아리사(牙?斯) 등과 술을 올리면서 축수하였다.

요주가 술에 취하자 행궁으로 돌아갔는데, 근시(近侍)인 소격(?格)·관인(?人)인 화격(華格)·포인(?人)인 석곤(錫袞, 辛古) 등이 시해하였는데 나이는 39세였고, 묘호를 목종(穆宗)으로 하였다.

경오일(23일)에 소사온과 남원추밀사 고훈(高勳)·비룡사(飛龍使)86 니리(尼?, 女里, 경종의 근신) 등이 세종의 둘째 아들 야율현(耶律賢, 948~982)을 받들고 갑기(甲騎) 1천 명을 인솔하고 말을 달려 행재소로 달려갔다.

야율현이 통곡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권하자 드디어 영구(靈柩) 앞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백관들은 존호를 올려서 천찬(天贊)황제라 하고 크게 사면하고 기원을 고쳐서 보령(保寧)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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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프로이트는 토템 동물의 자리에 아버지를 가져다 놓는 것은 ‘토테미즘(인간과의 연관성 속에서)의테두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단정한다. 이를테면 터부와 토테미즘"에 성스러움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프로이트의 아버지 살해라는 주제, 구체적으로 《모세와 유일신앙》(1938)에서 개진된 유대교에서의 아버지 살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원시 시대 유목민들의 나이든 추장은 살해를 모의한 아들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아들들은 아버지 살해죄로 붙잡힌다. 그러나 이행위, 즉 아버지 살해는 이른바 양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같은양가 감정으로 인해 아들이 결국 더 이상 자의적 권력이 아닌 실질적 권리로 부성의 권위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부족내의 모든 여자들을 소유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와 동시에 공동 사회의 족외혼이나 성스러움을 구축하는 것이다. - P97

성스러움의 한 면은, 살해 행위와 속죄 행위가 그것이 투사하는 모든 종류의 기제들과 강박관념적인 의식들과 더불어 만들어 내는 사회적 관계 자체이다. 다른 한 면은 안쪽의 좀더 내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드러나지도 않는 곳으로, 고대적 이원론에서 본다면 융합이 가능할 듯하면서도 동시에 위협하는 존재인, 취약성과 불안정한 동일성의 불확실한 공간을 향해 선회하는 부분이다. 그와 같은 성스러움의 내면은 주체/대상의 비분리를 향한다. - P99

내적 이미지에 맞추어 외부는 희로애락을 생성한다. 따라서 명명할 수 없는 것은 희로애락의감정에 따라 극복할 수 없는 안팎의 모호성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희로애락을 명명한다는 것은, 즉 구별한다는 것은 언어를 개입시키는 것이고, 이때 언어는 안밖의 분리를 수립하는 모든 다른대립들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구별해야 한다. - P103

아버지 살해와는 반대항에 위치하며 언어적 전언과 동일한 시적 언어는, 이름들이 스스로 분리된 것처럼 아버지 살해와 화해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시적 언어란 ‘시작‘을 상징화하려는 시도이자 동시에 터부의 다른 면, 즉 기쁨이나 슬픔을명명하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 P104

나르시시즘은 자아의 존재는 고려하지만 외부 대상은 고려하지 않는다.
한편은다음과 같은 대상의(외부의) 비구조가 자아의 동일성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자아는 자기의 대상과, 즉 타자와 구별되지않고서는 명확하게 자리잡을 수 없는 자아이다. 그래서 최초의 나르시시즘적 자아는 자기의 비대상과의 공간적 양가성(내부/외부의 불확실)과 시각의 모호함(고통/기쁨)으로 인해 나약하며 위협받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다른 한편은, 힘이란 이와 같은 나르시시즘적인 지형학이 정신-신체 의학 속에서 어머니-아이라는 이분법에 의해서도, 어떤 타자에 의해서도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아니면 만약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언어 속에 잠겨 있다면, 생체심리학적인 전제 조건과 오이디푸스적삼각 구조를 그 자체가 허용하는 미래의 주체 속에서만 언어의 각인을 정립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의 주체가 기표를 활성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허용한 이후인 것이다. - P105

정화 의식에서는 더러운 것을 금하고, 그것을 세속 질서로부터 추방하여 성스러움의 차원에 고정시키는 것이 본질적인강조점이 된다. 따라서 더러움은 오염(밖으로부터 오는 더러움)이되고, 그것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면모를 근간으로 하여 성스러운질서를 세우게 된다. 이후 더러움은 가능한 대상으로부터 배제되어욕망의 대상도 아니며, 분리되고 아브젝트한 아브젝시옹이 된다. - P109

우리는 상징 질서 속에서 분석을 통해 여러 주관성을 확증적인 것으로 포착해야만 한다.

사회 문제란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성질의것인가? 여기에서의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이란, 사회적 상징 체계가 가지는 심오하고 독창적인 모종의 인과 관계를 구축하지 않는다.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은 주요 상징 기관인 말하는 주체에게만 효과가 있거나, 혹은 특별히 이득을 준다. 게다가 주어진 사회적 상징성의 유지를 위해 그것을 욕망하게 하는 원동력들을 해명한다. 또 그와 유사한 종류의 문제는 ‘예정 조화‘23) 라거나, 아니면 ‘숭고한 질서‘에 대한 세속적인 응수로서 ‘상징 체계‘를 취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은 의미 작용의과정중에 가능한 변이체와도 같이, 말하는 존재를 규정하는 단단하고도 유일한 보편성 속에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 P111

인간들이 그 위험에 가담한다 할지라도, 오염이 가져오는 위험은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이념들의 구조에 내재하는‘ 힘이다.
위험이란 어디에서, 또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결국은 상징 질서의 취약성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 P114

월경수가 성적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면 배설물은? 우리는 항문기의 페니스 역시어린아이의 상상력이 여성 성기에 품은 남근이라는 점을 되새길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의 권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최초의 구순기의 욕구 불만 이후에는 항문괄약근의 조절로부터 체험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언어의 상징성 속에 잠기고부터 인간 존재는 언어 법칙의 분신인 권한을 논리적으로, 그리고연대기적으로도 즉시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상징계(lesymbolique)의 반대편에 자리한 기호계(le sémiotique)라고 부른 이 육체에 대한 최초의 지형도는, 말하자면 그것이 아무리 언어의 전(前)조건이라 해도 의미의 지류임을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상징 질서의 방법을 통한 언어적 기호가아니라 언어적 기호가 수립하는 어떤 것이다. 모권은 그 용어의 두 - P117

측면에서 이 고유한 육체의 지형학에 대한 위탁 관리인이다. 모권은 남근의 획득과 언어의 습득이 이루어지는 부성적 법칙과는 구별되지만, 남자의 운명 속에 스며들 것이다. - P118

오염 의식들은 조각조각 자르고, 표식을 떼어내며, 규칙·범주·사회성을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연루된, 그리고 그것 자체의 절단에 내재하고 있는 어떠한 의미 작용도 가지지않는다. 이때 우리는 거꾸로 자문하게 된다. 과연 모든 글쓰기는언어가 우리에게 인식되는 단계인 제2단계의 의식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다시 기억하도록 하면서 언어 기호 자체를 가로지르는 이 표식떼기, 즉 오염 의식은 언어 기호의 전(前)조건이되고 벌써 그것들을 넘쳐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글쓰기란 사실상고유의 이름 저편에 있는 오랜 권한에 도전하는 주체와 대면하고있다. 이 권한이 내포하는 어머니성은 결코 위대한 작가를 회피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아브젝시옹이라 규정된 것과의 맞대면도 더이상은 피하지 않는다. - P121

정/부정의 대립은 그것이 은유화되지 않았을 때 하나의 동일성, 하나의 차이에 대한 바람을 재현한다. 그리고 남녀의 성적 차이의 자리를 차지한다. (정/부정이 성적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마치 카스트 체제에서처럼 족내혼에 의한 양성성의 제도화와 유사하게 나타날수도 있다.) 그것으로부터 정/부정의 대립은 상징 기능 그 자체(제물을 바치는 자/제물/신, 주체/대상/의미), 즉 고유한 분리하는 가치라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정/부정에 단초한 계급은 성적 차이와 자리바꿈한다. (아니면 성적 차이를 부인할까?)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정화 의식을 통해 희생제의의 폭력으로 대체된다. - P131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그것은 기쁨과 양립한다기보다는 질병이나 죽음과 등가물인 군주권이나 앎과 양립하는 개념으로만 존재하였을뿐이다. 오염은 이같은 모호함 속에서 혼동된다. 이렇듯 오염이란실천적으로는 어머니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유의 한계에 대한위반, 즉 근친상간인 것이다. - P134

민주제로 넘어가는 시기의 그리스에서 아브젝시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알고 있는 말하는 존재(남성인 후손을 남기지 않는)와 상징계에 대면한 주체(이방인인 테세우스에게 죽음의 희열에 대한 모든 명명 가능성을 양도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에게 부과된다.
여기서 아브젝시옹은 또 다른 논리, 즉 성스러움의(사회적·문화적·고유의) 또 다른 가장자리처럼 의식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오염뿐만 아니라 법칙의 오인이나 위반을 향해 내던져진다. - P138

"나는 아브젝트이다. 말하자면 죽을 운명에처한 말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부족함과 타자에의 의존성은(어머니를)욕망하고(아버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에게 무죄를 언도하는 대신, 그로 하여금 단지 그의 극적인 분열을 양도하는만을 허용할 뿐이다. 진실에 대한 모종의 효과에 대해 결정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방인인 영웅에게 양도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상징계, 언어로 변환된 우리 스스로를 알아본다는 조건으로만 열린 채로 있다. 타자에서도 다른 성에서도 아닌언어 속에서 의미한다는 것, 찔러 버린 눈, 상처, 근원적인 불만족은 시니피앙들의 연결고리에 대한 정의될 수 없는 탐색을 조건짓는다. 그것은 ‘아브젝시옹/성스러움‘이라는 중복된 진실을 향유하는 것과 등가이다. 여기서 두 갈래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승화 작용과 도착성.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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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인간이 되며 말과 동시에 질서를 만든다. 이 질서란 개체의 고유 표식을 없애고 어떤 범주로 묶는 일 그리고 이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일을 통해 성립된다.

힌두교에서 잔여물은 극도로 양가성을 지닌 개념이다. 더러움이 동시에 재생이라는 양가성은 아브젝시옹이 고귀한 순수함이 되는 것이나 난관이 성스러움에 대한 충동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핵심은 잔여물이 통합되지 않은 이와 같은 사유의 구조와 공존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사실도 철저한 사상도 없이 모든 체계에는 잉여만이 있다.

잔여물이 지닌 이러한 양가성은 유일신적이고 일원론적인 세계의 일면적인 상징체계와 대조를 이룬다.

야생의 사회에서 번식을 오염으로 간주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부권이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 지나친 모계 성향에 대항하기 위해 정화의식을 통해 그 지지 기반을 찾는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성과 관련된 오염에 대한 공포는 사회질서 속에 현실적 제재가 적절히 주어지는 경우,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혈통을 중심으로 한 족내혼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양쪽 부모로부터 사회 구성원의 자질을 양도받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규칙은 양성 간의 상징적이거나 현실적인 역할이 균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도 사회의 계급화는, 적어도 사회 내에서 권력을 재는 가장 중요한 잣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양성 사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카스트란 사회 구성원의 자질을 이양하는 데 있어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동등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신분제라 할 수 있다.

카스트의 족내혼 규칙을 따르던 인도 사회와는 달리, 고전적인 의미의 족외혼을 따르던 대부분 야생의 사회에서는 성별, 씨족 등이 ‘같거나’ ‘다른’ 체계 구분이 생기고, ‘고유한’ 남성과 ‘이질적인’ 여성이라는 확연한 대립 구도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족외혼 체계의 이원론은 혐오와 분리에 대한 세심한 법칙들과 차이의 부재를 보충하기 위한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아브젝시옹은 금지되는 여성성 즉, 이질적인 것으로서 이름 없는 타자를 분리하는 과정이다. 드러난 금지와 분리는 모두 이 원초적인 아브젝시옹 위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의 무의식이나 인류의 무의식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눈먼 오이디푸스는 부정한impur 도시 국가에서 부정agos을 정화katharmos하기 위해 스스로 부정agos, souillure이 되어 추방된다. 오이디푸스의 아브젝시옹은 그가 안다고 믿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맡고 만 숙명적 역할에 대한 풀리지 않는 모호성ambiguite에서 생긴다. 바로 이와 같은 역동적 뒤바뀜이 오이디푸스를 아브젝시옹, 혹은 희생제물(pharmakos)로 만든다.53) 파르마코스란 더러움으로 오염된 국가를 더러움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추방된 속죄양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파르마코스의 모호함이 오이디푸스 비극의 배경이다.

오염은 삶을 정지시킨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보면 오염은 근친상간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어머니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유한 경계에 대한 위반으로써 오염이다. 이로부터 크리스테바는 말하는 존재나 사회적 존재의 고유성을 수립하는 최초의 경계선은 여성과 어머니 사이를 지난다고 추론한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파르마코스에 대응하는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이기 때문이다. 이오카스테야말로 야누스 자체이다. 그녀는 유일하다고 믿어지는 존재와 역할에 대해 모호성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전복시킨다.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모든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야누스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자기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재생산하는 존재인 동시에, 말하는 주체로서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여성적 신비나 수수께끼인 이오카스테의 그러한 분열 자체와 결혼했다고 볼 수 있다. 경계선에서 정화 작용 없이 아브젝시옹을 구현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반면에 남성은 같은 경우 아브젝시옹을 인식하고 폭로함으로써 그것을 정화시킨다. 그러므로 이오카스테가 부정한 미아스마(miasma, 나쁜 공기)이며 아고스agos임은 당연하다. 결국 오이디푸스만이 파르마코스(희생제물)인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죽음과 사회, 욕망과 앎,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의 경계에 있으면서 말하는 존재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죽음의 문턱에서 복수의 여신들이 거하는 아테네의 성스러운 숲에서 삶의 종착지를 발견한다. 그가 그곳에 머묾으로써 테베와의 전투에서 아테네를 구원하게 된다. 신탁에 의해 오이디푸스가 머물 자리와 그의 매장 위치의 중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종막은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전하는 사자(使者)의 언급으로 시작된다. 사자는 오이디푸스의 신비로운 죽음을 두고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에 가로놓인 신비한 경계를 언급하고, 오이디푸스가 정화의식을 통해 자신의 삶의 굴레를 벗어나 마침내 신들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결정짓는 외부적인 힘의 대립을 넘어선다. 즉, 죽을 운명을 가진 말하는 주체인 아브젝트로서 오이디푸스에게서 비천함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아브젝시옹/성스러움의 이중의 진실을 향유하는 길은 언어의 시니피앙(signifiant, 기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승화sublimation와 도착perversion을 향한 두 갈래 길이 열려 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 두 길의 교차점은 종교이다.

개인의 의식 속에서 감각적 이미지가 개념적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은 꿈을 꾸는 과정과 반대 방향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와 사고 작용에 앞서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정서와 감각의 단계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사회의 분류 체계에서 경계선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위험과 접촉하는 것이고 능력의 근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성스러움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 면은 살해 행위와 속죄 행위와 연관된 사회적 관계이다. 다른 한 면은 안쪽의 좀 더 내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드러나지도 않는 곳이다. 이 내면은 취약하고 불안정한 동일성을 가진 불확실한 공간을 형성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성스러움의 내면은 성스러움의 사회적 관계가 만드는 구분과 분리와는 거리가 먼, 주체/대상의 비분리를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어 기제와 사회화 과정이라는 한 면과 공포와 무관심의 과정이라는 다른 면으로 성스러움의 양면을 나누어 볼 수 있다.

모든 주변부(가장자리)는 위험을 감추고 있다. 이것은 인간 육체에도 적용되는 가설이다. 인간 육체는 모든 상징체계에 기본적 도식을 제공한다. 오염에 대한 상징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육체의 부분과 관련을 갖지 않은 오염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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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공포의 권력 시작했는데 정말 미치겠네요. 이렇게 단순히 글자만 읽는게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하하하하하

거리의화가 2024-01-15 10:29   좋아요 0 | URL
이해합니다ㅠㅠ 다락방님. 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 제가 참여한 이후로 최강 난이도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도 걔 중에 놀랄만한 문장에는 눈이 뜨일 때가 있고 이 책을 읽고 다시 본서를 읽음으로 재차 읽어 들어오는 부분도 간혹 생깁니다. 그렇다 해도 무지 어렵네요ㅜㅜ 과연 제가 뭘 읽고 있는 건지ㅋㅋㅋ
 

정묘 7, 무진 8

東郡太守 翟義가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가서 ‘攝政해서는 안 되는 자를주벌한다.‘ 하고는 郡國에 격문을 돌리니, 병력이 10여만 명이었다. 王莽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서 밥을 먹지 못하고는 이에 왕읍 등으로 하여금 翟義를공격하게 하였다. 王莽이〈周書〉를 따라 <大告>를 지어서 天子의 지위를 儒子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을 천하에 하니, 이에 관리와 군사들이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 ≪漢書 王莽傳≫ - P179

王莽은 스스로 위엄과 德이 날로 성대하여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크게 얻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진짜 황제에 즉위하는 일을 도모하였다. 11월에 居攝 元年이라 하고 진짜 天子의 지위에 즉위하여 천하를 소유한칭호(國號)를 정하여 新이라 하였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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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왜 하필 공포를 통해 대상 관계라는 문제에접근하려는 것인가? 왜 공포와 대상인가?
그것은 어린아이가 우리에게 들려 주기는 하지만 우리를 이해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비탄에 대해우리 어른들의 ‘공포‘ 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 P66

공포란 한 마디로 균형을 이루던 생물학적 충동의 단절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대상 관계의 형성이란, 때에 따라서는 가장 적절하지만 일시적인 균형 상태가 번갈아 가며 공포의 반복을 이루는 상태일 것이다. 공포와 대상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할 때까지 함께 전진할 것이다. - P67

모든 것에 이름 붙이려고 하다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부딪힌다. 거리의 소음들, 집 앞을 오가는 마차의 끊임없는 움직임, 정신분석에 귀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 자신의 신체나 자기 또래의 소녀에 대한 관심, 소년에게 있어뭔가 잡히지 않는 가냘픈 어머니라는 존재, 아버지가 억지로 성적인 특성을 부여한 환상이나 이야기들에 그가 보이는 관심들. 이미한스가 그것들 나름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발견하지 못한 채자기 나름대로 많은 의미(sens)를 부여한 그것들 모두는, 프로이트가 지적한 대로 나르키소스적 자기 보존의 충동과 성적인 충동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그리고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한스의 인식철학적 경험 속에서 그 모두가 굳어진다. - P68

우리는 공포증의 전개 과정에서 고유의 물신 숭배자의 일화를 알고 있다. 대상 관계에 단초하는 결핍 대신에 주체가 자리를 차지하고 대상 관계의 작위성에 직면하면 아마도 물신 숭배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때 물신은 덧없는, 그러나 필수불가결한 구원의 장이 된다. 그렇다면 정확히 언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뗄래야 뗄 수 없는 물신이 아닐까? 물신 숭배적인 부인에 근거한 그것이 ‘잘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기호는 사물이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명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말한다‘ 등등)말하는 존재라는 틀 속에서 우리를 정의한다. 그것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대한물신 숭배는 아마도 분석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될 터이다. - P72

우리가 결핍과 공격성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결핍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강박적 공격성을 배제하는 것이 되고, 결핍을 배제한 채 공격성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이를 편집증화하는 것이 된다. - P74

우리의 언어는 수동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누군가 한 아이를 때린다‘ 라는 언표는 수동태로 전환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다루고 있는 공포증의 대상에 대한 논리에 주목해 볼 때, 그것 역시 문법상의 수동화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미 작용 기능의 형성 단계와 마찬가지로 공포증 또한 검열이나 억압의충격으로 은유화되기 전에 전환의 기호(능동태가 수동태로 된다)로대체된다. - P75

공포증의 대상은 정확히 말해서 선택을 회피하는 것이고, 주체로 하여금 가능한 한 오랫동안 결정내리기를 미루게 하려는 것이다. 그 과정은 또한 반상징을 통하거나, 상징화 과정에 대한 초자아적 차단막을 통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공포증의 환각 자체인 이질적인 덩어리에까지이르려는 강렬한 상징활동의 압축을 통해서이다. - P77

나르시시즘은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대상을 향한 충동으로 넘쳐나는 이 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것과, 이 넘쳐나는 나르시시즘의 힘이 어떻게 자폐증에까지이르지 않는 것인가가 그것이다.
나르시시즘의 넘쳐나는 힘이란 모종의 상상적이고 생물학적인구성물이다. 그것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해답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분석 삼각형, 즉 대상의 존재를 제기할 수 있는 정신분석 삼각형적인 관계의 실패로 인한 나르시시즘이 그것이다. 두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나르키소스적인 충동이란, 자기의 충동에 하나의 대상을 부여하면서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 자리잡으려는 주체와 대항하여부성적인 은유가 불안정할 때만 우세해진다. - P80

부성적인 기능의 대표자는 결핍된 어머니라는 좋은 대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언어가 좋은 가슴에 대체되고, 어머니의 정성의 자리는 담론이 차지한다. 바로 초자아보다 더 이상적인 부성이 말이다.
우리는 ‘타자‘가 그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형태들을 환각적 은유의 소산인 나르시시즘으로 교체하면서 대상을 변화시켜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공포와 매혹(자아)의 육체와 성적인) 대상이 지나친다. - P82

환각의 대상은 피하고 도망치고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면서 기호로만 포착된다. 또한 환각은 시선이나 재현의 중개를 통해서 유지된다. 나머지 절차 동안 시각적 환각은 다른 것들, 이를테면타 환각(청각적 촉각적인 환각들………)을 집결시키고, 고요하고 중성적인 일상의 상징성 속에 침입하여 주체의 욕망을 재현한다. - P83

분리는 양끝, 즉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가능한 이동 없는 심연이자순수하고 단순한 균열이다. 주체도 대상도 아니다. 다만 한 면은 석화 작용이고, 다른 한 면은 위선인 것이다.
이같은 ‘견고한 성’에 통로를 내고 이동을 가능케 함으로써 욕망이 생겨난다. - P84

환자가 극도로자신을 보호하려는 기표의 딱딱한 껍질은 비의미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더 이상 새로이 의미를 형성하거나 자를 수 없는 ‘순수한 기표‘로서의 음악이나 음조 같은 것조차 울리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세분된다. 이와 같은 분할은 자기를 형성하기도 전에 환상을 흐트러뜨리고 자유 연상을 실패로 이끈다. - P87

프로이트식 기호는 말의 재현과 대상의 재현(1915년 이래로 사물의 재현이 되는) 사이의 관계 매김이다. 대상의 재현이 열려진 그것임에 반해 (청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 · 시각 이미지), 말의 재현은 이미 닫혀진 이질적인 총체(음성의 이미지, 읽는 이미지, 글 쓰는 이미지, 말의 기동력이되는 이미지)이다. - P90

아브젝시옹은 ‘타자‘를 대신하여 들어서고, 주체에게 희열을 제공하기에까지 이른다. 한 여성이 위험을무릅쓰고 이 경계에 들어가는 경우, 그 까닭은 상징성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삶(말하자면 성적인 삶을)을 보장하는 아브젝트한욕망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모성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그녀는 아브젝시옹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생각지도 않고, 마치 자신의 어머니에게 갚아야 할빚(틀림없이 배변기에 대한)이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여성은 드물게 아브젝시옹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나 성적인 삶을 엮어낸다. 내부적으로는 ‘타자‘ 속에 정박하고 있을, 그렇지만 타자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는 아브젝시옹에 대한 욕망이나 삶을 말이다.
‘타자‘ 속에 정착하고 있는 그녀에게 타자가, 즉 아브젝시옹이 찾아올 때 그녀는 오이디푸스의 모자이크 속에서 글쓰기를 통해 남근의 보유자, 즉 남성과 동일시하여야 할 여정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 P93

다시 태어나려는 열망, 끝없는재도전의 상징인 언제나 실패하는 자기 해산이나 낙태의 현기증나는 연출은, 그러나 항상 그 자체의 분열로 인해 중도에 잘리고 만다. 왜냐하면 희열이 동일성이 결핍된 아브젝시옹을 요구할 때, 고유한 동일성의 출현은 결단의 법칙을 구하기 때문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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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12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진도 팍팍 나가시네요! 저도 다음주 월요일에는 늦어도 시작하자! 벼르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1-12 08:31   좋아요 0 | URL
실상 장 수는 많지 않은데 어려워서 반복해서 읽어도 전체적인 이해는 힘드네요. 부분적으로 문장들을 이해하고 추렴하며 읽고 있습니다. 다락방님도 화이팅!

그레이스 2024-01-12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다!
이거 읽어야하는데,,, ㅋㅋ

거리의화가 2024-01-13 13:0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도 동참하십니까?^^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