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프로이트는 토템 동물의 자리에 아버지를 가져다 놓는 것은 ‘토테미즘(인간과의 연관성 속에서)의테두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단정한다. 이를테면 터부와 토테미즘"에 성스러움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프로이트의 아버지 살해라는 주제, 구체적으로 《모세와 유일신앙》(1938)에서 개진된 유대교에서의 아버지 살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원시 시대 유목민들의 나이든 추장은 살해를 모의한 아들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아들들은 아버지 살해죄로 붙잡힌다. 그러나 이행위, 즉 아버지 살해는 이른바 양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같은양가 감정으로 인해 아들이 결국 더 이상 자의적 권력이 아닌 실질적 권리로 부성의 권위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부족내의 모든 여자들을 소유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와 동시에 공동 사회의 족외혼이나 성스러움을 구축하는 것이다. - P97

성스러움의 한 면은, 살해 행위와 속죄 행위가 그것이 투사하는 모든 종류의 기제들과 강박관념적인 의식들과 더불어 만들어 내는 사회적 관계 자체이다. 다른 한 면은 안쪽의 좀더 내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드러나지도 않는 곳으로, 고대적 이원론에서 본다면 융합이 가능할 듯하면서도 동시에 위협하는 존재인, 취약성과 불안정한 동일성의 불확실한 공간을 향해 선회하는 부분이다. 그와 같은 성스러움의 내면은 주체/대상의 비분리를 향한다. - P99

내적 이미지에 맞추어 외부는 희로애락을 생성한다. 따라서 명명할 수 없는 것은 희로애락의감정에 따라 극복할 수 없는 안팎의 모호성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희로애락을 명명한다는 것은, 즉 구별한다는 것은 언어를 개입시키는 것이고, 이때 언어는 안밖의 분리를 수립하는 모든 다른대립들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구별해야 한다. - P103

아버지 살해와는 반대항에 위치하며 언어적 전언과 동일한 시적 언어는, 이름들이 스스로 분리된 것처럼 아버지 살해와 화해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시적 언어란 ‘시작‘을 상징화하려는 시도이자 동시에 터부의 다른 면, 즉 기쁨이나 슬픔을명명하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 P104

나르시시즘은 자아의 존재는 고려하지만 외부 대상은 고려하지 않는다.
한편은다음과 같은 대상의(외부의) 비구조가 자아의 동일성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자아는 자기의 대상과, 즉 타자와 구별되지않고서는 명확하게 자리잡을 수 없는 자아이다. 그래서 최초의 나르시시즘적 자아는 자기의 비대상과의 공간적 양가성(내부/외부의 불확실)과 시각의 모호함(고통/기쁨)으로 인해 나약하며 위협받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다른 한편은, 힘이란 이와 같은 나르시시즘적인 지형학이 정신-신체 의학 속에서 어머니-아이라는 이분법에 의해서도, 어떤 타자에 의해서도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아니면 만약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언어 속에 잠겨 있다면, 생체심리학적인 전제 조건과 오이디푸스적삼각 구조를 그 자체가 허용하는 미래의 주체 속에서만 언어의 각인을 정립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의 주체가 기표를 활성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허용한 이후인 것이다. - P105

정화 의식에서는 더러운 것을 금하고, 그것을 세속 질서로부터 추방하여 성스러움의 차원에 고정시키는 것이 본질적인강조점이 된다. 따라서 더러움은 오염(밖으로부터 오는 더러움)이되고, 그것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면모를 근간으로 하여 성스러운질서를 세우게 된다. 이후 더러움은 가능한 대상으로부터 배제되어욕망의 대상도 아니며, 분리되고 아브젝트한 아브젝시옹이 된다. - P109

우리는 상징 질서 속에서 분석을 통해 여러 주관성을 확증적인 것으로 포착해야만 한다.

사회 문제란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성질의것인가? 여기에서의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이란, 사회적 상징 체계가 가지는 심오하고 독창적인 모종의 인과 관계를 구축하지 않는다.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은 주요 상징 기관인 말하는 주체에게만 효과가 있거나, 혹은 특별히 이득을 준다. 게다가 주어진 사회적 상징성의 유지를 위해 그것을 욕망하게 하는 원동력들을 해명한다. 또 그와 유사한 종류의 문제는 ‘예정 조화‘23) 라거나, 아니면 ‘숭고한 질서‘에 대한 세속적인 응수로서 ‘상징 체계‘를 취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주관적 상징 질서의 영역은 의미 작용의과정중에 가능한 변이체와도 같이, 말하는 존재를 규정하는 단단하고도 유일한 보편성 속에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 P111

인간들이 그 위험에 가담한다 할지라도, 오염이 가져오는 위험은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이념들의 구조에 내재하는‘ 힘이다.
위험이란 어디에서, 또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결국은 상징 질서의 취약성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 P114

월경수가 성적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면 배설물은? 우리는 항문기의 페니스 역시어린아이의 상상력이 여성 성기에 품은 남근이라는 점을 되새길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의 권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최초의 구순기의 욕구 불만 이후에는 항문괄약근의 조절로부터 체험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언어의 상징성 속에 잠기고부터 인간 존재는 언어 법칙의 분신인 권한을 논리적으로, 그리고연대기적으로도 즉시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상징계(lesymbolique)의 반대편에 자리한 기호계(le sémiotique)라고 부른 이 육체에 대한 최초의 지형도는, 말하자면 그것이 아무리 언어의 전(前)조건이라 해도 의미의 지류임을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상징 질서의 방법을 통한 언어적 기호가아니라 언어적 기호가 수립하는 어떤 것이다. 모권은 그 용어의 두 - P117

측면에서 이 고유한 육체의 지형학에 대한 위탁 관리인이다. 모권은 남근의 획득과 언어의 습득이 이루어지는 부성적 법칙과는 구별되지만, 남자의 운명 속에 스며들 것이다. - P118

오염 의식들은 조각조각 자르고, 표식을 떼어내며, 규칙·범주·사회성을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연루된, 그리고 그것 자체의 절단에 내재하고 있는 어떠한 의미 작용도 가지지않는다. 이때 우리는 거꾸로 자문하게 된다. 과연 모든 글쓰기는언어가 우리에게 인식되는 단계인 제2단계의 의식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다시 기억하도록 하면서 언어 기호 자체를 가로지르는 이 표식떼기, 즉 오염 의식은 언어 기호의 전(前)조건이되고 벌써 그것들을 넘쳐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글쓰기란 사실상고유의 이름 저편에 있는 오랜 권한에 도전하는 주체와 대면하고있다. 이 권한이 내포하는 어머니성은 결코 위대한 작가를 회피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아브젝시옹이라 규정된 것과의 맞대면도 더이상은 피하지 않는다. - P121

정/부정의 대립은 그것이 은유화되지 않았을 때 하나의 동일성, 하나의 차이에 대한 바람을 재현한다. 그리고 남녀의 성적 차이의 자리를 차지한다. (정/부정이 성적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마치 카스트 체제에서처럼 족내혼에 의한 양성성의 제도화와 유사하게 나타날수도 있다.) 그것으로부터 정/부정의 대립은 상징 기능 그 자체(제물을 바치는 자/제물/신, 주체/대상/의미), 즉 고유한 분리하는 가치라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정/부정에 단초한 계급은 성적 차이와 자리바꿈한다. (아니면 성적 차이를 부인할까?)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정화 의식을 통해 희생제의의 폭력으로 대체된다. - P131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그것은 기쁨과 양립한다기보다는 질병이나 죽음과 등가물인 군주권이나 앎과 양립하는 개념으로만 존재하였을뿐이다. 오염은 이같은 모호함 속에서 혼동된다. 이렇듯 오염이란실천적으로는 어머니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유의 한계에 대한위반, 즉 근친상간인 것이다. - P134

민주제로 넘어가는 시기의 그리스에서 아브젝시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알고 있는 말하는 존재(남성인 후손을 남기지 않는)와 상징계에 대면한 주체(이방인인 테세우스에게 죽음의 희열에 대한 모든 명명 가능성을 양도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에게 부과된다.
여기서 아브젝시옹은 또 다른 논리, 즉 성스러움의(사회적·문화적·고유의) 또 다른 가장자리처럼 의식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오염뿐만 아니라 법칙의 오인이나 위반을 향해 내던져진다. - P138

"나는 아브젝트이다. 말하자면 죽을 운명에처한 말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부족함과 타자에의 의존성은(어머니를)욕망하고(아버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에게 무죄를 언도하는 대신, 그로 하여금 단지 그의 극적인 분열을 양도하는만을 허용할 뿐이다. 진실에 대한 모종의 효과에 대해 결정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이방인인 영웅에게 양도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상징계, 언어로 변환된 우리 스스로를 알아본다는 조건으로만 열린 채로 있다. 타자에서도 다른 성에서도 아닌언어 속에서 의미한다는 것, 찔러 버린 눈, 상처, 근원적인 불만족은 시니피앙들의 연결고리에 대한 정의될 수 없는 탐색을 조건짓는다. 그것은 ‘아브젝시옹/성스러움‘이라는 중복된 진실을 향유하는 것과 등가이다. 여기서 두 갈래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승화 작용과 도착성.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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