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인간이 되며 말과 동시에 질서를 만든다. 이 질서란 개체의 고유 표식을 없애고 어떤 범주로 묶는 일 그리고 이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일을 통해 성립된다.
힌두교에서 잔여물은 극도로 양가성을 지닌 개념이다. 더러움이 동시에 재생이라는 양가성은 아브젝시옹이 고귀한 순수함이 되는 것이나 난관이 성스러움에 대한 충동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핵심은 잔여물이 통합되지 않은 이와 같은 사유의 구조와 공존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사실도 철저한 사상도 없이 모든 체계에는 잉여만이 있다.
잔여물이 지닌 이러한 양가성은 유일신적이고 일원론적인 세계의 일면적인 상징체계와 대조를 이룬다.
야생의 사회에서 번식을 오염으로 간주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부권이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 지나친 모계 성향에 대항하기 위해 정화의식을 통해 그 지지 기반을 찾는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성과 관련된 오염에 대한 공포는 사회질서 속에 현실적 제재가 적절히 주어지는 경우,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혈통을 중심으로 한 족내혼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양쪽 부모로부터 사회 구성원의 자질을 양도받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규칙은 양성 간의 상징적이거나 현실적인 역할이 균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도 사회의 계급화는, 적어도 사회 내에서 권력을 재는 가장 중요한 잣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양성 사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카스트란 사회 구성원의 자질을 이양하는 데 있어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동등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신분제라 할 수 있다.
카스트의 족내혼 규칙을 따르던 인도 사회와는 달리, 고전적인 의미의 족외혼을 따르던 대부분 야생의 사회에서는 성별, 씨족 등이 ‘같거나’ ‘다른’ 체계 구분이 생기고, ‘고유한’ 남성과 ‘이질적인’ 여성이라는 확연한 대립 구도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족외혼 체계의 이원론은 혐오와 분리에 대한 세심한 법칙들과 차이의 부재를 보충하기 위한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아브젝시옹은 금지되는 여성성 즉, 이질적인 것으로서 이름 없는 타자를 분리하는 과정이다. 드러난 금지와 분리는 모두 이 원초적인 아브젝시옹 위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의 무의식이나 인류의 무의식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눈먼 오이디푸스는 부정한impur 도시 국가에서 부정agos을 정화katharmos하기 위해 스스로 부정agos, souillure이 되어 추방된다. 오이디푸스의 아브젝시옹은 그가 안다고 믿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맡고 만 숙명적 역할에 대한 풀리지 않는 모호성ambiguite에서 생긴다. 바로 이와 같은 역동적 뒤바뀜이 오이디푸스를 아브젝시옹, 혹은 희생제물(pharmakos)로 만든다.53) 파르마코스란 더러움으로 오염된 국가를 더러움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추방된 속죄양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파르마코스의 모호함이 오이디푸스 비극의 배경이다.
오염은 삶을 정지시킨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보면 오염은 근친상간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어머니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유한 경계에 대한 위반으로써 오염이다. 이로부터 크리스테바는 말하는 존재나 사회적 존재의 고유성을 수립하는 최초의 경계선은 여성과 어머니 사이를 지난다고 추론한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파르마코스에 대응하는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이기 때문이다. 이오카스테야말로 야누스 자체이다. 그녀는 유일하다고 믿어지는 존재와 역할에 대해 모호성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전복시킨다.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모든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야누스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자기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재생산하는 존재인 동시에, 말하는 주체로서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여성적 신비나 수수께끼인 이오카스테의 그러한 분열 자체와 결혼했다고 볼 수 있다. 경계선에서 정화 작용 없이 아브젝시옹을 구현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반면에 남성은 같은 경우 아브젝시옹을 인식하고 폭로함으로써 그것을 정화시킨다. 그러므로 이오카스테가 부정한 미아스마(miasma, 나쁜 공기)이며 아고스agos임은 당연하다. 결국 오이디푸스만이 파르마코스(희생제물)인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죽음과 사회, 욕망과 앎,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의 경계에 있으면서 말하는 존재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죽음의 문턱에서 복수의 여신들이 거하는 아테네의 성스러운 숲에서 삶의 종착지를 발견한다. 그가 그곳에 머묾으로써 테베와의 전투에서 아테네를 구원하게 된다. 신탁에 의해 오이디푸스가 머물 자리와 그의 매장 위치의 중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종막은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전하는 사자(使者)의 언급으로 시작된다. 사자는 오이디푸스의 신비로운 죽음을 두고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에 가로놓인 신비한 경계를 언급하고, 오이디푸스가 정화의식을 통해 자신의 삶의 굴레를 벗어나 마침내 신들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결정짓는 외부적인 힘의 대립을 넘어선다. 즉, 죽을 운명을 가진 말하는 주체인 아브젝트로서 오이디푸스에게서 비천함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아브젝시옹/성스러움의 이중의 진실을 향유하는 길은 언어의 시니피앙(signifiant, 기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승화sublimation와 도착perversion을 향한 두 갈래 길이 열려 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 두 길의 교차점은 종교이다.
개인의 의식 속에서 감각적 이미지가 개념적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은 꿈을 꾸는 과정과 반대 방향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와 사고 작용에 앞서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정서와 감각의 단계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사회의 분류 체계에서 경계선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위험과 접촉하는 것이고 능력의 근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성스러움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 면은 살해 행위와 속죄 행위와 연관된 사회적 관계이다. 다른 한 면은 안쪽의 좀 더 내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드러나지도 않는 곳이다. 이 내면은 취약하고 불안정한 동일성을 가진 불확실한 공간을 형성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성스러움의 내면은 성스러움의 사회적 관계가 만드는 구분과 분리와는 거리가 먼, 주체/대상의 비분리를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어 기제와 사회화 과정이라는 한 면과 공포와 무관심의 과정이라는 다른 면으로 성스러움의 양면을 나누어 볼 수 있다.
모든 주변부(가장자리)는 위험을 감추고 있다. 이것은 인간 육체에도 적용되는 가설이다. 인간 육체는 모든 상징체계에 기본적 도식을 제공한다. 오염에 대한 상징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육체의 부분과 관련을 갖지 않은 오염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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