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왜 하필 공포를 통해 대상 관계라는 문제에접근하려는 것인가? 왜 공포와 대상인가?
그것은 어린아이가 우리에게 들려 주기는 하지만 우리를 이해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비탄에 대해우리 어른들의 ‘공포‘ 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 P66

공포란 한 마디로 균형을 이루던 생물학적 충동의 단절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대상 관계의 형성이란, 때에 따라서는 가장 적절하지만 일시적인 균형 상태가 번갈아 가며 공포의 반복을 이루는 상태일 것이다. 공포와 대상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할 때까지 함께 전진할 것이다. - P67

모든 것에 이름 붙이려고 하다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부딪힌다. 거리의 소음들, 집 앞을 오가는 마차의 끊임없는 움직임, 정신분석에 귀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 자신의 신체나 자기 또래의 소녀에 대한 관심, 소년에게 있어뭔가 잡히지 않는 가냘픈 어머니라는 존재, 아버지가 억지로 성적인 특성을 부여한 환상이나 이야기들에 그가 보이는 관심들. 이미한스가 그것들 나름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발견하지 못한 채자기 나름대로 많은 의미(sens)를 부여한 그것들 모두는, 프로이트가 지적한 대로 나르키소스적 자기 보존의 충동과 성적인 충동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그리고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한스의 인식철학적 경험 속에서 그 모두가 굳어진다. - P68

우리는 공포증의 전개 과정에서 고유의 물신 숭배자의 일화를 알고 있다. 대상 관계에 단초하는 결핍 대신에 주체가 자리를 차지하고 대상 관계의 작위성에 직면하면 아마도 물신 숭배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때 물신은 덧없는, 그러나 필수불가결한 구원의 장이 된다. 그렇다면 정확히 언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뗄래야 뗄 수 없는 물신이 아닐까? 물신 숭배적인 부인에 근거한 그것이 ‘잘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기호는 사물이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명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말한다‘ 등등)말하는 존재라는 틀 속에서 우리를 정의한다. 그것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대한물신 숭배는 아마도 분석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될 터이다. - P72

우리가 결핍과 공격성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결핍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강박적 공격성을 배제하는 것이 되고, 결핍을 배제한 채 공격성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이를 편집증화하는 것이 된다. - P74

우리의 언어는 수동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누군가 한 아이를 때린다‘ 라는 언표는 수동태로 전환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다루고 있는 공포증의 대상에 대한 논리에 주목해 볼 때, 그것 역시 문법상의 수동화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미 작용 기능의 형성 단계와 마찬가지로 공포증 또한 검열이나 억압의충격으로 은유화되기 전에 전환의 기호(능동태가 수동태로 된다)로대체된다. - P75

공포증의 대상은 정확히 말해서 선택을 회피하는 것이고, 주체로 하여금 가능한 한 오랫동안 결정내리기를 미루게 하려는 것이다. 그 과정은 또한 반상징을 통하거나, 상징화 과정에 대한 초자아적 차단막을 통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공포증의 환각 자체인 이질적인 덩어리에까지이르려는 강렬한 상징활동의 압축을 통해서이다. - P77

나르시시즘은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대상을 향한 충동으로 넘쳐나는 이 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것과, 이 넘쳐나는 나르시시즘의 힘이 어떻게 자폐증에까지이르지 않는 것인가가 그것이다.
나르시시즘의 넘쳐나는 힘이란 모종의 상상적이고 생물학적인구성물이다. 그것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해답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분석 삼각형, 즉 대상의 존재를 제기할 수 있는 정신분석 삼각형적인 관계의 실패로 인한 나르시시즘이 그것이다. 두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나르키소스적인 충동이란, 자기의 충동에 하나의 대상을 부여하면서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 자리잡으려는 주체와 대항하여부성적인 은유가 불안정할 때만 우세해진다. - P80

부성적인 기능의 대표자는 결핍된 어머니라는 좋은 대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언어가 좋은 가슴에 대체되고, 어머니의 정성의 자리는 담론이 차지한다. 바로 초자아보다 더 이상적인 부성이 말이다.
우리는 ‘타자‘가 그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형태들을 환각적 은유의 소산인 나르시시즘으로 교체하면서 대상을 변화시켜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공포와 매혹(자아)의 육체와 성적인) 대상이 지나친다. - P82

환각의 대상은 피하고 도망치고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면서 기호로만 포착된다. 또한 환각은 시선이나 재현의 중개를 통해서 유지된다. 나머지 절차 동안 시각적 환각은 다른 것들, 이를테면타 환각(청각적 촉각적인 환각들………)을 집결시키고, 고요하고 중성적인 일상의 상징성 속에 침입하여 주체의 욕망을 재현한다. - P83

분리는 양끝, 즉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가능한 이동 없는 심연이자순수하고 단순한 균열이다. 주체도 대상도 아니다. 다만 한 면은 석화 작용이고, 다른 한 면은 위선인 것이다.
이같은 ‘견고한 성’에 통로를 내고 이동을 가능케 함으로써 욕망이 생겨난다. - P84

환자가 극도로자신을 보호하려는 기표의 딱딱한 껍질은 비의미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더 이상 새로이 의미를 형성하거나 자를 수 없는 ‘순수한 기표‘로서의 음악이나 음조 같은 것조차 울리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세분된다. 이와 같은 분할은 자기를 형성하기도 전에 환상을 흐트러뜨리고 자유 연상을 실패로 이끈다. - P87

프로이트식 기호는 말의 재현과 대상의 재현(1915년 이래로 사물의 재현이 되는) 사이의 관계 매김이다. 대상의 재현이 열려진 그것임에 반해 (청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 · 시각 이미지), 말의 재현은 이미 닫혀진 이질적인 총체(음성의 이미지, 읽는 이미지, 글 쓰는 이미지, 말의 기동력이되는 이미지)이다. - P90

아브젝시옹은 ‘타자‘를 대신하여 들어서고, 주체에게 희열을 제공하기에까지 이른다. 한 여성이 위험을무릅쓰고 이 경계에 들어가는 경우, 그 까닭은 상징성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삶(말하자면 성적인 삶을)을 보장하는 아브젝트한욕망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모성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그녀는 아브젝시옹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생각지도 않고, 마치 자신의 어머니에게 갚아야 할빚(틀림없이 배변기에 대한)이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여성은 드물게 아브젝시옹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나 성적인 삶을 엮어낸다. 내부적으로는 ‘타자‘ 속에 정박하고 있을, 그렇지만 타자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는 아브젝시옹에 대한 욕망이나 삶을 말이다.
‘타자‘ 속에 정착하고 있는 그녀에게 타자가, 즉 아브젝시옹이 찾아올 때 그녀는 오이디푸스의 모자이크 속에서 글쓰기를 통해 남근의 보유자, 즉 남성과 동일시하여야 할 여정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 P93

다시 태어나려는 열망, 끝없는재도전의 상징인 언제나 실패하는 자기 해산이나 낙태의 현기증나는 연출은, 그러나 항상 그 자체의 분열로 인해 중도에 잘리고 만다. 왜냐하면 희열이 동일성이 결핍된 아브젝시옹을 요구할 때, 고유한 동일성의 출현은 결단의 법칙을 구하기 때문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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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12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진도 팍팍 나가시네요! 저도 다음주 월요일에는 늦어도 시작하자! 벼르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1-12 08:31   좋아요 0 | URL
실상 장 수는 많지 않은데 어려워서 반복해서 읽어도 전체적인 이해는 힘드네요. 부분적으로 문장들을 이해하고 추렴하며 읽고 있습니다. 다락방님도 화이팅!

그레이스 2024-01-12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다!
이거 읽어야하는데,,, ㅋㅋ

거리의화가 2024-01-13 13:0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도 동참하십니까?^^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