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 23

정월에 漢나라 군대가 宛물을 포위하였다. 春陵 戴侯의 曾孫 劉玄이 平林의 군중에 있으면서 이름을 更始將軍이라 하니, 이때 漢나라 군대가 이미10여 만이었다. 劉氏를 세워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고자 하였는데, 南陽의호걸들과 王常 등은 모두 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新市와 林의 장수들은 방종한 것을 좋아하여, 의 위엄과 명철함을 두려워하고 劉玄의 나약함을 탐해서 먼저 함께 계책을 정하여 劉玄을 세웠다. 劉玄이 황제에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조회 받을 때에 부끄러워 땀이 흘렀으며 손을 들어올리고 말을 하지 못하니, 이로 말미암아 호걸들이 실망하여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다. - ≪後漢書 齊武王傳≫에 나옴-3월에 偏將軍 등이定陵,
순행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王은 물과 尋을 보내서 군대를 징발하여지방을 평정하게 하고, 또여러 맹수인 호랑이. 표범무소 · 코끼리 등속을 몰고 가서 군대의 威武를.
돕게 하고는 이름을 百大軍이라 하여 군대를 풀어 昆陽을 포위하였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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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권8 본기 제8 경종 야율현 편


- 보령 2(970) 가을 7월에 우피실상온 야율현적을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 야율현적을 경종이 아낀 이유가 속자치통감에 상세히 나옴

- 보령 3(971) 봄 정월 갑인일에 우이리필(형부 관원) 해저가 사람을 보내 적렬(덕열륵부) 포로를 바치자, 조서를 내려 ‘공이 있는 장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하였다.
-> 속자치통감에는 해저가 아니고 야율희달이라고 나옴

- 보령 3(971) 가을 7월 신축일에 북원추밀사 야율현적을 서북로초토사로 삼았다.
-> 야율현적에 대한 자세한 평가가 속자치통감에 나옴

신해일(10일)에 처사인 산조(酸棗, 河南 延津) 사람 왕소소(王昭素, 904~982)를 국자박사로 삼았는데 치사(致仕, 벼슬을 그만 둠)하였다.

왕소소는 젊어서 돈독하게 공부하였고, 지행(志行)을 갖고 있어서 황제가 그 이름을 듣고 불러서 편전에서 접견하였다. 그때 나이가 이미 70여 세였는데, 황제가 물었다.

"어찌해서 벼슬하지 않는가?"

왕소소는 사과하며 능력이 없다고 하였다. 건괘(乾卦)를 강론하게 하였더니 ‘구오비룡재천(九五飛龍在天)’34에 이르자 얼굴을 가다듬고 말하였다.

"이 효(爻)는 바로 폐하의 오늘날 일에 해당합니다."

증거를 끌어 와서는 이어서 미언대의(微言大義)의 뜻을 넌지시 간언하였다. 황제는 아주 기뻐하며 치세(治世)와 양신(養身)의 술책을 물으니 왕소소가 말하였다.

"치세는 백성을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으며, 양신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황제는 그가 말한 것을 아껴서 병풍 사이에 써 두고, 한 달이 넘게 남겨 두었는데, 자주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니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을 한 것이다. 나이 89세에 집에서 죽었다.

요(遼)에서는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을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야율현적은 일찍이 요주(遼主, 경종)를 번저(藩邸)에서 모셨었는데, 목종(穆宗, 재위; 951~969)이 포학하자 요주가 한광사(韓匡嗣, 918~983)·니리(尼?, 女里, ? ~978)와 더불어 노닐면서 말하다가 목종을 나무라는 말에 미치자, 야율현적은 일찌감치 의당 멀리하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목종의 시기(猜忌)를 면할 수 있었는데 야율현적의 힘이었다. 요주가 처음으로 서자 대부분 제왕 가운데 혹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싹틔우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하고 몰래 야율현적을 심복으로 삼았으니, 그러한 연고로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황제가 일찍이 유사에게 명령하여 명주(?州, 河北省 永年縣 東南)방어사 곽진(郭進, 922~979)을 위하여 집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무릇 정당(庭堂)에 모두 기와를 사용하였다.

유사가 말하였다.

"오직 친왕·공주만이 비로소 이러한 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곽진은 서산(西山)에서 요새를 장악하고 10년을 넘게 있으면서 나로 하여금 북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없게 하였는데, 내가 곽진을 보는 것이 어찌 딸보다 적겠는가! 빨리 가서 공역을 감독하고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남당주(南唐主)가 다시 편지를 써서 남한주(南漢主) 유창(劉?, 942~980)에게 중국에 귀순하라고 깨우쳐 주고 급사중 공신의(?愼儀)를 파견하여 사자로 가게 하였다. 유창이 편지를 받고 크게 화를 내고 드디어 공신의를 가두고 역을 통하여 남당주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아주 불손하였다. 남당주는 그 편지를 올려 보내자 황제는 비로소 그를 칠 것을 마음으로 결정하였다.

소사온이 죽자 요주(遼主)는 황후 때문에 도적을 잡는 일을 아주 급히 서둘렀는데, 신축일(3일)에 국구(國舅)인 소합제(蕭哈濟)와 소합리(蕭哈里, 海只)가 소사온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다는 상황을 찾아내서 모두 복주(伏誅)하고 그의 동생인 소신도(蕭神覩)를 황룡주(黃龍州, 吉林省 四平市)로 유배 보냈고, 곧 역시 그를 주살하였다.

전흠조는 요(遼)와 만성(滿城, 河北省 保定市에 속함, 河北省 中部 太行山 동쪽 기슭에 위치)에서 싸웠는데 요의 기병이 조금 물러나자 이긴 기세를 타고 수성(遂城, 河北省 保定市 徐水縣)에 이렀다. 전흠조는 흐르는 화살을 맞고 말에서 넘어지자 기사(騎士)인 왕초(王超)가 말을 전흠조에게 주니 군대는 다시 떨쳤다. 아침부터 포시(?時, 오후 4시)까지 죽이고 상처를 입힌 것이 아주 많았으며 밤에는 수성에 들어가서 지켰는데, 요나라 사람들이 그곳을 포위하였다.

며칠이 되자 전흠조는 성 안에 식량이 적은 것을 헤아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남문을 열고 그 한쪽 귀퉁이에서 포위를 뚫고 나갔다. 이날 저녁에 보채(保寨, 보호 받을 수 있는 영채)에 도착하였는데, 군대 안에는 화살 하나도 잃지 않았다. 북방으로 말이 전해지기를 3천 명이 6만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계해일(25일)에 주문이 도착하니 황제가 기뻐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이 자주 변경에 들어와서 노략질하는데 내가 20필의 비단을 가지고 거란 사람의 머리 하나를 사려고 한다면 그들의 정병은 10만 명에 불과하니 비용은 단지 견(絹) 200만이면 적은 다 없어질 것이다."

이로부터 변방의 대비를 더욱 닦았다.

남한의 도통 이승악(李承渥)이 군사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봉화봉(蓬華峯) 아래에 주둔하면서 코끼리를 훈련시켜서 진을 치도록 하여, 매 코끼리마다 10여 명씩을 실었는데 모두가 병장기(兵仗器)를 잡고 있었고, 싸우게 되면 진(陣)의 앞에 두면서, 큰 것으로 군대의 위엄을 삼았다.

반미가 군사들 가운데 있는 경노(勁弩)를 찾아서 그것을 쏘게 하자 코끼리는 달아나면서 올라 탄 사람을 흔들자 모두 떨어졌고, 도리어 이승악의 군사들을 밟으니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다.

신미일(5일)에 군사가 백전(白田)에 도착하였는데, 남한의 주군이 소복(素服)을 하고 나와서 항복하니 반미는 승제(承制)하여 그를 풀어 주었다. 드디어 광주(廣州)로 들어가서 종실(宗室)·관속 97명을 포로로 잡고, 남한의 주군과 더불어 모두 용덕궁(龍德宮)에 묶어두었다.

유보흥은 처음에는 백성들 사이에 숨었지만 후에 마침내 그를 붙잡았다. 환관 100여 명이 옷을 잘 차려 입고 뵙기를 청하자 반미가 말하였다.

"이렇게 탁인(?人, 환관)이 많은데 나는 조서를 받들어서 죄진 사람을 치려했으니,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명령을 내려서 그들을 모두 목 베었다.

신축일(8일)에 요(遼)에서는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을 서북로(西北路)병마도부서로 삼았다. 야율현적은 충성스럽고 굳세며 아름답고 민첩하고, 정성을 미루어 다른 사람을 대우하니 비록 한가한 휴식시간에도 정치를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관청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감히 구차하거나 게으른 일이 없었으며 몇 년 동안 쌓아 온 옥사를 모두 해결하였다.

요(遼)의 세종은 야율찰극(耶律察克, 察割, ? ~951)에게 시해되었는데, 요주(遼主)는 그때에 네 살이어서 어떤 사람이 양탄자로 싸서 쌓아 놓은 장작 밑에 숨겨 두어서 죽음을 면하였다. 뒤에 영흥궁(永興宮)에서 자랐는데, 보부(保傅, 보모와 스승)가 된 사람들이 모두 은덕을 베풀었다. 9월 을사일(13일)에 요주(遼主)가 부부(傅父)·보모(保母) 등에게 호구와 우양(牛羊)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또 잠저(潛邸, 등극 전의 저택)시절의 급사(給使)였던 사람들을 탑마부(塔瑪部)로 삼고 관리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임자일(20일)에 요주(遼主)가 귀화주(歸化州, 武州, 山西省 ?州市)에 갔다. 갑인일(22일)에 남경(南京, 幽州, 北京)에 갔다. 상경(上京, 內蒙古 巴林左旗 林東鎭南)유수 한광사(韓匡嗣, 918~983)를 남경으로 옮기고 바로 그의 아들 한덕양(韓德讓, 941~1011)을 대신 동경유수로 삼았다.

을사일(2일)에 요(遼)의 북원추밀사인 소사온(蕭思溫, ? ~970)을 위왕(魏王)에 책봉하고 북원대왕 야율오진(耶律烏眞, 屋質, 915~973)에게 유열(裕悅, 于越)을 덧붙여 주었다.

요(遼)에서는 한광사(韓匡嗣, 918~983)를 상경(上京, 內蒙古 赤峰市 巴林左旗 林東鎭)유수로 삼았는데, 번저(藩邸)에 있을 때의 옛 은혜를 이용한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연왕(燕王)에 책봉하였다. 한광사는 그 아들 한덕양(韓德讓, 耶律隆運, 941~1011)으로 하여

금 입시하게 하였는데 요주(遼主)는 삼가며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을 덧붙여 주어 추밀원통사(樞密院通事)에 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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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lude, ch1

만일 여성의 무능 정도를, 이를테면 셋 이상의 수는 세지 못한다는 식으로 엄격하게 한정할 수 있다면, 여성의 사회적 운명도 과학적 확신을 가지고 취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호함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리고 그 편차는, 여성의 머리 모양과 여성이 좋아하는 시와 산문으로 된 러브 스토리는 모두 같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


여자는 자기주장이 약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여자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호막은 자기 의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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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1-23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미들마치 전에 사두셨나봐요. 부지런히 읽으시는 모습에 자극받습니다 ☺️

단발머리 2024-01-23 22:20   좋아요 1 | URL
저두 동감입니다! 미들마치 두께가 상당한데 말이에요!! 😉

거리의화가 2024-01-24 09:27   좋아요 2 | URL
네^^ 원서는 몇 달 전에 사 두었고 번역본은 비교하면서 고민하다 얼마 전 샀거든요. 두께 때문에 꽤나 시일이 걸릴 것 같지만 쉬엄 쉬엄 읽으려고 합니다. 아무튼 Prelude 부터 문장들이 좋아 머리가 확 깨는 느낌이고 등장 인물들 묘사도 흥미롭네요^^

건수하 2024-01-24 09:31   좋아요 1 | URL
앗 그럼 민음사판 나온 다음에 사신 거군요~ 저걸 고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4-01-24 21:05   좋아요 2 | URL
번역은 제가 둘 다 비교 분석한 게 아니라서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다만 이 번역본이 각주가 친절한 것 같아서 선택했습니다.

건수하 2024-01-24 21:19   좋아요 1 | URL
전 너무 두꺼워서 오래된 번역이라 민음사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각주가 친절하다는 건 큰 장점이네요. 답변 감사해요 화가님 :)

2024-01-24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24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 2024-01-24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들마치 압축판? 읽고 훌륭한 문장이 워낙 많아서 제대로 읽어보고싶다 생각했는데 화가님은 원서까지! 멋집니다!!
원서 일단 구매라도 해둘까요?🙄

거리의화가 2024-01-24 21:02   좋아요 2 | URL
압축판은 아무래도 아쉽죠^^ 어려워도 정본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원서 난이도가 있어서 쉬엄 쉬엄 읽을까 해요. 그래도 줄거리 까먹으면 안되니까 찬찬히ㅎㅎ 문장 앞부분만 읽었는데도 압도합니다^^*
 

정축(17)

王莽은 성품이 조급하여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매번 어떤 일을 일으키거나 만들 때마다 번번이 옛 제도를 흠모하여 시의적절함을 헤아리지 않고 그대로 따르려 하였으며 제도를 또 정하지 않으니, 관리들이 이로인해 간악한 짓을 하였다. 그러므로 천하 사람들이 원망하여 형벌에 빠지는자가 많았다. ≪漢書 食貨志≫ - P188

王莽의 법령이 번거롭고 까다로우니, 백성들이 손만 흔들면 禁網에 저촉되어 농사짓고 누에치지 못하고 이 번다하고 심하였으며, 旱害와 蝗蟲이서로 이어지고 獄訟을 결단하지 못하였다. 관리들이 가혹하고 포악함으로 위엄을 세우고 王莽을 인연(이용)하여 백성들을 침해하니, 부유한 자는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가난한 자는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어서 이에 함께일어나 도적이 되었다. 荊州의 사람인과 王鳳,南陽의 馬武,穎川의 王常과 成丹이 함께 모여 綠林山 가운데 숨어서 무리가 7, 8천 명에 이르렀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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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부정주의처럼 담화를 짓누르는 무정부주의나 허무주의는 이제 전복되어 하나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증오하는 동시에 욕망하는 위협과 공격성, 선망하면서 동시에 혐오하는 대상으로. - P270

‘타자‘에 대해서처럼 단일성(Un)에 겁먹고 거부된 욕망은 ‘타자‘와 단일성에 대한 전멸자로서의 증오를 만들어 낸다.
이때 유대인의 모습은 거부된 사랑이 지배력에 대한 증오로 변하는 상태에 집중될 것이다. 유대인의 형상은 또한 지배력에 대한증오와 결합하여 지배력이 제거해 버린 나약함이나 희열에 찬 실체, 여성성이나 죽음으로 채색된 성(性)에 대한 욕망에 집중될 것이다…………….
유희인 만큼 환상적이고 양가성을 지닌 대상을 창조하는 셀린의유대인 배격주의는 일종의 유사 종교의 형성 과정이다. 그것은 비신도(非信徒)의 아브젝시옹을 체험하기 위한 역사 속에 담지된 사회학적 소름 끼침에 다름 아니다. 이때 사회적이거나 상징적인 약호가 아브젝시옹 앞에서 스스로의 취약성을 느낄수록 유대인 배격주의가 보다 과격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 P273

유대인은 지배자로 승격되고 여성이 된다. 양가적이고 자기와 타자, 주체와 객체, 좀더 깊이는 안과 밖 사이의 완고한 한계를 잃어버린경계선, 변질된 지배자로서의 여성 말이다. 공포와 매혹의 대상, 아브젝트 자체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은 아브젝트하다. 더럽게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그와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 P281

구어체의 글쓰기로 셀린은 그가 표명하는 주제나 이념적인 참여를 논리와 문법에 복종해야 하는 수사학적 작용, 즉 문어체 언어속에 중첩시킴으로써 이념을 언어 속에 새기는 대귀환(기호학자의말을 빌리면, ‘제2차 모델화 체계‘ )을 완성시킨다. - P292

스피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대립되는 두 힘인 정보와 반복 상기는 작가의 분할된문장 속에서 끊임없이 싸움을 벌인다. 그것은 곧 작가 자신에 대한 확인이자 허무주의를 스스로 고찰하는 방편인 것이다." - P296

때문에 문장을 분할하고 자꾸 반복해서 상기시킴으로써 명료성을 더하려는 것은, 타자의 존재에대한 작가 의식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말하는 주체는 문장의 유형별로 두 곳의 장소를 차지할 것이다. 하나는 고유의 동일성 자리(그곳, 평언의, 정보가 권리를 갖는 곳)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한 객관적인 표현의 자리(다시 말하고, 덧붙이고, 명백히 할 때의)이다. - P297

글쓰기에 대한 몰두, 각고의 자제력, 추상성의 제거와 말없음 덕에 셀린의 언어는 충동에 보다 가까운 정서로 매혹의 아브젝시옹이 내는 소리와 비명 속에서 파열한다………… - P307

셀린의 묵시록적인 언술이나 예언 자체는 공포의 언술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언술은 판단이나 탄식 · 단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안쪽에 위치한 셀린은 위협을 바깥으로 발설하지도 않고, 게다가 그것에 방어할 도덕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할까? 그때 정면에서 아브젝시옹의 웃음이 터진다. 언제나 같은 원천인 그것은, 프로이트가어렴풋이 짐작한 바 성적이거나 억압된 죽음의 침입, 또는 억압된무의식의 난입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난입이 있다면, 그것은어떠한 것으로부터 유래한 것도, 확실한 것도, 숭고한 것도, 미리준비된 조화가 주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벌거벗고 고뇌에 찬, 공포스러운 만큼 매혹적인 어떤 것이다. - P310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모든 문학이란 묵시록의 비전인 것이다. 이 묵시록은 사회 역사적인 조건들과 관계를 맺고 있을지라도,
변형된 나약한 경계선상(경계례)에서 결국 다소간은 동일성주체/대상 등)이 중첩되어 있거나, 한계가 모호하거나 이질적이거나 동물적인, 변모된 아브젝트한 대상이다. - P313

페미니즘은 권력에 대한 항변으로 명멸했던 수많은 이념들 가운데 마지막이 될 것이다. 또한 성적인 동일성을 포함한 모든 상상적 동일성의 파괴자인 동시에 나르시시즘의 파괴자인 예술가와는 달리 여성주의는 자기의 권리를 침해하는 세력만을 탄핵한다.
**************************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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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1-23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화가님 존경스럽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1-23 16:36   좋아요 0 | URL
수하님 존경이라니...^^; 11장까지 다 읽기는 했는데 1장 다시 한 번 더 읽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수하 님도 응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