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 킨 #2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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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산미 딱이다! 뒷맛이 시큼하지 않고 깔끔하고 개운했다. 과일 중 가장 좋아하는 게 있다면 사과인데 사과만의 상큼함이 있어서이다. 사과와 메이플 시럽은 역시 조화가 좋은 것 같다. 홍차를 거의 마시지는 않지만 역시 홍차는 개운함이겠지. 시큼함 없는 약한 산미를 원한다면 픽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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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12-14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는 이걸 마셔볼까요..?!

거리의화가 2022-12-14 10:08   좋아요 0 | URL
저는 원래 고소한 쪽 좋아하는 편이지만 간만에 원두 두개 타입 다 나왔길래 둘 다 샀어요^^; 이거 먼저 마셔봤는데 시큼한 거 싫어하는 제 입맛에도 괜찮았어요. 새벽부터 마셨던건데도요^^

scott 2022-12-14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큼함 없는 약한 산미맛 나는 커피 라니
귀가 솔깃!

200그램 짜리는 10일 정도면 싸악 비워 버리는 뎅 ㅎㅎ

이 원두 찜 !👆^^

거리의화가 2022-12-14 11:43   좋아요 1 | URL
500그램 사기엔 애매해서 항상 200그램 사는데 생각보다 빨리 비워버려서 저도 아쉬워요. 스콧님께도 좋은 선택이길!ㅎㅎ 요즘엔 그냥 코스트코 가서 대량 원두를 사옵니다ㅠㅠ

독서괭 2022-12-14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에우에~~이름이 귀엽네요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12-14 13:25   좋아요 1 | URL
이름 생각은 미쳐 못했어요~ㅎㅎㅎ 과테말라에 있는 지명 이름에서 따온 거라고 합니다^^

희선 2022-12-15 0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커피도 개운한 뒷맛이 좋죠 그런 거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과 산미가 느껴지는가 봅니다 괜찮을 것 같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2-19 09:27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묵직하지 않고 가벼운 커피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침에 먹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은 게 좋더라구요.
사과를 워낙 좋아해서 커피에 사과 블렌딩 참 좋네요~ㅎㅎㅎ
 
장강일기
정정화 지음 / 학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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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땅, 빼앗긴 나라의 얼어붙은 한겨울 밤은 의주행 열차 앞에 서 있는 젊은 아낙네의 달아오른 열기로 데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망이질하는 여인의 가슴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차는 어쩌면 저토록 한마디의 말도 없이 엎드려 침묵을 지키는 것일까? 참혹과 고난이 기다리는 땅으로 간다는 묵시의 경고일까? 아니면 빨리 갈 것을 서두르는 재촉의 몸짓일까? 어쩌면 내 결심을 시험해 보는 마지막 순간의 엄숙한 고요일지도 모른다(P17).

한 여인이 1920년 1월 도착할 사람은 알지 못한 채 열차에 몸을 싣는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길이었다. 사라진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아 자국의 다른 곳도 아니고 타국땅이었다.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1919년 여름, 그는 시집온 지 8년 만에 어렵게 얻은 첫 딸을 낳자마자 잃고 만다. 그리고 10월 어느 날 남편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나간 뒤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 시어머니가 넌지시 던진 신문에는 사라진 두 사람의 소식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대동단 사건으로 큰오라버니가 체포된 후 시댁 주위에는 왜경이 항시 대기 중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 속 욕구도 함께 생겼다고 한다. 시어머니께 친정엘 다녀온다는 말을 하면서 그렇게 시댁을 나섰다. 친정 아버지를 만나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하고 받은 거금 8백원을 들고 상해로 향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친척인 정필화가 동행을 하였다.

무사히 상해에 도착하고 임정의 상황을 보니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편이 넉넉치 못했고 활동 자금이 많이 부족했다. 그는 신규식을 찾아간다. 신규식은 김가진과도 가까운 사이여서 그의 집안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었다.
"엉뚱한 소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친정에 가서 돈을 좀 얻어와 볼까 하는데요."
임정의 어려운 살림을 내부인이라면 모르지 않을 터이지만 신규식은 그의 신변을 걱정했다. 시댁도 왜경에 감시를 받는 판국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의 이 결단이 너무나 놀랍다. 가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자금 수급이 쉽지는 않을텐데, 왜놈에게 잡힐지도 모르는데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저지르는 그의 결단 말이다. 나는 간이 작아서 절대 못할 일이다. 어쨌든 처음에는 이렇게 그의 사적인 용기에서 시작된 것이 나중에는 임정의 공식적인 밀령으로 1931년까지 자금 조달 업무를 하게 된다.

그가 자금 조달 업무를 하며 초반에 도움을 준 비밀 연락소의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 신의주 시내의 세창양복점 주인 이세창씨다. 이세창의 도움으로 그는 신의주에서 서울까지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
이세창은 소박하고 착한 성품을 지녔지만 애국심과 정의감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몸조심하라요. 자기만 생각할 거이 아니라 남도 생각을 해야 되는 일이야요. 기래야 또 들어올 수 있으니까니. 명심하라요. 내레 솔직하게 한마디 하갔는데, 젊은 아주머니레, 더구나 귀골로 곱게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시다. 독립운동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레 하나같이 다 이런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기렇디요? 나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
이세창은 그의 결단력과 기개에 적지 않이 놀랐던 모양이다.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을 건네는 이세창이 있어서 그도 용기를 더 가지고 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금 조달 업무로 국내에 갔다가 체포가 되었는데(다행히 큰 일은 없었다) 종로서에서 풀려난 후 그는 상해에서 시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는다. 1922년 7월 4일이었다. 상해에서는 김가진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고, 국내에 있던 그는 시댁의 살림으로는 손님을 받을 수가 없어 친정에서 받은 돈으로 전셋집을 얻어 그곳에서 문상객을 받는다. 조의금으로 받은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만 여겼다) 중 일부는 시집 식구들을 위해 자리잡게 한 후 상해로 간다. 상해로 가보니 장례식 비용이 모두 외상이라 결국 가져온 돈으로 충당한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부부는 자신들의 거취를 재고할 수밖에 없었는데 친정에 가서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나겠다는 승낙을 받은지 얼마 안되서 하필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계획도 수포가 되고 만다(만약 이 때 부부가 떠났다면 임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부부는 자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25년 어느 날 그는 배가 아파왔고 갈수록 통증이 심해져서 자궁수술을 받고 아들 후동이를 낳는다. 아이를 6년 만에 다시 갖게 된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임정 식구들도 김가진의 손자가 태어났다고 축하 인사를 건네며 많이 귀여워해주었다고 한다.

1931년 여름 그는 여섯 번째로 고국 땅을 밟았다. 시댁과 친정으로부터 아이를 데리고 나오라는 재촉 편지를 받아서였다. 이 때는 친정의 가세도 기울고 인심도 냉랭하던 때였다. 시댁에서 가까운 인사동을 지나다가 첫번째로 자금 조달 문제로 들어왔을 때 자신을 숨겨 주고 도와준 이의 집 골목을 지나가 반가운 마음에 찾아 들어갔다. 내가 아무개입니다 하고 안부를 묻자 그 사람은 "누구시더라?" 그는 무안했고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반성하게 했다. 비록 하잘것없고 하찮은 일이겠지만,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가? 도대체 독립이란 무엇이며, 또 투쟁이란 무엇인가? 독립의 주인은 누구이며, 투쟁의 대상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성엄은 당시 상해에서 동지들과 테러 행위에 대한 모의를 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서울에 가면 돈을 좀 마련해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31년 초 다시 상해로 돌아가면서 나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다시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P100)


임정이 해외에 있었던 만큼 해외 사정은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임정이 왜 그렇게 복잡하게 피난을 다녀야 했는지,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외교와 전쟁 등의 상황이 얽혀 있었는데 이도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대표적으로 서안사변에 대한 설명이다.

1936년 12월 12일 초공(공비 토벌) 작전을 독찰하고자 서안에 온 장개석이 서북초비 부총사령 장학량과 제17로군 총사령 양호성의 부대에 의하여 감금당한 일이 발생하였다. 장개석은 장학량 휘하의 동북군을 공산당 토벌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는 목적으로 서안에 왔는데 부하에 의해 감금되고 말았던 것이다(P140).
서안사변 당시뿐만 아니라 내가 중국에 있는 동안 서안사변에 대하여 끝끝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으므로 사건의 경위에 대하여는 오히려 그 후 책을 보고서야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서안사변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 큰 전환점이 됐으며, 따라서 우리나라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서안사변이 있기 바로 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추축세력 형성과 더불어 일본과 독일의 방공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중국은 역시 나찌 독일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중국 국민혁명군(중앙군)에는 독일 고문관들이 고용되었으며, 중앙군의 편제와 장비를 독일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을 중간에 두고 중국에서는 이른바 중일 방공협정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국민정부 내에는 왕조명과 하응흠 등 철저하게 반공 친일의 노선을 걷는 이들이 있어 그러한 반민족적인 노선을 강력히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안사변은 이러한 음모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었고, 장개석은 서안에서의 언약도 있거니와 더 이상 중국인의 염원에 등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서안사변이 있은 후 겉으로나마 중국은 비로소 일본과 맞서 싸우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P142~143).

사실 나도 중일전쟁 이전에 이런 큰 사건이 발생했는지 몰랐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반공을 기치로 항일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군 내부에 부패 문제도 많아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던 것 같다. 국내 사정도 복잡했으나 해외에 있던 임정으로서 이렇게 중국과 일본, 주변국들의 정세에 대한 역사와 임정의 움직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임정이 상해->가흥->진강->남경->장사->광주->(불산->삼수->오주->계평->유주->의산->독산->귀양->준의->기강)->토교-중경 이렇게 복잡한 루트로 이동을 하게 된 데는 일본의 중국 공격과 중국의 내전 등 외부적인 요인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임정이 세웠던 계획들은 틀어지고 귀국조차 공식적인 이름으로 허락되지 못한 채 지도자 급들은 개인적으로 귀국절차를 밟았다. 정정화는 1946년 1월에야 귀국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옛적에 동정호의 이름들 들었더니
오늘 내가 악양루에 오르다.
오와 초의 땅은 동과 남으로 갈렸고
하늘과 땅이 일야에 떴도다.
친한 벗에게서 일자 소식 없고
늙고 병든 이 몸에겐 외로운 배 한 척뿐
관산 북녘엔 아직도 전쟁인데
난간에 기대니 흐르는 눈물.

악양루는 두보의 오언율시로 눈물을 적신 곳이었다. (...)
사람에게 칼과 피의 전쟁을 생각케 하고, 소식 끊긴 친한 벗을 기억시켜 주며, 자신의 젊음을 다 잃어버린 외로운 이에게 배 한척이나마 의지할 곳을 베풀어 주는 관용을 아끼지 않고, 혹시라도 잊었을까 하늘과 땅 사이에 떠다니는 만물의 무상함을 일러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악양루일까, 동정호의 물일까?
얻고 싶었던 것을 얻었고, 찾고 싶었던 것을 찾았고,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는 지금, 나는 그토록 갈망했던, 제 한 몸을 불살랐으나 결국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한 채 중원에 몸과 함께 묻힌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대신해 나라도 조국에 가서 보고를 해야만 한다. 싸웠노라고,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 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P254~255).


책에는 그와 연이 있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많이 들어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대외적 이미지 말고도 그들이 편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태도나 모습 등을 엿볼 수가 있다.

이시영 선생이 내게 구두를 한 켤레 사주시며 "나갈 때만 신고 다녀." 내 공부를 많이 도와주시고 아껴주시던 분인데, 내가 늘 그 헝겊신만 신고 다니는 게 안쓰러웠는지,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다(P88).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왜놈 잡는 일에는 그렇게 무섭고 철저한 분이지만, 동고동락하는 이들에게는 당신 자신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겉으로 나타내는 법 없이 항상 다정하고 자상하며 격의없는 분이 백범이었다(P96).

한번은 그분의 생신 때 내가 미당과 함께 비단 솜옷을 사다드린 적이 있다.
"난 평생 비단을 몸에 걸쳐 본 일이 없네. 어울리지를 않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나마 밥술이라도 넘기고 앉았는 건 온전히 윤의사의 피값이야. 피 팔아서 옷 해입게 생겼나? 당장 물려 와.(P120)"
홍구공원의 의거가 있은 직후였던 때 백범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건네셨다. 많은 교육을 받은 어느 지식인 못지 않게 대범하고 경우가 밝은 분이었다.

석오장은 영욕과 회한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깨끗하고 꼿꼿한 자태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 석오장은 나 한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임정의 큰 인물이었다. 지도자다운 지도자였다. 깔끔한 용모답게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간에 너저분한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무슨 일을 처리하든지 공정했다. 주의나 주장이 확고하면서도 언제나 말수가 적고 청렴했던 탓에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되어 있던 이들도 선생을 존경하고 흠모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동갑나기인 성재와는 늘 행동을 똑같이 했고, 일곱살 아래인 백범이 선생님 대우를 깍듯이 했던 분이 석오장이었다. 임정의 무슨 큰일이 있을 때면 백범이 꼭 선생을 찾아와 상의를 했고, 그럴 때면 "백범, 백범"하면서 백범과 같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머리를 맞대곤 했었다(P178).

백연 김두봉이 중앙집행위원장이 된 후 팔로군 구역 내의 한인들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백연은 비록 민족혁명당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철저한 보수파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가 주로 공산주의자들의 집단인 독립동맹의 위원장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하나의 사건이었다(P211). -> 이 부분은 꽤나 놀란 부분이다. 김두봉이 보수파로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공산당 계의 거물로만 생각을 하고 있어서 전혀 보수파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부분은 더 조사와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집은 우남과 개인적으로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1904년에 출옥하여 도미할 때 시아버님이 그의 뒤를 많이 돌봐주었다. 심지어 집 내실에까지 데리고 와 도미 자금에 쓰라고 상당한 액수의 사재를 내준 적도 있다. (...) 우남과의 그러한 관계는 귀국 후 정치적인 견해의 대립으로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백운장의 연고권 문제를 기화로 해서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백운장은 서울에서 가장 훌륭한 사저 중의 하나로 시아버님 때 지어진 시댁 소유의 사택이었다. (...) 시아버님은 여러 차례 백운장 건축을 사양했으나 결국 황실의 권고에 따라 백운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망국 후 얼토당토 않는 일에 휘말려 백운장의 소유권이 일본인의 소유에 넘어가게 되어 소유권 문제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시아버님이 재판 도중 상해로 망명을 함으로써 백운장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백운장은 적산이 되었고, 우리는 당연히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었으므로 성엄은 우선 백운장을 임대하려고 수속을 밟았다. 백운장 임대를 위한 제출 서류에는 보증인이 필요했다. 성엄은 백운장의 내력을 잘 아는 세 사람 위창과 우남, 우사를 내세웠다.
우남을 찾아가자 우남은 도장을 찍어주면서 토를 달았다. "독립이 되면 찾게 될 터인데, 서두를 필요가 잇을까?" 마침내 백운장은 미 군정 당국의 임대 허가가 나와 성엄이 조흥은행에 임대료를 물고 임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 군정 당국은 1948년 정부 수립이 될 때까지 결국 백운장의 소유권을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정부 수립이 된 후 우남은 여러 해에 걸쳐 모든 귀속재산을 소유자에게 다 불하해 주면서도 백운장만은 유서있는 건물이라는 이유로 불하하지는 않았다. 우남이 물러난 후 5.16 직후 백운장은 결국 미국인이 운영하는 교회측으로 그 소유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새 정권이 재빨리 미국인 교회에다 불하처분시켜 버린 것이다(P276~279). -> 이승만은 참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왜 이리 지저분하고 치졸한게 많은지.

백범의 죽음은 정정화에게도 충격이었고, 더 이상은 민족의 분열을 막을 지도자가 없다는 허망함을 느꼈던 것 같다. 또 시아버지의 유해를 결국 해외에서 모셔오지 못한 것은 그에게 큰 응어리로 남았다.
중국의 국공내전, 항일투쟁을 견뎌낸 그이지만 6.25는 또 다른 재난이자 슬픔이었다. 남편인 김의한은 어느 날 누군가 데려간 것이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는 의지할 상대도 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생계를 꾸려 나가야했다. 그 와중에 조소앙의 비서인 김홍곤을 만나 남편의 소식을 들은 것이 화근이 되어 체포가 되고 만다. 한달 동안의 감옥 생활,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요시찰인으로 찍혀 항시 감시대상이 되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자식이 언론인이 되어 밥 벌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지 않았을까. 정정화의 아들 김자동도 어머니의 성품을 닮은 탓인지 강직했던 모양이다. 출세의 기회가 몇 차례가 있었는데도 이를 모두 거부하고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드라마이고 이야기다. 그 시대를 오롯이 겪어낸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임정의 이야기이자 독립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외부에서 본 임정이 아니라 내부인의 시선에서, 임정의 살림꾼으로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그의 글은 울림을 준다. 비어있는 역사를 채우는 이야기다.

어머니의 항일투쟁 기록은 고초와 간난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한 편의 대서사시다. 어느 한때도 어머니는 주인공 자리를 남에게 맡겨 보지 않았과, 자신의 삶의 신조를 어기지 않으면서 역사의 소용돌이 에서 끝끝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변절, 매국, 부일에서부터 방관, 냉소, 무관심, 안일무사, 이기주의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몹쓸 것들이 종횡무진으로 활개치던 그토록 어려웠던 시기에 어머니는 흔들림 하나없이 항상 꼿꼿했다(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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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2-11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보면 감동적이면서도 ‘과연 나도 저렇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자문하게 됩니다 ㅋ 특히 당시 여성으로서는 쉽지 않았을텐데 대단한거 같아요 ^^

거리의화가 2022-12-11 19:41   좋아요 3 | URL
저는 못할 것 같아요^^; 마음은 있어도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ㅠㅠ 저는 그러고 보면 너무 현실적이라서요. 정정화 여사 대단하죠. 어떻게 그렇게 강단 있게 밀고 나가셨는지 몰라요. 선택의 순간들을 놓고 보면 더 놀라게 됩니다.
 
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870~1945 - 하나로 연결되는 세계 하버드-C.H.베크 세계사
에밀리 S. 로젠버그 책임편집, 조행복.이순호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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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좀 더 익숙한 장소가 되는 동시에 더 낯선 장소가 되었다. 사람과 물자의 교류 속도가 빨라졌고, 타지를 여행하고 묘사하는 매력은 인류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뚜렷했으나 새로운 정점에 도달했다(P13). 세계는 이 시기 더 가까워지면서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지역적으로 차이를 보였으며 한편으로는 이해와 소통이,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과 거부 반응이 나타났다.

베크 세계사의 근대 국가는 두 버전으로 나뉜다. 먼저 리바이어던이 내놓은 국가의 개념을 초기 국가로 보고 1.0 버전으로 부른다. 그리고 1850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시기를 2.0 버전으로 부르겠다라고 논한다. 명시적으로는 1945년까지로 나와 있으나 1970년대까지를 범위로 설정했다. 이는 1945년 2차 대전의 종식으로 탈제국, 탈식민이 종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해방은 한참을 이어서까지 진행되었다. 미소의 대결로 냉전이 격화되면서 체제와의 대결도 시작되었다. 체제의 경쟁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흐름이 진행된 바 있다.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 사이에 국가는 여러 방식으로 재탄생했다. 국가는 영토의 통합성을 위해 싸우고 중간계급들을 징집했으며, 영토를 공고히 하고 '유목민'이나 부족민을 복속시켰고, 전대미문의 전쟁으로 서로 대결했다. 국가는 폭력을 통한 변혁의 전망에 도취된 당원들이 가장 잔인한 지도자들을 실질적으로 숭배한 혁명 정당들을 실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는 정상 상태를 추구했고 지속적으로 강력해지는 경제의 힘들과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려 했다. 물론 국가는 사상과 이해관계, 심지어 본능까지도 주입된 개인들과 공동체들, 정당들의 창조물로서 앞선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국가는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던 정책들과 하위 기관을 통해 작동했다(P322).

1870년에서 1945년을 관통하는 특성들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극적인 축소, 다양한 종류의 세계 네트워크로 빨라진 사람과 상품, 사상의 이동, 근대 국가와 제국주의 체제에서 서구가 장악한 헤게모니,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의 교차와 상호적 구성, 세계적 도시의 등장,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기술의 확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종족 차별주의 이데올로기의 힘(이에 대한 도전), 새로운 권위주의 형태들과 더 효율적인 살인 수단의 등장으로 거의 모든 대륙에 가져다준 폭력들이다.

퍼시 비시 셸리는 '세계는 과거에 싫증을 낸다'고 했다. 이 시기를 살펴 보기 전에 이전의 1760년부터 1850년의 시기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시기를 주도한 유럽에는 정치가 새로운 원리가 되고 권리 개념이 등장하였으며 과학의 등장에 따른 종교적 권위 영역이 재규정되었다. 또 행정의 합리화, 지리적인 재구성, 국제법이 정리되었다. 1850년 이후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의 정치적 폭력에 따른 혼란이 발생하고 이후 전쟁과 혁명, 대량 실업의 발생, 힘을 갖춘 제국들이 등장하였다.

1850년에서 1880년의 발전은 세계 전역의 국가 조직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국가는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고용을 촉진하며 이민의 흐름이 가속화되었다. 1870년대 유럽 전역의 도시에 인간 동물원이 세워졌다. 동물원은 문명의 위계 질서를 전제로 하였고 관람객은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증명했다. 전시 대상인 원주민 등은 마치 배우처럼 서비스직에 종사했다.

20세기 세계 각국은 국내의 분쟁과 혁명, 경기 침체, 전쟁에 대처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예외적 상황과 비상 사태가 발생할 때 법 질서가 시민권을 보호하는 조항을 갖고 있음에도 각국은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고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런 예외적 상황에서 국가는 탄생했다. 교육과 기간 시설에 투자하고 경제를 규제하는 오늘날의 복지 국가 방식의 국가, 전쟁과 혁명 등의 사회적 소요에 대응하고 식민지를 통치하면서 이득을 얻거나 개발과 주권을 동시에 진행하는 전쟁 국가의 모습으로 분화되어 나타났다.

제국 체제가 등장하면서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투쟁도 벌어졌다. 토지, 자원을 둘러싼 쟁탈과 식민지 전쟁, 제국주의적 평정을 위한 종군이 이어졌다. 제국은 상이한 물질 조건과 사회적 기회, 문화 역량을 결정할 때 핵심 역할을 수행한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제국의 정치인들, 식민지 행정관들이 재규정한 제국의 범위는 국경이 되었다. 유럽의 아프리카 지배와 터키 공화국, 청 제국, 러시아 제국, 서유럽 국가의 국경이 정해졌다.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세력이 약화되고 미국과 일본의 세력이 발흥하였다. 제국 체제는 영토와 주권, 전략적 이점, 채굴 가능한 자원, 문화적 영향력 획득을 위한 경쟁으로 이루어졌다. 지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는 식민지의 모습을 반영하지 못하는 제국의 역사들을 경계한다. 식민지가 어떻게 그리고 왜 제국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질서의 공동 저자인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과정이 토착민 사회에서 전 세계적 저항과 식민지 해방에 함의를 갖는 실천과 고유의 주권 관념을 발전시킨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 이 시기 제국적 세계에 대한 자존적인 설명 가운데 식민지 '현지'나 제국 본국의 제국 비판자들이 수행한 작업을 무시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작업이 1945년 이전 제국들이 세워 유지하려 한 이전의 세계적 질서를 만들고 종국에는 해체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P346).

속박된 남녀들의 저항, 인권을 둘러싼 계몽주의적 논의, 자유민 노동과 노예노동 간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논의는 이렇듯 권력관계의 틀 속에서 인간의 이동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에 유럽의 정주형 대토지 소유자와 그들이 이주한 사촌인 (나중에는 미국 출신 소유주들까지 가세한) 식민지의 플랜테이션 농장 소유주들은 될 수 있으면 값싸고 유순한 노동자를 공급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문제는 아프리카인의 노예화가 불가능해지면 유럽의 하층민 혹은 필요할 경우 아시아의 식민지화된 지역 사람들을 억압해 아열대 지방이나 열대 지방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국가 주도로 계약 노동자들을 동원하거나 유럽의 경우 정부가 이주민의 뱃삯을 지원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민간 분야에서 납세자에게 비용이 전가되게 하는 내용의 로비가 시작되었다. 계급적 이해관계와 계급투쟁, 인종화와 저항, '인간의 조건'에 대한 사고방식의 재정립은 이렇듯 이주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P500).

국가는 19세기 말 이후 여권이 도입되고 이주민의 출입국 장치가 마련되어 이주 제도 수립에 따른 국가의 역할이 늘어나면서 중요한 분석적 도구가 되었다. 이주는 이주민의 결정에 따른 자유 이동과 강제 이동, 지방 이동과 대륙 이동, 계절 이동(주기적 또는 일시적)과 영구 이동, 이주 목적지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 성별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모든 것을 국가적으로 설명하려 한 시도는 다민족 제국 내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식민지 지역은 식민주의자, 피식민지인 또는 백인과 유색인의 이분법으로 분류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 난민과 전쟁 포로, 강제 노동자, 전쟁 전 제국의 식민주의자 본국 송환이 필요한 병사 등이 생겨났다. 그러나 고국이 소멸했거나 전후 신정부가 들어서서 귀국이 어려운 경우, 생명이 위험하여 재정주가 필요한 병사들에 따른 이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망가진 경제의 재건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이주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탈식민지화로 야기된 다양한 형태의 이주도 있었다.

인간의 역사와 사람들이 살았던 환경이 이 첫 번째 근대 세계화 시대의 결과를 결정했다. 역사적으로 교류를 제한했던 지역과 사람들이 상품 사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해방된 세계적 힘들은 지금도 여전히 메아리친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렇게 경고한다. "과거는 절대 죽지 않으며,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P919)"

세계 무역은 1914년까지 팽창했고 1920년대는 정체했고 1930년대 대공황 여파로 급감하였다. 이로 인하여 각국은 자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산업주의와 농업주의, 공익과 사익 사이의 논쟁을 벌이게 된다. 상품의 흐름과 가격 통제 능력을 갖춘 시장의 힘은 시간과 장소에 따른 상품 사슬에 영향을 미쳤다. 상품은 상품화 과정의 결과, 생산자와 가공업자, 운송업자, 수출업자, 도매업자, 소매업자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세계 시장이 통합되었다고 해서 상품의 이용 방식이 한결 같지는 않았다. 나라별 문화적인 차이가 존재했고 농촌과 도시 간의 격차도 컸기 때문이다. 경제 제도와 기간 시설이 출현함으로써 대규모 무역 투자와 국제적 합의가 가능해지면서 급격한 팽창이 일어날 수 있었다.

19세기 말 교통, 통신, 금융, 통상에 혁명이 일어나 충성심과 감수성에 변화가 일어나고, 공간적 거리에도 한계가 생기다 못해 심지어 거리 자체가 소멸된 현상은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전 세계, 갈수록 몸집이 불어난 국제적이고 초국적인 네트워크들의 탄생을 불러왔다. 지금은 주로 세계화로 불리는 현상으로 향해 가던 그 국면에 크리스토퍼 앨런 베일리는 적절하게도 ‘대가속‘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베일리는 자신보다 앞서간 다수의 역사가가 이 시대와 당대의 ‘근대‘를 연 것이 유럽인이고, 싫든 좋든 근대의 특징을 제국, 교역, 문화적 패권의 새로운 구조들을 통해 다른 지역들로 전해 준 것 역시 유럽인이었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지금의 세계를 "지구전역에 도달하는 중첩된 네트워크들의 복합체인 동시에 네트워크들 속에 게재된 거대한 힘의 차별성도 인지한 복합체로도 인식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이 "기존의 범세계적 네트워크"를 종종 "자신들의 뜻에 굴복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힘, 결속력, 활용성, 광범위에 걸친 실효성 있는 네트워크와 열망을 갖게 해 준 것"은 "서구의 지배와 힘에 내포된 기생적, ‘네트워크화된‘ 특성이었다."고 썼다(P923~924).

초국적 연대는 거의 예외 없이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에 긴장을 조성한다는 것, 그리고 초국가적·국가적·제국적·지방적 영역이 별개의 장소가 아니라 대다수 사람이 동시에 모여 사는 장소들이라는 관점이다. 범세계적 흐름과 개인도 그안에서 지방화된 변이를 생성해 내고, 지방화된 변이는 역으로 범세계적 흐름과 개인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전송선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서로 간에 마찰을 일으키면서 상호 구성적 존재임을 드러내듯이 말이다(P1003).
서구 근대는 근대성과 진보, 자유의 확대가 이성과 과학의 목적론적 승리라 보았다. 하지만 이성과 인종학의 결합은 자유주의 대신 비합리적인 극단의 시대이자 전체주의를 가져왔다. 선형적 목적론을 중심으로 편제된 그 시대의 오래된 역사는 진보라 불리는 진화적 미래를 지향하는 과학과 이성의 합리적 문화를 가진 서구 제국의 범세계적 확산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녔다. 그런데 그 관점을 가진 서사 구조도 근래의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의 도전에 직면했다(P1091).

초국적 공간 내에서 소비자 주도의 문화 특성들이 혼합된 방식은 여러 가지로 묘사될 수 있다. 하나의 문화를 잃는 동시에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동화assimilation로도 표현될 수 있고, 타 문화 요소를 선택적으로 수용해 새로운 배합 문화를 만들어 내는 혼성화hybridity로도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보다는 언어학에서 쓰는 부호 전환code-switching이라는 용어를 쓰려고 한다. 그것이 초국적 대량 소비자 이미지들로 구성된 문화에서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일들을 가장 적절하게 대변해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국어 능통자들이 특정 시기에 생소한 언어의 낱말들을 들먹이며 상대방을 혼란시키는 전략을 쓰듯, 소비자들 또한 어느 주어진 시기에 상이한 문화적·정치적의미들을 뭉뚱그려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는 부호 전환의 전략을 쓸 수도있는 것이다(P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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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08 1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담달 2023년 이달상에 뽑힌다에 제 🖐 을 ^^

2022-12-08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2-12-08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익숙함과 낯섬의 공존 !

진정한 글로벌리즘이 개시된
시기가 1870년대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과연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긍정적인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거리의화가 2022-12-08 17:45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근대를 규정하는 시기가 세계사마다 약간씩은 차이를 보이는데 시작점과 종료점이 달라지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긍정적, 부정적 측면 둘 다 존재했다고 봐야할 것 같아요.
 
자우림 - 겨울 스페셜 앨범 MERRY SPOOKY X-MAS - 128p 양장본(단편소설 및 사진 포함)
자우림 노래 / 지니(genie)뮤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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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스페셜 앨범이라고 해서 기존 곡을 커버한 곡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음악이 듣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앨범은 실제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다. 크리스마스에 어떤 이야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으로 눈과 귀가 모두 즐거워지는 경험을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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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2-06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우림 채널에서 음악을 들어볼 수 있네요 뮤비도 있고요 소식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2-06 17:43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동중엔 플레이리스트 반복해서 듣고 있어요. 즐감하셔요*^^*

scott 2022-12-07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말 자우림 무대에 서는 날
화가님도 그곳에 ^^

거리의화가 2022-12-07 13:04   좋아요 0 | URL
아마도 올해 연말 시상식에 참석은 할 것 같은데 아마도 나중에 올라오는 영상 클립으로 보지 않을까 싶어요. 가수 여럿 나오는 무대 보는건 아무래도 힘들더라구요. 그리고 연말 공연은 무척 길거든요~ㅋㅋㅋ 단독 콘서트는 직관해야 의미가 있고~^^ 어쨌든 올해는 앨범을 두 개나 내줘서 팬으로서 즐겁습니다*^^*
 
토지 7 - 2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7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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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의 연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로를 사모한다고 해서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처럼, 때론 질투가, 분노가 연이 되곤 한다. 개인의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만 이어지질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약자인 여자 탓만 하려하는 윤이병과 송영환은 참 못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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