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행복한 임신중지의 가능성을, 가장 좋게 봐서 규범을 위반한 것, 가장 나쁘게 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 임신을 원치 않은 여성의 관점에서 임신중지를 바라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이 있고 그 수단이 비교적 직접적이며 고통을 주지 않는데도 자꾸만 불행으로 재현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터무니없다.



책을 읽고 내용은 정리가 안 되었어도 읽으면서 떠올렸던 과거의 기억을 적어두자 생각해서 끄적인다.


나는 오래도록 독신을 지향했다. 사랑에 대한 감정에 회의적이던데다 결혼이란 제도에 대한 불신이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전에 한 번 썼던 내용인데 나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결혼 이전에도 그랬지만 친정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나는 결코 아이를 낳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했었다. 아이를 넷 출산한 어머니는 출산 이후 한참을 지나도 육아로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아이를 넷을 낳아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지금보다 더 예전이었던 시절 가부장적인 환경 아래에서 살아온 부모님이 만나 아이를 낳았다. 지금도 공동육아가 현실적으로 어려운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어머니는 임신 후 10개월을 총 4차례를 겪고 출산 후에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아버지가 번듯한 직장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도 못해서 자영업을 시작한지라 이후에는 하루 밥 벌어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10년 넘게 이어졌다. 말 그대로 슈퍼맘이었지만 나는 이 용어가 너무 싫다. 왜 슈퍼맘이 되어야만하는가.


임신은 남녀가 함께 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에 대한 고민은 왜 여성들만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열렬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대부분 짝사랑이었거나 그마저도 뜨거운 감정이 일어나는 사랑은 아니었다. 남편을 만나고 사랑을 하면서 혼전임신에 대한 고민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고정관념이 강했던 나는 결코 혼전임신을 해서는 안된다는 주의였다. 잘못 했다가는 피곤해진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혼전임신이 잘못인 것은 아니다. 사랑해서 낳은 결실이 결혼 전이라고 스스로 책잡힌다고 생각하게 되는 씁쓸한 현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초반에 임신에 대한 시할머니의 압박이 심했다. 한 날은 명절에 한 번 갔다가 "아이를 낳아야 효도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용돈과 선물을 드리는 것, 다정한 말로 안부를 묻는 것은 효도가 아닌건가 싶어 좌절감이 일었다. 시간이 좀 지나니 친정 부모님께서 스트레스를 주셨다. "아이는 반드시 낳아야 한다."라고 하시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 본인이 그렇게 고생을 하셨으면서 내게 아이를 낳아 키우라는 게 말이 되나? 이제는 자연스럽게 내 몸이 노화가 되어 임신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서 더 이상 말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 모양인지 말씀하시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때를 생각하면 서운함이 밀려온다. 


임신중지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성의 경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한다는 저자의 말이 무엇보다 공감되었다. 또 임신한 여성을 아이의 어머니로 고정시켜 임신중지는 잘못되었고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비판을 가한다. 여성들이 임신과 임신중지라는 경험을 겪으며 느끼는 온갖 불평등의 상황은 분노해야 하는 게 맞고 트라우마를 비롯한 부정적 감정은 느끼지 않아도 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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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24 11:4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에 저희 아파트 새로운 이웃분이 저희 엄마에게 큰 딸 왜 시집 안보내냐고 했다더라고요. 엄마는 자기가 안간다는데 뭘 보내냐, 자기가 알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고 했더니 ‘그래도 결혼은 해야죠‘ 라고 했대요. 그래서 엄마가 그분께 ˝결혼해서 행복하세요?˝ 했더니 답을 안하셨다고.. 그전까지 아이낳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이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분노하셨다 했거든요. 저희 회사에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 직원도 저한테 왜 결혼 안하냐고 그래도 결혼은 해야된다고 그러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방금전까지 부장님이 아내랑 자식 잇는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하셨잖아요˝ 했더니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이러시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 ‘그래도‘ 해야할까요? 자기들이 했기 때문일까요? 자기가 선택한 삶이 있고 타인이 선택한 삶이 있고 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건데, 왜 자기가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걸까요? 설사 그게 행복하지 않아도 말예요.


저에게도 좋은 책읽기였어요. 좀 충격이기도 했고요. 뭔가 바로잡히는 느낌이 들어서 좋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책읽기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또 읽느라 고생하셨어요, 거리의화가 님!



거리의화가 2022-08-24 12:49   좋아요 3 | URL
대체 본인들이 그렇게 불만스러웠으면서 왜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지ㅉㅉㅉ 행복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거기로 뛰어들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인지...ㅎㅎㅎ

책을 다 이해는 못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또 이번에 배워갑니다^^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로 고민하는 많은 여성들도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으면 좋겠으나 남성들도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미 2022-08-24 11: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희 엄마도 슈퍼 맘이셨어요. 저는 외동이고 엄마가 동생들 여럿을 키우다시피 하신 모습을 보며 자랐죠.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님 세대도 딱히 이유를 모른채 남들 다 하니까 결혼하고 낳으니까 낳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학 공부하길 참 잘했어요. 제대로 된 질문을 찾아가면서 사회의 민낯을 볼 수 있는 안경을 낀 기분? ^^*

거리의화가 2022-08-24 12:51   좋아요 3 | URL
예전 어머니들은 생각할수록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걸 다 감내하고 어찌 사는지;;; 그 세월은 결코 보상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납니다.
여성학 공부 시작한지는 얼마 안됐으나 읽을수록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네요. 공부할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제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니 좋습니다.

mini74 2022-08-24 12: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희집은 아이가 다섯. 최소 아들이 둘은 있어야 한다는 친할머니의 의지로 인해 ㅠㅠ어린 시절도 사춘기도 행복하지 못했어요. 온 힘을 다해 키워준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행복하지 못했던 유년기는 다섯아이의 첫째 둘째 혹은 막내 또는 딸이라는 이유가 컸을거에요.아이를 낳는건 여성의 몫인데, 의무인냥 혹은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처럼 취급되는 건 ㅠㅠ전 아이를 반드시 낳아야 한다가 아니라 아들을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말을 시댁갈때마다 들었답니다. ㅎㅎㅎ 조선시대냐 싶지만, 이 동네 다둥이 가족들 보면 아직도 막내가 아들인 경우가 많아요 쓰다보니 또 분노가!!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08-24 12:54   좋아요 4 | URL
다섯이라니...;;; 사실 저희 어머니도 네 명의 아이를 출산한 이유가 아들 낳아야 해서였어요. 결국 딸 둘 낳고 아들 둘을 낳는 사태가~ 만약 아들 낳아도 되지 않았으면 두명만 낳았을것을. 저희 아버지가 외동 아들이어서 친할머니께서 엄청 압박을 하셨다네요. 그래도 아들을 셋 만에 낳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_-
아이들이 넷이었고 부모님은 일을 하시다 보니 정말 알아서 커야 하는 상황이 됐었어요. 그래서 오래도록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부모님은 아이를 키워야하니 그런거지만 아이들은 그게 또 아니니까요. 저도 쓰다보니 또 분노가 듭니다!ㅜㅜ

페넬로페 2022-08-24 13: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에서는
결혼했다
아이가 있다!
이 두 문장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끊는데 최고예요.
그 다음부터는 질문이 들어오지 않거든요.
저도 딸아이에게는 결혼해도 꼭 아이를 낳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인간이 아이를 낳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는 확실히 인간을 성숙시켜 주거든요^^

거리의화가 2022-08-24 14:15   좋아요 3 | URL
네. 대한민국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은 다른 것들을 압도할 만한 질문일겁니다.
아이를 낳든 아이를 낳지 않든 본인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을 합니다. 그래야 후회를 해도 덜 하지 않을까요.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은 다른 것이겠지요.

2022-08-29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8-24 17:5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제 친한 친구가 어렵게 자라 아이에 대한 기대가 없었고, 남편도 어린시절 일찍 부모님 돌아가셔 거의 고아로 성장하여 남편도 자식에 대한 애착이 없어 친구네는 결혼하자마자 무자식으로 합의를 보고 살더군요. 그러다 나이 들어가면서 남편이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다보니까 자식을 낳고 싶어한다길래, 저도 옆에서 얼른 낳으라고~ 더 나이 들기전에 낳으라고~ 막 부추겼었는데 막상 가지려니까 안생겨서 친구네는 그냥 그렇게 강아지만 키우고 살고 있어요. 근데 근 10 년을 자식 없는 친구네를 보면서 아~ 자식이 없어도 더 멋지게 살 수 있구나!! 생각이 완전 바뀌었죠^^
그전엔 친구 따라다니면서 늙어서 외롭다고 빨리 아기 가지라고...ㅜㅜ 뒤늦게 미안했어요ㅜㅜ
요즘엔 내가 애를 셋이나 낳았다는 게...너무 많이 낳은 것 같아 좀 부끄러울 때도 많아요ㅋㅋㅋ 애들을 보면 사랑스럽지만 한 번씩 나 굳이 애를 셋이나 낳았어야 했나?? 생각해 봅니다. 결혼하면 당연히 애를 낳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아요.
요즘 사촌언니네 조카들 한 두 명씩 결혼하고 있는데 일찍 결혼한 조카는 아기를 낳아 힘들게 키우고 있지만 조금 늦게 결혼한 조카들은 다들 아기를 낳지 않기로 결정하고 살고 있구요. 그런 걸 보면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옛날식의 방식대로 살아가라고 강요하기엔 이젠 구태의연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리뷰를 생략하신다길래 섭섭하다가 괜스레 더 반갑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4 20:52   좋아요 5 | URL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이기적인 나를 되뇌였거든요. 어쩌면 이런 저의 경험들이 족쇄처럼 트라우마로 남아 저를 괴롭히나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나를 놔주자 싶었고 주변 탓으로 돌리는 것도 그만하자 생각했어요. 이기적이어도 괜찮겠죠~^^;
그리고 개인적인 이야기라 리뷰로 쓰기에는 그랬고 그렇다고 해서 안 남기면 기억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생각해서 올렸습니다. 나무님이 여성주의책 읽을 때 함께해주셔서 항상 든든합니다. 감사해요^^

바람돌이 2022-08-24 22: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임신과 출산에 관련되면 우리 여자들은 정말 할 얘기가 산더미죠. 대한민국처럼 가부장제 심하고, 임신과 출산은 여자에게 몰빵시키고, 그러면서 잘못되면 비난도 몰빵시키는..... 심지어 우리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들을 낳아야 된다는 압박에 시달렸잖아요. 저희 시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저만 보면 아들 하나 낳아야지.... ㅎㅎ 그런 우리 여자들의 의식에 전환점을 가져올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로는 우리도 다 알고 있잖아요. 임신중지가 여성이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란걸.... 그런데 주변 서사는 늘 그런 감정을 강요하는데 이 책에서 그것을 명료하고 확실하게 아니라고 얘기해주니까 좋더라구요. ^^

거리의화가 2022-08-25 09:11   좋아요 3 | URL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뿌리깊은 이 가부장제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구나...! 대한민국은 아이는 당연히 낳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도 아들을 강요하여 많은 어머니들이 고통을 당했었죠. 저희 어머니도 그랬구요. 말씀하신대로 여성들도 예전 사고에 갇혀서 힘들어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식을 전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책에서 감정의 강요가 정책적 수사로까지 이어진다는 것도 알려주어서 좋았어요.

공쟝쟝 2022-09-10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경험을 되짚어 해석해보는 여성주의 책읽기는 좋은 것~~^^ 거화님의 리뷰는 참 좋아요!

거리의화가 2022-09-11 11: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쟝쟝님^^ 제 리뷰가 저는 부끄럽습니다ㅎㅎ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쓰다보면 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