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츠크네히트의 다수가 루터파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신성모독행위들값비싼 교회 식기류를 약탈하거나 수녀들을 강간하는 등의도시 약탈 과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에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했다. 성유물함이 박살났고, 전임 교황들의 것을 포함해 무덤들이 파헤쳐졌다. 미사를 풍자한 집회가 열렸고, 란츠크네히트가 ‘교황‘ 선출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바티칸의 프레스코화에 루터 - P336

를 칭찬하는 낙서가 새겨져 있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사도 베드로의 도시에서 그러한 신성모독이 행해졌다는 것, 유럽 전역의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교회들의 유물과 재단을 더럽혔다는 것이 특히 충격적으로 여겨졌다.
혹자에게는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준 예술가와 학자들의 공동체가 해체된 것도 통탄할 만한 사태였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 P337

카를 5세의 이탈리아 순방 계획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를 반드시 저지하려고 했던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내 자신의 동맹 세력들과 새로운 군사 원정 계획을 논의해왔는데, 왕이 직접 이탈리아 원정을 지휘하든, 스페인 국경지대로 군대를 보내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동맹국들은 둘 다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모두 평화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를 5세의 고모이자 플랑드르의 섭정 마르가레테와 프랑수아 1세의 모친 루이즈 드 사보이아 사이에서 원격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7월에 두 부인이 캉브레에서 회담을 갖기 전에 많은 외교적 기초 작업들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진행된 양측의 회담은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강인하고 지적인 두 여성은 최선의 협상 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단단히 결심한 상태였다. - P359

분명한 것은 그(카를 5세)가 교황의 대관식 주재를 바랐던 것의 이면에 한 가지 실제적인 고려 사항이 있었다는것이다. 자신의 대관식을 통해 동생이 로마인의 왕(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계자)으로 선출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이 조속히 진행되지 않을 경우 독일 내 자신의 적대 세력들이 다른 후보자를 선출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그의동생은 1531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 P368

교황과 프랑스 왕은 공의회를 하나만 소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고 그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프랑수아1세는 구교, 신교를 가리지 않고 독일의 제후 및 도시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 P387

황제는 결혼 동맹을 통한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밀라노와 저지대 지역 가운데 어느 곳을 희생해야할지 고민했고, 스페인 중신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토에 속하는 저지대 지역이아니라 전쟁의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재원 고갈의 주범이 된 밀라노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밀라노가 독일과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이자 나폴리와 시칠리아 방어의 핵심이며 저지대 지역보다 스페인에 훨씬 더 유용하다는 입장이었다." 카를 5세는 저지대 지역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했다. - P420

바오로 3세의 마지막 명령은 조반니 마리아 델 몬테, 즉 율리우스(율리오) 3세가 1550년 2월 말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자마자 재확인되었다. 기분에 따라 변덕이 심했던 새 교황은 국정과 씨름하기보다는 느긋하게 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특별히 자신의 가문을 위한 야심 같은 것도 없었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이상 파르네세 가문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다. - P434

카를 5세는 1554년 7월 25일 펠리페와 메리 튜더의 결혼에 맞춰 밀라노-이전에 했던 책봉은 무시하고와 나폴리를 펠리페에게양여했다. 펠리페는 나폴리 국왕 책봉에 대해서만 따로 기념식을 가졌다. 밀라노는 이미 자기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카를 5세는 펠리페와 상의하지 않고 몇 달 동안 더 이 나라들의 국정에 결정권을 행사했다. - P461

1555년 5월 금욕적인 개혁가이자 종교적 권위를 수호하는 데 매우열성적인 것으로 알려진-특히 스페인의 나폴리 지배와 카를 5세를싫어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나폴리 추기경 잔 피에트로라파가 교황에 선출되었다. 바오로 4세는 모든 외국 세력이 축출되면 이탈리아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는데, 스페인보다는 프랑스의 존재로 인한 폐해가 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의 두 왕자가이탈리아에서 한 명은 베네치아에서, 다른 한 명은 로마에서 교 - P474

육을 받고 각각 밀라노 공작과 나폴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것이었다. 전임자들과 달리 그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카를 5세와 펠리페에 맞서 기꺼이 프랑스 국왕 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476

1530년대가 되면 장창병과 화승총병의 조합으로 유럽 각국의 군 전력에서 보병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스페인,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화승총병들은1520년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세기 초에 이처럼 비교적 갑작스럽게 효과적인 총기류가 등장한 것은 세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1480년대에 화승총 발화장치에서 일어난 기술 발전이었다. 초기 총기류가 그랬던 것처럼화승총도 엉덩이 부근에서 한 손으로 격발했는데, 기술 발전으로 어깨에서 발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두 번째는 화약 성능이 개선되고가격이 싸졌다. 화약 가격은 15세기에 80%나 떨어졌고, 화약 성능의개선으로 사거리는 크게 증가하고 사격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세번째는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대규모 화기 제조업이 발전했다. 이는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스위스 용병의 경쟁 상대로 란츠크네히트가 부상한 것과도 연결되었다 - P513

이탈리아 전쟁에서 교황의 참전은 유럽 전역에서 하나의 제도로서교황과 교황권이 인식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황이 세속적 목적을 위해 기독교 세력들을 상대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때때로 자기 가문을 군주적 지위로 격상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일으킨 군사 원정에 교회 재산을 유용했다는 점 등은 로마 교황청을 향한 환멸을 더욱 자극하여 신교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 P614

이탈리아는 나폴리와 밀라노가 스페인 왕가와 밀착하고, 프랑스 국왕과 황제가 계속해서 이탈리아 내부 문제와 이해관계로 얽히면서, 불가피한 수준으로 유럽의 국가 체제에 보다 긴밀히 얽혀 들어갔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는 다시 한 번 유럽 열강의 전장이 될 것이었는데, 롬바르디아를 누가 소유하느냐가 핵심적인 전략적 관건이었다. 향후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국가들의 운명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 P648

국왕 그리고 황제 사이에 체결되는 외교적이고 왕조적인 합의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 크고 작은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의 관계망서그토록 중요한 요소였던 ‘보호‘와 ‘복종‘을 낳는 정교하게 맺어진 정치적 후원과 충성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재구축되었다. - P649

1495년 3월,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답신에서 "당신은 내게이탈리아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그것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 없소"라고 말했다.23 1556년 10월, 로마의 영주이자 군인인 카밀로 오르시니는 베네치아 대사에게 "나는 프랑스에는 프랑스 사람이, 스페인에는 스페인 사람이,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 사람이 있는것을 보고 싶소"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의식하게 만든 것은 외국의 지배 경험 그 자체라기보다는수천수만 명씩이나 되는 외국 병사들의 존재였을 것이다. - P656

이탈리아 전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너머로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화야말로 이탈리아인의 우위가 인정된,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분야였다. - P660

이탈리아 전쟁이 불러온 모든 장기적 결과 가운데 가장 큰 파급효과를 낳은 것은 당연히 이탈리아반도의 많은 부분이 이제 외국 군주-이탈리아에 거주하지 않는ㅡ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P671

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평가는 스페인 왕이 이탈리아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는 것이 전쟁의 고정된 결론은 아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확실히 그 문제는 1529~1530년 카를 5세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그시기 전후로도 그의 군대는 수세에 몰리는 경우도 잦았고, 그의 사령관들은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충분치 않은 병력으로 전선을 사수하느라 고군분투했으며,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것이라 믿을 수 없어야전에 임하지도 못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구체화된 전쟁의최종적 결과는 당시 이탈리아인이나 프랑스인, 심지어 스페인인이보기에도 이탈리아 주둔 스페인군이 거둔 확고부동한 승리의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깜짝 놀랄 만한 이변으로 비쳤다. 이탈리아인들은 스페인 제국의 힘을 압도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었다. 이탈리아 내 스페인 세력의 토대는 이탈리아 전쟁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대단하지도, 탄탄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 P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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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6-3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댄 존스의 [중세인들] 읽을 때 이탈리아 전쟁을 종교개혁에 붙여놓았던 것을 보고 좀 의아해 했는데... 화가님이 그동안 올려주신 문장들을 다시 읽으면서 정치와 종교를 나눌 수 없었던 그 시기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6-30 21:4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말씀하셨던 부분을 잘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도움이 되신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